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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리엔트 ㅣ 이산의 책 24
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이희재 옮김 / 이산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가 겨냥하는 것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는 글로벌한 세계사, 세계 경제의 역사를, 근대 경제를 대상으로 서술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계사나 경제사에서 지배적인 유럽중심주의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는 은의 세계적인 유통 흐름이라는 구체적인 쟁점을 가지고 이 두 가지 목표를 수행하려고 시도한다.
문외한인 데다가 전공도 전혀 다른 사람이 세계적인 화제작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재미있게 책을 읽은 한 사람의 독자의 권리를 빌려 한 마디 해보고 싶다. {리오리엔트}는 비유하자면 {공산당 선언}에 가까운 책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 유럽 혁명(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잔뜩 기대에 부풀어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고 썼던 것처럼, 아마도 동아시아의 새로운 (재)발흥에 고무된 프랑크의 머릿속에도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세계체제라는 유령이”라는 문구가 소리 없이 맴돌고 있었을 법하다.
비유를 좀더 이어가자면, 마르크스(ㆍ엥겔스)는 완성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어쨌든 {자본} 1권을 출판함으로써(그리고 2, 3권을 편집ㆍ간행함으로써)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그저 허망한 허깨비가 아님을 입증했다. 그러나 프랑크는 ‘선언’은 했지만, 그 선언을 뒷받침해줄 만한 결정적인 저작은 미처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 프랑크의 솔직한 고백처럼 “이 책도 ‘분석’은 미진한 반면 ‘서술’에 너무 치중한 것이 사실이다.”(538쪽) 아마도 이 때문에 우리는 프랑크의 ‘서술’(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선언’과 ‘촉구’)에 약간의 흥분감을 느끼며 때로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끝내 ‘그렇지만 ...’이라는 망설임과 회의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사실 {리오리엔트}의 주장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웬만한 지지자나 동조자가 아니고서는 선뜻 그의 주장들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토인비, 폴라니, 파슨스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마르크스와 베버 및 브로델이나 월러스틴도 모두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람들이며, 따라서 19세기 이후 서양의 사회과학자들 중 거의 누구도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역으로 말하면 그의 세계체제론은 적어도 지난 2세기 동안의 (따라서 사실은 그 역사 전체에 해당하는) 서양 사회과학 전체를 뒤집어엎으려는 대담한 시도인 셈이다.
하지만 이 대담한 시도를 위해 프랑크가 제시하는 논거들은 너무 불충분하고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인상, 적어도 너무 간단하거나 단조롭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특히 프랑크가 제시하는 콘드라티예프 장기 순환설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다. 그에 따르면 청동기 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세계 체제에 되풀이해서 작용해온 경기 순환의 사이클은 마치 세계 체제 내의 각 부분 경제들의 발흥과 몰락, 재발흥을 설명하는 유일한(적어도 궁극적인) 원인인 것처럼 보인다. 다음과 같은 대목이 특히 그렇다. “결국 1800년을 전후하여 아시아가 유럽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것은 전반적으로 빈곤해서도 아니었고 전통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었고 무슨 대단한 실책을 저질러서도 아니었다. 마르크스식이면서 슘페터식의 어법을 빌리자면 실패의 근원은 성공에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 각국의 경제가 밀리게 된 것은 그때까지 아메리카에서 유입되는 화폐를 자금으로 삼아 18세기 상당 기간동안 지속되었던 장기 ‘A’국면적 팽창으로 조성된 경제적 인센티브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데 있었다.”(488-89쪽)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고 주장했다면 프랑크는 “인류의 역사는 장기순환의 역사다”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마치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의 경제사적인 판본처럼 들린다. 곧 지역적인 경제 현상들의 작용 이면에는 세계체제의 장기 순환이라는 신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프랑크가 이 책에서 전체론적인 관점을 일관되게 역설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프랑크는 지칠 줄 모르고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임을 주장한다. 이는 나무들에 몰두하느라 숲을 보지 못하는 다른 ‘국지적인’ 역사가들에 대한 비판이자 진정으로 ‘글로벌한’ 세계사를 구성하려는 그의 궁극적인 방법론적 원칙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랑크가 보지 못한 것(또는 일부러 외면하는 것)은 전체론은 결국 환원론에 빠지기 쉽고 환원론은 역사를, 헤겔이 말했듯이 “모든 소가 검게 보이는 밤”처럼 그려낼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그 역사에서는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이 장기순환이라는 신의 몸짓의 표현들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너무나 황량한 풍경일 것이다.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혔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계급투쟁을 역사의 동력으로 설정함으로써 역사 과정의 변화에 대한 가능성이나마 남겨두었다면, 그 유럽중심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하는 프랑크가 레오폴트 랑케(그는 이 책에서 비판받지 않는 유일한 19세기 사상가인 것으로 보인다)의 문구가 일종의 기독교 신학의 세속화된 판본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