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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 동문선 현대신서 97
베르트랑 오질비 지음, 김석 옮김 / 동문선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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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부터 미국에서 부는 지젝 열풍이 남한에도 고스란히 날아와(이는 너무 당연한 결과지만, 또 너무 진부하고 부끄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이제 국내에서도 라캉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라캉 자신의 저술(곧 책이나 논문)이 한편도(!) 국역되어 있지 않은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참 놀라운 현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는 그만큼 라캉의 저작이 하루빨리, 그리고 신뢰할 수 있게 번역되기를 바라는 여러 독자들의 열망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라캉에 관한 연구의 고전 중 하나로 꼽힐 만한 오질비의 책이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이렇게 사장되어 가는 것은 한 사람의 독자로서 참 아쉬운 일이다. 이는 아마도 오질비가 이 책 이외에는 단행본 저작을 내지 않은 데다 발표한 글들도 매우 적은 편이어서 미국에 별로 소개되지 않았고, 그래서 라캉에 관심이 많으신 여러 연구자들(대개 영미문학 전공자들이고, [아마추어] 정신분석가들이 몇몇 섞여 있는)들 역시 당연히(?) 이름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저간의 사정 때문이리라.

오질비는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영미권에도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프랑스의 좌파/구조주의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매우 높이 평가받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고등사범학교에 2002/2003년 학기부터 설치된 [현대 프랑스 철학 연구 센터]에서 그가 알랭 바디우, 이브 뒤루 등과 함께 강좌를 맡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주는 한 사례다. 그리고 그는 올해 나온 발리바르의 책(L'Europe, l'Amerique, la guerre)에서 발리바르와 '우정어린' 논쟁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오질비의 이 책은 그의 철학적 역량을 잘 보여주는 책인데, 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오질비의 책은 소위 정통 라캉주의자인 자크-알랭 밀레류의 해석에서 벗어나 라캉의 정신의학 박사학위 논문에서부터 1949년 라캉이 발표한 [거울 단계] 논문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라캉의 이론을 탐구하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1960년대 말-70년대 초의 소위 마템에 기초한 후기 라캉 중심의 해석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이며, 따라서 벌써 영미권에서 정형화되기 시작한 정통 라캉주의적 해석과 다른 관점에서 라캉을 읽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해준다.

2) 하지만 오질비는 단순히 1933-1949년까지의 라캉의 저술에 한정하지 않고, [에크리]만이 아니라 라캉의 후기 저술, 예컨대 [정신분석의 네 가지 기본 개념](1964)의 쟁점들이 어떻게 이 시기의 라캉의 작업 속에 함축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그는 캉귈렘의 과학사 연구나 푸코의 작업과 라캉의 작업을 비교함으로써, 1960년대 구조주의 진영 내부의 지적 쟁점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제공해 주고 있다.

