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알랭 바디우 밑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분을 만나 저녁을 먹으면서 나눴던 대화가 생각이 나서 재미삼아 퀴즈를 하나 내봤는데, 예상외로 답변이 너무 쉽게 나와서, 썰렁하게 되었습니다. 책임지세요!^^

어제 대화 도중에 어떻게 Bergson 발음 및 표기에 관한 문제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사실 보통 독자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혼란스럽죠. 최근까지 "베르그송"이라고 잘(??) 써오다가, 얼마전부터 "베르크손"이니 "베르그손"이니 하는 표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해서, 갑자가 Bergson에 대한 표기가 세 가지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같은 자리에 있던 한 분(3명이 식사를 했는데)이 얼마전 학술회의에 참석하러 일본에 다녀오셨는데, 일본 사람들은 Bergson을 전부 "베르그송"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베르그송"이라는 표기는 사실은 일제 시대에 일본 사람들이 부르던 어법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학위를 마치고 온 분에 따르면 프랑스 사람들은 전부 "베르그손"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반면 "베르크손"이라고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은 Bergson이 독일계이기 때문에, 독일식 발음을 따라 그렇게 표기해야 한다고 하지요.

Bergson 전공자도 아닌 주제에 이 문제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단언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제 견해로는 프랑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표기도 그렇게 바꾸는 게 옳은 게 아닌가 합니다. 제가 학부 다닐 때만 해도 Durkheim을 "뒤르켕"으로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 이후 이것도 "뒤르켐"으로 고쳐서 부르고 있으니까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죠. 그래서 어제 저희 세 사람은 "베르그손"이라고 부르는 게 합당하지 않냐고 나름대로 합의를 봤습니다. 물론 우리끼리만요.^^

이렇게 Bergson의 표기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프랑스인들의 발음 관습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가서 이런저런 철학자들, 예술가들, 작가들의 인명에 관한 일화들을 이야기하게 됐죠. "으젤"이니 "립니즈"니 "미셸 앙주"(미켈란젤로)니 "엔느"니 등등. 저도 프랑스 TV를 보다가 "로날도"(사실은 "호날도")라는 이름이 나와서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는데, 알고보니 "호나우두"더군요. 그런데 사실 "으젤"이라는 발음은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들한테서나 들을 수 있고, 보통은 다 "헤겔"이라고 제대로(헤겔이 고마워하겠죠^^) 불러준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떤 이름이든 자기식대로 발음하는 프랑스 사람들을 보면, 한편으로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 부럽기도 합니다만, 될 수 있는 대로 그 나라에서 부르는 대로 발음을 해주는 게 좋은 게 아닌가 합니다. 물론 표기법 원칙을 따르는 가운데에서 그렇게 해야겠지만요.

 

어제 들은 이야기 중에서 흥미로운 것 한 가지는 프랑스 고등사범학교(파리 윌름 거리에 있는)에 "현대프랑스철학 국제연구센터"(Centre International d'Etude de la Philosophie Française Contemporaine) 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지난 번에 오질비의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에 대한 서평에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알랭 바디우를 주축으로(그 분 말에 따르면 바디우가 파리 8대학에서 고등사범학교로 적을 옮긴 것은 이 센터를 주관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더군요. 물론 이제 교수직에서는 은퇴하긴 했지만),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 이브 뒤루, 베르트랑 오질비 같은 사람들이 관여해서 정규 세미나와 연구 모임, 학술 콜로퀴엄 등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센터의 이름처럼 베르그손에서 바슐라르, 구조주의, 들뢰즈 등에 이르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이 강의와 연구, 토론의 주제구요.

물론 아직 정식 학위과정이 아니라 "마지스테르Magistère"라는 특수학위과정밖에 없기는 하지만, 그동안 프랑스 철학계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을 가르치는 곳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주목할 만한 작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루빨리 정식 학위과정이 설치되고 재정적, 행정적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갖추어서, 훌륭한 연구자들을 많이 배출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알튀세리엥들이 들으면 반가울 만한 소식인데, 이 센터의 비공식적 명칭이 "알튀세르 센터"라고 합니다. 사실 약자로 하면 CIEPFC인데, 발음하기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라서 관련 당사자들은 모두 "알튀세르 센터Centre d'Althusser" 라고 부른다고 하는군요. 앞으로는 이게 공식 명칭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알튀세르는 지금도 프랑스 학계에서는 금기시되는 인물이어서 학위주제로 삼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좀처럼 활성화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처럼 알튀세르에 관한 연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데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 센터가 현대 프랑스 철학만이 아니라 알튀세르를 중심으로 한 마르크스주의(사실 전자와 후자는 함께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 연구에도 크게 기여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국내 알튀세리엥들도 이제 좀 뭔가를 만들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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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5-01-20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찔려요. 전 아직도 입에 뒤르껭이 붙어있답니다. -.-;;

