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남한에는 두 종류의 지젝 독자들이 있다. 한 부류의 독자들은 대중문화를 다루는 지젝의 절묘한 솜씨에 매료되어 있다. 사실 정부와 학계, 산업계와 언론계가 한 목소리로(이는 참 보기드문 일이다. 그러나 정말로?) 21세기는 문화산업의 시대이고, 우리의 살 길은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데 있다고 소리높여 합창하는 시기에, 지젝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문화적 소비대상이자 벤치마킹의 모델일 수밖에 없다. 난해한 독일 관념론 철학과 라캉의 이론이 발하는 아우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자상하게 문화를 향유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학계여 지젝을 본받으라!! 그리고 이미 지젝을 흉내내고 해설서까지 쓰는 학자들까지 생겼으니, 남한의 문화산업은 전도가 양양하다.
    다른 부류의 독자들은 전자와는 정반대로(그러나 정말로?) 지젝에서 급진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주체를 일방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무의식의 주체"를 주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알튀세르와 달리, 이데올로기를 "과학과 대립하는 것"으로 사고하지 않고(알튀세르에 관한, 정말로 지긋지긋한 영미식 토포스다! 이거야말로 이데올로기 그 자체다),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무의식적인 장소(또는 이데올로기의 실재계적 공백)을 발견하여, 이데올로기론을 새로운 정점으로 끌어올렸다고 한다(브라보!!). 어떤 부류의 독자들이 진정한 지젝의 독자들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그런데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나는 왜 역자가 제목을 이렇게 번역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오역도 바로잡을 겸 재판을 찍을 계획이 있다면, 그 때는 그 이유를 꼭 알려주었으면 고맙겠다)은 지젝의 원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이다.
    우선 헤겔을 비롯한 독일관념론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통달해 있는 전문 학자로서의 지젝의 면모가 있다. 실제로 그는 헤겔과 정신분석학으로 각각 학위를 하는 보기드문 지적 인내심을 보여주었다(그런데 왜 자크-알랭 밀레는 지젝의 논문을 자기 총서에 출판해주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그는 지젝을 자기 오른팔처럼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이런 지적 토대에 기초하여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자신의 이론적 과제로 제시하는 이론가 지젝의 모습이 있다. 이 과제는 푸코와 하버마스 사이의 근대성 논쟁의 배후 쟁점으로서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논쟁이라는 문제로 제기된다. 이 문제에 관한 지젝의 테제는 라캉은 욕망의 그래프를 4단계로, 또는 2층으로 제시할 줄 알았던 반면, 알튀세르는 1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곧 알튀세르는 호명 테제에만 그쳤을 뿐, 어떻게 호명을 넘어서는, 또는 호명을 벗어나는 주체가 존재할 수 있는지는 사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정말로? 지젝은 때로는 스스로 속는 척한다).
    그리고 대중문화 분석가, 향유자로서 지젝의 모습이 있다. 그가 유고 영상기록 보관소에 틀어박혀 탐닉했던 미국 영화들은 단순히 이론을 예시하기 위한 소재에 그치지 않고(그랬더라면, 지젝이 그렇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이론, 또는 진리의 증거 자체가 되어버린다. 어떤 이론, 어떤 진리? 물론 라캉의 이론, 라캉의 진리다. 따라서 지젝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젝 또는 라캉에 동일화되는 과정이며, 대중문화에서 이들의 이미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93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지젝이 자신의 문제, 곧 라캉과 알튀세르의 논쟁을 좀더 정교하게 전개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지젝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부정적인 것과 머물기], [이데올로기의 유령] 등에서, 자신이 이미 했던 이야기들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왜 그는 로베르트 팔러의 비판에 답변을 하지 않을까?).
    지젝이 대중문화에서 벗어나 급진정치 쪽으로 갈 수 있을까? 그가 과연 급진정치를 통해, 스스로 말하듯 라캉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또는 그는 이미 대중문화에 너무 깊이 중독된 게 아닐까? 그런데 이 질문들은 의미가 있는 질문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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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09-3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 잘 이해는 못했지만 추천은 하죠

balmas 2004-10-10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고마울 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