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렛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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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습관이랄지- 사고 방식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기호에 관한 문제다. 음식, 이라든가하는 형이하학적인 것에서, 음악이나 문학같은 형이상학적인 것까지, 나의 그러한 습관은 늘 이어진다.

누구나 그렇듯, 새로운 것을 접했을 때 좋으냐, 싫으냐 구분을 짓게된다.

편협한 부분을 수도 없이 가지고 있는 나는, 이러한 부분에서도 끝도 없이 편협한지라 한번 싫다고 마음 먹은 것은 두번다시 돌아보지 않아 문제가 된다. 그러나 또한 귀가 얇은 나는, 내가 싫다고 젖혀놓은 것을 누가-특히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좋아한다고 말을 하면 슬그머니 걱정이 된다.

정말 매력적인 부분이 있는데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걱정이 중첩되기 시작하면, 나는 내가 젖혀놓았던 것을 다시 들춰보게 된다. 내가 혹시 놓친것이 있지나 않나 꼼꼼히 살피면서.

나에게 신경숙이라는 작가는 그런 작가였다. 처음으로 읽었던 신경숙의 작품 "외딴방",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대학 동기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풍금이 있던 자리", 어느해였던가 히트를 쳤기에 읽었던 "오래전 집을 떠날 때" 그러한 소설들을 거쳐 다가간 "깊은 슬픔".  깊은 슬픔을 읽고나서 나는 신경숙을 내 마음속에서 젖혀 놓았다.

별로 재미도 없고 취향에 맞지 않아도 꿋꿋히 읽어내는 능력을 가진 나는(실제로, 일종의 네임 벨류랄까, 그런 것을 가지게 되는 작가들은 최소한 "읽을 수 있는"글을 써낸다는 것만은 사실이므로 그것을 별로 능력이라고 칭할만한 것도 못되지만) 그 당시까지 나온 신경숙의 작품 거의 전부를 읽었던 셈이었으니 나의 판단이 섣부르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신경숙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 것은, 웹상에서 만난 누군가였다.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읽으면서, 신경숙에 대해 조금쯤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보통, 소설 한편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끽해야 3-4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나는 누워서 책을 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책상에 앉아서는 도저히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리 습관을 들였던 탓인지도 모른다- 마음먹고 집중하면 두어시간만에도 한권을 읽어치운다. 아주 재미없는 소설이거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소설, 새로운 사상이나 설정때문에 천천히 곱씹어야 하는 소설이 아니라면 보통의 경우 그러하다.

나를 바이올렛 앞으로 끌어들인 것은 내가 몹시도 사랑하는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의 안내문 때문이었다.

"신경숙의 소설에선 처음부터 독자를 휘어잡아야 한다거나 도중에서 독자를 놓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나 잔꾀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중략)--- 나에게 신경숙 문학의 매력은 식물이 주는 위안과도 같다."


첫 문장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마지막 문장은 바이올렛을 읽고 싶게 만들었다. 나는 식물이 주는 위안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고, 그것이 얼마만한 위안인지도 알고있다. 그러한 식물이 주는 위안과 같은 것을 주는 소설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바이올렛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은 모두 합해 다섯시간 정도? 침대에 누워 잠들기 직전까지 꼼꼼히 읽었으니 대충 따지면 그쯤되겠다.(참고로, 나는 잠들기 전에는 소설책을 읽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아예 밤을 샐 마음으로 잡지 않는다면. 보통 소설을 잡으면 밤을 새게된다.) 신경숙류의 문장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좀 더 스피디하고, 명확한 문체가 좋다. 그러나 맛난 음식을 먹듯 꼼꼼 아껴 읽었다.

재미의 면에서 이야기 하라면 할 말이 없다.

거의 하이퍼 리얼리즘(hyper realism)에 가까운 배경의 설정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원동력처럼 느껴졌을 정도라면.

"기차는 7시에 떠나네"에 이어 "바이올렛"에도 등장한 서울시 종로구.

