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 살의 철학 뉴아카이브 총서 8
미셸 앙리 지음, 박영옥 옮김 / 자음과모음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자음과 모음] 여름호에 실릴 서평을 한 편 올립니다.

 

국내에는 다소 생소한 미셸 앙리라는 현상학자의 저서에 관한 서평입니다.

 

이 글 역시 아직 교정이 끝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이나 토론은

 

[자음과 모음] 여름호에 실린 글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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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셸 앙리(1922~2002)는 프랑스 현상학의 최후의 대가라고 할 만한 사람이다. 독일의 에드문트 후설에서 시작되고 마르틴 하이데거와 막스 셸러 등을 통해 활력을 얻은 ‘현상학 운동’은, 하버마스가 지적한 것처럼(󰡔탈형이상학적 사유󰡕), 그 이후 오히려 프랑스에서 독창적인 계승자를 얻게 된다. 장 폴 사르트르와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실존주의적 현상학,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의 현상학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적인 현상학 운동의 모습들이라면, 미셸 앙리는 프랑스 현상학이 여전히 창조적 쇄신의 능력을 잃지 않았음을 입증해주는 가장 최근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앙리의 저작은 프랑스에서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들었으며, 독일이나 미국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앙리의 저작 거의 대부분이 영어로 번역되어 있고, 앙리에 관한 연구서나 논문집도 여러 권 나와 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따라서 다소 늦기는 했지만, 󰡔물질 현상학󰡕과 󰡔육화, 살의 철학󰡕의 번역을 계기로 국내에도 이 독창적인 현상학자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논의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서평의 대상이 된 이 책은 앙리의 저작 중 말년에 속하는 책이다. 󰡔현시의 본질󰡕(1963)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통해 독자적인 사상의 기틀을 마련한 앙리는 󰡔신체의 철학과 현상학󰡕(1965), 󰡔물질 현상학󰡕(1990) 같은 현상학적인 저작 이외에도, 󰡔마르크스󰡕(1976)나 󰡔정신분석의 계보학󰡕(1985), 󰡔내가 진리다: 기독 철학을 위하여󰡕(1996) 같은 저서를 통해 고유한 의미의 현상학적인 철학의 영역을 넘어, 사회철학, 정신분석 및 기독교 신학의 영역까지 자신의 사유를 확장해갔다. 따라서 󰡔육화, 살의 철학󰡕은 국내의 독자들이 앙리의 원숙한 사상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2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상학의 전복”이라는 제목이 붙은 1부에서는 살의 현상학의 관점에서 후설과 하이데거 현상학의 한계를 밝히고 있다. 2부인 “살의 현상학”에서는 좀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근대 과학을 개시한 갈릴레이적 환원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신체(corps)와 구별되는 살(chair)의 개념에서 찾고 있다. 마지막 3부인 “육화의 현상학-기독교적 의미의 구원”에서는 살의 현상학을 바탕으로 기독교적 구원 개념에 대하여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육화’라는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기독교 신비의 핵심을 이루는 육화의 문제를 현상학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살이라는 앙리의 현상학적 개념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또한 근본적으로 현상학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대담한 철학적 도전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현상학을 통해 현상학을 넘어서기. 둘째, 육화라는 기독교 신비의 핵심을 신앙의 대상이 아닌 심오한 철학적 통찰로 이해하기.

 

자신의 도전을 정당화하고 완수하기 위해 앙리는 우선 신체와 살의 구별에서 논의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신체가 “길가의 돌멩이” 같은 우주의 타성적 물체 등을 가리킨다면, 살은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을 스스로 겪는 우리의 신체”(13쪽)를 뜻한다. 우리의 살은 “스스로 자기를 느끼고, 고통을 견디고, 자기를 감내하고, 자기를 짊어지며, 항상 다시 태어나는 인상들을 따라서 자기를 향유하는 것”(13~14쪽)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구별은 매우 현상학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현상학을 전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상학적인 이유는, 이러한 구별이 신체에 대한 살의 우위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앙리의 구별은 후설 이래로 다른 현상학자들이 전제하듯이 초월론적인 것으로서의 주관에 근거하여 객관적 질서, 과학적 질서의 가능성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앙리에게 이러한 주관의 핵심은 의식이나 현존재, 심지어 무의식이나 신체도 아니고 “살”이다. 이러한 살의 개념은 “철학자들에 의해 전혀 성찰되지도 않은 마르크스의 한 진술에 의하면 사유는 삶의 양태”(175쪽)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앙리가 시도하는 현상학적 전복 또는 전회에 의하면 “더 이상 우리에게 살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사유가 아니며 반대로 사유가 자기에 접근하는 것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느끼고 견디는 것을, 그리고 결국 사유가 매번 자기인 바의 것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삶, 즉 cogitatio의 자기-계시이다.”(174쪽)

