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 - 한 젊은 예술가의 뉴욕 이야기
박상미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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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전, 줌파 라히리의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을 읽었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로는 《축복 받은 집》, 《그저 좋은 사람》에 이어 세번째 책이었다. 첫번째 소설집 <축복 받은 집>을 무척 괜찮게 읽어놓고도 알수 없는 이유로 사지 않고 미뤄두었다가 그보다 늦게 나온 <그저 좋은 사람>을 먼저 읽고서 읽은 책이었는데, 역시나, 참 좋았다.  

그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문체라고 할까 그 분위기가 좋았다. 줌파 라히리의 문장은 촘촘하게 직조된 실크의 느낌을 주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빈 공간이 없이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랄까. 이건, 내가 좋아하는 김훈의 문장과는 또다른 대극점에 있는 문체인데, "문장과 문장 사이에 블랙홀이 있"고 (문장과 문장사이의)"전압이 높은"(따옴표 안은 김훈 본인의 표현 인용) 김훈의 문체를 좋아하던 나로서는 이렇게까지 촘촘한 문장을 좋다라고 느끼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호감이 갔다.  

 가끔, 번역 소설을 읽다보면 원문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이 문장의 원문은 무엇이었을까, 원문도 이런 뉘앙스를 풍기고 있을까, 이 번역자가 과연 바르게 옮긴 것이 맞는 것인가,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청바지 위로 가려운 곳을 긁고 있는 듯한 이런 느낌은 번역 소설을 좋아하면서도 좋아하지 않게 되는 이유가 되어주기도 하고, 영어에 관해 거의 공포심 수준의 울렁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어 공부를 해보고 싶게 만드는 순간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은, 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증오심도 생기고, 이런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 번역까지 하게 되는 사람에 대한 열등감까지. 아. 나 정말 이러다 언젠가는 영어를 정복해버리고 말거야. 나의 불행한 잉글리쉬 포비아. 

이럴때 나는 번역자에 관심을 가진다. 김연수는 김연수 스럽게 번역을 하고 이윤기는 이윤기 스럽게 번역을 한다. 번역은 제 2의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번역된 소설은 자연스럽게 번역자의 스타일이 반영되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니까. (적어도)내 머릿속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움베르토 에코는 닮은 꼴이다. 둘다 이윤기의 번역으로 읽었으니. 그때 내 눈에 띈 책이 이 책이었다. 

한때, 이곳이 아닌 저곳을 꿈꾼 적이 있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내가 모르는 곳에서의 새로운 삶은 말 그대로의 매혹이었다. 내가 선택하는 새로운 탄생이랄까. 그렇다고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저 떠난다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트인다는 기분이 들곤 했었다.  

그렇게 내가 선택한 곳은 뉴욕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미드는 <C.S.I> 시리즈와 결혼한 뒤 남편과 함께 본 <프리즌 브레이크>가 전부인 내가 뉴요커에 대한 어떤 환상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나는 아직도 뉴요커가 뭔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대한 상징인지도 모르고 더 솔직히 말해서는 관심도 없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내가 굳이 뉴욕을 선택한 건 아주 단순한 우연이었고, 뉴욕은 뉴욕이 아니라 런던, 파리, 시카고, 헬싱키 어디여도 상관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상관없고. 그곳이 어디든 나는 떠나지 않을테니까.  

 어쨌든, 떠난다는 상상만으로도 숨길을 틔울수 있을때, 난 뉴욕에 관한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산 책은 뉴욕 여행 안내서였고, 뉴욕에 사는 사람들이 쓴 책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때 산 책이 이 책이다. 사 놓고 3-4년이 넘도록 펼쳐보지도 않았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줌파 라히리와 번역자 박상미는 전혀 달랐다. 문체도 느낌도 분위기도 모든 것이 다. 소설가와 미술가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만큼 달랐다. 이 책의 박상미는 그저 평범한, 압구정동에도 있을 법하고 인사동에도 있을 법한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냥 뉴욕에 관한 책이었다. 뉴욕에 사는 한국 사람의 여행기가 아닌 생활기. 줌파 라히리에 대한 기대덕에 약간은 실망스럽기까지 한 책이었다.  

그렇지만, 이 책만을 놓고 보자면, 그럭저럭 괜찮다. 찬양에 치우치지 않고, 그렇다고 뉴욕에 억눌리지도 않고, 외국 문화에 대한 반감도 없이 말 그대로의 생활기로 잘 읽힌다. 한국 도산공원 앞의 이야기와 비슷하달까. 나고 자란 문화가 아닌 전혀 새로운 문화 속으로 뛰어들어 사는 사람의 이질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뉴욕에 잘 동화되어 사는 사람이구나, 잘 살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마저 든다. 그리고 그 안도감은 "이곳이 아닌 저곳"을 꿈꾸던 나의 숨길을 좀더 크게 열어준다. 그래, 뉴욕가서도 잘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문득 무럭무럭 든달까. 

