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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ㅣ 동문선 현대신서 40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이종영씨는 국내에 바디우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을 때, 바디우의 [철학을 위한 선언]을 번역하고, 이후에도 여러가지 경로로 바디우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온 학자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리학]의 번역은 좀 실망스럽다. 동문선 출판사에서 나온 다른 번역들에 비하면 비교적 나은 편에 속하고, 바디우에 관해 학문적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무난하지만, 이 번역서는 여러가지 세부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어서 학문적으로는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몇가지 사례를 통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이 책에는 identification/identifier라는 단어가 여러번 사용되고 있는데, 이종영씨는 이를 어떤 경우에는 <정체화>(16-17쪽)로, 어떤 경우에는 <식별>(18쪽)로, 어떤 경우에는 <일체화>(20쪽)로 번역하고 있다. 원문의 같은 단어를 이처럼 상이하게 번역할 경우에는 이 다양한 번역어가 원문의 같은 단어를 가리킨다는 점을 표시해두는 게 당연할 것이다. 더 나아가 16-17쪽의 <정체화>라는 번역은 라캉이 쓰는 의미에서 identification, 즉 상상적 정체성의 형성이라는 개념(30쪽에 나오는)을 염두에 둔 번역이지만, 16-17쪽의 맥락에서 이는 그저 <동일시>나 <일체화>를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아직 너무 '사소'한 문제다. 이 번역의 또다른 문제는 reconnaitre/reconnassance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역시 어떤 때는 <인정>(18)으로, 어떤 때는 <파악>(18)으로, 또 어떤 때는 <식별>(21)로 번역하고 있고, 그리하여 독자가 <식별>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 이 단어가 identification을 번역한 것인지 아니면 reconnassance를 번역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는 데 있다. 이런 경우 바디우의 논의가 담고 있는 학문적인 엄밀성이 살아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번역에는 다수의 오역들도 엿보인다. 예컨대 15쪽의 <명확하게 표명될>이라는 번역은 <형식적으로 표상될>이라고 번역해야 칸트 윤리학의 고유한 형식주의가 드러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16쪽의 <성찰적 주체>와 <결정하는 판단>이라는 번역은 칸트 철학의 고유한 주제 중 하나인 reflessiant과 determinant의 대비, 즉 <반성성>과 <규정성>의 대비를 알아차리기 어렵게 만든다. 또한 30쪽의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의 의식에 대해 '대상화'되었기 때문에 나에게 하나의 안정된 소여처럼, 그 외재성 속에서 주어진 내면성처럼 구성되는 거리를-둔-나-자신>이라는 번역은 <-나를 하나의 안정된 소여처럼, 그 외재성 속에서 주어진 내면성처럼 구성하는->이라고 번역해야 왜 identification이 <정체화>, 즉 허구적 정체성의 형성인지 이해가 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31쪽의 <그 유한성 속에서 나에게 드러나는 대로의 타자는, 그 넘어섬이 고유한 윤리적 경험일 순수하게 무한한 타자에의 거리의 현시여야만 한다>는 번역은 <유한자 안에서 나에게 나타나는 대로의 대타자는 고유하게 무한한 타자와의 거리의 현현이어야 하며, 이 거리를 넘어섬이 원초적인 윤리적 경험이다>로 번역해야 바디우의 진의가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식의 오역과 부주의한 번역은 이 책 도처에 나타나고 있는데(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는 능력 부족이라기보다는 부주의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더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