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제왕의 생애 (반양장)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사실, 궁정 음모극을 몹시 좋아하는데, 굵직굵직한 남성적인 이야기 보다 박종화의 『금삼의 피』같은 여성적인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게다가 화사한 떨잠과 어여머리와 금박휘황한 의상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오면 금상첨화이려니, 하며 본다. 당연히 사극도 좋아한다. 궁중의 비사, 음모에 관한 이야기가 잔뜩 나오는 인현왕후 이야기나 문정왕후 이야기는 더 좋다.

그럼에도 작년(또는 재작년쯤?)에 산샤의 『측천무후』를 읽었을 때, 음, 나와 중국 궁정의 이야기와는 맞지 않는 군 하였었다.

전 세계적으로 “내시”라는 존재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역사의 전면에 그 내시의 존재가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곳이 중국인 것 같다. 그. 내시. 라는 존재의 기괴함을 생각해 보라. 남자이되 남자가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도 아니고, 몸은 남성인데 성기가 없음, 그 하나로 인하여 수염마저 나지 않고, 외모도 목소리도 점점 여성화 되어가는 그 존재. 그들의 영혼은 여성이었을까 남성이었을까.

한국, 조선의 궁중 비사가 대부분 상궁 마마님들에 의해 벌어진다는 것과는 달리, 중국의 궁중 비사는 그 기괴한 존재 내시들에 의해 일어난다. 그래서 중국의 궁정 이야기는 내게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하게 읽힌다. 하여, 산샤의 측천무후 이후, 읽지 않기로 마음 먹고 있었는데, 이 소설을 집어든 이유는 일단, 쑤퉁의 소설이었기 때문이고, 가상 역사 소설이라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누천년의 중국 역사 안에서 가상의 나라를 만들고 가상의 황제를 만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하는 호기심이었다. 산해진미를 만들수 있는 재료를 잔뜩 쌓아놓은 다음에 만들어 내는 요리에 대해서는 늘 기대가 가득하게 마련이니 말이다.

이 소설은 섭국 이라는 가상의 나라, 제 5대왕 단백의 일대기다. 부왕의 오자(五子)로 태어나 할머니가 조작한 부왕의 유지에 의해 14살에 왕위에 올라 24살에 폐위되는 왕. 1인칭으로 서술되는 이 이야기 안에, 단백의 왕으로서의 치세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당연하지, 그동안 정치는 할머니 황보부인이 하였으니. 단백은 그저, 황제로서, 무지하여 잔학할 수밖에 없었던 황제로서 살아가다 폐위된다. 폐위된 후 평민으로 살아가다 줄타기 광대가 되어, 동경하였던 새와 같은 자유를 줄 위에서 맛본다는 이야기.

쑤퉁은 이 소설을 “꿈 속의 꿈” 과 같은 이야기라 말하고 있는데, 그 말이 딱 맞다. 이 소설 한편을 읽고 나면, 한편의 총천연색 꿈을 꾼 듯, 인생 무상에 관해 한번쯤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제왕이었던 남자가 줄타기 광대로 인생을 마감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그럼 너무 도식적이라 재미가 없지.) 그저, 산다는 게 뭘까, 에 관해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왕의 장남으로, 부왕이 지정한 차기 제왕으로, 누가 보아도 훌륭한 왕재였던 단문(섭국의 6대왕이 된다.)의 치세 때에 섭국이 망한다는 것을 생각해보아도.

글은, 전체적으로 꿈처럼 기괴하면서도 우아하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게, 우아하여 궁정극 특유의 분위기가 난다. 화려하면서도 규칙적이고, 규율속의 파격이 있는 우아함.

썩 괜찮은 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하오 미스터 빈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요즘 젊은 사람들 답지 않게 신문을 받아본다. 그것도 조선일보. 특별히 남편과 나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적이라서가 아니라(사실 보수적이긴 하다.) 조선일보 판촉 사원이 롯데백화점 상품권으로 유혹을 했기 때문에. 별로 읽을 거리가 없긴 한데, 주말 섹션 하나만은 볼만하다. 그 중에서도 북섹션.

