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10일 전에 [연대 대학원 신문]에 실은 글 하나 올립니다. 

스피노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 한 가지 견해를 제시한 글입니다.

제 학위 논문을 '심하게'(?) 축약한 글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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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론의 철학자 스피노자



balmas



스피노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모든 철학은 항상 해석들 속에서만, 그 철학에 대한 수용과 저항, 비판과 전유의 역사 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어떻게 해석되고 전유되어 왔는가에 대한 검토 없이 어떤 철학을 읽고 평가한다면, 무의미한 되풀이나 공허한 자기주장에 그치기 십상이다. 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오늘날 스피노자 철학을 읽고 해석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배적인 수용과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범신론의 애매성


스피노자 철학은 전통적으로 범신론 철학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범신론”(pantheism)이라는 말은, 신이란 초월적이거나 인격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자연 만물과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자연 만물 안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도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왜 스피노자의 철학이 당대의 유럽에서 혁명적인 의미를 지녔는지, 왜 정치ㆍ신학 권력에 그토록 위협적인 느낌을 주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피에르 벨(Pierre Bayle)에서 하인리히 야코비(Heinrich Jacobi)에 이르는 스피노자 비판가들이 범신론은 무신론이라고 집요하게 비판했으며, 반대로 디드로에서 포이어바흐, 플레하노프에 이르는 유물론 사상가들이 같은 이유로 스피노자를 예찬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스피노자 자신이 부인하고 있듯이(73번째 편지 참조), 이는 스피노자의 신 또는 실체 개념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아니다.)

  반면 두 번째 의미로 읽으면 범신론은 하나의 신비주의를 뜻하게 된다. 노발리스가 스피노자를 “신에 취한 사람”이라고 불렀듯이, 󰡔윤리학󰡕에는 신에 관한 무수한 표현들이 나온다. 사실 󰡔윤리학󰡕은 「신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1부에서 시작해서 신을 향한 사랑 및 특히 신의 지적 사랑을 “구원 또는 지복(至福) 또는 자유”의 길로 제시하는 5부로 끝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신이 자연 만물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제시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신과의 합일이야말로 스피노자 철학의,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간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 철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 이러한 애매성에 빠지는 것 또는 그러한 애매성과 유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해방의 철학자 스피노자: 역량론적 해석의 난점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난 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 역량론적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흐름은 하나의 사상사적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이 해석은 스피노자를 애매성의 질곡에서 빼내어 근원적인 해방의 철학자로 복원시켰기 때문이다. 68년의 반역은 역량론적 해석의 동력이었으며, 들뢰즈, 마트롱 또는 네그리를 비롯한 여러 주석가들에 의해 스피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마르크스보다 더 탁월한 해방의 철학자로 부활했다. 

  역량론적 해석은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 “역량”(potentia)이라는 개념을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에 놓는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 변화가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자연이며,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에 따라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생산하는 (󰡔윤리학󰡕 1부 정리 11, 정리 16) 내재적인 원인, 자기원인이다. 하지만 신이 이처럼 절대적인 역량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유한한 실재들, 개체들에게는 자유의 여지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게 아닌가? 이러한 반문에 대해 역량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신 또는 실체의 절대적 역량이 양태들의 자유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실체와 유한한 실재들이 서로 대립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체와 양태들 사이의 관계를 외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실체는 양태의 타동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1부 정리 18)이다. 곧 실체의 역량은 양태들의 자유를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양태들 자신이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코나투스 개념은 유한한 실재들이 스스로 어떤 결과들을 산출할 수 있는 원인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3부 정리 7 및 정리 54 참조) 

