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이북스 출판사의 인문학 도서 특별 할인전! 20~25% 할인가에 드립니다.
기간 : 2006년 6월 5일 월요일 ~ 2006년 6월 30일 금요일

 

 

오, 이제이북스에서 6월 한달 동안(6월 5일 - 6월 30일) 인문학 도서를 20-25%

할인 판매하는군요!!

이제이북스에서 이런 행사를 하는 것은 제가 알기로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책값이 비싸서(이제이북스 책들이 상대적으로 조금 비싼 편이죠. 험험 ...

책을 잘 만들기는 하지만. ^^;;)  사지 못했던 책들을 구입할 절호의 기회인 듯 ...

사실은 저도 몇 권 찜해 놓은 게 있습니다.

스티븐 툴민과 앨런 재닉의 명성이 자자한 책인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클라우스 에메케의 [기계 속의 생명],

마크 포스터의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날기 전에 인터넷을 생각한다]

이 세 권은 꼭 사볼 생각입니다.

 

그동안 [헤겔 또는 스피노자]와 [스피노자와 정치]를 미처 구입하지 못한 분들은 이번 기회에

한 권씩 구입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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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그 2006-06-07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미처' 구입하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사보아야 겠군요.^^
(그런데 그래도 역시 비싸긴 하네요.ㅋ 궁시렁 궁시렁)

balmas 2006-06-07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그래도 비싸긴 비싸죠. ㅋ

딸기 2006-06-07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이북스가 책값이 비싼 편인 건가요?
몇권 사긴 했는데... 거긴 주로 철학책을 내는 것 같더군요. 제가 산 책들은 물론 철학과는 관련 없는 것들이었습니다만.
(써놓고 보니 이상하긴 하네요. 철학과 관련 없는게 과연 세상에 있을까)

쎈연필 2006-06-07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멋진 정보 감사드립니다...
스피노자에 대한 책은 몹시 어려울 것 같지만 숨 고르고 질러야겠군요...!!

헤르베르트 2006-06-0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말대로 퀄리티에 비해 좀 비싼 편인거 같긴 해여. [빈 비트겐슈타인 세기말의 풍경]은 종이나 여러가지 면에서 볼때, 꽤 저렴한 방식으로 제작한 거 같은데 값이 만만치 않죠(니체 관련 책도 마찬가지로 보이고). 그런데 저런 책은 1~2천권 팔까 말까인듯 하니 출판사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째거나 이제이북스에서 출간하는 책은 일관적인 기준치가 있어서 신뢰가 가는 편입니다. 오히려 A급 품질의 책도 잘 만드는 출판사가 어쩌다 안팔리는 책을 허접하게 만드는 경우에는 좀 짜증나죠. 영리하게 장사하는 만큼 마땅한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 받아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발마스님 혹시 서양철학사 저 책 읽어 보셨나요? 내용이 괜찮으면 스웨이드 양장본으로 하나 구입하고 싶은데^^;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할인 기간에 [헤겔 또는 스피노자]랑, [스피노자와 정치]도 장만해야 겠습니다ㅋ

푸하 2006-06-07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balmas 2006-06-07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ㅎㅎ 상대적이겠지만, 보통 좀 비싸다고들 하죠. ^^; 이제이북스에서는 앞으로 서양철학의 고전들을 주로 출간할 계획을 세우고 있더군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나 플라톤 전집, 그리고 근대 철학의 고전들을 지속적으로 출간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사장님이 원래 철학을 전공한 분이고, 출판사도 좋은 철학책들을 내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하니까, 앞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철학 전문 출판사로
발전해가는 모습을 기대해도 좋을 듯합니다. ^____________^
철학은 범위가 너무 넓은 게 좀 문제죠. ㅎㅎ
또마님/ 흐흐, 감사합니다.
헤르베르트님/ [서양철학사]는 저도 읽어보지 못했는데, 한번 서점에 나가서
직접 실물을 보시고 결정하시죠. :-) ㅎㅎㅎ 정말 마슈레와 발리바르 책은 이런 기회에 하나 장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푸하님/ 뭐가 멋지십니까? 저요?? ^^;;

비로그인 2006-06-0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 그의 삶과 철학
이 책은 어떠한 가요? 니체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사람에게 입문서로 권할만한 책이 뭐가 있을까 궁금해서요..