이 책 『니하오 미스터 빈』도 어느 주말 아침, 조선일보 북섹션에 실려 있던 책 소개 기사를 보고 주문했던 책이었다.

중국 작가의 책은 위화, 쑤퉁을 거쳐 이 작가가 세번째.
위화와 쑤퉁이 중국에 거주하며 중국어로 작품활동을 한다는 것과는 달리, 하진은 미국에 거주를 하며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창작활동을 한다. 모국어가 아닌, 학습된 언어로 창작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인 것일까, (한국인 이창래-영어로 글을 쓴다, 벨기에인 아멜리 노통-프랑스어로 글을 쓴다.) 문체가 몹시 단정하다. 마치, 문법책에 나오는 문장들처럼. (물론 번역가의 영향도 있을테지만.)

그 단정한 영어로 그려내는 세계는 의외로 대단히 중국적이다. “중국적” 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여러가지로 생각해 보았지만, 글쎄. 한국의 “한의 정서”라는 걸, 한국인은 분명히 감지해 내고(물론 외국인도 감지해 내겠지.) 존재를 알고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중국적인 정서라는 것 또한, 분명, 중국만의 특이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위화, 쑤퉁, 하진의 소설에서 구사하고 있는 유머는 분명 한국인 작가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저, 다르다. 국민성이 다른 것과 같이.

웃음조차, 대륙적이라고 할까. 말 그대로 스케일이 다르다. 웃음의 스케일이. 웃음을 이끌어내는 방식과, 웃음을 유발해내는 상황 등이, 아, 정말 중국적이군 싶게.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와 비슷한 유형의 유머이긴 한데, 이 소설의 주인공 샤오 빈은 위화의 허삼관과 닮은 듯 하며 다르다. 허삼관이 만들어 내는 유머 뒤의 찡한 눈물 같은 게 없다고 해야하나. 무게감은 비슷한데, 그 뒤의 느낌이 다르다.

일종의 슬랩스틱 코메디를 보듯 깔깔 웃어가며 볼 수 있는 책이다. 분량도 적당하고, 한 두시간 정도 몰입해 읽기 딱 좋다.

하진, 이 작가, 글 참 맛깔나게 잘 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걸프렌즈 - 2007 제31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홍 지음 / 민음사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은 좀 뜸한 것 같지만 한 10년쯤 전에, 트렌디 드라마라는게 한창 유행을 한 적이 있었다. 최진실이니 김남주니 하는, 지금은 늙어버린 여배우들이 주연을 맡아 열심히 일을 하는 여성 직장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당시에 유행하는 아이템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드라마들이어서 그 드라마의 주연 여배우가 입은 스타일이 그대로 유행이 되곤했다.(하기야 그건 요즘도 좀 그렇긴 하다.) 그땐 미장원가서 머리를 할 때도 딱 한마디면 됐다. "고소영 머리 해주세요." (흠. 알고 있는가? 밝은 색으로 염색을 하고 층을 내어 자른 생머리 스타일을 당시엔 고소영 머리라고 불렀는데, 20대 초반 여대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였다.)

요즘 드라마는 그런 천편일률성이 많이 사라진 것 같다. 헌데... 그 트렌디 드라마의 천편일률성이 고스란히 소설로 넘어와버린 느낌이다. 이런. 소설에서 그런 걸 느끼다니 당혹스럽다. 이거야 원, 여성 소설가=트렌디 하다 라는 공식이 성립될 정도.

