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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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남한에는 두 종류의 지젝 독자들이 있다. 한 부류의 독자들은 대중문화를 다루는 지젝의 절묘한 솜씨에 매료되어 있다. 사실 정부와 학계, 산업계와 언론계가 한 목소리로(이는 참 보기드문 일이다. 그러나 정말로?) 21세기는 문화산업의 시대이고, 우리의 살 길은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데 있다고 소리높여 합창하는 시기에, 지젝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문화적 소비대상이자 벤치마킹의 모델일 수밖에 없다. 난해한 독일 관념론 철학과 라캉의 이론이 발하는 아우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자상하게 문화를 향유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학계여 지젝을 본받으라!! 그리고 이미 지젝을 흉내내고 해설서까지 쓰는 학자들까지 생겼으니, 남한의 문화산업은 전도가 양양하다.
    다른 부류의 독자들은 전자와는 정반대로(그러나 정말로?) 지젝에서 급진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주체를 일방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무의식의 주체"를 주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알튀세르와 달리, 이데올로기를 "과학과 대립하는 것"으로 사고하지 않고(알튀세르에 관한, 정말로 지긋지긋한 영미식 토포스다! 이거야말로 이데올로기 그 자체다),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무의식적인 장소(또는 이데올로기의 실재계적 공백)을 발견하여, 이데올로기론을 새로운 정점으로 끌어올렸다고 한다(브라보!!). 어떤 부류의 독자들이 진정한 지젝의 독자들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그런데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나는 왜 역자가 제목을 이렇게 번역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오역도 바로잡을 겸 재판을 찍을 계획이 있다면, 그 때는 그 이유를 꼭 알려주었으면 고맙겠다)은 지젝의 원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이다.
    우선 헤겔을 비롯한 독일관념론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통달해 있는 전문 학자로서의 지젝의 면모가 있다. 실제로 그는 헤겔과 정신분석학으로 각각 학위를 하는 보기드문 지적 인내심을 보여주었다(그런데 왜 자크-알랭 밀레는 지젝의 논문을 자기 총서에 출판해주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그는 지젝을 자기 오른팔처럼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이런 지적 토대에 기초하여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자신의 이론적 과제로 제시하는 이론가 지젝의 모습이 있다. 이 과제는 푸코와 하버마스 사이의 근대성 논쟁의 배후 쟁점으로서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논쟁이라는 문제로 제기된다. 이 문제에 관한 지젝의 테제는 라캉은 욕망의 그래프를 4단계로, 또는 2층으로 제시할 줄 알았던 반면, 알튀세르는 1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곧 알튀세르는 호명 테제에만 그쳤을 뿐, 어떻게 호명을 넘어서는, 또는 호명을 벗어나는 주체가 존재할 수 있는지는 사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정말로? 지젝은 때로는 스스로 속는 척한다).
    그리고 대중문화 분석가, 향유자로서 지젝의 모습이 있다. 그가 유고 영상기록 보관소에 틀어박혀 탐닉했던 미국 영화들은 단순히 이론을 예시하기 위한 소재에 그치지 않고(그랬더라면, 지젝이 그렇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이론, 또는 진리의 증거 자체가 되어버린다. 어떤 이론, 어떤 진리? 물론 라캉의 이론, 라캉의 진리다. 따라서 지젝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젝 또는 라캉에 동일화되는 과정이며, 대중문화에서 이들의 이미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93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지젝이 자신의 문제, 곧 라캉과 알튀세르의 논쟁을 좀더 정교하게 전개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지젝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부정적인 것과 머물기], [이데올로기의 유령] 등에서, 자신이 이미 했던 이야기들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왜 그는 로베르트 팔러의 비판에 답변을 하지 않을까?).
    지젝이 대중문화에서 벗어나 급진정치 쪽으로 갈 수 있을까? 그가 과연 급진정치를 통해, 스스로 말하듯 라캉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또는 그는 이미 대중문화에 너무 깊이 중독된 게 아닐까? 그런데 이 질문들은 의미가 있는 질문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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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09-3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 잘 이해는 못했지만 추천은 하죠

balmas 2004-10-10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고마울 데가 ...
 
