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지방화하기 - 포스트식민 사상과 역사적 차이 프리즘 총서 15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지음, 김택현.안준범 옮김 / 그린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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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출신의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트의 [유럽을 지방화하기]가 "프리즘 총서"  15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마이페이퍼"에서 소개할까 했는데, 마침 한국일보에서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요청해서

 

한국일보 서평 원고로 이 책의 소개를 대신하겠습니다.

 

중요한 문제의식과 독창적인 개념화, 빼어난 문체 등이 어우러진 차크라바르티의 걸작이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읽히고 논의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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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초판이 출간된 인도 출신 역사가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아직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단언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이미 고전이 되어가고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이미 10여개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수많은 서평과 논평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 책이 해체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유럽 대륙 내부에서 유럽을 탈식민주의의 시각에서 파악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간된지 불과 15년만에 이 책이 이처럼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1980년대 초 일군의 인도 역사가들이 시작한 서발턴 연구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다. 서발턴(subaltern)이라는 말은 원래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회의 하층 계급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다. 그런데 라나지트 구하를 비롯한 서발턴 역사학자들은 이 용어를 일반화하여 엘리트 집단 이외의 모든 인도인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서발턴 역사학이란 역사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나타낼 만한 변변한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민초들의 역사를 기록하려는, 더욱이 그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려는 새롭고도 급진적인 역사학 기획이었다. 구하의 [서발턴과 봉기], 스피박의 [서발턴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등이 바로 이러한 기획을 대표하는 저작이며, 차크라바르티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유럽을 지방화하기] 역시 서발턴 역사학의 일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책의 제목이 “유럽을 지방화하기”일까? 유럽을 지방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여기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역사주의’라는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차크라바르티는 역사주의를 “모든 연구 대상은 그것이 실존하는 내내 통일적인 것으로 이해되며 세속적, 역사적 시간의 발전 과정을 통해 충분히 표현된다고 생각하는 역사에 관한 사유 양식”으로 정의한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세계 전체는 동일한 역사적 패턴에 따라 발전해왔고 또 계속 발전해간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을 특징짓는 것이 “먼저 유럽에서, 나중에 다른 곳에서”라는 구조다. 곧 산업화와 민주주의, 시민권, 인권 등이 먼저 유럽에서 생겨났으며, 유럽을 제외한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에서는 유럽이 이룩한 선진 문명을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서구 내지 유럽은 세계의 모든 문명이 뒤따라야 할 표준적인 모델을 제공해주는 셈이다. 차크라바르티에 따르면 유럽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해준 것이 바로 역사주의였으며, 식민지 체계가 종식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런 사유 방식은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역사에는 단일한 발전과정이 존재하며, 각 나라 및 문명은 이 과정에서 얼마나 앞서 있고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에 따라 그 수준의 정도가 평가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을 해체하려는 것이 바로 유럽을 지방화하기라는 제목이 뜻하는 바다.


 

  그러나 이것을 새로운 보편을 세우자거나 보편을 다수화하자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말하자면 유럽식 보편주의는 한물 갔으니 이제 아시아적 보편을 세울 때가 되었다, 이제 세계의 패권은 아시아로 넘어왔다는 식의 주장이 아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유럽식 역사주의를 모방하는 것에 불과할뿐더러, 헌팅턴 식의 문명충돌론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유럽의 사상 및 문명 전체를 거부하자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차크라바르티가 유럽을 지방화하기 위해 주로 의지하는 사상적 원천은 마르크스와 하이데거 및 푸코 같은 유럽의 사상가들이다. 중요한 것은 단일한 역사 발전 과정을 가정하는 관점을 해체하고, 각각의 문화, 각각의 나라, 각각의 지역에 고유한 역사적 삶의 독특성을 존중하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다.


 

  역사주의는 우리의 삶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정희 시절에는 조국 근대화라는 구호로 나타났고, 지금은 선진국 따라잡기라는 형태로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획일화된 도식이 얼마나 사람들의 삶을, 특히 자크 랑시에르가 말하듯 몫 없는 이들의 삶을 유린하고 있는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유럽을 지방화하기]의 궁극적인 전언은, 서발턴들의 독특한 삶의 역사들에 기반을 둔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테면 탈중심적 보편성, 해체적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화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차크라바르티는 역사가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고전 저작들은 물론이거니와 헤겔, 후설, 하이데거 같은 독일철학자들과 알튀세르, 푸코, 데리다 같은 프랑스철학자들의 저작들까지 두루 꿰고 있는 데다가, 인도의 역사와 사회, 문학 등에 관한 폭넓은 사료들을 원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서와의 대조 없이 술술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는 것은 두 번역자의 빼어난 능력과 힘겨운 노력 덕분이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라는 기획을 어떻게 우리의 역사와 현실 속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질문해보고 또 각자 답변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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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이 2014-10-09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갈 길이 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