숨은아이 2005-01-20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재미있는 걸 알았습니다. 으젤, 립니즈, 엔느... 그렇군요. ^^ 그런데 알튀세르가 왜 금기시되나요? (제가 무식해서... --;)

aporia 2005-01-20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얘기들, 정말 반가운 소식들이네요...! 불어를 정말 배우고야 말아야겠습니다. 게다가 선생님 마지막 말씀은, 너무 반가워,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를 지금 정세에 맞게 쇄신/복권/개입시키는 것. 작년 한해의 혼란과 새롭게 진출하는 대중운동들의 요구, 그렇지만 그 앞에서 무능하거나 휩쓸려 갈 뿐인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어느 때보다 변화된 인식과 활동에 대한 욕망을 느꼈더랬습니다. 선생님의 본격적인 활약상을 하루라도 빨리 볼 수 있길 간절히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선생님의 건투를!

balmas 2005-01-20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뒤르껭, 뒤르케임, 뒤르켐, 이 이름들도 참 혼란스럽게 같이 쓰였죠.
숨은아이님, 알튀세르는 1980년에 정신착란 상태에서 자기 부인을 목졸라 살해했습니다. 철학사 전체에 걸쳐 최악의 스캔들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죠. 그래서 1990년 사망할 때까지 알튀세르는 사실상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오히려 더 불행한) 상태에 있었답니다. 그 이후 알튀세르는 드문 경우들(유고집 발간과 두어 잡지의 특집호)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에서 거의 논의되지 못하고 있지요. 알튀세르 전집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출간되었거나 출간되고 있는 실정이랍니다.
아포리아님, 앞으로 뜻있는 분들이 노력한다면 좋은 결과들이 생기겠죠.^^

숨은아이 2005-01-20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설명해주셔서 고맙습니다.

NA 2005-01-21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되어서 저도 여기 교수하고 말을 하다가 '헤겔'이라고 발음을 하니까 못알아 듣더군요. 사실 헤겔은 독어발음이기도 한데...영어에서는 '헤이글' (강세는 앞쪽)...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누군가(어렴풋이 데리다 였다고 기억이 나는데 확실친 않군요) 불어에서는 H가 발음이 나지 않는다는 걸 이용해서 Hegel을 '애글(?)'(독수리aigle)로 비유를 했던 적도 있던 것 같은데.... 미국에선 들뢰즈를 '들루즈'라고 발음하던데(이것도 한참 됐지만, 들뢰즈라고 말했다가 상대방이 몬알아 들어서 한참을 고생했던 적이 있었죠), 원래 불어발음은 어떤 게 맞는지 모르겠군요. 진 선배가 앞장서시면 아마 여기저기서 뜻있는 알튀세리엥들이 따라 가지 않을까 싶군요. 저도 한귀퉁이에서 심부름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balmas 2005-01-22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ctrl님, 무슨 말씀을 ... 저야말로 뒤에서 시키는 일만 고분고분할 생각인데요.
그런데 이러다가 정말 올해 안에 뭔가 될 것 같군요.^^
저도 Deleuze에 대한 발음을 많이 들어보지 못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들루즈"라고들 부르더군요. 그럼 Deleuze도 표기를 바꿔야 하나???
그리고 사실 Zizek도 표기법 원칙에 따르면 "지젝"이 아니라 "지제크"라고 하는 게 맞죠(Balzac을 "발자크"라고 하는 것처럼).
윽, 점점 어려워지는군 ......

aporia 2005-01-26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미 아실 것 같기도 하지만, 위에서 말씀하신 '알튀세르 센터' 홈페이지가 있군요. 주소가 http://ciepfc.rhapsodyk.net입니다. 발리바르가 2004년 12월에 A4 25장 분량의 글도 하나 있네요. 혹시 모르셨다면 참고하세요. 감사합니다.

balmas 2005-01-27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저도 지난 번에야 알았습니다.^^
 

퀴즈 하나 내볼 테니까 맞혀보세요.