  하지만 역량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성, 그 이론적 진면목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을까? 게루, 들뢰즈, 마트롱 또는 마슈레와 같은 대가들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역량론적 해석은 여전히 많은 모호함을 드러낸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지니고 있음에도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지와 수동성에 빠져 있는가? 이러한 예속은 어디에서 유래하며 이는 어떻게 개조될 수 있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수동력과 능동력이라는 별개의 힘”을 가정한다. “우리의 수동력은 불완전성 또는 우리의 능동적 힘 자체의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다.”(Deleuze,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1969, p. 204) 이 수동력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이는 “우리 자신과 구별되는 외부 실재로부터 작용을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한다. 다시 말해 본질의 차원에서 우리는 능동적인 원인이지만, 실존의 차원에서, 우리와 구별되는 다른 존재자들과의 마주침의 차원에서 우리는 수동적이며 이것이 우리의 예속의 뿌리를 이룬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불완전성, 유한성, 제한을 극복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공통 통념(notio communis)의 이론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곧 여러 가지 마주침들 중에서 “좋은 마주침”, 우리의 본성과 합치하는 존재자들과의 마주침을 선별하고 이를 통해 공통 통념들을 형성함으로써, 우리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존의 차원에서 인간들은 상상과 수동성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이러한 선별이 가능하겠는가? 더 나아가 인간은 외부 실재들에 의해 변용되지 않고서는 실존할 수 없는데, 수동력이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면, 들뢰즈 또는 역량론적 해석가들이 추구하는 능동성은 외부 실재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남, 곧 해탈함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또는 원초적으로 주어진 능동적인 본질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목적론과 어떻게 다른가?

 

관계론으로서 스피노자의 철학

 

이러한 해석들 대신에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을 관계론으로, 그것도 가장 일관되고 근원적인 관계론 철학 중 하나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는 역량론을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열어놓은 스피노자 연구의 새로운 차원을 좀더 풍부하게 개척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다.

  이 제안이 당혹스럽게 들릴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뜬금없는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스피노자는 대표적인 실체의 철학자이며, 따라서 관계론 철학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닌가? 더 나아가 이는 매우 통속적으로 이해될 위험도 안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제안하는 관계론을,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세상에 고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관계론으로 해석하자는 것은 무엇보다 스피노자 철학의 대상과 목표를 좀더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관계론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의 대상은 개체화 또는 같은 말이지만 사회적 관계에 대한 분석이다.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의 목표는 인간의 원초적인 삶의 조건을 이루는 예속적 관계를 개조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데 있다. 좀더 부연해보자.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하나의 개체 또는 하나의 실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실체는 자연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오히려 무한하게 많은 인과연관들의 체계와 다르지 않다. 실체가 지닌 절대적인 역량,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무한하게 생산해내는 역량은 자의적이거나 우연적으로 실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엄밀하게 규정된 인과관계에 따라 필연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연에 대한 합리적 인식과 실천적 지향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인식은 인과연관의 질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다른 내용을 갖지 않는다.(1부 정리 18, 정리 25, 정리 28, 2부 정리 7 참조)