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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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폭력의 세기>는 흔치 않은 깊이를 지닌 책이다. 적은 분량이지만, 권력과 폭력 같은 정치학의 기본 개념들에 대해 깊이 있고 참신한 논의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반면 이 책의 번역은, 심각한 오역이 문제되는 건 아니지만, 영어의 통사 구조를 그대로 옮긴 게 여실히 드러나는 전형적인 번역투 문장들로 되어 있어서 읽기가 매우 불편하다). 아렌트의 논지는 (1)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인 개념들이지만, (2)서양 정치학의 한 전통으로부터 양자를 같은 것으로, 또는 적어도 동류의 것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생겨났으며, 이는 결국 20세기에 폭력 혁명론의 예찬자들을 낳게 되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렌트가 보기에 폭력은 본성상 도구적인 것이며, 폭력은 어떤 부당한 압제나 횡포에 맞서 행사되었을 때 정당화될 수 있다. 즉 폭력이 유일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는 부당하게 실행된 권력에 대해, 다른 어떤 대용물이 아니라 바로 그 권력을 응징하고 바로 잡기 위해 행사된 경우다. 반대로 권력은 [제휴해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상응](74쪽)하는 것으로 정의되며, 따라서 집단성을 특징으로 갖고 있다. 하지만 권력의 좀더 중요한 특징은 정당화를 요구하는 폭력과 달리 정당성(legitimacy)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즉 폭력은 사후적인 결과들에 따라 정당화되거나 정당화되지 않지만, 권력은 정치적 공동체의 기원에서 자신의 정당성의 원천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예컨대 제헌의 행위와, 쿠데타 또는 반혁명의 행위는 엄격하게 구분됨을 의미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 정치, 특히 20세기 정치의 문제점은 권력과 폭력의 이러한 본질적 차이가 망각되고 은폐되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는 16세기 절대주의 권력론 이래 근대 정치철학은 정치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 이해하고, 권력 역시 [조직되고 합법화된 폭력]으로 간주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관점은 정치와 권력에 대한 유일한 관점도 바람직한 관점도 아니며, 오히려 좀더 근원적이고 심오한 이해 방식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형성하는 공적인 참여 행위로 권력을 이해하는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적 경험, 그리고 18세기의 미국 혁명의 경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부에 제기되는 폭력혁명론의 위험은 폭력의 도구적 성격을 망각하고 폭력을 목적화한다는 데만 있지 않다. 아렌트에 따르면 폭력혁명론의 진정한 위험은 과학기술의 진보와 관료제의 확산에 따라 생겨난 [전쟁과 폭력의 자율화] 경향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이러한 경향을 저지하고 근절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더욱 부추기고 심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정치와 권력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적어도 문제의 위치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가 내리고 있는 결론이다.

아렌트의 매력은 서양의 철학 전통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복잡한 현실 문제들에 대해 명쾌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아렌트의 논의는 혁명적이거나 진보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읽는 이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또한 바로 이 때문에 아렌트의 논의는 보수적인 것은 아닐지 몰라도 지나치게 규범적인 방향으로 경도될 위험이 있다. 예컨대 이런 질문을 해보자. 폭력과 권력이 구분되는 [시점]은 어느 시점인가? [누가] 이 양자를 구분하는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헌의 행위와 쿠데타는 [언제], [누구]에 의해 구분되는가?

아렌트는 [과거시제]로 말하고 [적]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라는 인칭을 사용할 권리를 부당전제하고 있다. 이는 아렌트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미국혁명이라는 두 가지 위대한 정치적 전통이 지니는 규범적 힘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는 이 두 전통은 [현재의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또 오늘의 투쟁 속에서 [변용]되고 [변혁]될 수밖에 없음을 그가 얼마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20세기 후반이 탈혁명의 시대이며, 문제는 오래된 혁명의 전통을 [복원]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이 역시 하나의 폭력일 수 있음을. 따라서 경계는 권력과 폭력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권력 자체 내에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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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7-09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제목만 읽고서라도 추천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시는군요.
한나 아렌트....
한동안 무척 좋아했고(현재도 좋아하지만) 비판적으로 읽어내야 할 필요가 있는 작가란 점에서.... 매우 동의하는 바입니다. 추천 꾸욱....