처음 정이현이나 고은주 정도만 해도 신선했다. 특히 정이현의 2003년 소설집 <낭만적 사회와 사랑>이 주는 상큼함은 놀라울 정도였다. 얼마나 신선하고 재미있었게. 그게 2005년 고은주의 <여자의 계절>로 이어지더니, 2006년 박주영의 <백수생활 백서>가 나왔을때는 식상했고, 2007년 이홍의 <걸프랜즈>는, 아이고 두(頭)야... 싶다. 제발 새로운 소설을 써줘. 당신들의 신변 잡기는 그만 보고 싶어! 라고 외칠까, 일기는 일기장에! 라고 외칠까... 하다가.

흠. 그래도 재미는 있다. 천편일률적인 드라마가 매번 제작 방영되어도 매번 인기있듯, 맨날 그나물에 그 밥, 글 쓰는 사람만 다를뿐 내용은 똑같은 인터넷의 신변잡기 게시판에 매일이다시피 발도장을 찍게 되듯, 하기야 재미있으니 반복되는 것이기도 하겠지 말이다.

다시, 소설이야기로 돌아가서.

가끔, 어떤 소설은, 그 소설의 내용과는 전혀 맞지 않는, 나 개인의 경험이 덧씌워져 읽히기도 한다. 소설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거나 해서가 아니라, 소설에서 지나가는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 같은 것 (중심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에대한 경험이 겹친다고 해야하나.

이 소설은 34살 먹은 중견기업의 "유진호 대리"를 중심에 둔, 34세 오세진, 29세 한송이, 22-3세 보라(성이 안나온다) 세 여자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유진호 대리는 세다리를 걸치고 있는 중이다. 주인공인 29세 한송이 양과 그나마 가장 긴밀한 사이인 것처럼 보이지만 나머지 두 여자(세진과는 첫사랑이란다.)와도 정리를 하지 않는다.

나는, 우유부단한 남자는 딱 질색이고, 애정의 감정선이 단정하지 못한 것만큼 싫은 것도 없어서, 남편이 좋았다. 이 남자는, 적당히 약았고, 적당히 닳았고, 적당히 단순하며, 적당히 순수한 면이 남아서,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 "귀찮아서" 라도 하지 않을 남자라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애정선이 단정해 진 것이 나에 대한 순수한 애정만이 아니라고 한다고 해도 뭐, 어떠랴, 중요한 건 이 남잔 단정한 연애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헌데, 이 단정하고 모범적인(자랑질 미안하다-_-) 내 남편과 유진호 대리가 한순간 겹쳐보였다. 오호라.
유대리는 승진을 했고(과장이 됐네?) 한송이에게 청혼을 한다. "승진을 하면 결혼이 좀 더 쉬울줄 알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읽다 나는 박장대소 했다. 사람들의 생각은 참 다양하구나.

결혼을 한 그해에, 나는 숨쉴 틈도 없이 바빴다. 이미 벌여놓은 일만도 한가득이어서 새로운 일을 끼워 넣는다는 건 정말 무리한 상태였다. 내년 봄으로 결혼을 미루자는 나의 이러한 말에, 남편은 수줍게(마치 이 소설의 유대리처럼 말이다!) 웃으며 말했다.

"내년 봄에 나는 과장이 되요. 결혼 소식이 사내 인트라넷에 뜰텐데, 서대리 결혼, 이러면 초혼 같지만, 서과장 결혼, 이러면 재혼 같잖아요?"

ㅎㅎㅎ 그래서 그해 가을에 우린 결혼했다. 회사에서의 승진이 결혼과 연관지어지는 사람이 또 있구나 싶어서 웃겼었다.

이 부분을 읽고나서 보니, 이 소설이 새롭게 다가왔다. (안타깝게도 후반부다.)
이게, 이 소설의 강점이 될지 약점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소설이 소설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게시판에서 종종 만났던 누군가의 연애담 한편을 읽는 기분이 들었달까. (하기야 요즘 인터넷 게시판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웬만한 작가의 필력보다 나아보일때가 있다.) 그래서, 한남자와 연애중인 세 여자가 서로 친구로 잘 지낸다는 파격적인 스토리가 전혀 파격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오지게" 재미있기만 하다.

