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 전21권 세트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번에 읽은 게, 전권을 다 읽은 것으로는 10번쯤 되는 것 같다. 1부와 2부의 경우는 열번을 훌쩍 넘겨 읽었고. 토지를 잡고 읽고 있을 때, 사람들은 다들 신기해 했다. 지겹지 않으냐, 물었던 사람들에게 나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었다. "하나도, 지겹지 않아."

지금에 와서 고백을 해 보자면, 사실 토지 4부는 몹시 지겨웠다. 당시에 읽을 때. 3-4부의 주축 인물이 되는 임명희, 조찬하, 조용하, 선우신, 유인성, 임명빈, 서의돈, 이상현- 이런 인물들을 나는 사랑할 수 없었고, 그들 사이에 간간히 나오는 서희와 길상의 이야기 덕분에 지겨운 이야기를 겨우겨우 읽어 갔다고 해야 하나. 처음 읽을 때에는 그랬다. 허나 워낙에 하나의 소설을 머리속에 집어 넣어 요약, 정리, 분석까지 마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나의 성격상, 읽다가 젖혀 두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 토지를 읽을 때, 나는 토지와 씨름하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게, 아마, 95년도 가을이었던 것 같다. 학교 도서관에 가기 귀찮아 하는 나를 대신해, 제 학교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주었던 친구는, 3부 2권을 읽다 포기하고 말았었고, 나는 하루 두시간씩, 꼬박꼬박 토지에 시간을 헌납했다. 토지의 마지막권을 덮던 순간에, 나는 토지가 지긋지긋 해 져서, 뭐랄까, 일종의 숙제를 해 치운 기분이었을 뿐이었다. (그때 나는 당시 최고로 유행했던 대하소설들을 읽어 젖히고 있을 때였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시작으로, 아리랑,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 김주영의 객주, 홍명희의 임꺽정, 등등이 95년도에 내가 읽었던 대하소설들이다.)

토지를 다시 잡은 건, 대학 2학년 때, 15-6세기 국어를 공부하면서였다. 15-6세기 국어의 흔적은 경상도 말에 많이 남아있다는 말씀을 하시던 중세국어 교수님은 늘 나를 탐내셨다. 조건이 갖추어 졌으니 중세국어 전공을 하라고. 나는 청개구리 심보로, '토지'를 전공하겠노라, 했었다. 나에게는 '토지'를 연구할 조건이 훨씬 더 잘 갖추어져 있노라고. 토지의 인물들이 쓰는 언어는, 내 모태어인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떤 사명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유치하게도. 그래서 토지를 다시 읽었다.

토지를 이해하기에, 대학 2학년, 실제적 나이는 만 열여덟 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너무 어렸다. 허나 한번 읽었던 가락이 있어서 인가, 3-4부의 고비도 쉽게 넘겼고, 나는 토지의 매력에 빠져들어, 마지막 권을 덮던 그날 바로 1권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 뒤로, 토지를 읽을 때 마다 나의 무게 중심은 이동하기 시작했다.

처음 읽을 때는 당연히, 최서희, 라는 한 인물의 매력에 푹 빠졌다. 토지는 서희를 위한 연대기였고, 모든 것은 서희를 위해 존재하는 부속물 같은 것들이었다.

그 다음으로 집중했던 사람은 최윤국, 서희의 둘째 아들이었다.

세번째 읽을 때, 비로소 나의 눈에 김길상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최서희의 남편'이 아니라 '김길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사랑한 사람은 김환, 윤씨부인의 불륜의 자식이자 서희의 씨다른 삼촌, 형수를 강탈해간 姦夫(간부), 김환- 구천이였다.

김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토지로 졸업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때, 참으로 괴로워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나는 김환, 이라는 인물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의 허무, 그의 정열, 그는 왜 그리 살아야만 했나, 그의 매력에 주체할 수 없이 빠져들면서도 나는 그를 인정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김환의 문제는 거의 2년간 나를 괴롭힌 숙제였다. 토지가 싫어질만큼.

토지의 인물들에 대한 나의 사랑도, 거기에서 딱 멈추어 버렸다. 나는 김환을 이해할 수 없었고, 나의 사랑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억지로 논문을 써야 했을 때도, 나는 김환의 이야기는 얼렁 뚱땅 넘겨버리고 말았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내 논문이 참으로 창피하다. 김환, 이라는 인물은, 토지의 중심축 중의 하나니까. '한의 정서'라는 말을 표현하는데 김환만큼 적절한 인물은 없고, 토지의 인물들 중, 손꼽을만큼 매력적인 인물의 하나이니까.

토지를 다시 읽어야 겠다고 결심한 건, 나남출판사에서 토지 출간소식을 듣고나서였다. 2002년 1월에 출시된다고 했었고, 나는 그걸 살 결심이었다. 그리고 나는 토지를 생일 선물로 받았다.

받아서 제일 좋은 위치(침대 머리맡)에 예쁘게 꽂아 놓고도 나는 다른 책들을 먼저 읽었다. 토지는 맛있는 과자를 아껴먹는 듯한 기분으로 아껴두었던 것이다.

이번에 내가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또 있다. 송영광, 송관수의 아들, 백정의 외손자, 아름답게 생긴 남자(하기야, 토지의 주인공급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재자가인이다.), 눈에 띄지 않을만큼 다리를 저는, 관골에 보일듯 말듯한 상처가 있는, 그리고... 양현이 사랑하는. 양현을 사랑하는.

나는, 윤국이를 몹시 사랑했다. 그 윤국이 사랑하는 양현을 앗아간 남자, 영광을 나는 참 미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매력이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읽으며 나는 김길상, 김환, 이용, 최윤국에 이어 또 한명의 연인을 얻었다.

토지를 읽을 때 마다 늘 설렌다. 이번에는 또 누구를 사랑하게 될까, 하는 기막히게 기분 좋은 설레임이다. 무심히 넘겼던, 단순한 엑스트라로 넘겨버렸던 사람들 하나하나를 새로이 발견하고 사랑에 빠질 때 마다, 나는 가슴이 뛴다.

용이와 월선이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전혀 새로운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고 김환과 별당아씨의 사랑을 읽고 김환을 이해하게 되었을때 환희에 떨었었다. 서희와 길상, 양현과 영광, 인실과 오가다 지로, 명희와 찬하, 상현, 기화와 상현, 석이.

사랑의 깊이가 이렇게도 깊을 수 있나, 두번 세번 생각하게 하는 사람들.

집필 기간 26년, 원고지 장수 5만장, 회당 사용 잉크 10통. 그 동안 박경리는 유방암을 앓았고 사위(시인 김지하)의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홀로된 어머니와 딸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삶이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

이라고. 그의 삶이 불행했음에 감사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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