balmas 2004-07-09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앞으로는 제목에 좀더 신경을 써야겠군요.
감사.^^

balmas 2004-10-24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좀 빨리 보시지~~ ^^
 
신학-정치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8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김호경 옮김 / 책세상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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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스피노자 하면 사람들은 보통 [윤리학]을 생각하지만, 스피노자는 서양정치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의 정치학 저술은 1670년에 독일의 유령출판사 이름을 달고 익명으로 출간된 [신학정치론]과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정치론](1676-1677)이 있다. 이 두 저작은 스타일이나 논변방식, 논의 내용 및 저술의 목적에서 매우 상이한 성격을 보여주지만, 스피노자 철학을 이해하는 데서나 근대 정치철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저작들이다.

1980년대 이후 네그리나 발리바르 등의 스피노자 연구서가 출간되면서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의 번역은 꼭 필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책세상에서 출간한 이 [신학정치론] 번역본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1) 이 책 맨 앞에는 번역 대본을 1670년판이라고 적어놓았다. 이는 매우 의심스러운 사실인데, 왜냐하면 이 판본은 희귀본이어서 한 권에 천만원이 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연구자들이나 주석가들, 또는 번역가들이 사용하는 판본은 이 판본이 아니라, 1925년 독일에서 칼 게파르트(Carl Gebhardt)가 편집해서 출간한 고증본 전집본이나 1884-85년 네덜란드의 반 블로텐과 란트가 편집한 판본이 대부분이며, 1670년 판본(및 그 이후 출간된 몇 개의 이본들)은 문헌학 연구를 위해 드물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역자의 번역을 보건대, 역자가 실제로 대본으로 삼은 것은 독일의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에서 라틴어-독어 대역본으로 출간된 책과 1991년 미국에서 출간된 새뮤얼 셜리의 번역본인 듯하다. 새 판을 찍을 때는 어느 판본을 사용했는지 좀더 정확히 밝혀야 할 것이다.

2) [신학정치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반부는 서문에서부터 15장에 이르는, 성서 해석과 관련된 부분이고, 후반부는 16장에서 20장까지의 정치학에 관한 부분이다. 그리고 전반부는 다시 서문에서 7장까지를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책세상 고전문고의 성격상 [신학정치론] 전체를 번역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책의 내용을 고려할 때 7장까지는 모두 번역했어야 마땅할 텐데, 이 책은 선별된 3장밖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다.

3) 역자가 라틴어본을 직접 번역했을 것 같지는 않다. 번역 문장을 볼 때 독일어본이나 영어본 문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을 학문적으로 평가해주기는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이 책을 구입하는 독자들은 스피노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기보다는 네그리나 들뢰즈 또는 알튀세르나 발리바르의 영향 아래 스피노자의 저작들을 직접 읽어보려고 하지만 외국어 판본으로 읽는 데는 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일 것 같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신학정치론]이 담고있는 내용을 얼마간 전달해 줄 수 있는 이 책은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별 세개의 평점을 주었다.

[신학정치론]은 번역하기는 매우 어려운 책이지만, 잘 번역된 판본으로 읽는다면 매우 흥미있고 매력있는 저작이다. 아쉽게도, 이른 시간 내에 이 책의 국역본이 출간되기는 어렵겠지만, 언젠가 잘 번역이 된다면, 스피노자의 사상만이 아니라 근대 사상 전반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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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 혁명 - 프로이트의 삶과 저작
마르트 르베르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마르트 로베르는 프랑스의 저명한 독문학자로, 문학과 정신분석에 관한 주목할 만한 저작들을 여럿 발표한 사람이다. 푸코는 자신의 문학비평에서 자신이 로베르에게 많은 이론적 빚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로베르의 이론적 역량과 위상을 잘 보여주는 한 사례다.

