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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치론 ㅣ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8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김호경 옮김 / 책세상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스피노자 하면 사람들은 보통 [윤리학]을 생각하지만, 스피노자는 서양정치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의 정치학 저술은 1670년에 독일의 유령출판사 이름을 달고 익명으로 출간된 [신학정치론]과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정치론](1676-1677)이 있다. 이 두 저작은 스타일이나 논변방식, 논의 내용 및 저술의 목적에서 매우 상이한 성격을 보여주지만, 스피노자 철학을 이해하는 데서나 근대 정치철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저작들이다.
1980년대 이후 네그리나 발리바르 등의 스피노자 연구서가 출간되면서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의 번역은 꼭 필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책세상에서 출간한 이 [신학정치론] 번역본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1) 이 책 맨 앞에는 번역 대본을 1670년판이라고 적어놓았다. 이는 매우 의심스러운 사실인데, 왜냐하면 이 판본은 희귀본이어서 한 권에 천만원이 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연구자들이나 주석가들, 또는 번역가들이 사용하는 판본은 이 판본이 아니라, 1925년 독일에서 칼 게파르트(Carl Gebhardt)가 편집해서 출간한 고증본 전집본이나 1884-85년 네덜란드의 반 블로텐과 란트가 편집한 판본이 대부분이며, 1670년 판본(및 그 이후 출간된 몇 개의 이본들)은 문헌학 연구를 위해 드물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역자의 번역을 보건대, 역자가 실제로 대본으로 삼은 것은 독일의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에서 라틴어-독어 대역본으로 출간된 책과 1991년 미국에서 출간된 새뮤얼 셜리의 번역본인 듯하다. 새 판을 찍을 때는 어느 판본을 사용했는지 좀더 정확히 밝혀야 할 것이다.
2) [신학정치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반부는 서문에서부터 15장에 이르는, 성서 해석과 관련된 부분이고, 후반부는 16장에서 20장까지의 정치학에 관한 부분이다. 그리고 전반부는 다시 서문에서 7장까지를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책세상 고전문고의 성격상 [신학정치론] 전체를 번역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책의 내용을 고려할 때 7장까지는 모두 번역했어야 마땅할 텐데, 이 책은 선별된 3장밖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다.
3) 역자가 라틴어본을 직접 번역했을 것 같지는 않다. 번역 문장을 볼 때 독일어본이나 영어본 문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을 학문적으로 평가해주기는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이 책을 구입하는 독자들은 스피노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기보다는 네그리나 들뢰즈 또는 알튀세르나 발리바르의 영향 아래 스피노자의 저작들을 직접 읽어보려고 하지만 외국어 판본으로 읽는 데는 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일 것 같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신학정치론]이 담고있는 내용을 얼마간 전달해 줄 수 있는 이 책은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별 세개의 평점을 주었다.
[신학정치론]은 번역하기는 매우 어려운 책이지만, 잘 번역된 판본으로 읽는다면 매우 흥미있고 매력있는 저작이다. 아쉽게도, 이른 시간 내에 이 책의 국역본이 출간되기는 어렵겠지만, 언젠가 잘 번역이 된다면, 스피노자의 사상만이 아니라 근대 사상 전반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