3) 오질비의 문체는 매우 간결하고 명쾌하지만 또 한편으로 상당히 함축적이어서, 적은 분량 안에서 매우 많은 논의내용을 담고 있으며, 내가 보기에 이것들 대부분은 구조주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라캉의 이론, 더 나아가 구조주의 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오질비의 이 책은 필독서라 해도 좋을 것이다. 번역은 전반적으로 무난하고, 공들인 역주도 책을 읽는 데 상당히 도움을 준다. 하지만 두어 군데 오역이 있고, 몇군데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점들은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무책임한 오역과 날림 출판으로 악명높은 출판사에서 이 정도 수준의 번역서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출판사의 책이라면 다시는 사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독자들도 한번 이 책은 믿고 구입해 볼 만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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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pin 2005-04-13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절 읽었어요. 집중하니까 이해가 되긴 되네요.
그리고 뒤의 원주/역주는 철학적 지식이 부족한 저에게는 많이 도움이 되네요. 두고 궁금할 때마다 보면 좋겠어요.
예전에 읽은 책에서는 시니피앙, 시니피에를 능기네 소기네 하던데 이 책에서 처럼 그냥 그대로 시니피앙, 시니피에 하니까 더 낳은 것 같네요. 이해하기가요.
아무튼 라깡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책을 추천해 줘서 감사합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 - 타자를 향한 욕망
콜린 데이비스 지음, 김성호 옮김 / 다산글방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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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는 외국에서의 명성에 비하면 국내에는 널리 알려지지 못한 철학자다. 레비나스의 저서 중 두 권, 그것도 대표적인 저서로 보기는 어려운 저서들만 국역되어 있고, 국내 연구자의 저서 한 권과 몇 편의 연구 논문들이 국내의 레비나스 연구의 현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이 레비나스의 사상의 전체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후설 및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이를 넘어서려는 레비나스의 초기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해서 [전체와 무한](1961)에서 제시된 타자론이 [존재와 다른 것](1974)에서 윤리, 정치적인 영역으로 심화, 확장되는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요령있게 잘 제시해주고 있다.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은 레비나스의 사상이 다른 철학자들, 특히 데리다와의 논쟁 또는 토론을 통해 변모되어가는 과정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잘 제시해주고 있다는 데 있다. 레비나스의 복잡하고 난해한 사상을 일반 독자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체로 전달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은데, 이 책은 이런 점에서 성공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역자의 공들인 번역도 칭찬할 만하다. 몇군데 가벼운 오역이 눈에 띄긴 하지만, 유려한 우리말 문장으로 내용을 정확하게 잘 전달해주고 있다. 레비나스 사상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직접 레비나스의 저작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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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현대신서 40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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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영씨는 국내에 바디우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을 때, 바디우의 [철학을 위한 선언]을 번역하고, 이후에도 여러가지 경로로 바디우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온 학자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리학]의 번역은 좀 실망스럽다. 동문선 출판사에서 나온 다른 번역들에 비하면 비교적 나은 편에 속하고, 바디우에 관해 학문적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무난하지만, 이 번역서는 여러가지 세부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어서 학문적으로는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몇가지 사례를 통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이 책에는 identification/identifier라는 단어가 여러번 사용되고 있는데, 이종영씨는 이를 어떤 경우에는 <정체화>(16-17쪽)로, 어떤 경우에는 <식별>(18쪽)로, 어떤 경우에는 <일체화>(20쪽)로 번역하고 있다. 원문의 같은 단어를 이처럼 상이하게 번역할 경우에는 이 다양한 번역어가 원문의 같은 단어를 가리킨다는 점을 표시해두는 게 당연할 것이다. 더 나아가 16-17쪽의 <정체화>라는 번역은 라캉이 쓰는 의미에서 identification, 즉 상상적 정체성의 형성이라는 개념(30쪽에 나오는)을 염두에 둔 번역이지만, 16-17쪽의 맥락에서 이는 그저 <동일시>나 <일체화>를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아직 너무 '사소'한 문제다. 이 번역의 또다른 문제는 reconnaitre/reconnassance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역시 어떤 때는 <인정>(18)으로, 어떤 때는 <파악>(18)으로, 또 어떤 때는 <식별>(21)로 번역하고 있고, 그리하여 독자가 <식별>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 이 단어가 identification을 번역한 것인지 아니면 reconnassance를 번역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는 데 있다. 이런 경우 바디우의 논의가 담고 있는 학문적인 엄밀성이 살아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번역에는 다수의 오역들도 엿보인다. 예컨대 15쪽의 <명확하게 표명될>이라는 번역은 <형식적으로 표상될>이라고 번역해야 칸트 윤리학의 고유한 형식주의가 드러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16쪽의 <성찰적 주체>와 <결정하는 판단>이라는 번역은 칸트 철학의 고유한 주제 중 하나인 reflessiant과 determinant의 대비, 즉 <반성성>과 <규정성>의 대비를 알아차리기 어렵게 만든다. 또한 30쪽의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의 의식에 대해 '대상화'되었기 때문에 나에게 하나의 안정된 소여처럼, 그 외재성 속에서 주어진 내면성처럼 구성되는 거리를-둔-나-자신>이라는 번역은 <-나를 하나의 안정된 소여처럼, 그 외재성 속에서 주어진 내면성처럼 구성하는->이라고 번역해야 왜 identification이 <정체화>, 즉 허구적 정체성의 형성인지 이해가 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31쪽의 <그 유한성 속에서 나에게 드러나는 대로의 타자는, 그 넘어섬이 고유한 윤리적 경험일 순수하게 무한한 타자에의 거리의 현시여야만 한다>는 번역은 <유한자 안에서 나에게 나타나는 대로의 대타자는 고유하게 무한한 타자와의 거리의 현현이어야 하며, 이 거리를 넘어섬이 원초적인 윤리적 경험이다>로 번역해야 바디우의 진의가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식의 오역과 부주의한 번역은 이 책 도처에 나타나고 있는데(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는 능력 부족이라기보다는 부주의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더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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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4-09-13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다른 글도요.
정확히 어디에 문서가 있는지 기억은 안나는데 이 윤리학책번역이 이종영씨의 의도대로 출판이 안되고 출판사 자의로 출판되어 지금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종영씨 글중에서 읽은 기억인데 많은 부분 출판사 맘대로 뺄건빼고 출판된것으로 말하더군요.
하여간 많은 리뷰글 부탁하고 마이리스트보니 사두어야 될 책들을 알게되어 정말 고맙습니다.

