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합



족두리 쓰고 원삼 활옷 몸에 걸치고 평생에 한 번 혼례날 누려봄직한 호사, 용비녀 꽂고 발그스름한 두 볼과 입술이 어여뻐라. 수줍음과 설레임으로 달아오르는 신부의 얼굴엔 그보다 더 붉은 빛 연지곤지를 찍었구나.
연지는 볼과 입술을 붉은 색조로 꾸미는 화장품이다. 이마에 동그랗게 치레하는 것은 곤지라 하는데 이 것 또한 연지를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여인들이 연지 화장을 했다고 전해지며, 고구려 수산리 고분벽화나 쌍영총 벽화에서도 볼과 입술에 연지바른 여인을 볼 수 있다.
연지는 보통 잇꽃과 주사(朱砂)라는 광물질을 갈아 계란 노른자와 명반, 사향 등을 섞어 솥에다 끓여서 만들었다고 한다.
연지 곤지는 신부의 건강함을 상징하는데 초혼에게만 허락되었다. 연지 곤지만이 아니라 활옷도 붉은색이고 혼례상과 예단에 쓰이는 보자기나 종이도 붉은색이요, 첫 날밤 원앙금침에도 남색과 함께 붉은색이 쓰였다.
그것은 붉은색이 갖는 주술적인 힘 때문이었다. 붉은색은 또한 혈기왕성한 젊음의 상징이기도 했다.
사진 상단 청자 흑백상감 연지합은 연지를 보관하던 자그마한 통으로 분원 가마에서 구운 아주 귀한 화장용기이다.
하단 중앙 앵두빛 입술과 도화빛 뺨을 위한 서가연지는 서가분을 만들어 내던 광업화장품연구소에서 생산되던 근대적인 상품이다.

♣ 자료문의 053)745-5373 이무열




▲ 연지합. 고려시대
지름 3.6cm~6cm
높이2.8cm~4.8cm



▲ 중앙이 서가연지. 일제강점기
지름 4cm, 높이 0.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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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녀/떨잠



비녀는 몸을 단장하고 그 매무새를 더 한층 아름답게 하기위해 기혼녀의 쪽진머리에 꽂는 필수적인 장식품이다. 비녀는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여 왔는데, 비녀머리의 수식에 따라 용잠,매죽잠,석류잠,말뚝잠,호도잠,버섯잠 등으로 부르며 그 형태는 대부분 길상적인 것으로 부귀,다남,장수를 기원하는 것 들이다. 또 재료를 보면 은,도금,백동,놋쇠,산호,진주,옥,나무,뼈 등이있다. 그림 상단은 봉황칠보비녀로서 상당한 신분의 여인이 사용한 것으로 깨끗하고 잘 차려입은 여인에게 하는 칠보단장 했다는 말이 절로 떠오름직 하다. 아래 떨잠은 흔히"떨철반자"라고도 불리며 의식때 왕비를 비롯해 상류계급에서 '어여머리'나 '큰머리'의 중앙과 좌우에 하나씩 꽂았던 화려한 장식품이다. 이런 떨잠은 머리에 꽂는 최고의 수식품으로 보통 원형이나 각형 나비형 등의 옥판위에 산호.청강석.진주 꽃심(芯)을 거미발로 물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는 용수철 끝에는 나비.벌.봉등이 부착되어 떨잠을 착용한 이가 걸을 때 마다 떨리도록 만들어 한껏 아름다움을 자아내게 했다.

♣ 자료문의 053)745-5373 이무열





▲ 봉황칠보비녀. 조선시대



▲ 떨잠.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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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족집게



몸단장과 매무새를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한 옛 여인들의 머리치레는 지극정성이었다. 칠흙 같은, 아니 삼단 같은 머리채 올올이 얼레빗으로 빗어내리고 다시 참빗으로 빗어 동백기름 발라 쪽 찐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또한 단오를 앞두고 긴머리 창포물에 감아 가리마 타고 빗어 넘기는 윤기도는 그 단정한 모습은 매섭기 까지 하다.
그런가하면 목덜미 하얗게 드러내고 머리 손질하는 자태는 그 얼마나 고혹적이며 관능적이기 까지 한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때는 빗은 장신구로 활용되어 뒷머리에 꽂고 다니기도 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 빗은 정조의 상징이었으며, 빗을 주면 결혼을 허락하는 것이 되기도 하여 장신구로 쓰는 관습이 사라졌다.
빗은 보통 박달나무, 대추나무, 소나무, 대나무, 화각... 등을 재질로 썼는데 사진 중간의 붉은칠과 자개로 꾸미거나 하단 왼쪽 뿔이나 오른쪽 대모로 만든 얼레빗은 귀한 것에 속한다.
특히 세워진 모양의 뿔과 신주로 된 빗들은 남성용으로서, 목침겸용 거울을 펼쳐두고 상투머리를 빗어올릴 때나 수염을 빗기 위한 용도였다.
하단의 족집게는 눈썹이나 몸의 털을 뽑는 미용도구로 사용되었는데 족집게가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미를 가꾼다는 점에서 미용사를 상징하기도 했다. 일면 족집게는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함과 잡티를 제거하는 청결함을 상징하기도 하여, 어떤 일을 정확히 예견하거나 처리하는 '족집게 같다'는 관용적 표현을 낳기도 했다.