이곳은 내가 살았던 곳이다. 평창동, 세검정, 광화문, 종로, 제일은행 본점과 교보문고, 세종문화회관, 삼성병원. 삼청공원, 총리공관. 이런곳들. 나 역시 늘상 이곳들을 헤메며 산다. 나는 이 지역의 고즈넉함과 고색창연함을 사랑하고, 강남과는 다른 이곳의 공기를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곳을, 이 작가 역시 이만큼이나 사랑하는 구나 싶어, 신선했다.

글을 읽으며, 아아. 이 작가는 참 열심히 쓰는 구나. 싶었다. 오래 오래 생각하고 꼼꼼히 조사해서 참 열심히 쓰는구나. 자신의 주변을 참 많이 사랑하는 구나. 싶었다.

여전히, 신경숙이라는 작가를 사랑하지는 않으나-

오산이, 라는 그녀, 잘려버린 혀를 가진 그녀, 늘 관음의 대상이 되는 그녀.

인간이 이렇게까지 외로워할 수가 있을까 싶어, 읽는 내내 통곡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외롭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마는, 어찌 이리도 외로워 하나 싶어.

그러므로 결말 역시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외로움에 관하여, 끝도 없이 생각하게 만들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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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전10권 세트 - 반양장본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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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거대 산맥 토지를 읽고 난 직후, 바로 잡은 소설이라서 그럴까. 도무지, 도무지. 이건, 도대체가, 싶어지는 소설. 조정래를 몹시 좋아하는데, 정말이지 실망스럽다. 이 조정래가, 태백산맥을 쓴 그 조정래 맞나, 싶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오롱이 조롱이 생김새도 능력도 다아 각각인 법처럼, 한 작가에게서 태어나는 작품도 다 오롱이 조롱이 인 것이 당연하다는 것 쯤, 알고 있지만.
흠. 뭐랄까. 태백산맥에서 아리랑, 한강까지 내려오는 그 하향 곡선이 너무 가파르다고 해야 하나. 최소한의 기본기, 라는 것이 있는 것인데- 움.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간다는 것만은 인정하지만, 그것만으로 조정래 답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실망스러운 소설. 달걀같던, 계란같던, 꽉 차고 군더더기 하나 없던, 그 완벽한 구성미에 문체미학을 선보이며 반짝이던 태백산맥의 아름다움이 아리랑에서 좀 흐려진다- 싶더니, 한강에서는 완전히 망해 버렸다.
뭐랄까.

사건은 있는데 인물이 없는, 소설.

짧은 소설-열권이면 결코 짧지 않은데... 말이다.- 안에 51년 이후의 격변기 한국의 상황을 몽땅 다 담으려고 하다 보니, 소설이 지나치게 산만해 진다. 이 작가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궁금해 지게 만든다.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시선은, 연좌제, 도시 빈민층, 농촌 부채에 시달리는 농민층, 졸부, 정치판, 야당 국회의원, 개천에서 용난 고등고시 당선자, 군인, 카투사, 양공주, 대학생, 데모대, 복부인들, 방적 공장 여공, 철공소 직원, 몰락한 독립지사의 자손, 재봉소 시다, 넝마주이, 깡패, 극장, 가발공장 여직원,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경부고속도로 건설, 전라도 차별(지역감정)문제 등등등을 정신없이 비추는 것으로도 모자라, 월남전, 라이 따이한 문제, 독일 파견 광부, 간호원 등등까지 비춘다.

한마디로, 정신이 없다. 이쯤되고 보면, 도대체 누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지, 중심인물이 누구인지, 그 인물의 성격이나 사상이나, 인생관이 무엇인지 따라가는 것 초자 허겁지겁이 되는 것이다. 인물은 흐려지고 사건들만 남는다.

소설의 스케일이 큰 것이야, 워낙에 조정래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기는 한데... 이거야, 원, 싶다. 태백산맥의 전라남도 벌교면, 묘사가 눈 앞에 보이는 듯 했던 그 완벽한 묘사가, 그 완벽한 문체미학이 그야말로 완벽하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잠시, 생각을 해보면,

태백산맥-전라남도 벌교, 지리산, 서울
아리랑-전라남도 지역(범위 넓어짐.), 서울, 간도, 하와이, 러시아
한강 - 전라남도, 서울, 독일, 베트남.