balmas 2004-09-13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그런 이야기는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종영 선생이 번역한 다른 책들도 [윤리학]과 대동소이한 문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걸 보면, 꼭 번역의 문제점이 거기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은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종영 선생은 자신의 번역본(이나 저술)이 이런저런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수긍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한 것 같더군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좀더 꼼꼼하게, 좀더 정성을 들여서 번역하면 될 텐데 ...

balmas 2006-03-2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태원 씨,

첫째로, 알랭 바디우의 '윤리학'의 출판과정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그 책은 제가 교정을 한 차례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편집부에서 자의적으로 수정을 한 뒤 저에게 연락도 취하지 않고 출판된 책입니다. 저는 교보문고에서 그 책이 판매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책을 사서 내용을 훓어본 후 편집부에서 자의적으로 수정한 부분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곧장 출판사로 가서 책의 폐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밤을 새서 원래의 원고대로 책을 고쳐놓은 후(교정을 보았다기보다는) 출판사에게 새롭게 인쇄할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새로운 판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당시의 출판저널에도 실려 있고, 제가 이와 관련하여 교수신문에 '책의 자본주의적 운명'이란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폐기된 책을 가지고 저의 번역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진태원 씨가 지적한 번역문제에 대해 말해봅시다.

1) identification을 여러 용어로 번역했다고, 그래서 문제라고 하셨는데, 원래 identification은 여러 용법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s'identifier라고 할 때는 정체화이겠지만, identifier는 식별의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진태원 씨는 reconnaissance가 식별일 수 있다고 했지만, reconnaissance는 훨씬 가볍고 부정확한 의미로 쓰입니다. 한 용어의 쓰임을 그 용법에 따라 정확하게 파악해 주는 것이 번역자의 할 일이겠지요.

2) 15쪽의 "명확하게 표명될"에 대해서는 저처럼 번역해야 독자들에게 확실하게 전달되리라는 것은 물론이겠지요. 'formel'이란 단어의 불어 용법에 대해 진태원 씨가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진태원씨께서 다니시는 서울대의 김상환 선생님께 여쭤보시기 보랍니다.

3) 16쪽의 맥락에서 "열정적 또는 성찰하는 주체", "능동적이거나 결정하는 판단"에서 '성찰'을 '반성'으로, '결정'을 '규정'으로 번역하면 맥락에 잘 맞지 않겠지요. 한국에서 철학을 하면서 특정한 번역어를 중심으로 사고를 하셨겠지만, 불어로 사고를 할 때는 특정 저자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가 공유하는 '헤플레시상', '데테르미낭' 그대로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태원 씨께 전달이 될런지요? 불어 단어를 볼 때 진태원 씨 머리 속에 굳어진 국내 번역어에 자꾸 집착하시지 말란 것입니다.

4) 30쪽의 정체화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저처럼 번역해야 자기가 설정한 대상에 대한 상상적 정체화가 더욱 잘 드러나겠지요. 제가 역점을 두었던 것은 자기 내부에서 스스로를 대상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5) 31쪽의 번역에 대해서, '넘어섬'을 말하는 것이 '바디우의 진의'일 것임은 명확하겠지요. 진태원 씨께서도 좁은 지면에 길게 말씀하실 수는 없었겠지만, '바디우의 진의'를 진태원 씨가 어떻게 파악하셨는지 알 수 없군요.

셋째로, 진태원 씨가 알라딘 리뷰에 쓴 글의 의도에 대해 말해보고 싶습니다. 불어에 대해 판단능력이 없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불어단어들을 열거하시면서 스스로가 '학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번역'을 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그런 얘기는 판단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판단능력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는 것이 좋겠지요. 서로 서로를 고쳐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불어를 알지도 못하는, 아무런 판단능력이 없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단어들을 열거하면서, '봐라, 이것이 올바른 번역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분히 선동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태원 씨의 리뷰가 저에 대한 사적 감정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불어를 잘 아는 번역자들끼리 모일 기회가 없다는 것도 문제이긴 하지만요.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자기 이름을 드러내면서 책임질 수 있는 글을 쓰시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권력을 좋아하지 않고 진리만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진태원 씨께서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문제를 갖는 학자로 성장하시길 바랍니다.