마지막까지 그 오진 재미를 끌고가지 못하는 건 신인작가의 한계인 듯 하고.

재미있게 읽을만한 소설이다. 트렌디 드라마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문학사상사의 임홍빈 사장님을 쪼꼼 아는데, 그 분, 은근히 일본 마니아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하루키 마니아인 것 같다.

사실 한국에서 하루키만큼 잘 팔리는 작가도 드물테니까 뭐, 하루키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도, 출판사의 사장이라는 측면에서보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서두.

이 책은 하룻 밤 동안에 일어나는 이야기다. 누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띠지의 카피 문구는 참. 진정 소설과 동떨어진 광고 문구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도달하였다고 인정해 줄만하다. 아마 임홍빈 사장님 작품일지도. ㅡㅡ;;;

이 책은 자매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생인 마리의 이야기다. 하룻동안 마리의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과 마리가 만난 사람들, 그 사람들과 연결되는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일본의 현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지만 인간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을 가능하게 해 주지는 않는다. 하루키답게 스피디하고 재미있게, 또 쉽게 줄줄 읽히기는 한다.

가끔. 하나의 주제에 관해 계속해서 접하게 될 때가 있다. 어쩌면, 늘상 주어지는 정보였음에도 내가 그것에 관해 깊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평소와는 다르게 그것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이게 되는지도 모르지만, 여튼. 그런 우연은 놀랍다.

얼마전 읽은 공지영의 장편소설에서도 사형수와 법체계에 관해, 인간의 선과 악에 관해 깊이 생각해보게 만들었었는데, 이 책에서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리 언니 에리의 옛 남자친구의 친구(관계가 뭔가 복잡... ㅡㅡ;;)인 다카하시를 통해서.

특별한 줄거리나 이야기가 있기 보다는.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一日)"이 구보의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었다면 이 소설은 시간의 흐름을 충실하게 따른다. 작가는 철저하게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라는 주어를 사용함으로써 독자마저 작가와 같은 위치에 놓아두고 등장인물들을 철저하게 관찰하게 만든다. 그런면에서 독특했던 작품이지만. 글쎄 별로 생각을 많이 해 보게 만드는 건 아니었다. 너무 구태의연한 결론을 이끌어내기도 했고.

다작은 별로 좋지가 않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 윤수가 소리쳤어요. 신부님, 살려주세요. 무서워요. 애국가를 불렀는데도 무서워요......"
공지영,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푸른숲, 2005, p. 293」

어이가 없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나는 얼핏, 소설을 읽다가 우는 일이 가능한가...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나를 울린 소설은, 최소한 내 기억에는 없다.

소설은 재미있는 것이고, 그 서사의 줄기에 푹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었는데, 그야말로 고작, 내가 그다지 괜찮은 소설가로 꼽지도 않았던 고작 공지영의 소설에, 어이 없게도 나는 울고 있었다.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러, 별 특이할 것도 없는, "살려주세요, 무서워요."라는 그 구절에서, 나는 소설 읽기를 그치고 울었다. 정확히 말하면, 머릿속으로 소설 내용이 들어오지 않아 어찌된 일인가 하고 봤더니 내가 울고 있더라.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소리까지 내어가며. 바로 그 줄을 읽기 직전까지도 나는 울 염도 내지 않았었다. 코끝이 찡해 온다든지, 코 허리가 시큰해 온다든지, 눈이 맵싸해 진다든지 하는, 눈물과 울음의 전조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갑자기. 그 한줄에 뜻밖에도 울음이 터졌다. 그냥 울음이 아니라, 슬퍼 죽겠는 통곡이. 끝내는 몇장 남지않은 뒷부분을 읽는 것을 포기하고 책을 내려놓고 한참을 울다가, 그리고 책을 마저 읽었다.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사형제도를 유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저 사람을 어떤 명목으로든 내가 낸 세금으로 밥을 먹여가며 살려 두어야 한다는 점을, 그가, 나에게는 아무런 해악을 끼치지 않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힘들여 벌어들인 돈의 단 1전의 몇만분의 일이라도 그의 밥술에 포함된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이건 여전히 과거형이 아니다. 그냥, 참을 수 없다.