이렇게 따지면, 아리랑에 비해 한강이 과히 스케일이 커진것도 아닌데, 왜 굳이 배경이 넓어져서 흐트러진 것처럼 여겨질까?
다시한번 말하지만,
인물은 없고 사건만 있는 소설. 인물과 소설이 따로 논다. 특히 로맨스라면 임채옥과 유일민의 사랑이 거의 유일하다 시피 한데, 도대체가 이들의 애정도 아무런 공감이 가지 않는다. 유일민을 사랑한다는 임채옥의 말은 느닷없고, 두 사람의 행동은 그야말로 신파다 싶다. 짜증스럽다.

꽤 큰 역할을 차지하고 앉은 강숙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도대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뭘 말하고 싶은 것인지, 뭐~ 싶다. 막 짜증이라도 내고 싶단 말이다.

유별나게 괜찮은 인물도 하나 없으면서(즉 중심이 될만한 인물이 없으면서) 주변의 수많은 인간들에게 공정하고 동일한 역할을 할당해주려다 보니, 지나치게 산만해 지는 것이다.

루카치(주1)에 따르면, 인간과 신이 밀착되어 있던 시대에는 서사시가 나오고, 인간과 신이 떨어지며 인간의 내면에 "심연"이 생기면 소설이 나온다고 했다. <소설의 출현>에서 이언 와트는 삶의 토털리티의 부재로 인하여 소설은 출현하게 된다고 말한다. 점점 복잡 다단해지는 사회는 삶의 토털리티(totality) 구현을 어렵게 만들고,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소설에서 그것을 찾는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점점 복잡해져 간다. 내면과 외면이 다르고 측면과 정면이 달라지는 시대이다. 사람의 내면에는 열겹, 스무겹의 마음이 존재하게되고, 하나의 사건, 하나의 인물에 관해서도 한 사람이 수십가지의 판단을 하게 되는 결과에 이른다. 삶의 토털리티가 사라지는 것처럼 진실역시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면, 차라리 중세의 인간들이 부러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단순한 사고 체계와, 인샬라(신의 뜻대로), 라고 중얼거리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그 시대의 사람들 말이다. 최소한 진실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테니까.(그 시대에 있었던 철학자에 관한 논의는 접어둔다.)

근대의 징후는 "자의식의 발전"으로 잡을 수 있다. 인간의 자의식이 발달해가는 것은 필연적으로 근대를 가져오고, 근대는 다양성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자의식 과잉은 근대성의 가장 명확한 징후라고도 할 수 있다.

근대가 되면, 영웅은 사라지게 된다. 영웅이 되기에, 인간의 자의식은 너무도 발달해 버렸고, 영웅이 되기보다는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행복을 찾게 된다. 영웅이 아니면 악인, 이라는 단순한 양분법이 통하지 않는 시대인 것이다.

근대의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 중의 또다른 하나가, 적의 부재이다. 무엇이 적인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적의 부재는 적의 존재가 너무도 거대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결과이기도 하다. 근대의 '적'이란, 영웅의 존재가 해결할 수 없는 존재이다. 또한, 적은 아군의 양면성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또한번 근대의 영웅은 죽고 만다.

조정래의 한강은 처음부터 이러한 불합리성을 타고 태어났다. 50년대 초, 6.25 직후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태어난 소설은 처음부터 영웅이 탄생할 수 없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 시대 한국은 악인이 영웅이 되는 시대였다. 정의롭지 않은 군인, 부도덕한 기업가, 타락한 정치가, 그들이 영웅의 자리를 꿰어차는 시대에서 주인공은 영웅이 될 수 없고, 영웅이 되지 못한 주인공만 수십명이 등장하는 소설은 처음부터 산만하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소설, 주인공도 조연도 없는 소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사회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허나 어찌되었건, 좋은 소설은 아니다. 소설은 산만하고 정신없으며, 인물들은 모호하고 전형적이다.