헤르베르트 2006-06-07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렇군요. 예전에 교보에서 서양 철학사 스웨이드 본은 비닐포장이 되어있어서 내용을 볼수가 없더라고요. 일반판은 보이지도 않고.. 아무래도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텐데.. 다른 경로로 다시 체크해봐야 겠습니다.
이제이북스 출판사의 장래 활동이 매우 기대되는 군요. 기왕에 굵은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품질관리에도 신경 써줬으면 좋겠습니다.^^;

balmas 2006-06-07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때리다님/니체에 대한 입문서로는 좋은 책입니다. 적극 추천!
헤르베르트님/ 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비닐 포장이 되어 있었네요. ㅎㅎㅎ
좀 안타깝게 됐습니다.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어,

열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

며칠 전 한 출판사의 뒷풀이 모임에 갔다가 한 시인을 만났다.

처음 들어보는, 그러니까 나에게는 무명의 시인이었던, 그는

아주 수줍어하는, 부산의 시인이었다.

철학과 문학의 경계에서 왔다갔다 하노라고, 또는

시 안으로 철학을 들여온다고 늘 야단맞는다며,

수줍게 웃는 그 시인은,

피가 더러운 것들은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산업공학과 출신의 공학도였던, 그는

피가 더러운 탓에,

과학철학과 과학사 공부에도 기웃거려 보았다가,

결국 시인이 되었는데,

힘드셨겠다고,

사실은 내가 아는 학생들 중에도 그런 친구들이 몇몇 있다고,

그런데 그 학생들에게 차마 철학을 공부하라고 적극 권유할 수는 없었다고,

말하는 나에게,

수줍게 웃으면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피가 더러운 것들은 어쩔 수 없다고.

그 피가 더러운 시인이 생각 나서,

마침 네루다의 시집을 집어든 김에, 역시

피가 더러운 족속인 네루다의 시를 한편 올려 본다.

 

더러운 이들이여, 번성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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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6-05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가 더러운 족속들, 핏빛 글자로 쓰셨네요.
사지가 뜨거워지면서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예요, 이 새벽에 어쩌자고.

balmas 2006-06-05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나어릴때님도 혹시 더러운 피를 가진 분 ...??

릴케 현상 2006-06-05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는 피만 더럽지도 않은가 봐요

하늘바람 2006-06-05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너무 좋아하는 시인데요.

헤르베르트 2006-06-05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는 별론데ㅋ 요즘 마던 락 밴드들의 가사 같다는 느낌이...
죄송해여 이럼 안되는 거죠? (_._)

2006-06-05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6-05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6-06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ㅎㅎ 그게 무슨 말씀??
하늘바람님/ 그러셨군요. ^^
헤르베르트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 그럼 안되는 게 어딨나요? ㅋ
그러고보니 또 노래 가사를 닮기도 했군요. ^^;
속삭이신 님/ 과제를 내준 사람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그 정도면 무난할 것 같군요. :-)
 

 

 

7시간 30분의 감동…연극 한편의 놀라운 힘
연극비평_레프 도진의 ‘형제자매들’(LG아트센터, 5.20~21)

2006년 06월 03일   노이정 연극평론가 이메일 보내기

얼마전 내한한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의 ‘형제자매들’에 쏟아졌던 관심만큼이나 그 여파가 적지 않다. 연극 한편이 이토록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레프 도진이 연출한 이 작품에서 우리는 사라져가고 있는 연극의 힘을 재발견했다. 특히 우리 연극인들에게 반성의 거울이 됐다. 배우들, 극작가들, 연출가들에게 이 연극은 우리가 연극에 담긴 가능성을 얼마나 지레 포기하고 있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이렇게 쉬우면서도 감동을 줄 수 있다니!