♣ 자료문의 053)745-5373 이무열





▲ 여러 가지 머리빗. 조선시대



▲ 족집게, 조선시대
백통, 신주, 은으로 된 몸체에 각종 풀꽃 문양을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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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이개/빗치개



귀이개는 원래 나무나 금속으로 만들어 귀지를 파내는 도구로 쓰였다. 그러다가 점차 장식적 의미로 발전해 옥이나 비취, 마노, 은으로도 만들었다.
사진 상단의 귀이개는 은으로 된 몸체에 아름다운 꽃잎을 양각하거나 칠보를 입히기도 하고 부귀와 복덕을 가져다 준다는 박쥐문양을 음각해 뒤꽂이 용도로도 쓰였다.
특히 중앙의 쪽진머리에 쓰였을 뒤꽂이용 귀이개는 아직도 상당 부분 금도금한 흔적이 남아 당시에 귀하게 쓰였음을 짐작케 한다.
하단의 사진은 빗치개로, 빗살틈에 낀 때를 빼거나 가리마를 타는데 쓰는 물건으로서 빗치개는 여인에게 빗 이외에 가장 필요성이 큰 것이었다. 이 빗치개는 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할 때 쓰일뿐 아니라 밀기름을 바르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빗치개는 여러 가지 재질로 크기와 모양을 다양하게 만들었는데 머리쪽은 둥글고 얇으며 꼬리쪽은 뾰족하고 가늘다. 사진 왼쪽은 장식성을 위해 칠보를 입힌 것이며 세 번째는 자라의 등껍질로 만든 대모빗치개이며 제일 오른쪽은 뿔로 만들었고 나머지는 모두 은을 재질로 했다.
빗치개 몸체에는 갖가지 문양을 새기곤 했는데 둘째와 여섯째 빗치개에는 태극문양을 상감해 넣었으며 네 번째 백동빗치개에는 고어의 아래 아자를 사용해 빗치개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이러한 귀이개와 빗치개는 보통 빗이나 종이빗접, 면경(거울), 쪽집게, 분통, 살쩍밀이등과 함께 경대에 간직해 두곤 했다.

♣ 자료문의 053)745-5373 이무열





▲ 귀이개. 조선시대
길이 6.5cm~16.8cm




▲ 빗치개, 조선시대
은칠보빗치개는 뒤꽂이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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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꽂이



옥같이 희디흰 살결에 가느다란 눈썹, 복숭아빛 뺨, 앵두 같은 붉은 입술, 박속같이 흰 이, 가는 허리.... 옥반에 진주를 굴리는 듯한 목소리, 검고 윤기나는 삼단 같은 머리채의 여인은 다 어디 갔는가?
그런 이상향의 미인은 아닐지라도 몸에 밴 덕성과 슬기,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없는 완벽한 속내를 지닌 옛 여인들의 치장 중에서 가장 많은 정성을 괴이고 제가끔의 형세에 따른 호사를 누리려한 것중 하나가 머리치장인 것 같다.
뒤꽂이는 긴 머리채 곱게 빗질하여 동백기름 바르고 빗치개로 곱게 가리마 타고 속댕기 드려 머리 틀고 비녀 찌르고 쪽진머리가 비녀에서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머리핀과 같은 구실을 하는 장신구였다.
때로는 실용과 장식의 구실을 겸했던 뒤꽂이는 크게 장식을 위한 뒤꽂이와 가리마를 타거나 빗을 소제하는데 쓰이는 빗치개와 귀지를 파내는 귀이개뒤꽂이가 있다.
이 중 가장 화려한 것은 장식을 위한 화접뒤꽂이이다.
가는 은귀둥 머리에 각종 꽃잎과 나비, 새, 연봉, 불로초, 벌, 닭, 가지... 따위의 문양을 새기거나 칠보를 올리거나 보석을 물린 다양한 기법의 유물을 접할 수 있다.
다양한 기법의 다양한 문양이 표현된 이런 뒤꽂이류는 길상적인 의미를 충분히 표현하며 한시대를 풍미하며 규방속 여인의 일생의 반려가 되었었다.
이들 뒤꽂이 중에는 비취나 백옥으로 깍은 것도 있고 호박이나 산호, 진주, 석웅황 등을 재료로 세심한 주의와 숙련을 필요로 한 제품들이 많았다.

♣ 자료문의 053)745-5373 이무열





▲ 칠보화접뒤꽂이. 조선시대
길이 5.4cm~10.8cm




▲ 뒤꽂이. 조선시대
첫째와 여덟째는 말뚝 뒤꽂이
길이 5.2cm~8.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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