우리 교수님 표현대로라면, "장화 홍련전"의 인물들 같은 전형성을 내포하고 있는 인물이다. 악인은 악인으로서의 철저한 전형성을, 선인은 선인으로서의 철저한 전형성을 보여준다.

소설이 이래서야 재미가 적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재미없는 소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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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 전21권 세트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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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읽은 게, 전권을 다 읽은 것으로는 10번쯤 되는 것 같다. 1부와 2부의 경우는 열번을 훌쩍 넘겨 읽었고. 토지를 잡고 읽고 있을 때, 사람들은 다들 신기해 했다. 지겹지 않으냐, 물었던 사람들에게 나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었다. "하나도, 지겹지 않아."

지금에 와서 고백을 해 보자면, 사실 토지 4부는 몹시 지겨웠다. 당시에 읽을 때. 3-4부의 주축 인물이 되는 임명희, 조찬하, 조용하, 선우신, 유인성, 임명빈, 서의돈, 이상현- 이런 인물들을 나는 사랑할 수 없었고, 그들 사이에 간간히 나오는 서희와 길상의 이야기 덕분에 지겨운 이야기를 겨우겨우 읽어 갔다고 해야 하나. 처음 읽을 때에는 그랬다. 허나 워낙에 하나의 소설을 머리속에 집어 넣어 요약, 정리, 분석까지 마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나의 성격상, 읽다가 젖혀 두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 토지를 읽을 때, 나는 토지와 씨름하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게, 아마, 95년도 가을이었던 것 같다. 학교 도서관에 가기 귀찮아 하는 나를 대신해, 제 학교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주었던 친구는, 3부 2권을 읽다 포기하고 말았었고, 나는 하루 두시간씩, 꼬박꼬박 토지에 시간을 헌납했다. 토지의 마지막권을 덮던 순간에, 나는 토지가 지긋지긋 해 져서, 뭐랄까, 일종의 숙제를 해 치운 기분이었을 뿐이었다. (그때 나는 당시 최고로 유행했던 대하소설들을 읽어 젖히고 있을 때였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시작으로, 아리랑,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 김주영의 객주, 홍명희의 임꺽정, 등등이 95년도에 내가 읽었던 대하소설들이다.)

토지를 다시 잡은 건, 대학 2학년 때, 15-6세기 국어를 공부하면서였다. 15-6세기 국어의 흔적은 경상도 말에 많이 남아있다는 말씀을 하시던 중세국어 교수님은 늘 나를 탐내셨다. 조건이 갖추어 졌으니 중세국어 전공을 하라고. 나는 청개구리 심보로, '토지'를 전공하겠노라, 했었다. 나에게는 '토지'를 연구할 조건이 훨씬 더 잘 갖추어져 있노라고. 토지의 인물들이 쓰는 언어는, 내 모태어인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떤 사명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유치하게도. 그래서 토지를 다시 읽었다.

토지를 이해하기에, 대학 2학년, 실제적 나이는 만 열여덟 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너무 어렸다. 허나 한번 읽었던 가락이 있어서 인가, 3-4부의 고비도 쉽게 넘겼고, 나는 토지의 매력에 빠져들어, 마지막 권을 덮던 그날 바로 1권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 뒤로, 토지를 읽을 때 마다 나의 무게 중심은 이동하기 시작했다.

처음 읽을 때는 당연히, 최서희, 라는 한 인물의 매력에 푹 빠졌다. 토지는 서희를 위한 연대기였고, 모든 것은 서희를 위해 존재하는 부속물 같은 것들이었다.

그 다음으로 집중했던 사람은 최윤국, 서희의 둘째 아들이었다.

세번째 읽을 때, 비로소 나의 눈에 김길상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최서희의 남편'이 아니라 '김길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사랑한 사람은 김환, 윤씨부인의 불륜의 자식이자 서희의 씨다른 삼촌, 형수를 강탈해간 姦夫(간부), 김환- 구천이였다.