1985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기 직전 초연해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순회공연을 해온 이 작품은 말리극장의 예술감독으로서 레프 도진의 초기작이다. 스탈린 시대 러시아 북부 아르항겔스크 지역을 배경으로 한 아브라모프의 소설 4부작 중 앞의 3부(‘형제자매들’(1958), ‘두 해 겨울과 세 해 여름’(1968), ‘길과 갈림길’(1978))를 연극화했다. 공식적으로는 2년 간 준비했다지만 1977년 배우들과 함께 아브라모프가 살고 있는 마을을 직접 찾아가 생활하는 등 도진의 고백에 따르면 준비기간은 10년에 이른다.


공연 전 우리가 주목했던 건 7시간 30분(순수 공연시간 5시간 20분)이라는 공연시간이다. 세계적으로 10시간을 넘는 연극 작품도 꽤 있지만 요즘 국내 연극은 2시간을 채 넘기지 않는다. 모든 것을 효율로, 속도로 계산하는 시대에 몸으로 대항하는 이 연극은 우리 관객에게도 느린 호흡으로 살 기회를 제공했다.


드디어 막이 오르고, “동지들이여, 시민들이여, 형제자매들이여!”이라는 스탈린의 연설과 함께 배경에 1940년대 전쟁기록영화를 투사하면서 시작된 연극은 1941~195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러시아 집단농장 콜호스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보여줬다. 러시아판 인생유전이라 할만하다. 나이가 차지 않아 참전 못한 청년 미하일과 남자들이 없는 마을을 책임지는 콜호즈 여위원장 안피사 등의 이야기가 이 펼쳐지는 제1부 ‘만남과 이별’, 전쟁이 끝나 남자들이 돌아오고 스탈린 독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제2부 ‘길과 갈림길’ 사이에 십 년의 세월이 있다.


연극은 많은 사람들의 운명의 교차를 다룬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에서는 이 위로도 배신으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불신과 분열의 분위기가 무대를 지배하게 된다. 농촌에 남은 사람들, 도시로 간 사람들의 삶은 달라지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영광의 인물과 위기의 인물도 끊임없이 생겨난다.


이것이 정해진 스토리대로, 쓰여진 텍스트대로 진행된다면 아마도 매우 지루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극은 주요 인물들의 에피소드에 집중돼 그 이야기들 사이에서 긴장과 이완을 체화한다. 보는 관객도 그 흐름에 따라 집중과 이완을 하게 된다. 이것을 도진은 하나의 교향악이라 표현했다. “드라마에는 그 자체에 멜로디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는 이 긴 시간 동안 관객이 편안히 연극을 볼 수 있는 것은 그 자체에 들어있는 음악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마리아 셰브초바는 이 연극의 스타일을 ‘산문의 연극’이라 칭했다. 배우들이 “소설을 온전히 공연하면서” 즉흥적 시도를 통해 “대본의 신체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소설의 강건한 내러티브는 배우들의 몸과 목소리를 통해 응축된다. 전체적으로는 비극적인 톤을 가진 이 작품을 우리가 힘들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은 한 사건이 끝나면 다른 사건을 맞기 위한 여유가 생기고, 비극적 사건들 사이에는 긴 희극적 릴리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아니한가.


여성과 남성 집단으로 나뉘어 질펀한 음담패설을 나누는 마을 주민들의 집단적 휴식, 씨뿌리기도 축제와 같이 함께 하는 농촌의 전통이 이 연극에 희극적 에너지를 부여한다면, 불행하게도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양이 적어진다. 집단농장의 삶이 곤고해지면서 사람들의 집단성은 분열되고 이기심이 싹트며 연극 첫 막에서 제시되던 카니발리즘적 에너지는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이다.


