자, 그러니 당신, 다시 바늘을 집어 들길. 오늘 당신이시작한 뜨개질이 다가올 어느 겨울밤을 위한 대책이자 선물이듯 우리가 새로이 시작할 또 다른 이야기의 뜨개질은지금보다는 덜 외롭고 쓸쓸한 다가올 시간 속의 우리를 위한 일이어야 한다. 코를 빠뜨리면 풀고 다시 뜨면 되고 무늬가 틀렸다면 새로운 무늬라고 우기면 된다.  - P12

눈물을 심어본 적이 있는 당신에게 깨진 거울을 겁내는 우리에게 나는 오늘 화환처럼 무지개를 걸어주고 싶다.
산다는 게 다 그렇다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렇고 그런 삶을살아내느라 오늘도 모진 애를 쓰고 있으므로, 어린 날의 낙하는 크느라 그런 거라지만 오늘 우리는 끝내 추락하지 않기 위해, 기어이 생존자가 되기 위해 낚싯바늘 몇 개를 아래턱에 매달고도 숨을 쉬고 있지 않은가. - P45

 산다는 건 어쩌면 수많은 보이지 않는 손들의 도움을 거치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림자 노동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이름을 가지지 못한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프게 상기해야 한다. 내 이름을 찾아가는 여정에 타인의 이름을 지우지 않는 일도 포함됨을 알아야 한다. - P50

다시 말하지만, 내 삶은 다면체다. 조명을 어디에 얼마나 비출지는 당신 마음이다. 그러나 당신 눈에 보이는 모습이 내 삶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주길. - P51

 2014년 5월 언더우드국제심포지엄의 주강사로 초대받은 월터스토프는 광화문광장의 세월호 희생자 추모를 위한 노란 리본 아래서 힘주어 말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게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얘기하지 마라. ‘괜찮다‘고도 마라. 그들은 절대 괜찮지 않다. 괜찮을 수가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 P76

정전은 다시 쓰여야 한다. 내겐 당장 어머니와 딸이라는 책이 필요하다. 단 한 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는, 조력자와 서당 개 역할만 주어진 채 그들만의 서당을 얼쩡거렸던 우리만의 서사가 필요하다. 죄책감을 먹고 자란 서당개의 날카로운 송곳니로 고루한 책들을 실컷 물어뜯는 깃부터 시작해야지. 그리고 새롭게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고싶다. 그러려면 내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 먼 곳에서 부유하던 어머니의 불행과 행복을 읽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 P91

 작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책은 무기입니다. 아마도 평화로운 무기겠지만, 하나의 무기입니다." - P132

파괴의 정도부터 찾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증언자로서 작가가 선택한 첫 번째 책무다. 포루그 파로흐자드와 마리아마 바가 한 줄기 빛을 피워 올려 가부장제의 검은 집을똑똑히 보여주었던 것처럼. 그리고 살아남은 보물들을 그러모아 자신의 언어로 재생성하는 것이 창조자로서 작가에게주어진 두 번째 일이다. 우리는 생존자로서 이 여성들이 새로 그려낸 빛의 언어를 흠향한다.  - P134

무수한 여성들이 ‘엄마 됨‘으로 인해, 혹은 ‘엄마 됨‘의공포와 자기 분열로 인해 고통받아왔다. 엄마는 아이를 지키지 못할까봐 두렵고, 아이를 지키느라 자신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우며, 순간적으로나마 아이보다 자신을 우선한 것에 따른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 P142

엄마 됨의 경험이 세계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고립일 수밖에 없을 때 여성은 세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삭제당한다. 글을 쓰는 여자는 모두 생존자라고 했던가. 이 문장을 조금 고쳐 말하고 싶다. 엄마가 된 여자는모두 생존자다. 그러므로 고통과 기쁨이 범벅이 된 모성의양가성을, ‘생명을 젖으로 빨아대는‘ 엄마 됨의 분투기를 증언할 때 엄마가 된 여자는 모두 쓰는 사람이다. - P149

시인 오드리 로드는 "레즈비언 공동체에서 나는 흑인이고, 흑인 공동체에서 나는 레즈비언이다. 억압에 위계란 없다"라는 말로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말했다.  - P175

정체성 찾기란 언제고 다칠 수 있다는 각오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이제 나는안다. 다칠 수 있고 심지어 꺾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번싸워보겠다고 안간힘을 내어보는 것,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이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대가다. - P176

어떤 희생제물도 우연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시대의 가장 정확한 약자이자 소수자가 희생양이 되어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황야로 쫓겨난다. 그러므로 여성은최후의 식민지라는 말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낡지 않았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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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3-06 09: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산문집,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