프로이트 전집의 발간과 지젝 등의 작업이 소개되면서 국내에서도 점점 더 정신분석에 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음에도, 로베르의 이 책이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1964년 이래 이 책은 프로이트에 관한 개론서 중에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저술 중 한 권으로 평가받아 왔으며, 또 그럴 만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 라디오방송을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매우 평이한 문체로 쓰여 있으며, 내용 역시 프로이트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그의 학문적 작업과 지적 교류, 일상적 삶을 서술하고 있어서, 프로이트 사상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프로이트의 사상의 발전과정을 충실히 따라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로베르는 프로이트를 일종의 성인으로 간주하여 숭배와 찬양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로베르는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책임을 안고 있고, 결혼할 돈이 없어서 오랫동안 약혼자를 기다리게 만들고 있으며, 학문적 성공에 목말라 있는 유대인 출신의 젊은 학자인 프로이트가 상황의 압력과 학문적 고뇌를 겪으면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가는 과정을 사실적이면서 매우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 결과 독자들은 프로이트라는 한 유대인 학자의 삶과 사상을, 마치 대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재미와 함께, 충실하게 읽어낼 수 있다.

로베르의 문체 자체가 유려한 데다 번역도 잘 되어 있는 편이어서(다만 프로이트 원전 인용문들 중 일부는 오역이어서 내용이 잘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큰 어려움 없이 읽히는 것도 이 번역본의 장점이다. 프로이트의 삶과 사상을 알아보려는 모든 독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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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12-06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퍼갈께요. 꾸벅~^^

balmas 2004-12-06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세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불량배들 - 이성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
자크 데리다 지음, 이경신 옮김 / 휴머니스트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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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 책 <불량배들>이 국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이 책은 올해 초에 나왔고, 따라서 출판사에서 저작권 계약을 하고 역자 섭외를 하는 일 등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한다면, 이 번역본의 출간은 불과 4-5개월만에 번역이 끝났다는 것을 뜻하는데, 데리다의 극도로 미묘한 글쓰기를 생각할 때 과연 번역이 충실할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걱정은 끔찍하게도 사실로 드러났다. 나는 지금 책을 사서 불과 30여쪽을 읽었지만, 일일이 밝히기가 민망할 정도로 책의 첫부분부터 터무니없는 오역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프랑스 철학 전공자(그것도 프랑스에 유학중인)가 한 번역이라 혹시 했지만, 이건 정말 해도 너무 하다 싶을 만큼 이 책은 오역으로 점철되어 있다. 근거없는 중상이라는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몇 개의 예만 들어보자.

9쪽 번역문: “그녀가 개시하여 말하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비록 그녀가 나르시스의 “오라!”를 반복하며, 나르시스의 어떤 말의 메아리로 울린다 할지라도 첫번째로 호소한다.”
Elle dit de façon inaugurale, elle déclare son amour, elle appelle pour la première fois, tout en répétant le "Viens!" de Narcisse, tout en se faisant l'écho d'une parole narcissique.
수정 번역문: “그녀는 나르시스의 “나오라!”를 온전히 반복하면서도, 자신을 온전히 나르시스의 말의 메아리로 만들면서도, 자신이 최초로 말하듯이 말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호소한다.”
   이는 데리다가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나오는 에코와 나르시스의 이야기를 끌어들여, 에코가 나르시스의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지만, 이 되풀이의 행위 자체에서 새로운, 따라서 최초로 일어나는 어떤 것,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음을 밝히는 구절이다. 그 다음 번역을 보자.

