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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 최인호 유고집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번인가 읽으려 하다 못 읽은 작가들이 많다. 심지어 책을 사두고 몇 년씩 책장에 묵혀 둔 채 한 장도 넘기지 못한 작가들도 있었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주는 작가들 중에는 故최인호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읽지 못했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건 저러건 아무도 신경 안 쓸 일이라도, 생전에 읽지 않은 게으름이 한심했다. 언제부터인가 소설만 읽으면 몸이 아프고, 괜한 마음이 발동해 노트북 앞에 앉아 몇 자 쓰면, 또 몸이 아팠다. 그렇게 나는 아픈 것이 무서워서, 소설을 읽지도 쓰지도 않았고 그 주변을 지분거리기만 했다. 사실 알라딘 신간 평가단에 지원할 적마다 소설 분야에 지원했는데, 매번 떨어졌다. 그러다 마침 마음이 소설 바깥으로 기울어 갈 때 지원한 에세이 분야에 참여하게 되었다. 기쁘면서도 어쩌면 어떻게도 나는 소설과는 연이 안 닿는 것 같아 서운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이번 신간 평가단을 통해 소설가의 에세이를 많이 접했다. 마지막 책 역시 그랬다. 故최인호의 유고집인 <눈물>은 전혀 상상해본 적 없는 그의 신앙심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신앙심이 없는 내게 그리 까탈스러운 독서가 아니었다. 늘 '주님'이라는 분을 생각하는 투병 중이 작가를 떠올리며 아픈 것이 무서워 소설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내가 하고자 한 것을 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는 동안, 누군가는 손톱이 빠진 자리에 골무를 끼워 글을 쓰며 하고자 하는 것을 했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원해 그것을 하더라도, 이 작가의 열정에 비하면 진정도 없고 깊이도 없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2011년 네 번째 항암 치료를 끝으로 더 이상 항암 치료는 물론 CT, PET 그 어떤 검사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유일하게 받은 치료라면 목에 패인 상처에 안연고를 바르는 일이었습니다. 점점 끓어오르는 가래를 뱉을 힘이 없습니다. 서서도, 앉아서도 가래를 뱉을 수 없습니다. 바닥에 무뤂을 꿇고 엎드려 있는 힘을 다해 겨우 가래를 뱉으면 이미 내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됩니다. 가래 때문에 숨을 쉴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침이 나오지 않아 늘 물병을 달고 삽니다. 이제 먹는 것도 두렵습니다. 사레가 들려 먹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새 영양실조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익숙한 일과가 되었습니다. 폐렴이 찾아오는 것도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눈을 뜨려고 해도 자꾸만 눈이 감깁니다.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는 참을 수 없는 절망감입니다. 하지만 나는 쓰고 싶습니다. 반드시 이 고통 속에서, 내게 주님을 찬양하는 글을 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소서. 성체가 너무나 고픕니다.(37)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다른 이들로부터 노골적인 평가를 자주 받는 편이었다. 너는 이러이러하다, 라는 말이 그들의 입에서 나올 때 물론 의도는 그들이 느낀 나에 대한 호감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그 중에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말은 감화가 잘 된다, 감수성이 좋다는, 그 말대로 좋다면 좋은 말들이었다. 특히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했고, 그런 성향이 남들과 다른 것을 포착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고, 거기서 묘한 우월감도 있었고, 그런 우월감에 젖은 사람들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고, 그것이 얼마나 사람 대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도 알게 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뭔가를 읽고, 또 구상하면, 당시에는 그것이 늘 좋지 않은 방향으로, 건강한 삶의 대척으로 향했고, 감수성이 좋은 나, 뭔가를 읽으면 읽은 대로 생각하면 생각한 대로 기분이 요동치던 나는 더 이상 쓰지도 읽지도 말자는 고민에 방점을 찍었다. 오히려 등단이나 그런 작가적인 명예를 쓰지 못한 것이 능력의 한계이자, 다행이 되어버렸다. 


최인호의 유고집이 주님으로 점철되어 있더라도, 쓴다는 것 앞에 무력해지는 한 사람으로서 이 글은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썼다'는 자체로 이미 유의미하다. 제대로 써본 사람은, 쓰는 과정이 결코 1에서 10까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단순 반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 테다. 1에서 3을 쓰다가 2를 채우고 10으로 비약하고 다시 10을 지우고 8과 9의 무게를 재고 8을 위해 9를 희생하는 과정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 끝까지 쓴다는 것, 평생 쓴다는 것은 그 과정의 인내이기도 하지만 운명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조건이 악할수록 열망이 커지는 사람을 보는 건 소름돋는 일이다. 주보에 실렸다는 이 글들은 쓰고 싶다는 열망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깨끗함마저 느껴졌다. 그 때문인지 책이 끝날 즈음 나온 질문 하나가 故최인호 작가의 삶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열정은 삶에 대한 집착과는 어떻게 다른 겁니까?(340)


돌아보면 항상 부러운 이는 자기 내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해내는 사람들이었다. 더 부러운 건 그것을 조용하고 또 확실히 해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작가 최인호가 부러웠다. 누군가 이것이 올바른 감정이 아니라고 야단치더라도, 지금 내 안에서 쏟아지는 감정은 동경이나 존경이 아니라 부러움이다. 그리고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최인호 작가님, 마지막까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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