맞히면 ... 상품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보죠.^^

 

1. 으젤이라는 철학자와 립니즈라는 철학자를 아시는 분 있으신가요?

힌트를 드리자면 아주 유명한( 정말로!) 철학자입니다.^^

 

2. 엔느라는 시인과 고트라는 작가를 아시는 분 있으신가요?

역시 힌트를 드리자면 아주 유명한(진짜로!) 시인, 작가입니다.

 

왠 뜬금없는 퀴즈냐구요?

일단 한번 풀어보시죠. 이유는 다음에 설명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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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5-01-19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프니츠는 알겠는데...

클리오 2005-01-19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립니즈가 라이프니츠면 으젤은 헤겔 쯤 되나요? 우리나라에서 너무나 우리식, 혹은 영어식으로 발음을 표기하는 바람에 그 사람의 원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 --;; (알지도 못하면서 퀴즈에 열광적으로 반응하고자, 뜬금없이 한마디 써봅니다. 순전히 상상의 나래이니, 서재 주인장님의 눈과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기를...)

비발~* 2005-01-19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어식으로 읽었군요...;; 으음 그렇담... 시인은 하이네겠고.. 작가는 괴테겠네요...

비로그인 2005-01-19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트는 괴테?

비발~* 2005-01-19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고치는 새에...^^

balmas 2005-01-19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이렇게 쉽게들 맞추시다니 ... ㅠ.ㅜ 재미없잖아요!^^
역시 알라딘 분들은 대단하시군요.^^

chika 2005-01-19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중국어 강사가 "잘 모르지만 어쨋든 '바우루어'가 사람이름이랍니다" 하길래 '네, 바오로, 영어로 폴이라고 하는 이름일텐데요?'해줬더니 신기해하더군요. 재밌어요.. ^^

balmas 2005-01-19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정말 중국사람들도 만만치 않죠.

딸기 2005-01-19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일본 테레비에서 영화 광고 나오는데
키퍼 서덜랜드인가, 하는 배우 있자나요
'키파 사자란' ... 이라고 발음하더군요 ^^
반지제왕이 '로도 오부 자 링구'였고요. 차라리 한자로 쓰거나 일본말로 쓰지...

딸기 2005-01-1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생각해보니
일본 따라하다가 '독일'(일본어 발음은 도이치, 지금은 한자 없이 '도이츠')이라는 나라 하나를 만들어낸 우리나라도 있군요.

balmas 2005-01-20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로도 오부 자 링구" ...

조선인 2005-01-20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댓글까지 재미나게 읽고 갑니다.

einbahnstrasse 2005-01-21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에서는 괴테가 교떼르라던데요. 영국에서는 거써라고 하던가.

balmas 2005-01-22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각 나라마다 별개의 Goethe가 하나씩 다 있군요.^^

비발~* 2005-01-22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스파냐에선 호에테? 근데요
맞히면 ... 상품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보죠.^^ ---> 아직도 생각중?^^=3=3=3

balmas 2005-01-22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급소를 ...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군요.
이 참에 미뤄둔 이벤트를 해???

사량 2005-01-27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쪽에서 태어난 어느 분은 Goethe를 '개떼'라고 부르던걸요. -_-

balmas 2005-01-27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떼 ... ^^;;;
 

 

 

미국의 서울대, 서울의 미국대


서울대는 세계 몇 등일까. 대학의 순위를 매기는 기준이나 선정기관이라는 게 그다지 신뢰할만한 건 아니지만, 일년에 몇 차례씩 외신을 통해 들어오는 서울대의 등수는 항상 뉴스거리다. 최근 중국의 어느 대학이 매긴 성적표를 보면 서울대의 종합 성적은 150위권 밖이다. 동네 일등을 놓치지 않았던 자식의 부모라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등수다. 과목별로는 조금 나은 것도 있다. 2001년 도서구입비의 경우 105위, 2002년 ‘과학논문인용색인(SCI)’의 경우에는 34위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지난 주 서울대가 세계 대학 중 ‘넘버 투’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5년간 미국 박사학위 취득자의 출신 학부를 따져보았는데, 서울대가 2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서울대는 버클리대를 제외하고 미국 내 어떤 대학보다도 미국박사를 많이 배출했다. 그 수가 무려 1655명에 이른다. 한해 평균 300명을 웃도는 셈이다. 서울대가 배출한 국내박사가 대략 400명 남짓이고 그 일부는 타 대학 출신임을 감안한다면, 학부로서 서울대가 배출한 미국박사 수는 자체 배출한 국내박사 수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미국학위에 대한 열망이라든지, 미국박사와 국내박사의 차별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새삼스레 그 문제를 여기서 다시 들추어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것이 낡았거나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이른바 ‘서울대 넘버 투 사태’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태는 지금의 위기가 학위가 아닌 학문의 위기임을, 그리고 문제가 더 이상 대학의 등수가 아닌 대학의 지향에 있음을 보여준다.