번역문: “내가 여기서 이 “변형들”을 보충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이 유명한 장면 속에서 모든 것이 어떤 “도래할” 호소 주위를 선회하기 때문이다. 또 매번 새로이, 차례로, 이번을 마지막으로 줄곧 “도래하고” 있는 것이 “도래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곳에서 예측불가능한 것과 반복이 교차할 때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강력하게 주장되고 있는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Si je parais insister ici avec complaisance sur ces Métamorphoses, c'est que tout tourne, dans cette fameuse scène, autour d'un appel à venir. Et que c'est là, au croisement de l'imprévisible et de la répétition, en ce lieu où, chaque fois de nouveau, tour à tour, une fois pour toutes, on ne voit pas venir ce qui reste à venir, le motif le plus insistant de ce livre(p. 11).
수정 번역문: “만약 내가 여기서 자기만족에 빠져 『변신』의 이 대목에 집착하고 있는 듯 보인다면, 이는 이 유명한 장면에서 모든 것은 나오라는 호소/도래에 대한 호소/도래할 호소[appel a venir-이는 적어도 이 세 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주위를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 예견 불가능한 것과 반복이 교차하는 곳에, 매번 새롭게, 차례대로/돌고 돌아서(tour a tour), 마지막으로 한 번, 도래할 것으로 남아있는 것이 도래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이 장소에, 이 책의 가장 집요한 동기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32쪽 번역문: "영불 해협 너머, 그리고 대서양 너머에 있는 몇몇 사람들은 스리지에서의 decade 기간을 위해 등록하는 것조차 주저하게 되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리지에서 단번에 10년 동안 체류해 이야기하면서 무엇보다도 어떤 불량배의 말을 들어야만 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자신들의 그리스어와 라틴어, 즉 decade를 잊어버린 채 안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J'imagine que certains, outre-Manche et outre-Atlantique, hésitent encore à s'inscrire pour une décade à Cerisy parce qu'ils craignent de devoir y séjourner, y parler et surtout y écouter quelque voyou d'un seul trait pendant dix ans. C'est qu'ils en perdent leur grec et leur latin: décade, qu'ils se rassurent, ...(p. 20)      
  수정 번역문:  “영불 해협 너머, 그리고 대서양 너머에 있는 몇몇 사람들은 스리지에서 한 번의 데카드 기간[10일]을 지내기 위해 등록하는 것조차 주저하리라고 상상해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경우 10년 동안 계속 스리지에 머물면서 이야기해야 하고, 특히 어떤 불량배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데카드라는 말의] 그리스 및 라틴어 어원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두려움일 뿐입니다. 그들은 안심해도 좋을 것이, ...”

32-33쪽 번역문: "그것은 rogue state에서 '불량국가'까지 최강자의 이성, 법, 법률, 법의 힘, 요컨대, 질서, 세계질서와 그것의 미래, '세계의 의미', 결국 장-뤽 낭시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아무튼 더 겸손하게 말해서 '세계'와 '세계화'라는 단어들의 의미에서 '불량국가'까지 나아갑니다."
De rogue State à "Etat voyou", il y va, rien de moins, de la raison du plus fort, du droit, de la loi, de la force de loi, bref de l'ordre, de l'ordre mondial et de son avenir, du sens du monde, en somme, comme dirait Jean-Luc Nancy, en tous cas, plus modestement, du sens des mots "monde" et "mondialisation."  
수정 번역문: "[영어의] rogue state에서 [불어의] 'Etat voyou'[이 양자는 모두 불량국가라는 뜻이다]로 나아가는 중에 문제가 되는 것은 최강자의 이성, 법/권리(droit), 법(loi), 법의 힘,요컨대 질서, 세계질서와 그 장래이며, 장-뤽 낭시라면 이렇게 말하겠지만, 결국 '세계의 의미'[이는 1993년에 나온 그의 저서 제목이기도 하다], 아무튼 좀더 소박하게 말한다면, '세계'와 '세계화'라는 단어들의 의미다."

34쪽 번역문: "제가 오래전부터 말씀드렸듯이 S.I.E.C.L.E라는 단어의 각 글자는 장차 어떤 특이한 모험―즉, 지식인들의 사회성, 교환, 협동, 장소들, 확장들―의 대문자 약호나 표시―우리는 이 점을 터득하고 있습니다―가 될 때 스리지가 지적인 삶의 한 세기를 위해 의미하게 될 바를 반세기의 현존을 넘고 관통해서 몇 주 후에 우리는 축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Depuis si lontemps, disais-je, puisque nous fêterons dans quelques semaines, par-delà et à travers un demi-siècle d'existence, ce que Cerisy aura signifié pour un siècle de vie intellectuelle, chaque lettre du mot S.I.È.C.L.E. devenant désormais, nous l'apprenons, le sigle ou l'enseigne d'une extraordinaire aventure: Sociabilités Intellectuelles Échanges Coopérations Lieux Extensions.(p. 21)  
  수정 번역문: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라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몇 주 뒤면 스리지가 [1952년 이래] 반 세기 동안의 존재를 통해,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앞으로 지적인 삶의 한 세기에 대해 의미하게 될 바를 축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스리지의] 세기siècle라는 단어의 각각의 철자, 곧 S.I.ÈC.L.E.는 하나의 비범한 모험을 가리키는 대문자 약호 내지는 표시가 되리라는 점을 우리는 깨닫고 있습니다. 곧 [스리지의] 세기는 지적인 사교와 교류, 협동의 확대의 장이었다고 말입니다.”