김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토지로 졸업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때, 참으로 괴로워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나는 김환, 이라는 인물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의 허무, 그의 정열, 그는 왜 그리 살아야만 했나, 그의 매력에 주체할 수 없이 빠져들면서도 나는 그를 인정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김환의 문제는 거의 2년간 나를 괴롭힌 숙제였다. 토지가 싫어질만큼.

토지의 인물들에 대한 나의 사랑도, 거기에서 딱 멈추어 버렸다. 나는 김환을 이해할 수 없었고, 나의 사랑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억지로 논문을 써야 했을 때도, 나는 김환의 이야기는 얼렁 뚱땅 넘겨버리고 말았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내 논문이 참으로 창피하다. 김환, 이라는 인물은, 토지의 중심축 중의 하나니까. '한의 정서'라는 말을 표현하는데 김환만큼 적절한 인물은 없고, 토지의 인물들 중, 손꼽을만큼 매력적인 인물의 하나이니까.

토지를 다시 읽어야 겠다고 결심한 건, 나남출판사에서 토지 출간소식을 듣고나서였다. 2002년 1월에 출시된다고 했었고, 나는 그걸 살 결심이었다. 그리고 나는 토지를 생일 선물로 받았다.

받아서 제일 좋은 위치(침대 머리맡)에 예쁘게 꽂아 놓고도 나는 다른 책들을 먼저 읽었다. 토지는 맛있는 과자를 아껴먹는 듯한 기분으로 아껴두었던 것이다.

이번에 내가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또 있다. 송영광, 송관수의 아들, 백정의 외손자, 아름답게 생긴 남자(하기야, 토지의 주인공급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재자가인이다.), 눈에 띄지 않을만큼 다리를 저는, 관골에 보일듯 말듯한 상처가 있는, 그리고... 양현이 사랑하는. 양현을 사랑하는.

나는, 윤국이를 몹시 사랑했다. 그 윤국이 사랑하는 양현을 앗아간 남자, 영광을 나는 참 미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매력이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읽으며 나는 김길상, 김환, 이용, 최윤국에 이어 또 한명의 연인을 얻었다.

토지를 읽을 때 마다 늘 설렌다. 이번에는 또 누구를 사랑하게 될까, 하는 기막히게 기분 좋은 설레임이다. 무심히 넘겼던, 단순한 엑스트라로 넘겨버렸던 사람들 하나하나를 새로이 발견하고 사랑에 빠질 때 마다, 나는 가슴이 뛴다.

용이와 월선이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전혀 새로운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고 김환과 별당아씨의 사랑을 읽고 김환을 이해하게 되었을때 환희에 떨었었다. 서희와 길상, 양현과 영광, 인실과 오가다 지로, 명희와 찬하, 상현, 기화와 상현, 석이.

사랑의 깊이가 이렇게도 깊을 수 있나, 두번 세번 생각하게 하는 사람들.

집필 기간 26년, 원고지 장수 5만장, 회당 사용 잉크 10통. 그 동안 박경리는 유방암을 앓았고 사위(시인 김지하)의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홀로된 어머니와 딸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삶이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

이라고. 그의 삶이 불행했음에 감사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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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보급판 문고본) -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틱낫한 지음, 최수민 옮김 / 명진출판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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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몹시 고달픈 일이다. 그것이 부모이든 형제이든 하늘의 도우심으로 나와 아주 잘 맞는 사람과 가족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것은 더 없는 행복이겠으나 그렇지 않은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괴로움의 연속이 된다. 우리 엄마가 자주 쓰는 말이 있는데, 부부는 인륜이고 부모자식은 천륜이라, 부부관계는 끝장을 내고 돌아서는 순간 남이 될 수 있지만 부자관계는 그럴 수 없으니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끊어 내 버릴 수 없는 관계에 놓인 사람과 맞지 않는다면, 또, 부부관계는 끝장이 났다 해도, 내 아이의 아비, 또는 어미라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 계속 보아야만 한다면 우리는 지옥의 고통에 빠진 나의 삶을 건져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아무리 맞지 않는다 해도 가족은 가족이다. 가족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보다 깊이 사랑하고 있고, 깊이 사랑하고 있기에 깊이 상처받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아주 섬세한 테크닉을 요하는 일이다. 나이 먹어가며 우리는 끊임없이 남을 상처주지 않는 방법, 내가 상처받지 않는 방법과 더불어 남과 함께 살아가는 테크닉을 연마해야 한다. 그것이 일종의 사회성 훈련이 아니겠는가.