그런 의미에서 특별한 책이었다. 한국 사람이 외국에 살면서 그 나라의 문화에 관해 쓴 책인데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고 그래서 편안하게 읽힌다.  

밑줄 그은 구절 하나.  

"사람이 어딘가 쏟을 수 있는 열정이나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거든. 한 곳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버리면 다른 곳에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적어진다고 생각해."
(p.197)

 ps. 재미있게도, 이 책에도 김훈이 나온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김훈의 소설 <화장>에 대한 감상이. 이 사람도 김훈에 감탄하는 구나, 신기했다. 결국 이쪽 끝과 저쪽 끝은 서로 닿아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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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1-23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아시마님. 떠났다가 돌아오시는 건가요, 아니면 아주 떠나시는 건가요?

아시마 2009-11-23 12:17   좋아요 0 | URL
당근 돌아오죠. ㅎㅎㅎ 한 4년 있다가 와요. 아직 떠나는 것도 좀 남았구요.
아참, 뉴욕으로 가는 건 아녜요. 글 써놓은 게 꼭 나 뉴욕가, 라고 써놓은 것 같아서 사족 달아요. ^^

다락방 2009-11-23 12:41   좋아요 0 | URL
사족 땡큐에요. 뉴욕 가시는 줄로 알았거든요. ㅎㅎ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어느해의 크리스마스 였는지, 닉 혼비의 《어바웃 어 보이》를 읽으며 낄낄거린 생각이 난다. 함께할 사람 없는 크리스마스의 우울을 멋지게 날려준 유쾌한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도 전혀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인 "책에 관한 책" 인데다, 닉 혼비가 썼다니까. 

물론 이 책도, 닉 혼비 답게 유쾌하다. 순간순간 빵빵 터지는 부분도 있고, 꽤 진지한 통찰을 보여주는 부분도 있고. 작가 매제에 관한 구절이나 <빌리버> 편집진에 대한 구절은 나올때마다 웃겼다. 책에 관한 관점도 비슷한데가 많고, 책에 대한 취향도 닮았다. 

그런데,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원래가 이런류의 취미와 관련된 책은(독서도 취미의 일종이란 전제하에) 취향을 타기 마련이지만, 이번에 새삼 느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책은 취향을 타는 것이구나. 라고. 

물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닉 혼비의 독서는 영미권 문학(그것도 디킨스와 체호프를 제외하면 최신의 현대문학)에 국한되어 있다. 치중도 아닌 국한. 책에 관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책이 내가 읽은 책이기만 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언급되는 작가에 대한 정보나 책에 대한 것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영미권 현대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은 나로서는 이 사람이 저 사람 같고, 저 사람이 이사람 같고, 저 책이 이 책 같고, 이 책이 그 책 같아서, 도무지 책장이 넘어가지를 않았다. 중간중간에 달려있는 옮긴이의 주석을 보면 이 책에서 언급되어 있는 책들의 절반 이상이 이미 한국에서 번역되어 있는 것 같던데, 디킨스와 체호프를 제외하고라면, 내가 읽은 책은 거의 없어서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게 만드는 게 닉 혼비의 저력일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간 내가 한국사람이 쓴 책에 관한 책을 즐겁게 읽었던 건, 내가 알고 있는 작가나 나도 읽었던 책에 관해서 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었다. 이건 달리 말하면, 영미권의 현대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무척 재미있고 유쾌하게, 닉 혼비의 농담을 즐기며 읽을 수 있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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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1-22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 아시마님. 저도 이 책을 꽤 즐겁게 읽은건 제가 읽고 아는 작품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었어요. 만약 닉 혼비가 언급한 작품들이 죄다 제가 모르는 것들이었다면 지금 읽었던 것처럼 재미있게 읽었을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정말.
 
좋은 이별 - 김형경 애도 심리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울할 때, 아니, 우울까지는 아니고 기분이 가라앉거나 처질 때 나는 책을 사거나 읽거나, 책장을 정리하거나 한다. 사방벽을 책으로 가득 채운 서재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기분이 많이 나아진다. 서재에서 내가 찾는 것은 안정감이다. 책을 주문하고 책장을 책으로 메우는 건 이미 나에겐 일종의 강박 수준이다.  

