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권에서 나오는 책들하고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나오는 책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몇 가지 있다.
1. 표지의 차이
영미권에서 나오는 책들은 대개 표지가 화려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매우 세련된 것들이다.
가령 이런 놈 한번 봐라 ...
유작으로 출간된 들뢰즈 논문 모음집의 영어 번역본인데, 책 제목하고 풍경하고 맞춘 것 봐라 ...

철학책 디자인이 이 정도니, 뭐 다른 책이야 더 볼 것 있나? 아쉽다구? 그럼 하나 더 볼까?
매우 실험적인 철학 논문들을 모아놓은 논문집인데, 표지 한번 봐라 ... 미술 화집인 줄 알겠다.

그럼 프랑스에서 나온 책들 한 번 볼까?
프랑스에서 가장 유서깊은 철학 전문 출판사로는 브랭Vrin 출판사가 있다. 소르본 대학 정문 앞에 보면
서점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하얀색 벽으로 된 브랭 서점(대개 출판사들은 서점을 같이 한다)이고,
맞은 편에는 프랑스 학술 서적 전문 출판사인 퓌프PUF
(이건 프랑스 대학 출판부(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의 약자다)의 서점이 있다.
브랭에서 나오는 책들 표지 한 번 봐라.
이게 제일 세련된 디자인이다. 미색 표지로 된.
브랭에서 나오는 책들 중 거의 50%는 이것과 똑같은 디자인이다. 책 제목하고 저자 이름, 소개글만 다를 뿐.

이건 몇년 전부터 나오기 시작한 새 문고본 시리즈 표지다. 깔끔하죠? 지나치게 ... -_-a
물론 다른 책들도 똑같은 디자인이다.

그런데 이 표지들은 정말 발전한 거다. 옛날에 나온 책 표지 한번 볼까?

1974년에 나온 말브랑슈 전집 중 한 권이다. 표지는 마분지 잘라서 만들었다. 70년대의 책들이
이러니 옛날 책들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떤 책들은 정식으로 인쇄한 건데도, 글자를 읽기 힘들 정도로
인쇄상태가 조악한 것들이 있다.
요즘 책들이야 너무 잘 만드는 거지 ...
데리다가 자신의 거의 모든 책을 내던 갈릴레(Galilee) 출판사 책들은 어떤가 볼까?
이건 좀 옛날 디자인이다. (80년대)

여기에 상당한 변화를 준 90년대 디자인.

여기에 다시 변화를 준 2000년대 디자인.

색깔은 모두 미색이다. (그러고 보니까 브랭이나 갈릴레나 다 미색을 좋아하네 ...)
물론 갈릴레에서는 이런 검은색 표지로 된 책도 낸다.

진짜 징한 출판사가 하나 더 있다. 여기는 들뢰즈와 부르디외, 이리가레 같은 쟁쟁한 철학자, 이론가들이
책을 낸 출판사인데, 이름은 미뉘Minuit라고 한다(원래는 "자정", 곧 "밤 12시"라는 뜻이다).
이 출판사는 이 표지 하나로 수백권의 책을 냈다. 징한 넘들 ...

이건 들뢰즈 책(1969년).

이건 이리가레 책(1984년).

이건 데리다 책(1967년)
이 표지와 쌍벽을 이루는 이 표지도 있다. 이 표지로도 수백권을 냈다.

1989년에 나온 클로드 시몽의 소설.

2003년에 나온 들뢰즈 책.
그러다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최근에는 색을 넣어서 디자인을 바꿨다. 화려하지?

독일책들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더 징한 놈들도 있다. 가령 이런 놈들 ...
펠릭스 마이너Felix Meiner라는 철학서적 전문 출판사 표지다. 얘들도 초록색 하나로 수백권의 책을
찍어냈다. 약간의 변화를 주긴 했지만 ...
이건 80년대 나온 책 ...

이건 90년대 나온 책. 디자인이 좀 달라졌지?

이건 2000년대에 나온 책.
약간 차이가 느껴지지?

어쨌든, 영미권에서 나온 책의 표지들을 보다 보면, 유럽에서 나오는 학술 서적의 책표지들은
너무 단조롭고 따분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서는 책표지들이
상당히 다양하고 화려해지고 있다.
2. 영미권에는 하드커버와 페이퍼백이 함께 나오지만, 유럽의 책들 중에는 하드커버가 거의 없다.
대신 불어로는 "broché", 또는 독어로는 "broschiert"라고 부르는 책들과 문고판이 대종을 이룬다.
그런데 문제는 이 놈의 "broché"다. 원래의 뜻에 따른다면 "가철"이나 "가제본"이 되겠지만,
영미식 용어법에 따르면 하드커버와 문고판 책이 아닌 것들은 모두 이 "broché"에 속한다. (우리말로는
정확히 어떤 용어에 해당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 놈의 "broché"는 출판사마다 찍어내는 방식이 제각각 달라서, 어떤 출판사는 고급 양장본 못지 않게
실로 잘 꿰메서 튼튼하게 내는 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출판사는 그야말로 양심 저당 잡힌 수준으로
만들어내는 데도 있다.
무슨 말이냐구? 주문한 책이 집에 도착하면 부푼 마음을 안고, 책을 펼쳐보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책을 쫙 펼치는 순간, 투.드.드.득.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책이 단번에 두 동강이 나버린다.
벌어진 두 쪽 사이로는 노란색 본드가 묻어 있는 책의 겉표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흐이구~~ 본드나 쫌 두껍게 바르면 아무말도 안하지, 한번 슬쩍 칠한 다음 대충 말려서 붙인 듯하다.
그러니, 두 동강으로 그냥 갈라져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가만히 붙어 있겠는가? 처음에는 두 동강이었다가
나중에는 네 동강으로, 그 다음에는 7-8동강으로 갈라지고, 그 다음부터는
한 장, 두 장씩 투둑 떨어진다.
책값이나 싸면 아무말 안하지. 하드커버가 아닌 이런 종류의 책은 대개 20 유로 내외, 비싸면 30유로 이상,
좀 싼 경우는 15 유로 정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는 2만원에서 4만원 정도까지 한다. 이 정도의 책값을
받으면서 이렇게 허술하게 "뽄드"칠을 하는 놈들 ......
(새로 산 책 보는 데, 또 투두두둑 쩌~억 소리를 내면서 갈라지는 책 때문에 열 받아서 페이퍼 한 번 써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