  그러나 이러한 인과관계를 결정론적 관계로,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선형적인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는 실체와 다른 존재자, 따라서 사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양태들” 내지 “변용들”(affectiones)이라고 부른다. “양태”라는 명칭은 실체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의 관계가 내재적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주며, “변용들”이라는 명칭은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과 실존의 양상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변용으로서 존재하는 실재들은 명칭대로 늘 변화하며, 변화를 통해서만 존립한다. 우선 변용들은 다른 실재들에 의해 “변용됨”(affici)으로써 성립하고 실존한다. 외부 환경, 외부 실재들과 교섭하고 이를 통해 변용되지 않는 실재는 단 한 순간도 존립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되기는 들뢰즈가 말하는 “수동력”이 아니다. 변용되기는 역량의 제한이나 우리의 불완전성의 징표가 아니라 우리의 역량이 성립하고 축적되기 위한 조건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용들로서 실재들은 또한 “변용함”(afficere)으로써 존립한다. 곧 변용되기를 통해 성립한 역량을 바탕으로 규정된 조건에서 규정된 방식으로 어떤 결과를 산출하면서 실재들은 실존한다. 변용되기와 변용하기는 상관적인 작용 또는 하나의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개체들로서의 실재들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관계다(스피노자가 “운동과 정지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 스피노자의 개체들은 일종의 원자 내지는 원초적인 존재론적 단위가 아니라, 변용의 인과연관을 통해서 전개되는 개체화 과정의 결과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개체들, 존재하는 실재들이 생성, 변화, 소멸하는 과정과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하지만 󰡔윤리학󰡕이라는 제목이 가리키듯이 스피노자의 진정한 관심사는 존재론 그 자체, 또는 그 과학적 표현으로서 자연학 그 자체에 대한 탐구에 있지 않았다. 그의 철학함의 대상은 항상 이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이었으며, 그의 철학함의 목표는 대개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인간의 삶, 이 삶을 규정하는 예속적 관계들을 합리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들로 개조하는 데 있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 수동적이고 예속적인(스피노자에게 이 양자는 거의 동의어에 가깝다)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 스피노자에게 수동성은, 들뢰즈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외부의 실재들로부터 작용을 받는 것, 그것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자연적 조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는 부정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동성은 우리가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3부 정의 2 참조).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것을 수행하거나 생산할 때, 이러한 활동이 우리 자신과 다른 것에 의해 전유되고 활용될 때, 우리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이다. 반대로 능동성은 외부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활동의 전체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물리적으로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상태에 있을 수 있으며, 개인적인 역량이 미약하다 하더라도 능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곧 역량이 양적인 개념이라면, 수동과 능동은 질적인 개념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관계론적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 또는 예속적인 삶의 조건을 이성적이고 능동적인 방향으로 개조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를 부분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예속적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관계에 따라 우리들 각자가 수동적으로 개체화되는 양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각자의 윤리적 해방은 예속적인 관계를 개조하려는 집합적인 실천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역으로 정치적 변혁은 다른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각자의 윤리적 노력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을 현재화하기 위해 필요한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하나의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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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21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저를 가장 "짜증"나게 하는 철학자가 스피노자 입죠.헤헤헤. 정말 데까르트나 칸트같은 이 보다 훨씬 낯설고 어려운 철학자...

balmas 2006-05-21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스피노자가 어렵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소개나 연구가 덜 되어 있기 때문이겠죠 ...

yoonta 2006-05-21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동성은 "부분적인 원인" 능동성은 "전체적인 원인"이라는 해석..발마스님의 독창적 해석이신가요? 님처럼 스피노자의 역량을 관계론속에서 파악한다면 그리고 위에서 님이 들뢰즈식 해석의 난점이라고 표현하신 부분..즉 들뢰즈식 스피노자해석이 역량에 의한 능동적 변용이 외부적 실제에 의한것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좋은 대안이 될수있을 것같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통상적인 범신론철학으로 보는 것보다..일종의 신비주의철학으로 보는것이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이 당시의 신비주의자들과의 교감속에서 이루어진것이 분명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이부분에 대한 사료적 검토가 좀더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요..학계에서는 신비주의에 대한 연구를 비논리적이라는 이유로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는데...스피노자같은 비강단철학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자신처럼 비 강단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의 (신비주의적 방식의)해석이 오늘날의 역량론에 의한 스피노자해석과 통하는 부분도 많다고 개인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신비주의사상에 의하면 개체의 능동성은 인간과 만물이 바로 신이라고하는 신인동형설에 근거하고 있고..그러한 신과 인간의 상호연관관계속에서 사회나 자연전체를 사고하게 되면 님이 이야기하시는 관계론적 스피노자해석도 결국은 신비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간의 연관관계의 하나의 '변용'이라고 볼수있죠.....

여튼 좋은 글 잘봤습니다...발마스님..^^

p.s. 님의 글을 읽고보니 님이 쓰신 그 논문을 "심하게" 보고싶어지네요..혹시 볼수있는 방법없을까요?