요즘 한국의 대학들은 경쟁력 강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교수나 대학원생들에 대한 지원도 늘었고 연구논문에 대한 압박도 강해졌다. 대학만이 아니라 학위자의 경쟁력도 늘었다. 국내박사의 실력이 미국박사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미국박사인 어느 교수는 내게 실력 있는 국내박사들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 걸 볼 때마다 화가 치민다고 했다. 나를 생각해서 해준 말이겠지만 정작 나를 화나게 하는 쪽은 따로 있다. 학문과 대학 자체가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상황에서 나는 솔직히 미국박사보다 더 경쟁력을 갖춘 국내박사를 대변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국내에서 미국박사보다 더 미국적 경쟁력을 갖추었다면 대견한 일이지만, 그런 거라면 나는 진심으로 미국 유학을 권하고 싶다. 한국노동운동사도 좋고 중국문학도 좋으니 미국학자들의 시각이 궁금하다면 직접 가보는 것도 나쁠 게 없다. 미국에서 배웠다거나 미국을 배웠다는 건 그 자체로 좋은 일이지 문제일 턱이 없다. 문제가 있다면 미국박사들 중 상당수가 미국적 시각을 하나의 시각이 아닌 유일한 시각으로 믿는 데 있을 뿐이다.

불행히도 이제 그 믿음이 실재성을 획득하고 있다. 미국 학문의 시각과는 다른 시각이라는 게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대학의 커리큘럼이나 연구방법은 이미 미국의 것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대학들은 지금 자국 출신 미국학자들의 귀환을 기다리는 것을 넘어 스스로 그런 학자들을 양성하려 하고 있다. 미국학자들의 귀환보다 훨씬 심각한 건 바로 이쪽이다. 학문의 지향에 대한 자기 성찰을 병행하지 않는 변화의 노력은 대학과 학문을 큰 위험에 빠뜨린다.

‘서울대 넘버 투 사태’는 그동안 서울대가 사실상 미국대학원의 학부 노릇을 해왔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나는 서울대가 이 사건을 어떻게 대할지 궁금하다. 만약 대학원중심대학에 대한 서울대의 표방이 미국의 학부 노릇을 하다 대학원 노릇을 하려는 거라면 희망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석규가 보여주지 않았던가. 자기 세계를 갖지 못한 자들은 제 아무리 ‘넘버 투’라고 해도 결국에는 ‘넘버 쓰리’일 뿐이라는 걸.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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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1-20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댓글들이 재미있죠??
 

 

확대해석의 경연장

담덕29

 

이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유심히 보니 추천을 많이 받은 글일수록 확대해석의 경연장이다.

이 칼럼이 그렇게 편협하고 교육개혁에 대해 무지와 오류에 찬 글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맹목적인 사회엘리트 계층에 대한 반감차원에서 쓰여진 글도 아니다. 이 칼럼은 지극히 정상적인 상식선에서 쓰여진 글이다.

이 칼럼을 비판한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나는 무식해서 어려운 질문은 하지 못하니 대답을 한번 해보길 바란다.

미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세계2위의 대학이 서울대이다. 이것이 자랑스러운 일인가 덜떨어진 일인가?

내가 아는 상식에서는 학문에 대한 자존심이 있고 자기대학원과 교수 역량에 대해 믿음이 있는 대학이라면 어떻게든 외국에서 자기대학으로 유학을 오게 만들려고 애를 쓰지 자기대학사람들이 가게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기대학으로 외국사람들이 학문을 배우러 많이 온다는 자체가 '명문'이라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대학들은 그런 순위를 발표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대학을 나와 자기대학원에서 승부를 못보고 뭔가를 밖에서 배워와야 경쟁이 된다는 것은 내가 지금 있는 대학의 교수역량과 교육체계가 수준이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유학을 가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외국의 학문과 내용을 잘알 필요도 있고 선진학문을 통해 나와 국가의 발전을 꾀할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배알도 없는 사람들아 생각해보라. 서울대는 적어도 이 땅덩어리안에서는 엘리트라고 자칭타칭 부르는 대학이 아니었던가?