집단성의 해체, 혹은 코러스로 합류해 들어가는 개인에서, 개인으로 해체돼가는 코러스로 변화를 보여주면서 연극이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는 명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머니즘이 살아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단지 어떤 한 시기의 정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정치적 허구와 그 안에서 고통받는 인간 사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고발이다.


이 긴 공연의 모든 사건 속에 뗏목과 장대들이 있다. 10여 년의 삶의 다양한 무대들, 방과 집, 헛간, 목욕탕 등의 사적 공간과 파종과 축제의 무대가 되는 공적 공간들은 뗏목 모양으로 만들어져 무대 중앙에 매달린 단 하나의 나무판으로 만들어진다. 360도로 회전하고 아래위로 오르내리면서 모든 장면의 배경이 되어주는 이 뗏목은 나무로 만들어진 등장인물과도 같다. 무대를 감싸고 선 20개의 장대들은 숲인 듯 감옥인 듯 이곳을 탈출하지 못하는 이들의 삶을 에워싼다.


이 공연을 보고 아무도 이것이 새롭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이 공연은 ‘새로움’이 아니라 ‘낡음’을 강조한다. 목재로만 제작된 무대, 배우의 연기와 제스처만으로 연결되는 이야기들, 모든 관객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삶의 원초성에 대한 대사들. 그런데 왜 이 연극은 낡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


이 연극이 처음으로 서유럽에 소개될 때 서유럽 관객들도 연극에 놀랐다. 1988년 파리 가을축제에 초청된 이 공연을 보고 현 보비니 극장 예술감독인 파트릭 소미에는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건 우리가 연극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고 하는 것들의 종합이잖아. 코러스적 성격, 준 자연주의성, 서사적이고 교훈적인 인물. 이건 이젠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것들인데.” 그런데 도진과 말리극장의 연극들은 계속 서유럽에 초청됐고 인정받았다. 1992년에 초청된 ‘가우데아무스’(2001년 내한)와 1994년의 ‘폐소공포증’은 유럽의 새로운 연극 현상인 ‘코러스성’(등장인물들이 코러스가 되는 현상)의 문제를 무대로 회귀시킨 작품으로 인정되기도 했다.


2002년 유럽연극상을 수상한 도진은 인터뷰에서 그의 연극의 근원을 스승과 제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우리사회가 진보의 행렬 속에서, 새로운 지식습득의 방법 속에서 상실한 것 중 하나로 그는 ‘전통적 가르침’을 들었다. 피와 살이 흐르는 선생이 인터넷과 컴퓨터로 대체되는 상황. 그는 선생은 제자들에게 사물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사람이며 제자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 말하면서 유년기부터 자신의 삶을 만들어온 스승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첫 연극 스승은 두브로빈이다. 메이어홀드의 제자였으나 소련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연극을 만드는 것이 금지되자 전문적 활동을 포기하고 어린이들과 작업했던 그의 스승. 도진은 12살 때 수영강좌가 마감돼 연극을 하게 됐고, 그를 만났다. 도진이 말하는 두브로빈의 수업은 다음과 같다. 스승은 자기 주위에 아이들을 둘러앉게 하고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들은 아무거나 물었고 그는 마치 랍비와 같이 모든 것에 대해 설명했다. 도진의 회고에 따르면 그때부터 그에게 극장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하는 장소가 되었다 한다. 이 선생에게서 도진은 즉흥의 방법, 낡은 텍스트를 바꾸는 기적을 배웠다.


피터 브룩의 러시아 순회 공연과 조르지오 스트렐러 작품 ‘벚꽃동산’의 단 한 장의 사진에 자신의 상상력이 불타올랐다고 고백하는 도진은 실상 가장 중요한 훈련은 제자들과 수업이라고 단언했다. 제자들은 자신의 젊음을 이야기하여 선생을 늙지 않게 한다. 그리고 선생은 같은 것을 다른 세대에게 반복해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워져야 한다.