싸이런스 2006-05-21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나 멋진 글입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적 개념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진리에 다가가는 힘을 찾는 방법들, 즉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념들이 갖는 긴장, 그 관계의 상호성, 역동성은 현재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주는듯...정치론에서 독립과 의존, 자유와 평등, 권리와 역량의 관계성에 대해 읽으면서 스피노자 철학의 빼어남을 다시한번 느꼈어요. 특히 개체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신체와 정신의 통일성)이 국가에 대한 개념, 국가 자체를 하나의 개체로 보는 관점... 흥미로왔고요. 제가 공부하고 있는 분야에 스피노자 철학을 이론적 배경으로 제시할 수 있으리라는 단초들을 많이 얻었어요. 발마스님께 이점 감사드려요.아참... 언제 발마스님 학위 논문 읽어 봐야겠어요.

퍼그 2006-05-21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발마스님 논문 읽고 싶어했는데.ㅋ 출판하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헤르베르트 2006-05-2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핫 왠지 예고 편처럼 중요한 순간에 딱 끝나는 느낌인데요? 이런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정치론과 민주주의 대한 내용을 더 읽고 싶습니다(본론은 사서 보시라?).^^;

balmas 2006-05-22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타님/ 스피노자 철학을 신비주의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겠죠. 신비주의라는 게 서양철학사에서도 상당히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고,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매력적인 측면들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스피노자를 그런 식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상당히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글쎄요, 서울대 도서관에 PDF 파일이 공개되어 있기는 한데, 외부 사용자(곧 비서울대 이용자)들에게는 다운로드가 안되는 것 같더군요. 더구나 이 PDF 파일이 EZ PDF Reader 전용 파일이어서, Adobe Reader로는 읽을 수도 없구요 ... ;;;
싸이런스님/ ㅎㅎ 좀 도움이 됐습니까? 뭔가 단초들을 얻으셨다니 왠지 뿌듯하네요. ^^;;
pug님/ ㅎㅎ 언젠가는 출판해야 하는데, 올해가 될지 내년이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빠진 부분들을 좀 보충해서 출판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분량이 너무 많아지고 시간도 필요할 것 같아서 고민중이랍니다. -_-;;
헤르베르트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흐흐, 감질난다 이 말씀이신 것 같은데 ...
 

  

 

[문화일보]

독일 역사속에 그려진 ‘파우스트’의 인간상

파우스트 그는 누구인가? / 이인웅 엮음 / 문학동네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
파우스트는 독일의 문호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작품을 통해 문학 속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를 살았던 실존 인물로서 괴테 이전에도 독일의 민담과 수많은 출판물의 주인공이었다.

이 책은 독일의 전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학을 비롯한 여러 예술 장르에서 창조돼온 파우스트 인간상의 다양한 면모를 국내의 연구자들이 분석한 것이다.

30여년간 대학강단에서 파우스트를 강의한 이인웅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독일문학을 전공한 동료교수와 제자 박사 23명과 함께 3년간 준비해 내놓은 역작이다. 27편의 논문을 5부로 나눠 엮었다.

실제 인물 파우스트는 의학, 신학을 섭렵하고 유대계 신비학자들과 교제하면서 예언자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괴테는 파우스트에 관한 기존 전설과 출판물들을 참고, 지식과 학문에 절망한 노학자의 욕망 추구, 방황과 더불어 마침내 구원에 이르는 장구한 노정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괴테가 ‘파우스트’ 집필을 시작한 것은 1773년, 완성한 것은 1831년이다. 한마디로 필생의 대작인 셈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계약을 맺지만,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최후까지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파우스트에 관한 이전 출판물들이 주인공을 신의 저주를 받게 해 지옥으로 끌고 가지만, 괴테는 파우스트를 구원받은 자로서 하늘로 승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파우스트의 인간상이 독일의 근대 민족국가 형성 역사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됐다는 것을 이 책은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파우스트가 독일 민족의 필요에 따라 행동주의적 남성 표본으로, 제국주의 전쟁과 인간의 도구화로, 나치시대의 피와 토지 이데올로기로, 동독의 사회주의 토지개혁으로 이념화했다는 것이다.

