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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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린 소년이(사실 소녀라도) 화자가 되어 자신의 고난에 찬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글을 읽는 건 참 아프다. 어린소년을 화자로 택하기에 자연스레 오게되는 글 전체의 천진함이 더욱 아프다. 끝내, 나를 울린건, 열살 인줄 알고 있었던 열네살 모모의  

"사람은 사랑할 사람이 없이도 살수 있나요?"  (p. 269)

라는 질문이었다.  

한때는,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사랑이 꼭 필요하다고. 나를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나의 존재가 의미있어 지는 거라고. 그런데 살면 살수록 그게 아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어야 산다. 사랑할 대상이 없는 사람에게 세상은 잿빛이다. 첫사랑의 시작과 함께 다가오는 세상의 팡파르를 누구나 기억한다. 바람은 더욱 상쾌해지고, 하늘은 더욱 푸르러지고,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특별해지던 지명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한 귀퉁이, 사회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모모는 늙은 창녀 로자 아줌마의 보살핌으로 살아간다. 그는 끝내 로자 아줌마에게 "양모"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거부하지만, 그 어느 엄마가 로자에 대한 모모 만큼의 절실한 사랑을 받아볼 수 있을까. 

 가끔 TV에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이들의 비참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를 낳아 기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죽은 엄마를 한달이고 두달이고 죽은 줄도 모르고 방에 뉘어둔채 살아가던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곤 했다. 도저히 그 아이의 목소리(음성변조가 된 것이라고 해도.)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나를 돌봐주지 못한다해도, 그저 누워만 있는다고 해도,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고, 내가 무작정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존재의 죽음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이미 죽어버린 엄마라고 해도 그와의 행복한 공존을 파괴당하고, 이제는 정말 오갈데 없이 '사랑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의 목소리를 어떻게 듣고 있나. 아이이기에 유창한 언어로 그 기분을 표현할 수도 없이, 그저, 엄마가 죽은 줄 몰랐어요. 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는 그 아이를. 정말 그 아이를 어떡하니.

세상의 끝에 다다른 두 사람, 늙은 창녀 로자와 창녀와 정신병자의 아들 모모에게는 서로밖에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 안한다 보다 더욱 중요한, 내가 사랑하고 나의 사랑을 받아줄 존재. 그 절박함에 마음이 에여왔다. 그리고 그들 주변의 가난하고 대책없지만 무작정 따뜻하고 그야말로 대책없이 인정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을 눈물섞인 웃음이 아니고는 볼수가 없다. 

이 소설은, 기묘하리만치 이중적이다. 정말 비참한 현실이고 비정한 현실인데도 불구하고 단 한명의 악인도 등장하지 않고, 현실적인 악인이라도 이 소설 속에서만큼은 선량하고 인정많게 행동한다. 그건 화자가 14살 소년이기 때문에 가지고 올 수 있는 천진함일텐데, 실제로 모모는 그다지 천진난만 하지도 않고, 세상을 믿지도 않으며, 지나치게 조숙하기까지 하다. 세상을 믿지 않는, 이미 세파에 닳고 닳았음에도 어쩔수 없이 천진할 수 밖에 없는, '사랑할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모의 모습이. 정말이지 참. 

로맹 가리, 또는 에밀 아자르의 소설은 이게 세번째인데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유럽의 교육>-이 소설도 소년이 화자다) 이 작가의 글을 읽고나면 늘, 슬프다고만은 말할수 없는 뭔가 그냥 마음이 아프다고 밖에 표현할수 없는 기분이 된다. 아. 그래도 역시 슬프다.  

로맹 가리의 소설은, 여파가 꽤 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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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1-13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앞의 생』도『새벽의 약속』도 좋았지만, 저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가 정말이지 자지러지게 좋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소설집을 세개만 꼽아보라면 그 중 하나는 로맹 가리가 될 거에요. 어쩌면 가장 우선 순위를 차지할지도 모르구요. 네, 정말 여파가 세죠.

아시마 2009-11-13 09:24   좋아요 0 | URL
아. 전글에서 다락방님 서재가 저한테는 지뢰밭같다고 썼는데, 쿨럭. 이제는 제 서재에도 지뢰를 심어두시는 군요. 하.하.하.
이해할수 없지만, 전 왜 로맹가리의 소설이 제가 읽은 세권이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전 약간 전작주의자에 가까워서 웬만하면 다 수집하는 편이란 말이죠. 새벽의 약속이 뭔가 검색했다가 하늘의 뿌리까지 두권 다 장바구니에 담아버렸어요.
이제 전 돈 마련하러 가야해요. 남편 등은 하도많이 쳐서 더이상은 칠 등도 없다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