이종영 드림.


balmas 2006-03-23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2002년 9월에 바디우의 [윤리학] 번역본에 대해 알라딘에

서평을 하나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그 책의 역자인 이종영 씨가 저에게

전화를 해서 제 서평에 대해 이견이 있다고 말을 하더군요. 처음에는 알라딘에 답글을

달려고 했는데, 회원 가입 절차가 번거롭고 개인 정보가 유출될까 미심쩍기도 해서,

전화로 이야기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길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길래, 차라리

메일로 반론을 적어 보내면 내가 답글로 올리겠다고 했더니, 메일을 한통 보냈습니다.

위에 올린 글은 이종영씨가 저에게 보낸 메일 그대로의 내용입니다.

(제가 이걸 강조하는 이유는 처음에 제가 메일로 보낼 것을 제안했더니, 저를 어떻게

믿냐고 반문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서 판단하시면 될 것이니까 긴 이야기는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종영 씨가 어떤 분인지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글이라고 봅니다.

이런 류의 치기어린 답변에 제가 굳이 답글을 달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종영 씨는 마치 제가 편집부에서 자의적으로

수정한 판본을 가지고 서평을 쓴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제가 서평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종영 씨가 항의한 이후에 새롭게 출판된 판본입니다. 이 점은 이종영 씨에게

전화상으로도 이야기했고, 동의를 얻은 것이니까 확실히 지적을 해두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왜 이종영 씨가 굳이 메일에 이 내용을

다시 써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


2008-06-21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망가진 5년 2012-02-06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 처럼 해야 맞겠지요",
잘못된 지적에 대해 지적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힌다면서 한다는 말이 이것밖에 없군.
나이는 먹을 만큼 먹고, 공부는 한 만큼 했으면서 이렇게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 할까.
좋아 스스로를 제대로 처다보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
"나처럼 해야 맞겠지요"
어디다 이런 엉성한 답글로 사기를 치려고 해.

손용탁 2012-08-12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위 선생님위 글중 '데테르미낭'이란 무엇을 뜻하는겁니까..
예문 ....
중국 논문을 번역한 조선족(교포분)이 이러한 문구를 적어 놓았습니다,
"블러드마그네티즘 치료법으로 자신의 병을 오게하는 데테르미냥을 제거하고 화학 합성 반응을 가속하여...."
란 글귀에서..... '데테르미냥을 제거하고' 란 무엇을 뜻하는지요
선생님의 고견을 .. 꼭 부탁드립니다

balmas 2012-08-13 19:58   좋아요 0 | URL
맥락을 잘 몰라서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댓글의 인용문에서 "데테르미낭"은 "결정 요인" 정도의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손용탁 2012-08-15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의 고견에 감사드림니다.

Lomain 2017-12-15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1쪽 번역에서, ‘무한한 타자에의 거리의 현시여야만 한다’는 번역이 타자와 갖는 거리의 무한을 언급하고 있는 거라면, 재번역된 ‘무한한 타자와의 거리의 현현이어야 하며, 이 거리를 넘어섬 원초적인 윤리적 경험’이라는 것은 타자와의 무한한 거리마저도 넘어서야 한다는 것, 또는 거리를 좁힌다는 걸로 읽힙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후술된 ‘그리스적 용법에서 벗어나서 일반성 속에서 포착’이라는 건 타자의 무한성의 일반성이 아닌 그 무한성을 넘어선? 또는 좁힌 일반성을 말하는 것인지요.

balmas 2017-12-15 23:56   좋아요 0 | URL
제가 지금 책을 갖고 있지 않아서, 답변을 당장 드리기가 어렵겠네요.
도서관에서 확인을 해보고 나중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가면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정한 외 옮김 / 이후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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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알튀세르의 외전(外傳)의 핵심을 이루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알튀세르의 관점을 집약해놓은 책이다. 사후에 유고집(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2, Stock/IMEC, 1995)에 미간행 원고 상태로 발표되었지만, 알튀세르 자신은 생전에 이를 하나의 저서로 출간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 책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고, 알튀세르 특유의 섬세한 글쓰기와 사고를 담고 있다.