책을 엮은 이인웅 교수는 파우스트가 한없는 방황과 절망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상이라는 데 주목한다. 그를 통해 세상을 사는 모든 인간들이 과연 나는 누군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번에 괴테의 작품 ‘파우스트’를 번역해 같은 출판사를 통해 함께 펴냈다. 새 번역판은 대학 2학년때부터 파우스트에 심취해 온 이 교수의 번역 완결판이라는 점 이외에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석판화와 독일 표현주의의 대가인 막스 베크만이 그린 펜 소묘가 삽화로 들어있어 눈길을 끈다.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6/05/19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6051901031930136003

이게 기사에서 언급한 새 번역본!!

 

새 번역본은 바로 이 책이구만 ... 2종의 한글 번역본이 있는데, 새로 또 사??

기사에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3월에는 [파우스트 주해]라는 책도 내셨구만(아래 사진) ...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질적인 수준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하긴 평가할 만한 능력도 없다만),

여하튼 정년 퇴직 기념으로는 상당히 알찬 작업들이군 ...

 

아, 당분간 책 안사려고 했는데, 안살 수가 없군 ...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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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헉!!!

그런데 이건 값이 이게 뭐냐??

정   가 : 56,000원
판매가 : 50,400원(10%off, 5,600원 할인)
마일리지 : 1,520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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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6-05-20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는 누구인가'는 사도 '시와 진실'은 스킵해야겠군요(-.-;).

balmas 2006-05-21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시와 진실]은 왜 이렇게 비싸게 책값을 매겼답니까?
 

바로 이 책이다!

        

 

 

 Politique et Histoire, de Machiavel à Marx. Cours à l'Ecole normale supérieure de 1955 à 1972

 

Auteur Louis Althusser, François Matheron (Annotateur)
Paru le : 04/05/2006
Editeur SEUIL
Isbn : 2-02-062833-3 / Ean 13 : 9782020628334

Prix éditeur 23,00 €
Prix Decitre 21,85 €  Economisez : 5% (1,15 €)

제목은 [정치와 역사,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까지. 1955년에서 1972년까지 고등사범학교 강의록]

목차를 한번 보면 ...



  • LES PROBLEMES DE LA PHILOSOPHIE DE L'HISTOIRE (1955-1956)
        (역사철학의 문제들)
  • Les quatre courants fondamentaux au XVIIe
        (17세기의 네 가지 기본 사조)
  • Le XVIIIe siècle
        (18세기)
  • Hegel
       (헤겔)
  • La problématique de l'Histoire dans les œuvres de jeunesse de Marx
       (마르크스 청년기 저작에서 역사의 문제설정)
  • MACHIAVEL
        (마키아벨리)
  • Le point de départ : la revue des principautés
        (출발점: 공국들에 대한 검토)
  • L'Armée et la Politique
        (군대와 정치)
  • Les méthodes de gouvernement
        (통치의 방법)
  • Fortune et virtu : une théorie de l'action ?
        (포르투나와 비르투: 행위 이론?)
  • ROUSSEAU ET SES PREDECESSEURS ; LA PHILOSOPHIE POLITIQUE AU XVIIe ET XVIIIe SIECLE (1956-1966)
        (루소와 그 선배들: 17-18세기의 정치철학)
  • Les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roblématique politique des XVIIe-XVIIIe siècles
        (17-18세기 정치적 문제설정의 기본 개념들)
  • Hobbes (De cive)
        (홉스 [시민론])
  • Locke
        (로크)
  • Rousseau et la problématique du Discours sur l'origine de l'inégalité
        (루소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문제설정)
  • Le contrat social
        (사회계약)
  • HOBBES (1971-1972)
        (홉스)
  • Introduction
        (서론)
  • La théorie politique de Hobbes
  • (홉스의 정치이론)
  •  

    보다시피, 1955년에서 1972년까지 알튀세르가 고등사범학교에서 했던 강의록을 묶은 책이라고 한다.

    언젠가 발리바르의 회고에 따르면 알튀세르의 강의는 정치철학에 관한 자신의 사고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대가들의 강의(가령 하이데거나 푸코, 들뢰즈 ...)가 다 그렇지만,

    알튀세르의 강의도 빼어난 독창성과 깊이를 지니고 있다.