이 이야기에 새로운 것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거기엔 다만 우리에게 잊혀진 것이 있다.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인간과 연극의 진실에 관한 오랜 믿음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생존할 수 없다고 느끼는 이 시대에 그의 연극은 사람 사이의 교류에 대한 오랜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아리안느 므누슈킨이나 피터 브룩, 오태석 등 우리가 아는 연극의 대가들은 모두 이 믿음에서 연극을 시작한다.

노이정 / 연극평론가


©2006 Kyosu.net
Updated: 2006-06-0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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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05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도시락 싸가지고 가서 휴식 시간에 먹으며 봤으면 끝내줬겠어요.
세 번째 장면 사진 보니 어떤 연극인지 느낌이 옵니다.
이틀밖에 안하고 끝났나 보네요.

balmas 2006-06-04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말예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벌써 시작하고 끝나버렸네요. -_-
한번 봤으면 좋았을 것을 ...

Runa 2006-06-12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부산에서도 보려가려고 다이어리에 몇 달 전부터 적어놓고 손꼽아 기다렸는데,
정말 암 것두 하기 싫은 맘 땜에 그만 놓쳐 버렸네요.
근데, 공연 며칠 후 라디오에서 한 진행자 왈, 같이 울고 웃고 가슴 아파하다보니 그 긴 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연극이 끝났더라고 하더군요.
이 글은 더 실감나게 절 아쉽게 만드는군요.

그러니, 학위도 하셨는데 바쁘시겠지만 가까이서 좀 챙겨 보세요. 예?
멀리 있는 사람 성질 나거든요.ㅎㅎ

balmas 2006-06-12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앞으로는 애용하겠습니다.
그런다고 카우테님이 덜 열받게 될까요? ㅋㅋ
 

산책님이 헤겔의 근대철학사 강의에 관한 책을 읽다고 잘 모르는 게 있다고 아래 같은 질문을 남겨주셨네요.

제가 그 책을 보지 못해서 정확히 답변하기는 어렵지만,  아래처럼 답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도움이 되길 ...

(답변은 이탤릭체로 표시했습니다.)

 

산책님의 질문

 

데카르트가 말하는 연장res extensa을 가진 사물은, 그가 뚜렷하게 그런 것으로 깨닫지는 못했다 해도, 실제로는 사유의 부정으로서의 존재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유가 연장된 존재에 본질적인 규정들을 부여하고 있는데도, 그는 제멋대로 연장을 사유로 환원시킨다. 일단 우리가 (순수하게 논리적이고 영원한 진리들인) 본유관념들을 넘어서 사물들에 보편적인 규정들을 부여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된다. 첫째, 정신과 물체와 자연은 모두 실체들이지만 신이라고 하는 보장 체계에 의존하며, 그 신은 개념과 실재를 절대적으로 통일하는 자라는 것, 둘째 물체의 본질적인 속성은 연장인 반면, 정신의 본질적인 속성은 사유라는 것, 셋째, 그 결과 물체는 그것의 원인보다 덜 완전하다는 것, 넷째, 물체의 본질적인 연장성은, 예를 들어 (연장이 없는 물체인) 진공이나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 것인) 원자가 있을 수 없음을 증명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다섯째, 물체의 제이 성질인 색깔, 소리, 냄새 등은 감각적이고 지각적인 기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순전한 사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데카르트는 이러한 감각적 성질의 생성을 사유와 분리하려고 노력하고 있기에 그것이 사유의 부정적인 운동을 드러내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뒤이은 문장인데염. 철학은 읽으려고 시도할 때마다 좌절을 안겨주네요 ㅠㅠ


'사유가 연장된 존재에 본질적인 규정들을 부여하고 있는데도, 그는 제멋대로 연장을 사유로 환원시킨다. '에서 '연장된 존재'는 '연장을 가진 사물' 하고 같은 것인가요?