솔직히, 나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 맞지 않는 사건, 맞지 않는 어떤 물건이나 장소 등등은 필사적으로 피해 가는 편을 택하는 사람이다.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맞춰 가는 것은 너무도 피곤한 일이고, 힘들게 그런 일에 에너지를 쏟아 붓느니 좋아하는 다른 일을 한가지 더 한다 주의다. 나와 잘 맞는 사람, 나와 잘 맞는 일 등등을 할 때는 그다지 특수한 테크닉이 필요하지 않다. 그건 그냥,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나의 행동의 기반에 애정이 깔려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세상은 그다지 만만하지가 않다. 나와 맞지 않지만 피해갈 수 없는 사람이 있게되고-예를 들면, 중고등학교의 담임선생이라든지, 대학동기에 학번까지 붙어있어 끊임없이 같은 분임 토의조에 속하게 되는 친구라든지 직장동료라든지 하는- 나는 죽어라 피해 가는데 상대방이 괜히 나에게 달려와 시비를 건다든지 하는 경우. 사실 후자의 경우는 말할 데 없이 난감하다. 이럴 때 삶은 나름의 테크닉을 요구하게 된다.

틱낫한 스님의 이 책은 그러한 삶의 테크닉 하나를 알려준다. 가슴속에 일어나는 화로 인하여 나 자신을 주체하기 힘들 때에 나를 다독이는 방법, 정말 맞지 않는 사람이지만 피해갈 수 없는 사람일 때에 그 사람을 감싸안고 사랑하며 갈 수 있게 하는 방법 등을 가르친다. 물론 그것 뿐만은 아니다. 이 책은, 내가 왜 화를 내는가에 대한 명상을 하게 하고,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래서 나의 삶을 평화롭고 안온하게 가꿀 수 있도록 돕는다.

가끔 책을 읽다보면 엄마나 언니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 있는데, 이 책이 그렇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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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새
송우혜 지음 / 푸른숲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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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또는 미래- 그러니까 현재가 아닌 어떤 시점을 배경으로 쓰는 소설이나 만화를 볼 때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이질감이다. 이 이질감은 한국의 사고방식에 익숙한 내가 일본의 사고방식이 드러난 소설을 볼 때의 이질감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니까 역사물을 볼 때의 이질감은 배경과 주인공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아, 그러니까 이질감이 아닌 괴리감이라고 표현을 해야겠다. 맞다. 정확한 표현이다. 괴리감.

이러한 괴리감은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역사 소설에서 흔히 발견된다. 예전에 썼던 이사벨 아옌데의 『운명의 딸』에서도 여주인공은 19세기로 뛰어든 20세기의 여자라는 느낌을 주었다. 배경과 인물의 괴리감은 소설을 읽는 내내 기분이 껄끄러워지게 만든다. 이러한 괴리감은 역사 로맨스 소설에서 특히 강하게 드러난다. 줄리 가우드의 역사 로맨스에 나오는 현대적으로 발랄한 여주인공들이나 김지혜의 『공녀』에서의 예영의 행동 양식, 20세기 초, 조선의 여인으로는 도저히 봐 줄 수 없던 이선미의 『경성애사』에서의 나경. (아, 경성애사는 정말 잊고 싶은 소설이다. 생각하면 괴롭다. 쯧.) 그러한 소설들에서의 여주인공은 매직아이의 영상 같다. 배경과 잘 버무려져 얼핏보면 숨겨져 있는 것 같으나 집중해서 읽다보면 완전히 도드라져서 배경과 전혀 다른 모양이 되고 마는.