 

이러한 입장에 기초하여 앙리는 나타남과 나타나는 것 사이의 구별에 입각한 후설과 하이데거 현상학의 한계를 비판한다. 두 사람의 한계는 나타남을 “세계의 나타남”으로, 곧 탈-자(ek-stase)의 가시화의 순수 지평으로 간주하고, 이에 따라 나타남과 나타나는 것 사이의 무관심한 관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앙리는 후설이나 하이데거가 묻지 않은 “인상 그 자체의 나타남”(96쪽), 즉 “인상의 기원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러한 기원을 “고통의 자기-촉발(auto-affection)”(116쪽)에서 찾는다. 이러한 ‘고통을 느낌’은 후설의 이른바 ‘수동적 종합’에 선행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바로 “삶의 자기 안에의 도래”가 성립하게 된다. 왜냐하면 “삶은 자기와의 차이남이 없이 자기를 느끼고 견디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본래적이고 순수한 “정감성(affectivité)”(121쪽)으로서의 이러한 자기를 느끼고 견딤에서 “절대적인 삶의 자기-증여 과정”(182쪽)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학의 전복은 두번째 도전으로서 육화의 계시에 대한 재해석과 연결된다. 이러한 재해석은 사도 요한의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는 진술 및 “말씀이 살이 되었다”(16쪽)는 진술의 수수께끼에서 출발하여, “신의 인간-됨, 말씀의 살-됨으로서 그리스도와 같은 누군가는 가능하며 최소한 생각될 수 있는가?”(34쪽)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색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앙리는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의 가상들이 부딪히게 되는 한계로서 “절대적인 무-능”, “모든 힘보다 오래된, 그것에 내재하는 무-능에 대한 결정적인 직관”(327쪽)에서 출발하여 진정한 자유를 “정념적인/수난적인 소여”(345쪽)로서의 살의 경험에서 발견한다. 이때 “창조는 더 이상 자기 밖에 외적인, 분리된 실존의 이름으로, 그 자체 자율적인 것으로 향유하는 한 실체(entité)의 정립을 의미하지 않는다.”(345쪽) 오히려 창조는 “절대적인 삶의 자기-생성 안에서, 그것의 그치지 않는 도래 안에서만 자기에 도래하는 것의 생성을 의미한다.”(346쪽) 이렇게 “창조의 개념을 생성의 개념으로 대체”(426쪽)하면서 앙리는 삶에 대한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수동성을 의미하는, 따라서 모든 초월성이 배제된 수동성을 뜻하는 “초월론적 정감성”(427쪽)을 “우리의 초월론적인 탄생, [신의-인용자 추가] 자식으로서 우리의 조건”(428쪽)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앙리에 따르면 “모든 초월론적인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이 삶의 자기-계시를 가리키는 것”(482쪽)이 바로 말씀의 육화이다.

 

3

 

앙리의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책은 500쪽이라는 책의 분량이 적게 느껴질 만큼 아주 조밀하고 응축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무언가 우리 삶의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독자들이 받게 된다면, 그것은 (프랑스 현상학 특유의 강점이지만) 앙리가 욕망과 사랑, 불안, 고통, 부조리에 대한 감정 같은 인간의 일상적 경험 끊임없이 참조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앙리의 치밀하고 독창적인 사유를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평자는, 번역서 옆에 놓아둔 불어 원서를 거의 들춰보지 않았다. 그만큼 이 책은 꼼꼼하면서도 유려한 우리말로 잘 번역이 되어 있다. 역자의 값진 노고 덕분에 독자들은 프랑스식 현상학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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