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10일 전에 [연대 대학원 신문]에 실은 글 하나 올립니다.
스피노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 한 가지 견해를 제시한 글입니다.
제 학위 논문을 '심하게'(?) 축약한 글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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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론의 철학자 스피노자
balmas
스피노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모든 철학은 항상 해석들 속에서만, 그 철학에 대한 수용과 저항, 비판과 전유의 역사 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어떻게 해석되고 전유되어 왔는가에 대한 검토 없이 어떤 철학을 읽고 평가한다면, 무의미한 되풀이나 공허한 자기주장에 그치기 십상이다. 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오늘날 스피노자 철학을 읽고 해석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배적인 수용과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범신론의 애매성
스피노자 철학은 전통적으로 범신론 철학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범신론”(pantheism)이라는 말은, 신이란 초월적이거나 인격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자연 만물과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자연 만물 안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도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왜 스피노자의 철학이 당대의 유럽에서 혁명적인 의미를 지녔는지, 왜 정치ㆍ신학 권력에 그토록 위협적인 느낌을 주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피에르 벨(Pierre Bayle)에서 하인리히 야코비(Heinrich Jacobi)에 이르는 스피노자 비판가들이 범신론은 무신론이라고 집요하게 비판했으며, 반대로 디드로에서 포이어바흐, 플레하노프에 이르는 유물론 사상가들이 같은 이유로 스피노자를 예찬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스피노자 자신이 부인하고 있듯이(73번째 편지 참조), 이는 스피노자의 신 또는 실체 개념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아니다.)
반면 두 번째 의미로 읽으면 범신론은 하나의 신비주의를 뜻하게 된다. 노발리스가 스피노자를 “신에 취한 사람”이라고 불렀듯이, 윤리학에는 신에 관한 무수한 표현들이 나온다. 사실 윤리학은 「신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1부에서 시작해서 신을 향한 사랑 및 특히 신의 지적 사랑을 “구원 또는 지복(至福) 또는 자유”의 길로 제시하는 5부로 끝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신이 자연 만물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제시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신과의 합일이야말로 스피노자 철학의,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간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 철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 이러한 애매성에 빠지는 것 또는 그러한 애매성과 유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해방의 철학자 스피노자: 역량론적 해석의 난점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난 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 역량론적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흐름은 하나의 사상사적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이 해석은 스피노자를 애매성의 질곡에서 빼내어 근원적인 해방의 철학자로 복원시켰기 때문이다. 68년의 반역은 역량론적 해석의 동력이었으며, 들뢰즈, 마트롱 또는 네그리를 비롯한 여러 주석가들에 의해 스피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마르크스보다 더 탁월한 해방의 철학자로 부활했다.
역량론적 해석은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 “역량”(potentia)이라는 개념을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에 놓는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 변화가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자연이며,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에 따라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생산하는 (윤리학 1부 정리 11, 정리 16) 내재적인 원인, 자기원인이다. 하지만 신이 이처럼 절대적인 역량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유한한 실재들, 개체들에게는 자유의 여지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게 아닌가? 이러한 반문에 대해 역량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신 또는 실체의 절대적 역량이 양태들의 자유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실체와 유한한 실재들이 서로 대립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체와 양태들 사이의 관계를 외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실체는 양태의 타동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1부 정리 18)이다. 곧 실체의 역량은 양태들의 자유를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양태들 자신이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코나투스 개념은 유한한 실재들이 스스로 어떤 결과들을 산출할 수 있는 원인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3부 정리 7 및 정리 54 참조)
하지만 역량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성, 그 이론적 진면목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을까? 게루, 들뢰즈, 마트롱 또는 마슈레와 같은 대가들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역량론적 해석은 여전히 많은 모호함을 드러낸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지니고 있음에도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지와 수동성에 빠져 있는가? 이러한 예속은 어디에서 유래하며 이는 어떻게 개조될 수 있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수동력과 능동력이라는 별개의 힘”을 가정한다. “우리의 수동력은 불완전성 또는 우리의 능동적 힘 자체의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다.”(Deleuze,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1969, p. 204) 이 수동력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이는 “우리 자신과 구별되는 외부 실재로부터 작용을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한다. 다시 말해 본질의 차원에서 우리는 능동적인 원인이지만, 실존의 차원에서, 우리와 구별되는 다른 존재자들과의 마주침의 차원에서 우리는 수동적이며 이것이 우리의 예속의 뿌리를 이룬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불완전성, 유한성, 제한을 극복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공통 통념(notio communis)의 이론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곧 여러 가지 마주침들 중에서 “좋은 마주침”, 우리의 본성과 합치하는 존재자들과의 마주침을 선별하고 이를 통해 공통 통념들을 형성함으로써, 우리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존의 차원에서 인간들은 상상과 수동성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이러한 선별이 가능하겠는가? 더 나아가 인간은 외부 실재들에 의해 변용되지 않고서는 실존할 수 없는데, 수동력이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면, 들뢰즈 또는 역량론적 해석가들이 추구하는 능동성은 외부 실재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남, 곧 해탈함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또는 원초적으로 주어진 능동적인 본질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목적론과 어떻게 다른가?
