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여성의 조직적인 활동이 백인 여성들의 클럽을 모방한 형태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그 외의 다른 조직의 형태를 알지 못했고, 노동계급이 자신의 계급적 조직을 만들기에는 여전히 그들은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가난하니 말이다. 문제는 또한 이런 형태의 여성클럽이 흑인 여성들 내에서도 똑같은 문제 엘리트주의에 직면하는 것도 당연할테다. 시대적 한계라는 말이 그냥 있는게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이것이 어떻게 해체되고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가이다. 


  참정권 운동 역시 여러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데 사실상 중산층 백인 여성들이 노동계급의 상황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투표권을 얻으면 신세계가 열리리라는 전망을 열렬히 외치지만 노동자 여성들은 투표권을 가진 자신의 아버지,남자형제들의 삶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매일 보고 있는 것이다. 중산층 백인 여성들이 성차별주의가 계급 불평등이나 인종주의보다 훨씬 억압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그들만의 주장, 언어일 뿐이다. 인종과 관계없이 노동계급의 여성이 투표권을 요구하는 투쟁에 나서는 것은 이 투표권이 자신의 노동조건과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자각하여야 한다. 


 결국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적 각종 조직- 노동조함, 노동자 협회, 공산주의자 클럽, 사회당 등-의 등장과 그 영향과 연결되며,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등장으로 투표권운동은 백인 중산층 여성에게서 노동계급으로 확대되게 된다. 또한 걸출한 흑인여성혁명가들, 또는 사회운동가들이 등장한다. 루시 파슨스같은 초기의 공산주의자들은 대부분의 초기 공산주의 운동이 그러하듯이 모든 특수성 - 인종, 젠더를 계급성으로 대체해버리는 우를 범하지만 이것은 루시 파슨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거의 모든 사회주의 운동이 초기에 겪었던 오류를 거쳐가는 과정일뿐이다. 엘라 비르 블로어라는 백인 공산주의자 여성운동가에 이르면 이제 공산주의운동은 흑인해방운동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나간다. 또한 클라우디아 존스에 이르면 가사노동이 주를 이루는 흑인 여성의 직업이 성차별의 주요한 원인임을 간파하고 사회주의가 흑인여성, 흑인 전체, 노동계급 전체를 위한 이론이자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제 이들은 여성, 인종, 계급운동에서 어떤 새로운 차원을 열어갈 것인가?

점점 흥미로워지는 중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3-02-17 01: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뭐든 처음부터 잘 되는 건 아니겠지요 좋은 뜻이어도 잘못된 길로 가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다음 단계로 가겠습니다 더 안 좋은 길로 가지 않고 올바르게 간다면 좋을 텐데, 올바른 것도 정말 올바른 건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사람 마음이 다르기도 하니...


희선

바람돌이 2023-02-17 22:55   좋아요 1 | URL
뜻이 좋다고 모든 것이 다 용납되는 것이 아니라는걸 여기서도 또 느끼네요. 역사는 어차피 그런 장면의 연속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오류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나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달라지는 지점을 포착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

다락방 2023-02-17 09: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회주의 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게 그런 것 같아요. 처음 시작은 당연히 우를 범할 수밖에 없고요. 그러나 그것을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한계가 드러났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 같아요. 드러난 한계를 그 다음에는 수정해나가며 점점 완성된 형태를 갖출 수 있을 테니까요.

역시 같은 책 읽으면서 다른 분들의 감상을 읽는 건 너무 재미있어요. 바람돌이 님이 점점 흥미로워진다 하시는데, 저는 바람돌이 님의 글이 그렇다면 또 나오겠구나 싶어 흥미로워 집니다. 훗.

바람돌이 2023-02-17 22:59   좋아요 2 | URL
사회주의가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하고 그 긍정성 역시 이루 말할 수 없는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처음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정말 깨지기 힘든 무기를 쥐어준거니까요. 맑스가 그랬잖아요. 철학자의 임무는 세계를 해석하는게 아니라 변혁하는거라고....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의 오류 또한 우리는 냉철하게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이 책을 읽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맑스주의자로서 작가 앤절라 데이비스의 한계를 보기도 했습니다. 여성문제는 계급문제나 사회주의의 문제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지점이 분명히 있는데 그 부분은 간과됐거든요. 뭐 80년대 초반의 맑스주의자라면 당연한 한계이기도 합니다만.... ㅎㅎ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