“연장된 존재”는 “연장을 가진 사물”과 같은 것이긴 한데요, 이 문장은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오역이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


'둘째 물체의 본질적인 속성은 연장인 반면, 정신의 본질적인 속성은 사유라는 것,'에는 앞에서 나온 정신, 물체만 나오고 자연은 얘기 안하는데 왜 그런가요? 또 자연은 물체나 사유와 어떻게 다르죠?


이것도 이 문장만으로는 불확실하지만,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여기서 물체는 개별적인 사물을 가리키고, 자연은 이러한 물체들 전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물체는 개별적인 실체인 반면, 자연은 물질 세계 전체로서의 실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죠.


'셋째, 그 결과 물체는 그것의 원인보다 덜 완전하다는 것,' 그 결과라고 하는데 뭐가 그 결과라는 말인지 모르겠네염. 또 그것의 원인은 '연장'인가요?(<---물체의 본질적인 속성은 연장이란 말에서?) 그리고 그럼


그 결과라는 것은 앞에 나온 문장을 가리킵니다. 곧 “정신과 물체와 자연은 모두 실체들이지만 신이라고 하는 보장 체계에 의존하며, 그 신은 개념과 실재를 절대적으로 통일하는 자라는 것”을 가리키죠. 다시 말해 신이 물체의 원인이고, 연장과 사유, 물체와 정신을 통일시켜주는 궁극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이러한 원인에 의존하는 물체는 신보다 덜 완전하다는 뜻이죠.


'그 결과 정신은(혹은 자연은) 그것의 원인보다 덜 완전하다는 것'도 가능한가요? 생략된 것인지? 다른 뜻이 있는지?


좋은 질문입니다. 물체 또는 연장이 원인인 신보다 덜 완전하니까, 정신 내지 사유도 신보다 덜 완전하지 않느냐는 말인데, 당연히 그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논의 맥락은 연장과 물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정신이나 사유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은데, 아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죠. 정신 또는 사유가 연장과 구별되는 것인 한에서, 곧 통일의 원리가 되지 못하고 물체와 더불어 전체의 한 부분으로 머물러 있는 한에서 정신이나 사유는 신보다 덜 완전합니다. 곧 전체=신=사유+연장=정신+물체+자연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면, 사유는 연장과 함께 전체인 신의 한 부분에 불과하죠. 그리고 헤겔이 데카르트를 비판하는 논점 역시, 사유를 연장의 대립물로 파악하고 있을 뿐, 연장을 성립시키게 하는 원동력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겠죠.


'다섯째, 물체의 제이 성질인' (음 그럼 물체의 제일 성질은 연장인가요?)


그렇죠. 제일 성질은 연장입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연장, 운동, 크기 등이죠.


'데카르트는 이러한 감각적 성질의 생성을 사유와 분리하려고 노력하고 있기에 그것이 사유의 부정적인 운동을 드러내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이 말은  감각적 성질은 단순히 사유와 구분되는 물체의 성질인 것이 아니라 사유와 다름을 드러내는 물체의 성질로서 뭔가 연결되는 의미가 있다는(?) 그런 의미인가요?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감관을 통해 지각되는 감각적 성질과 우리의 지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물들, 물체들의 객관적 성질을 구별합니다. 헤겔의 이야기는 전자와 후자의 성질 모두 연장이나 물체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는 사유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데카르트는 사물의 객관적 성질들만을 우리 사유의, 우리 지성의 참된 인식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뜻이죠. 좀 모호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대략적인 의미는 그런 듯합니다.  