그런 소설들의 틈바구니에서 송우혜의 『하얀 새』는 배경과 인물의 완벽한 일치감으로 가치를 가진다.

17세기,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대단한 명문거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역시나 이름난 명문 거족의 집안 외며느리로 들어가게 되는 이승효라는 여인을 주인공으로 쓰고 있는 이 소설은 주인공의 매력도를 높이기 위해 어설프게 독자에게 아첨하지 않는다.

주인공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시대에 어울리지도 않는 인간 평등사상을 대입한다거나,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준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인공 승효는 17세기, 명문 거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사대부 가문의 며느리가 된 딱 그 차원에서 만큼만 사고하고 행동한다. 몸종이 도망을 치자 분노에 치를 떨고 자신의 몸종이 도망친 것에 수치스러워 하며, 집안을 위협하는 면천된 종의 이야기를 듣자 당장에 살의를 느끼고 실제로 청부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종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거나 얌전만 빼는 양반가의 새아씨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도적이 들어 집에 불을 질렀을 때,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도 불을 끄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되, 뒤에 가서 그것이 사대부가의 아낙으로서 체통을 잃은 일이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며(7. 불속의 길 中), 강화도까지 쳐들어온 몽고군에게 잡혀 인질이 될 때에는 앞서 도망치던 자신의 몸종 철원네에게 "달아나라! 둘 다 죽을 필욘 없다!"(p.220) 라며 그녀를 도망칠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그 어떤 장면보다 시대와 인물의 완벽한 일치감을 보여주었던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라 하겠다.

「"썩 나가거라! 네 예가 어디라고 들어와서 감히 방자한 짓거리를 하느냐."
서릿발이 돋도록 차가운 옛 주인의 얼굴을 흘끗 본 유월이가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서 불만스런 얼굴로 나갔다.
그 여자가 뉜가. 어떤 관계인가. 지금같이 어려운 때 그런 연줄을 만나면 잘 다독여서 덕을 좀 입어야 할 텐데 어찌 그렇게 야멸차게 내쫓는가.
주위에서 시끌쩍하게 말이 일어났지만, 승효는 먼저 자세로 도로 누워서는 입 한번 벙긋하지 않았다. 마음 깊은 데서 탄식이 일었다. 난세, 난세…… 하고 아우성치는 소리들이 높더니 내 이제 정녕 난세의 얼굴을 보았구나. 도망쳤던 종이 비단으로 몸을 감고 어엿하게 얼굴 쳐들고 제 발로 나타나 건들거려도 주인으로서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으니 이 이상 무엇을 더 볼 게 있으리요. 가슴에 커다란 얼음덩이가 들어앉았다.」
송우혜, 『하얀 새』, 푸른숲, 1996, p. 230


이 장면을 읽는 순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무리 견문이 넓고 도량이 활달하다 하나 평생을 규중에 갇혀 지내는 여인네의 몸이다. 읽은 책이라 해 봐야 공자왈 맹자왈 또는 내훈(內訓)정도가 다 일 것이니 시대를 제대로 읽어내는 눈이 있을 리 없다. 그런 그녀에게 난세란 고작, 도망친 종을 치죄하지 못하는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사람이란, 언제나 아는 만큼 보는 법이니까.

소설의 결말에서 작가는 승효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끝까지 시대와 밀착되어 있는 승효의 행동을 잘 보여준다. 승효의 강인한 성품과 엄격한 유교 윤리는 '심양'이라는 한 지점과 '장쇠 일가'라는 한 노비의 일가를 통하여 시대에 맞게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의미에서 참 괜찮은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96년에 책방에서 빌려서 한번 읽었었는데, 그 뒤로 절판되어 구하지 못하다가 얼마 전 헌책방에서 사들였다. 책대여점의 도장도 찍혀있고 스티커도 붙어있었지만 뭐 어떤가. 괜찮은 책을 다시 구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제발, 괜찮은 책들은 다시 좀 찍혀 나왔으면 좋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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