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 전10권 세트 - 반양장본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흠... 거대 산맥 토지를 읽고 난 직후, 바로 잡은 소설이라서 그럴까. 도무지, 도무지. 이건, 도대체가, 싶어지는 소설. 조정래를 몹시 좋아하는데, 정말이지 실망스럽다. 이 조정래가, 태백산맥을 쓴 그 조정래 맞나, 싶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오롱이 조롱이 생김새도 능력도 다아 각각인 법처럼, 한 작가에게서 태어나는 작품도 다 오롱이 조롱이 인 것이 당연하다는 것 쯤, 알고 있지만.
흠. 뭐랄까. 태백산맥에서 아리랑, 한강까지 내려오는 그 하향 곡선이 너무 가파르다고 해야 하나. 최소한의 기본기, 라는 것이 있는 것인데- 움.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간다는 것만은 인정하지만, 그것만으로 조정래 답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실망스러운 소설. 달걀같던, 계란같던, 꽉 차고 군더더기 하나 없던, 그 완벽한 구성미에 문체미학을 선보이며 반짝이던 태백산맥의 아름다움이 아리랑에서 좀 흐려진다- 싶더니, 한강에서는 완전히 망해 버렸다.
뭐랄까.

사건은 있는데 인물이 없는, 소설.

짧은 소설-열권이면 결코 짧지 않은데... 말이다.- 안에 51년 이후의 격변기 한국의 상황을 몽땅 다 담으려고 하다 보니, 소설이 지나치게 산만해 진다. 이 작가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궁금해 지게 만든다.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시선은, 연좌제, 도시 빈민층, 농촌 부채에 시달리는 농민층, 졸부, 정치판, 야당 국회의원, 개천에서 용난 고등고시 당선자, 군인, 카투사, 양공주, 대학생, 데모대, 복부인들, 방적 공장 여공, 철공소 직원, 몰락한 독립지사의 자손, 재봉소 시다, 넝마주이, 깡패, 극장, 가발공장 여직원,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경부고속도로 건설, 전라도 차별(지역감정)문제 등등등을 정신없이 비추는 것으로도 모자라, 월남전, 라이 따이한 문제, 독일 파견 광부, 간호원 등등까지 비춘다.

한마디로, 정신이 없다. 이쯤되고 보면, 도대체 누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지, 중심인물이 누구인지, 그 인물의 성격이나 사상이나, 인생관이 무엇인지 따라가는 것 초자 허겁지겁이 되는 것이다. 인물은 흐려지고 사건들만 남는다.

소설의 스케일이 큰 것이야, 워낙에 조정래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기는 한데... 이거야, 원, 싶다. 태백산맥의 전라남도 벌교면, 묘사가 눈 앞에 보이는 듯 했던 그 완벽한 묘사가, 그 완벽한 문체미학이 그야말로 완벽하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잠시, 생각을 해보면,

태백산맥-전라남도 벌교, 지리산, 서울
아리랑-전라남도 지역(범위 넓어짐.), 서울, 간도, 하와이, 러시아
한강 - 전라남도, 서울, 독일, 베트남.

이렇게 따지면, 아리랑에 비해 한강이 과히 스케일이 커진것도 아닌데, 왜 굳이 배경이 넓어져서 흐트러진 것처럼 여겨질까?
다시한번 말하지만,
인물은 없고 사건만 있는 소설. 인물과 소설이 따로 논다. 특히 로맨스라면 임채옥과 유일민의 사랑이 거의 유일하다 시피 한데, 도대체가 이들의 애정도 아무런 공감이 가지 않는다. 유일민을 사랑한다는 임채옥의 말은 느닷없고, 두 사람의 행동은 그야말로 신파다 싶다. 짜증스럽다.

꽤 큰 역할을 차지하고 앉은 강숙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도대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뭘 말하고 싶은 것인지, 뭐~ 싶다. 막 짜증이라도 내고 싶단 말이다.

유별나게 괜찮은 인물도 하나 없으면서(즉 중심이 될만한 인물이 없으면서) 주변의 수많은 인간들에게 공정하고 동일한 역할을 할당해주려다 보니, 지나치게 산만해 지는 것이다.

루카치(주1)에 따르면, 인간과 신이 밀착되어 있던 시대에는 서사시가 나오고, 인간과 신이 떨어지며 인간의 내면에 "심연"이 생기면 소설이 나온다고 했다. <소설의 출현>에서 이언 와트는 삶의 토털리티의 부재로 인하여 소설은 출현하게 된다고 말한다. 점점 복잡 다단해지는 사회는 삶의 토털리티(totality) 구현을 어렵게 만들고,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소설에서 그것을 찾는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점점 복잡해져 간다. 내면과 외면이 다르고 측면과 정면이 달라지는 시대이다. 사람의 내면에는 열겹, 스무겹의 마음이 존재하게되고, 하나의 사건, 하나의 인물에 관해서도 한 사람이 수십가지의 판단을 하게 되는 결과에 이른다. 삶의 토털리티가 사라지는 것처럼 진실역시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면, 차라리 중세의 인간들이 부러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단순한 사고 체계와, 인샬라(신의 뜻대로), 라고 중얼거리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그 시대의 사람들 말이다. 최소한 진실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테니까.(그 시대에 있었던 철학자에 관한 논의는 접어둔다.)

근대의 징후는 "자의식의 발전"으로 잡을 수 있다. 인간의 자의식이 발달해가는 것은 필연적으로 근대를 가져오고, 근대는 다양성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자의식 과잉은 근대성의 가장 명확한 징후라고도 할 수 있다.

근대가 되면, 영웅은 사라지게 된다. 영웅이 되기에, 인간의 자의식은 너무도 발달해 버렸고, 영웅이 되기보다는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행복을 찾게 된다. 영웅이 아니면 악인, 이라는 단순한 양분법이 통하지 않는 시대인 것이다.

근대의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 중의 또다른 하나가, 적의 부재이다. 무엇이 적인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적의 부재는 적의 존재가 너무도 거대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결과이기도 하다. 근대의 '적'이란, 영웅의 존재가 해결할 수 없는 존재이다. 또한, 적은 아군의 양면성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또한번 근대의 영웅은 죽고 만다.

조정래의 한강은 처음부터 이러한 불합리성을 타고 태어났다. 50년대 초, 6.25 직후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태어난 소설은 처음부터 영웅이 탄생할 수 없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 시대 한국은 악인이 영웅이 되는 시대였다. 정의롭지 않은 군인, 부도덕한 기업가, 타락한 정치가, 그들이 영웅의 자리를 꿰어차는 시대에서 주인공은 영웅이 될 수 없고, 영웅이 되지 못한 주인공만 수십명이 등장하는 소설은 처음부터 산만하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소설, 주인공도 조연도 없는 소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사회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허나 어찌되었건, 좋은 소설은 아니다. 소설은 산만하고 정신없으며, 인물들은 모호하고 전형적이다.

우리 교수님 표현대로라면, "장화 홍련전"의 인물들 같은 전형성을 내포하고 있는 인물이다. 악인은 악인으로서의 철저한 전형성을, 선인은 선인으로서의 철저한 전형성을 보여준다.

소설이 이래서야 재미가 적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재미없는 소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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