아직까지도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2004년 7월, 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유영철의 눈빛이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코 위까지 마스크를 하고 있는 상태로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찍은 그의 사진, 아직까지도. 나는 그 눈빛이 소름끼치고 무섭다. 진심으로. 그냥, 가끔은 악몽을 꿀정도로. 그다지 해상도가 높지도 않은, 인터넷 기사 속의 작은 사진 한장에도. 나는 그냥 무섭다. 이건 분노나 증오가 아닌 그냥 순수한 공포의 감정이다. 그의 사형은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너무 가볍지 않느냐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던 나인데.

글쎄. 공지영이 그려낸 사형수 정윤수는 너무 소프트 했지, 사실. 게다가 억울한 사형수 이기도 했고. 지나치게 매력적인데다 은근히 지적이기까지해서 그래 소설의 남자주인공 감이로구나. 했었지만.

그래도 맙소사. 내가 울 줄이야. 소설을 읽다가, 그 소설의 내용 때문에 울게 되는 사태가 올 줄이야. 이렇게 울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소설을 읽다가 운 적이, 적어도 내 기억하는 한에서는 없다는 걸.

소설의 여주인공은 끊임없이 상투적인 것이 싫어요, 싫어요, 라고 이야기 했지만. 이 소설은 공지영 식의 상투적인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고, 적당히 통속적인 면도 있고 그리고 몹시, 재미있게 읽힌다. 잠들기 전 잠시 읽으려고 잡았던 책인데, 끝내 나를 울린 것으로도 모자라서 일어나 컴퓨터를 켜게 만들기 까지 했으니. 브라보.

죄를 짓는 다는 것은 뭘까. 내가 죄를 짓지 않고 살았다고 감히 말 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기독교의 원죄에는 동의하지 않고, 모니카 수녀의 말대로 위선적일 뿐인 사람이라고 해도, 선이 뭔지는 알고 그 선을 진심은 아니라도 행하려고 최소한 생각까지는 해 본 적이 있다(늘 그랬다는 거짓말은 차마 못하겠다.)는 점에서, 그래. 나는 죄를 짓지 않고, 적어도 교도소에 들어갈만한 죄를 짓지는 않고 살아온 것 같다. 그 증거로, 나는, 전과가 없는 걸.

하지만. 그건. 정말로 내가 좋은 사람이어서일까? 교도소에 들어가 있고, 죽은 영혼조차 목에 검은 자국이 생긴 그 사람들보다 나의 영혼에는 더 많은 선의 요소가 들어가 있어서 그랬던 걸까? 글쎄. 그냥 나는, 좀 더 안전한 곳에 태어났고, 좀 더 운이 좋은 길을 걸어왔고, 살다보니 죄를 지을만한 짓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일 뿐인지도 모르잖아?

그럼. 나는. 사형수들의 밥수저에 내가 낸 세금의 몇십만분의 일이라도 포함되는 게 싫어요,라고 말을 할 수 있나... 사진 한장의 눈빛을 공포로 기억할 자격이 있을까. 그의 눈빛이 나의 공포로 기억되기까지, 나는 어쩌면 그의 눈빛이 그렇게 변화되도록 만드는데 몇십만분의 일이라도 기여했던 것은 아닐까.

하릴없이. 울었다.
내가. 울다니. 고작. 공지영에
공지영의 랭크를 단번에 몇십 단계위로 끌어올린 책.
적어도 나에게는.
브라보 공지영. 당신이 이겼어. 나는 이제 당신을 그닥 좋아하진 않아요, 라는 말은 못해. 당신의 소설이 그닥 괜찮진 않지, 언어 감각은 있어도, 라는 시건방진 소리 따위도 하지 않을 거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