흙흙...사전처럼 하루에 한 사람씩 뗄려고 했는데, 데카르트 붙들고 며칠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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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6-06-03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린트해서 읽어볼게요. 감사^^

릴케 현상 2006-06-03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가 좋은 질문도 하나 한 거죠? 맞죠^^*

balmas 2006-06-04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좋은 질문 하신 거 맞습니다. ㅎㅎㅎ

2006-06-04 0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6-04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예, 알겠습니다. :-)
 

 

황라열씨 보도…언론은 '벌떼'인가

[기고] 정영찬·서울대 인터넷뉴스 스누나우 편집장

2006년 06월 01일 (목) 23:10:55 정영찬·스누나우 편집장

'벌떼 같다.' 창공을 가르는 벌떼를 본 적이 있는가. 벌떼는 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가 꿀을 찾아온다. 또한 그들은 동족의 신호를 전혀 '의심'하지 않고 꿀이 있는 장소로 달려든다. 서울대 2006년(49대) 총학생회장 황라열 씨에 대한 기성 언론의 태도는 마치 벌떼와 같아서, 꿀이 있는 곳이라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게다가 그들은 꿀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조차 하지 않은 채 그 꿀(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사정없이 빨아댄다.

총학생회장 당선 때부터 시작된 언론의 집중 보도

   
  ▲ 황라열 서울대 총학생회장 ⓒ노컷뉴스  
 
'먹을 것 앞에서 참기 힘들다'는 생리적인 점까지 곤충과 닮았는지에 대해선 모르겠지만, 총학생회장 당선이 확정된 지난 4월13일 오전부터, 조선일보와 MBC를 비롯한 기성 언론들은 '이색 경력 총학생회장'을 주 기사거리로 보도했다. 문화일보는 4월13일자 기사에서 "황라열 씨의 이력서는 말 그대로 자리가 모자랄 지경"이라며 황 씨의 화려한 경력을 강조했고, 같은 날 경향신문은 "마치 한편의 인생역전 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다양한 이력을 가진 늦깎이 대학생이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며 흐름에 따랐다.

중요 이슈에 집중하는 언론의 태도는 비판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중요 이슈'였는가에 대한 사유가 없었다는 점이 문제다. 또한 '다양한 이력'과 '서울대 총학생회장'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경력 중심의 보도는 '사실 확인'이 뒷받침되지 않은 '선정적 보도'였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황 씨의 경력의 일부가 '허위 또는 조작’이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사실 확인 미비로 빚어진 '한총련 탈퇴' 보도 소동

벌떼 언론의 행태는 여기서 끊이지 않았다. 황 씨가 한총련 탈퇴 기자회견을 했을 당시, 기자회견장엔 30여명이 넘는 기자로 붐볐다. 의심 없는 벌떼와 같이, '그들'은 황 씨의 말을 받아 적고 그 말을 그대로 보도했다. 마치 '서울대 전체'가 황 씨의 의견에 동조라도 하는 듯 '굿바이 투쟁의 시대(조선일보 5월10일)'라는 자극적 표제를 쓰거나, "사상으로 뭉친 소수의 집단이 이끄는 학생운동은 저물고 있다(국민일보 5월10일)"라는 교수의 말을 통해 '이제 서울대에 운동은 없다'란 주장을 폈다. 하지만 '그 때'는 평택 미군기지 문제로 인해 연행된 50여명의 서울대 학생들이 풀려난 직후였다.

편향된 시각을 통해 거시적 논점이 결여된 채 양산된 당시 기사들은 서울대 총학생회와 한총련의 관계에 대한 과거사적 서술이 없다는, 그 내용적 공통점에서 맥락을 완전히 일탈하고 있다. '용기있는 서울대의 한총련 결별(세계일보 5월11일)'과 "이번 선언은 학생 자치활동 역사에서 구시대의 종언(終焉)과 새 시대의 개막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다(동아일보 5월11일)" 식의 보도는 학생들조차 당황하게 만들었다. 한총련과 서울대 총학생회의 관계가 소원했던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없는 단체를 탈퇴했다는 점에서 이는 마치 열린우리당 의원이 한나라당을 탈퇴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이와 같은 문제가 생긴 것은 80년~90년대 초반과 다르게 현재는 한총련(전신 포함)이 학생운동의 주류에서  밀려나있고, 학생운동이 총학생회와 별개로 진행되는 측면이 있다는 '현장 변화'에 대한 취재가 미숙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울신문은 이에 대해 "한총련과 서울대 총학생회는 1998년 이후 사실상 단절된 사이, 의미 없는 것을 갖고 서울대 총학생회가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5월12일)"는 한총련 측의 입장을 전했다.