 53-54쪽 번역문:  “그리고 그는 자신이 계약적이라고 생각하는 신학적 형태를 띤 순수 수사학적 비유, 그 필요성이 제게는 훨씬 더 중요하고 심각해 보이는 그 비유와 더불어 그 장을 마치기 전에 그것이 행정권과 입법권의 조직에 있어 어떤 지시적 표현으로 보이는 것을 제공합니다.
‘민중은 신이 우주를 지배하듯 미국 정치계를 지배한다. 그들은 모든 것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모든 것은 그들로부터 나오고 그들에게 흡수된다.’라고 결론짓습니다.”
  Puis il donne ce qu'il tient pour une description démonstrative quant à l'organisation des pouvoirs exécutif et législatif, avant de clore son chapitre avec le trope d'une figure théologique qu'il croit conventionnelle et de pure rhétorique mais dont la nécessité me paraît beaucoup plus grave et sérieuse: "Le peuple, conclut-il règne sur le monde politique américain comme Dieu sur l'univers. Il est la cause et la fin de toutes choses; tout en sorte et tout s'y absorbe."
  수정 번역문: “그 다음 그는, 그 자신은 관례적이고 순전히 수사학적일 뿐이라고 믿고 있는―하지만 이러한 비유를 사용해야 하는 필연성은 제가 보기에는 훨씬 더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입니다―신학적 형태를 띤 비유와 함께 그 장을 끝마치기에 앞서(“인민은 신이 우주를 지배하듯 미국의 정치계를 지배한다. 그들은 만물의 원인이자 목적이다. 모든 것은 그들로부터 나오고 그들에게 흡수된다”라고 그는 결론짓습니다) 그 자신이 행정권과 입법권의 조직에 관한 논증적 기술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54쪽 번역문: “저는 긴 우회의 관점에서 목적과 아주 가까이에서 미국에서의 민주정치, 더욱 분명하게 말해서 민주정치와 미국이 제 주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아마 간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주 멀찌감치 떨어져서 알리기 위해 토크빌과 『미국에서의 민주정치에 관해서』에 그다지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으면서 인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Il me fallait citer Tocqueville sans trop attendre, et 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 pour annoncer de très loin que, au terme d'un long détour, tout près de la fin, on s'apercevra peut-être que la démocratie en Amérique ou, plus précisément, la démocratie et l'Amérique aura été mon sujet.(pp. 34-35)
  수정 번역문: "아마도 사람들은 오랜 우회적인 논의를 거친 다음 거의 결말 부분에 가서, 미국에서의 민주정치,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민주정치와 미국이 내 주제가 될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리라는 것을 아주 일찌감치 예고해 두기 위해, 저는 기다리지 않고 미리 토크빌과 『미국에서의 민주정치에 관하여』를 인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79쪽 번역문: “저는 아랍-이슬람적이라는 종종 악용되는 결합의 특징을 아랍적, 그리고 차례로 이슬람적이라고 말합니다.”
  Je dis arabe et tour à tour islamique pour éviter le trait d'union souvent abusif de l'arabo-islamique.(p. 51)
  수정 번역문: "아랍-이슬람적이라는 식으로 자주 악용되곤 하는 붙임표[하이픈, trait d'union]를 쓰지 않기 위해 저는 차례차례 아랍 그리고 이슬람이라고 말합니다."