문제는 국역본에 이런 섬세함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이는 국역본이 영역본을 대상으로 했다는 데서 비롯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 책의 역자들이 알튀세르의 사상, 특히 그의 유고들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60년대 말-70년년대 초의 알튀세르의 복잡다단한 사상의 변화과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하는 문제다.

한 마디로 이 번역본은 숱한 오역과 알튀세르의 개념들에 대한 부적절한 번역을 담고 있어, 국내 독자들이 알튀세르 사상의 진수 중 한 부분을 이해할 기회를 빼앗고 있다. 예컨대 번역본 26쪽의 '그것은 그에 앞서서는 다른 어떤 것이었지만, 이제는 조금도 그렇지 않은 것이다'라는 문장은 '이것[시작하는 것] 이전에 이와 다른 것이 존재했지만, 이것과 관련된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로 번역되어야 의미가 통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27쪽의 '나에게는 사물을 현실적 진리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 가상적으로 표상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겨진다'는 문장은 '내가 보기에는 사물에 대한 상상보다는 사물의 실제 진리로 나아가는 게 더 적합하다'로 번역되어야 왜 바로 다음 문장에서 알튀세르가 '이 정식은 사물의 실제 진리, 따라서 객관적 인식과 주관적이고 상상적인 표상을 대립시키고 있다'고 논평하는지 이해가 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저작권이 국내 출판계의 상업성을 한층 더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위 좌파 서적 전문 출판사가 알튀세르의 중요한 저서를 이런 식으로 번역해서 내놓는 것은 단지 학문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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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자크 데리다 지음, 김보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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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사람이다. 이 책은 약 5-6년 전에 읽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이렇게 형편없는 번역본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출판사나 역자, 독자, 또는 데리다를 위해서라도 이런 책은 이제 절판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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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4-11-09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짧은 서평에 발마스님의 분노가 마구마구 묻어나는군요!

제가 가장 분노했던 번역은 존 쿨리의 '추악한 전쟁'이었습니다. 성전(holy war)를 비꼬기 위해 'unholy war'라고 제목을 붙인 것을, 웃기는 번역자(라기보다는 독서방해자)가 '추악한 전쟁'이라고 해놨더군요. 추악한전쟁이라고 하면, 명백히 다른 개념인 '더러운 전쟁' 즉 dirty war를 연상케하는데, 번역자가 과연 그런 정도의 상식이라도 갖고 있었는지는 회의적입니다만. 이 책 읽다가 너무 열받아서 무려 출판사에 항의전화를 하기까지 했답니다. 그 뒤에 알라딘에 보니깐 다른분들도 모두 번역에 열받아서 한마디씩 올리셨더군요.

이 책 못잖게 황당했던 것은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이었는데요, 이거 번역하신 분은 실은 제가 개인적으로 뵌 적이 있는 분인데 참 좋은 분이세요. 친절하시고, 소박하시고. 그런데 문제는... '성격'으로 번역의 오점을 만회할 수는 없다는 거지요. ^^ 여러 복잡다단한 지역이 포함돼있긴 하지만 통틀어 '중동학계'라고 할 수 있는 분야가 존재하는데, 이 동네에서 저 책 번역자가 거의 매장될 분위기였다고 하더군요. 결국 출판사는 저 책 절판&재번역 결정을 내렸고요. 알려질대로 알려진 촘스키 저술을 저따위로 번역하는 것은 범죄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촘스키 책 중에서 일반 독자들이 읽기엔 너무 전문적인 저 책이, 9.11 직후에 붐을 타고 꽤나 팔렸다는 겁니다.

balmas 2004-11-09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이것도 그냥 댓글로 묻어두기는 아까운 말씀이네요.

제가 페이퍼로 정리해놓을까요???


이 때까지만 해도 제가 좀 점잖았답니다.
지금은 완전히 '악동'이 됐지만 ...;;;

Chopin 2006-10-14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웃깁니다.

기인 2009-03-13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발마스님. 한국에 Differance(1968 1. 27 강연ㅎ)라는 에세이가 번역된 것이 이 책외에는 없나요?
Differance 읽어봐야되는데, 역시 한국어본을 옆에 두고 읽어야 마음이 안정되는 -_-;
어쩔수 없는 국문학도라서요.. 혹시 다른 '곶'ㅋ 에도 이 글이 번역되어 실린 것이 있는지
여쭈어봅니다 :)
68때 발표들 흥미로운 것 같아요. 푸코는 What is an Author도 68에 발표더라고요. ㅎ

rei 2021-01-13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어이가 없는 번역이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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