반성없는 기성 언론…허위 경력 파문에도 '맹신' 또는 '외면'

언론의 집중이 벌떼와 같은 무작정 '집착'이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 것은 근래의 황 씨의 '허위 경력' 파문을 통해서다. 당선 직후, 황 씨의 화려한 경력을 보도했던 수많은 언론들은 말 그대로 '뒷통수'를 맞은 꼴이 된 것이다. 황 씨의 '고대 입학'과 한겨레21 수습기자 경력이 사실무근으로 밝혀지면서 그들은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됐다. 팩트 중심의 기사'란 가장 기본적 보도 윤리가 무시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성 언론은 '반성'이 아닌 '맹신'과 '외면'의 한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황 씨의 경력 조작이 밝혀진 후 일부 언론은 "그는 '고려대 의예과에는 특차로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등록을 포기했던 것이 본의와 다르게 입학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고 말했다. 또 '한겨레21의 기고문 요청에 응한 사실이 다른 잡지사 수습기자 경력과 묶여서 표현되는 과정에서 수습기자인 것으로 잘못 전달됐다'고 덧붙였다(경향신문 5월27일)"는 식의 보도를 통해 이러한 발언을 '그대로 믿는' 태도를 보였다.

실수란 성공을 위한 어머니가 아니라, 또 다른 실수를 위한 도약인가. 왜, 황 씨의 해명에 대해선 사실 확인의 노력이 없는가. 또한 스누나우에서 '대마초 판매 경력' 관련 보도를 한 것에 대해 황 씨가 해명하자, 그에 대해서도 "코믹해 보이는 게 우려되지만 나프탈렌, 소위 말하는 좀약을 판 것이라고고 해명했다(세계일보 5월29일)"는 보도를 통해 황 씨를 맹신하는 태도를 보였다. 한총련 탈퇴 선언 당시 선정적 제목을 통해 보도했던 조선일보 등은 이번 경력 조작 사태를 보도하지 않는 '외면'의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황 씨의 말이 '거짓일 수도 있다'라는 반성적 보도 태도는 언제쯤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집중이 집착이 되고 그것이 맹신이 되면 그것은 이미 '기사'가 아니다. 그것은 팬레터일 뿐이다. 기성 언론의 올바른 보도 행태를 촉구한다.


정영찬 / 서울대 인터넷뉴스 '스누나우'(www.snunow.com)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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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6-0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balmas 2006-06-03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러세요. :-)

승주나무 2006-06-04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신문이어서 그런지, 문체가 좀 속상하군요. 논술로 따지면 빨간줄이 수십개는 걸려 있을 거에요. 칼럼이니까 감정을 싣는 것은 상관 없겠지만, 기성일보나 다름없이 고발형으로만 쓰는 게 되지 않나요. 내 학생이 쓴 글이라면 "기성 언론의 올바른 보도 행태를 촉구한다"을 핵심에 놓고 다시 쓰라고 주문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글이 주는 '팩트'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balmas 2006-06-04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역시 승주나무님답습니다.
스누나우에 가셔서 따끔한 지적을 좀 해주시죠. ^^;;

승주나무 2006-06-0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한 가지 고딩스러운 실수를 했네요. '행태'라는 말은 주로 부정적인 행위에 쓰는데, '올바른 행태'라는 말은 스누나우가 고차원적인 의도가 아니라면, 정말 바보 행태로군요.

아잇! 내가 대딩 편집자를 두고 무슨 짓이지^^ 무료해서 그랬어요.

행태(行態)
「명」행동하는 양상.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쓴다. ¶음주 행태/사재기 행태(국어대사전)

balmas 2006-06-0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승주나무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