정을 주는 것이 두렵다. 무언가, 특히 그것이 생명체일 경우엔 헤어짐보다 정을 붙이고 있는 동안의 책임감이 더욱 두렵다.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상대가 원하는 만큼의 관심과 애정을 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은 강박으로 발전해서 관계를 넓히는 자체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만큼만, 생명체와의 관계는 내가 돌보아 줄 수 있을 만큼만으로 한정짓는다. 사회생활을 할땐 정기적으로 휴대폰의 메모리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지우는 게 습관이었다. 결혼과 함께 (적어도 내겐) 축복받은 칩거의 세상으로 들어와서는, 웬만해선 휴대폰에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는다.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일종의 선택과 집중이랄까. 내게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가까웠던 누군가가 멀어지는 것만큼이나 싫다. 

헌데...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사람이 떠난 자리를 책으로 메웠다. 이책의 구절처럼 "사물들은 멋대로 떠나버리는 대상보다 더 쉽게, 더 잘 통제할 수 있기 때문"(p.133)인 것만은 아닌 것 같고, 사물은 무정하니까. 관심을 주지 않아도 내 마음이 무겁지 않으니까. 나에게도 특정한 몇몇 사람 말고 관심을 표명할 뭔가가 필요하니까. 더 정확하게는 나는 물건, 책을 "자신의 일부처럼 인식하면서 정체성의 한 요소"(p. 137) 로 느끼기도 하는 것 같다. 

실존하는, 실체로서의 타인의 상처받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도 싫고, 누가 나의 상처받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도 싫다. 타인을 위로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고, 그 사람의 상처받은 마음이 전해져와서 아프고 무겁다. 감당할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타인에게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다. 그 사람도 아프고 무거울테니까. 그래서 그냥 책이나 읽고 있는거다. 이건 분명 약간의 자폐 성향인거고, 이 책의 말대로 "독서는 그 자체가 이미 자폐적인 행위" (p.155)다.  

나의 독서 목록은 다양하다. 물론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있고, 소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나의 독서는 온갖 잡다구리한 곳으로 뻗어나간다. 김훈 식으로 말을 하자면, 계통을 찾을 수 없는 독서다. 이걸 김형경은  

"내가 책의 종류와 유형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던 것은 내 무의식 속 빈 공간이 그토록 크고 깊었다는 의미"(p.228) 

라고 풀이한다. 그런걸까. 

김형경의 글은 읽다보면 아프다. 맘이 아프다 슬프다 이런 의미가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몸이 아프다. 솔직하게 말해서 김형경의 글을, 특히 소설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고, 소설가 김형경이 그다지 글을 잘 쓰는 작가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데도 역시나 김형경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은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인데 어쨌든 새 책이 나올때마다 꼬박꼬박 사서 읽고 책장에 모셔둔다. 가끔은 김형경이 생각나기도 한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읽다보면 이 사람도 참 많이 아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이 아팠구나, 말 할 곳도, 들어주는 사람도 없어서 힘들었구나,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아프구나, 많이. 

하는 생각.  

김형경의 글은, 내가 알고 싶지 않은 내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내 속을 들여다보게 만들면 그건 감사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들여다보고 나서도 느낀다. 아... 나 이거 알고 싶지 않았는데, 라고. 이 책을 읽고서도 그랬다. 나, 내가 책에 집착하고 있다는 거 알지만, 왜 집착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라고. 난 왜이렇게 책이 좋지? 라는 건 그냥 그 의문의 수준에 만족하면 되는 거였는데, 그 뚜껑을 왜 열어버리냐고, 막 투덜거리고 싶어진다.  하나도 감사하지 않아.

그리고 나는 살포시, 그 뚜껑을 다시 닫는다. 알겠어 알겠어. 나에게 애도가 필요한 거 알았어. 하지만 나는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나는 다시 살포시 뚜껑을 덮어둔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또 김형경에게 변명을 한다. "독서는 훌륭한 애도 행위"(p.229) 라며. 나 애도 하고 있어. 그것도 매일 매일.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나는 내 마음의 한자락을 보여줬다. 말하기 표현하기, 이런게 정신건강에 무척 중요하단다. 그리고 또 한번, 독서는 훌륭한 애도 행위가 된다고 한다. 그러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읽어라, 그것이 무엇이든.  

마음속에 심연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나의 상처를 과장하고 싶지 않다. 나는 대한민국을 살아온 사람 평균치 만큼의 빈 공간을 가지고 있는 아주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표현 방식이 어떻건 누구에게나 이만큼의 빈공간은 있을 거다. 그 빈 공간때문에 아픈 사람이 있다면, 김형경의 글은 아프지만 따뜻한 위로가 된다.  