서울대가 아니라 다른 국내 대학이 미국대학에서 박사학위받은 세계2위라면 그나마 이해를 하겠다. 그런데 국내1위라는 서울대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미국대학으로 학위를 따러 갔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자랑스러운 뉴스인가?

서울대가 진짜 명문이라면, 서울대에 있는 교수들과 젊은 학생들이 진짜 실력이 있고 연구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라면 자기들이 만든 이론과 연구성과물로 미국대학을 누르고 오히려 그들이 서울대로 유학을 오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 서울대로 유학오는 미국학생들 아니 미국대학들이 있는가?

이래서 서울대교수들과 지방대교수들을 전부 자리이동 시켜도 서울대는 여전히 서울대이고 지방대는 지방대일뿐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도대체 서울대는 왜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서울대는 이 나라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서울대가 진짜 명문이라면, 이런 뉴스가 나왔을때 서울대 교수들은 전부 머리를 처박고 통곡을 해야한다. 애시당초 자존심도 없는지 조용한 것을 보면 과연 이 나라의 최고엘리트들답다.

한국에서 공부 제일 잘하는 학생들을 싹슬이해서는 단체로 외국대학으로 유학을 보내는 중간경유지 역할이나 하고 자빠져 있는 서울대..

아직도 대학이 무엇이고, 대학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도 감을 못잡아 정원축소하고 되지도 않는 논술이나 면접으로 학생들 '골라잡기'에만 혈안이 된 이 그럴싸한 대학의 총장이란 사람의 철학을 듣노라면 나는 암담해질 뿐이다.

그렇게 머리가 좋은 학생들을 뽑아 놨으면 하버드학생들이 유학을 오는 서울대로 진작에 만들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하버드 학생들이 서울대로 와서 학문을 배우고 있는가? 아니라면 왜 그들은 서울대에 와서 학문을 하지 않는가?

왜 한국의 서울대는 끊임없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가? 서울대에서 딴 석사나 박사학위는 쓰레기인가? 서울대에서 딴 석사나 박사학위로는 인정을 못받는가? 아니면 박사학위 여러개를 받아야 출세를 할 수 있기 때문인가?

하여간에 웃긴 것은 이 나라는 조금만 위에다 대고 비판을 하면 전부 열등감의 소산이거나 빨갱이들의 공격이라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뉴스를 보면서도 분노가 생기기는 커녕 칼럼자체를 수준이 낮다고 비판을 해대니 서울대의 웃기지도 않는 그들만의 무소불위 기득권이 사라질턱이 없다. 수능대박이면 인생역전이니 수능에서 단체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이렇게 배울 것 없는 대학이라도 들어가기만 하면 평생 놀고먹어도 나는 서울대출신이니까.

조만간 미국대학 유학순위 1위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차라리 그쯤되면 하버드 서울캠퍼스라고 불러야 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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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1-1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들 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짐작이 가네요. 가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 산다는게 깝깝합니다.
 

너무 많은 공장들
너무 많은 음식
너무 많은 맥주
너무 많은 담배

너무 많은 철학
너무 많은 주장
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공간
너무나 부족한 나무

너무 많은 경찰
너무 많은 컴퓨터
너무 많은 가전제품
너무 많은 돼지고기

회색 슬레이트 지붕들 아래
너무 많은 커피
너무 많은 담배연기
너무 많은 종교
너무 많은 욕심

너무 많은 양복
너무 많은 서류
너무 많은 잡지

지하철에 탄 너무 많은
피곤한 얼굴들
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사과나무
너무나 부족한 잣나무

너무 많은 살인
너무 많은 학생 폭력
너무 많은 돈
너무 많은 가난

너무 많은 금속물질
너무 많은 비만
너무 많은 헛소리
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침묵

 

- 아래는 알렌 긴스버그의 다양한 흔적(약간의 작품들과 인터뷰 등등)들을 볼 수 있는 싸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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