관계론으로서 스피노자의 철학
이러한 해석들 대신에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을 관계론으로, 그것도 가장 일관되고 근원적인 관계론 철학 중 하나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는 역량론을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열어놓은 스피노자 연구의 새로운 차원을 좀더 풍부하게 개척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다.
이 제안이 당혹스럽게 들릴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뜬금없는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스피노자는 대표적인 실체의 철학자이며, 따라서 관계론 철학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닌가? 더 나아가 이는 매우 통속적으로 이해될 위험도 안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제안하는 관계론을,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세상에 고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관계론으로 해석하자는 것은 무엇보다 스피노자 철학의 대상과 목표를 좀더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관계론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의 대상은 개체화 또는 같은 말이지만 사회적 관계에 대한 분석이다.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의 목표는 인간의 원초적인 삶의 조건을 이루는 예속적 관계를 개조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데 있다. 좀더 부연해보자.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하나의 개체 또는 하나의 실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실체는 자연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오히려 무한하게 많은 인과연관들의 체계와 다르지 않다. 실체가 지닌 절대적인 역량,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무한하게 생산해내는 역량은 자의적이거나 우연적으로 실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엄밀하게 규정된 인과관계에 따라 필연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연에 대한 합리적 인식과 실천적 지향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인식은 인과연관의 질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다른 내용을 갖지 않는다.(1부 정리 18, 정리 25, 정리 28, 2부 정리 7 참조)
그러나 이러한 인과관계를 결정론적 관계로,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선형적인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는 실체와 다른 존재자, 따라서 사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양태들” 내지 “변용들”(affectiones)이라고 부른다. “양태”라는 명칭은 실체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의 관계가 내재적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주며, “변용들”이라는 명칭은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과 실존의 양상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변용으로서 존재하는 실재들은 명칭대로 늘 변화하며, 변화를 통해서만 존립한다. 우선 변용들은 다른 실재들에 의해 “변용됨”(affici)으로써 성립하고 실존한다. 외부 환경, 외부 실재들과 교섭하고 이를 통해 변용되지 않는 실재는 단 한 순간도 존립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되기는 들뢰즈가 말하는 “수동력”이 아니다. 변용되기는 역량의 제한이나 우리의 불완전성의 징표가 아니라 우리의 역량이 성립하고 축적되기 위한 조건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용들로서 실재들은 또한 “변용함”(afficere)으로써 존립한다. 곧 변용되기를 통해 성립한 역량을 바탕으로 규정된 조건에서 규정된 방식으로 어떤 결과를 산출하면서 실재들은 실존한다. 변용되기와 변용하기는 상관적인 작용 또는 하나의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개체들로서의 실재들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관계다(스피노자가 “운동과 정지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 스피노자의 개체들은 일종의 원자 내지는 원초적인 존재론적 단위가 아니라, 변용의 인과연관을 통해서 전개되는 개체화 과정의 결과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개체들, 존재하는 실재들이 생성, 변화, 소멸하는 과정과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하지만 윤리학이라는 제목이 가리키듯이 스피노자의 진정한 관심사는 존재론 그 자체, 또는 그 과학적 표현으로서 자연학 그 자체에 대한 탐구에 있지 않았다. 그의 철학함의 대상은 항상 이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이었으며, 그의 철학함의 목표는 대개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인간의 삶, 이 삶을 규정하는 예속적 관계들을 합리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들로 개조하는 데 있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 수동적이고 예속적인(스피노자에게 이 양자는 거의 동의어에 가깝다)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 스피노자에게 수동성은, 들뢰즈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외부의 실재들로부터 작용을 받는 것, 그것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자연적 조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는 부정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동성은 우리가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3부 정의 2 참조).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것을 수행하거나 생산할 때, 이러한 활동이 우리 자신과 다른 것에 의해 전유되고 활용될 때, 우리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이다. 반대로 능동성은 외부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활동의 전체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물리적으로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상태에 있을 수 있으며, 개인적인 역량이 미약하다 하더라도 능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곧 역량이 양적인 개념이라면, 수동과 능동은 질적인 개념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관계론적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 또는 예속적인 삶의 조건을 이성적이고 능동적인 방향으로 개조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를 부분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예속적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관계에 따라 우리들 각자가 수동적으로 개체화되는 양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각자의 윤리적 해방은 예속적인 관계를 개조하려는 집합적인 실천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역으로 정치적 변혁은 다른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각자의 윤리적 노력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을 현재화하기 위해 필요한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하나의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