    (내가 특히 인상깊게 읽어본 강의는 정신분석학과 인문과학에 관해 고등사범학교에서 했던 강의다.)

    더욱이 말로 하는 강의인 만큼 생생한 현장감과 독특한 리듬도 느낄 수 있다.

    그런 만큼 이 강의록이 더욱 기대된다. 한 1주일 전에 인터넷 서점에서 다른 책들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곧바로 주문!!!!!!!!! 지금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중 ...

    사실 앞으로 한 2-3년간 공부하고 싶은 주제가 바로 이 주제였기 때문에 더욱 더 기대가 된다. 흐흐흐 ...

     

    앞으로 알튀세르의 저작들을 좀더 체계적으로 번역하고 소개할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마도 이 책도 그 대상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즐겁게 고대하고 있다. ^__________^

           Ecrits sur la psychanalyse          Sur la rep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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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onta 2006-05-18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엄청난 책이 나왔네여..목차만 봐도 정말 흥미로울것 같다는..
    발마스님... 읽지만 마시고 번역도 좀 꼭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부리 2006-05-18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만 들어본 알튀세르.... 농담도 무지 철학적으로 할 것 같은 그런 사람...그분의 책을 반기는 분들은 정말 대단한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stella.K 2006-05-18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은 안되있군요. 저는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책입니다요. 내 후배는 지금도 좋아할까?^^

    클리오 2006-05-18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분들이 책을 내면, 정말 두렵사와요... ^^;;

    청년도반 2006-05-18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옷 정말 강의 제목들만 읽어봐도 흥분되는데요+_+

    선배님이 이 책을 번역하실 때쯤이면 저도 이걸 불어 원본 그대로 읽을 수 있을런지. ㅎㅎ 책을 보니 또 의욕이 불끈 생기는군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ㅋ

    balmas 2006-05-19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타님/ 예, 재미있을 것 같네요. ㅎㅎ 예, 재미있으면 번역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출판해줄 출판사가 먼저 있어야죠. ^^;;
    부리님/ ㅋㅋ 알튀세르가 대단하지, 반기는 저야 뭐 ... ^^;
    사실 알튀세르는 농담도 철학적으로 하더라구요. :-)
    스텔라님/ 참, 전에 후배님 중에 알튀세르 좋아하는 분이 있다고 하셨죠? ㅎㅎ
    클리오님/ 알튀세르는 그렇게 난삽하게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니까, 아마
    번역된 거 보면 읽으실 만 할 거예요.
    웅기/ 목차 보니까 재미있겠지/ 실제 내용은, 일단 한번 읽어봐야지. ^^
    불어 공부 열심히 하라구. :-)

    stella.K 2006-05-19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닉넴을 어떻게 읽나요? 한문에 약해서리...ㅜ.ㅜ

    balmas 2006-05-20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스텔라님, "발마수"라고 읽는답니다.

    이름의 유래는 아래를 참고하세요. :-)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879542


    stella.K 2006-05-20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그렇군요. 근데 왜 또 바꾸셨어요?^^

    balmas 2006-05-2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재미로 한번 바꿔봤는데, 전부 다 읽기가 어렵다고들 하셔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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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인 2006-05-06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 갑니다.

    마늘빵 2006-05-06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갑니다.

    balmas 2006-05-06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러세요.
     

    [민중의 소리]의 보도에 따르면

    오늘도 평택에서는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계속 싸움이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에서도, 또 지방 곳곳에서도 항의 집회가 열릴 것이다.

    또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과 국방부, 청와대, 정당들의 뻔뻔스러움을

    질책하고 규탄하는 언론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어린이날을 낀 황금연휴를 맞아 저항의 움직임이 미약해보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건 마치 폭풍 전야와도 같은 움직임이다.

     

    어제 있었던 대추리의 투쟁은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아니 하나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남한에서 본격적인 평화 투쟁, 평화를 위한 대장정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또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항하고 저항하고 또 저항하는 길밖에는 없을 것이다.  

    같이 싸웁시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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