  80-81쪽 번역문: “그 대신 정체 속에서, 적어도 문화 속에서 유태교적 신앙(단 한 나라가 있지요. 이스라엘입니다)이나 기독교적 신앙(...)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국가들, 그리고 또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의 종교문화로 말하자면, 식민지 이후의 혼성국가들 대부분은 오늘날 민주 국가로 자기 소개를 합니다.”(80-81쪽)
  En revanche, toutes les États-nations profondément liés, sinon dans leur constitution, du moins dans leur culture, à une fois juive(il n'y en a qu'un, Israël), ou chrétienne(...), mais aussi la plupart des États-nations  post-coloniaux composites quant à la culture religieuse, en Afrique(...), en Asie(...) se présentent aujourd'hui comme des démocraties(p. 52).
  수정 번역문: "반대로, 헌정 자체에서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문화에서 유대교적(여기에는 단 한 나라, 이스라엘만이 있습니다)이거나 기독교적인(...) 것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든 민족국가만이 아니라, 또한 여러 종교가 혼합되어 있는 문화를 지닌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대부분의 탈식민주의 민족국가들도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로 자신을 내세웁니다." 

  210쪽 번역문: “그것은 모든 국가에게 무력에 의존하지 않도록 권고하는 유일한 예외조항입니다.”
  C'est la seul exception à la recommendation faite à tous les États de ne pas recourir à la force.(p. 142)
  수정 번역문: "이것은 모든 국가에게 무력에 의지하지 않도록 권고하는 것에 반하는 유일한 예외 조항입니다."

  이 문장들은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오역문들 중 일부를 임의로 골라낸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에만 국한한다 해도, 만약 이 문장들이 제대로 된 한글 문장이고 내용이 이해가 간다면, 나는 내가 경솔했음을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이런 마당에 41쪽에서 ‘supplément’과 ‘itérabilité’를 ‘보충’과 ‘반복 가능성’으로 번역하고, 120쪽 이하에서 ‘singularité’를 ‘개별성’으로, ‘partage’는 ‘배분’으로 번역한 것 등을 문제삼는 건 오히려 사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솔직히 이제 나는 출판사들과 지식인들에게 화가 나기보다는 겁이 난다. 얼마나 더 많은 오역들이 있어야, 따라서 독자들과 책의 원저자들, 더 나아가 역자 자신들의 고통과 희생이 있어야, 이 끔찍한 오역의 되풀이가 끝날 수 있을까? 또 언제쯤 이런 식의 끔찍한 독자서평을 쓰지 않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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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6-03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지적에 대해 추천을 던집니다.
출판사와 번역가의 치졸함으로 인해 안 그래도 어려운 책들이 더 어려워집니다. ㅠ.ㅠ

balmas 2004-06-03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렇죠.
번역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떻게 됐든 번역을 맡았다면, 읽을 수 있는 번역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게 저만의 생각은 아닐 겁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번역할 수 있게 놔두든가요.
독자들이 봉입니까? 인문사회과학 책들을 사랑하고 돈주고 사보는 게 무슨 죄입니까? 네?

balmas 2004-08-06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통의 외침들이죠, 정말.

장팔이 2005-09-10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워케 프랑스말을 그리 잘하세요~
정말 부럽슴니다.... ^^

balmas 2005-09-11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장팔이님,
정말 불어 잘하는 분들이 보시면 비웃습니다. ^^;;;
제 불어는 어디 명함 내밀 실력도 못된답니다.
어쨌든 처음 뵙는 분 같은데 반갑습니다. 요즘은 제가 좀 바빠서
서재에 거의 들르지 못하는데, 나중에 좀 한가해지면 종종 들르세요. :-)

미지 2008-07-17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데리다 시선의 권리를 꼭 읽고 싶은데요, 선생님의 오역 지적을 보고 경악해서 구매를 포기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역투성이 번역본을 보며 고통받고 싶지는 않지만, 이 책은 꼭 읽고 싶거든요... 선생님 같으신 분이 왜 그런 중요한 책들을 번역하시지 않는지 의아합니다. 불어는 장님인데, 영역본은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