글을 잘 쓰건 못 쓰건, 내 속의 심연을 들여다본 것이 감사하건 아니건, 

때때로 나는, 김형경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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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고양이 2009-11-23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위로가 되는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아시마 2009-11-24 01:47   좋아요 0 | URL
제가 감히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었다니 기쁩니다. ;)
 
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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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린 소년이(사실 소녀라도) 화자가 되어 자신의 고난에 찬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글을 읽는 건 참 아프다. 어린소년을 화자로 택하기에 자연스레 오게되는 글 전체의 천진함이 더욱 아프다. 끝내, 나를 울린건, 열살 인줄 알고 있었던 열네살 모모의  

"사람은 사랑할 사람이 없이도 살수 있나요?"  (p. 269)

라는 질문이었다.  

한때는,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사랑이 꼭 필요하다고. 나를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나의 존재가 의미있어 지는 거라고. 그런데 살면 살수록 그게 아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어야 산다. 사랑할 대상이 없는 사람에게 세상은 잿빛이다. 첫사랑의 시작과 함께 다가오는 세상의 팡파르를 누구나 기억한다. 바람은 더욱 상쾌해지고, 하늘은 더욱 푸르러지고,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특별해지던 지명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한 귀퉁이, 사회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모모는 늙은 창녀 로자 아줌마의 보살핌으로 살아간다. 그는 끝내 로자 아줌마에게 "양모"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거부하지만, 그 어느 엄마가 로자에 대한 모모 만큼의 절실한 사랑을 받아볼 수 있을까. 

 가끔 TV에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이들의 비참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를 낳아 기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죽은 엄마를 한달이고 두달이고 죽은 줄도 모르고 방에 뉘어둔채 살아가던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곤 했다. 도저히 그 아이의 목소리(음성변조가 된 것이라고 해도.)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나를 돌봐주지 못한다해도, 그저 누워만 있는다고 해도,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고, 내가 무작정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존재의 죽음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이미 죽어버린 엄마라고 해도 그와의 행복한 공존을 파괴당하고, 이제는 정말 오갈데 없이 '사랑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의 목소리를 어떻게 듣고 있나. 아이이기에 유창한 언어로 그 기분을 표현할 수도 없이, 그저, 엄마가 죽은 줄 몰랐어요. 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는 그 아이를. 정말 그 아이를 어떡하니.

세상의 끝에 다다른 두 사람, 늙은 창녀 로자와 창녀와 정신병자의 아들 모모에게는 서로밖에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 안한다 보다 더욱 중요한, 내가 사랑하고 나의 사랑을 받아줄 존재. 그 절박함에 마음이 에여왔다. 그리고 그들 주변의 가난하고 대책없지만 무작정 따뜻하고 그야말로 대책없이 인정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을 눈물섞인 웃음이 아니고는 볼수가 없다. 

이 소설은, 기묘하리만치 이중적이다. 정말 비참한 현실이고 비정한 현실인데도 불구하고 단 한명의 악인도 등장하지 않고, 현실적인 악인이라도 이 소설 속에서만큼은 선량하고 인정많게 행동한다. 그건 화자가 14살 소년이기 때문에 가지고 올 수 있는 천진함일텐데, 실제로 모모는 그다지 천진난만 하지도 않고, 세상을 믿지도 않으며, 지나치게 조숙하기까지 하다. 세상을 믿지 않는, 이미 세파에 닳고 닳았음에도 어쩔수 없이 천진할 수 밖에 없는, '사랑할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모의 모습이. 정말이지 참. 

로맹 가리, 또는 에밀 아자르의 소설은 이게 세번째인데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유럽의 교육>-이 소설도 소년이 화자다) 이 작가의 글을 읽고나면 늘, 슬프다고만은 말할수 없는 뭔가 그냥 마음이 아프다고 밖에 표현할수 없는 기분이 된다. 아. 그래도 역시 슬프다.  

로맹 가리의 소설은, 여파가 꽤 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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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1-13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앞의 생』도『새벽의 약속』도 좋았지만, 저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가 정말이지 자지러지게 좋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소설집을 세개만 꼽아보라면 그 중 하나는 로맹 가리가 될 거에요. 어쩌면 가장 우선 순위를 차지할지도 모르구요. 네, 정말 여파가 세죠.

아시마 2009-11-13 09:24   좋아요 0 | URL
아. 전글에서 다락방님 서재가 저한테는 지뢰밭같다고 썼는데, 쿨럭. 이제는 제 서재에도 지뢰를 심어두시는 군요. 하.하.하.
이해할수 없지만, 전 왜 로맹가리의 소설이 제가 읽은 세권이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전 약간 전작주의자에 가까워서 웬만하면 다 수집하는 편이란 말이죠. 새벽의 약속이 뭔가 검색했다가 하늘의 뿌리까지 두권 다 장바구니에 담아버렸어요.
이제 전 돈 마련하러 가야해요. 남편 등은 하도많이 쳐서 더이상은 칠 등도 없다는. ㅠ.ㅠ
 
국시꼬랭이 동네 시리즈 15권 + DVD 세트 국시꼬랭이 동네
강동훈 외 그림, 이춘희 글, 임재해 감수 / 사파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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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학 진학을 하느라 서울로 오기 전까지 살았던 고향집은 작은 정원이 딸린 주택이었다. 물론 부모님은 아직도 거기 살고 계신다. 하숙집을 거쳐, 직장생활을 하던 몇년간의 원룸생활이 이어졌고, 결혼과 동시에 나는 아파트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주부로서, 어떤 집의 관리자로서 내가 주택에 살아본 적은 없으니 아파트가 주택보다 얼마나 편한지는 알수없으나 생활의 편의라는 면을 제외하고라면 아파트는 참... 자연이라는 측면에서는 삭막한 공간이다. 자연에서 소외된 삶은 삭막해진다.  

꽃잎 뜯고 솔잎 뜯고 흙 퍼담아 하던 소꿉장난에 대한 기억은, 아파트에 사는 내 딸들에게는 딴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이건 어떻게 설명을 할수가 없다. 내 딸이 아파트 내부 공간에서 보는 꽃이란 고작 양란이나 분재, 그도 아니면 꽃다발 정도니까. 호박꽃의 수꽃과 암꽃이 어떻게 다른지(어릴때 소꿉장난을 할때 열살 미만의 나이에도 암꽃은 따면 안된다고 알고 있었던 나였다.) 풀의 이름이 뭐가 있는지. 풀꽃 도감과 야생화 도감을 사 주어도 아이에게 그건 지식의 차원이지 놀이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러니 점점, 자연과 더불어 사는 법은 잊어가고, 내 아이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과일 모형과 역시 플라스틱으로 근사하게 엄마의 부엌을 본떠 만든 부엌에서 깨끗하게(?) 소꿉장난을 한다. 이건 뭔가... 아니다 싶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자라 아파트에서 살아갈 내 아이를 보면, 이 아이가 상실한게 무엇인지, 이 아이 스스로는 알기나 할까, 하는 한숨이 난다. 하긴, 가져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한 상실감은 생기지도 않겠지. 

그러다 발견한 책이 이 책이었다. 이 책은 "잃어버린 자투리 문화"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도대체 잃어버린 자투리 문화가 뭔가하고 봤더니, 내가 열살 미만에 하고 놀았던 놀이들이다.(하긴 나도 이 책에 나오는 풀각시 만들기나 풀싸움을 해 본일은 없지만.) 외국에서 만들어 낸 창작 그림책을 보듯 이 책을 본다, 내 아이는. 읽히다 보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래도 이게 한국의 놀이문화라고, 니가 잃어버린 문화라고 알려주고 싶어 책장의 다른 책들보다 자주 꺼내 읽힌다.  

그리고. 책의 소명에 관해 생각한다. 이제는, 아주 시골에 사는 아이들을 제외한다면 이 놀이를 하며 자라는 아이도 없겠지. 그러면 역사책에 기록될 가치가 없는 이런 소소한 놀이문화들은 잊혀지겠지. 그러나 이 책이 존재함으로 해서 그 놀이들은 힘을 얻는다. 지금까지 천년을 유지해왔던 그 문화가 앞으로의 천년을 버티어나갈 힘을. 

이 열다섯권의 책은 글쓴이는 이춘희 한 사람이지만 그림을 그린 이는 다양하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게 한권한권 읽어나갈 수 있다. 난 전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책은 그나마 전집의 냄새가 좀 덜난다. 

이 책을 사고 얼마되지 않아 아이의 소꿉을 챙겨들고 벚꽃지는 공원으로 나가 꽃밥으로 소꿉놀이를 해 보았다. 벚꽃지는 계절이 지나 이제 아이와 함께 갔던 공원의 잔디는 모두 누래졌는데도 아이는 공원을 지날때 그 꽃밥을 지어 소꿉놀이를 했던 이야기를 한다.  

언젠가는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놀이를 다 해보는게 나의 소박한 소망이다. 그러려면 시골로 이사를 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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