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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새
송우혜 지음 / 푸른숲 / 1996년 6월
평점 :
품절
과거 또는 미래- 그러니까 현재가 아닌 어떤 시점을 배경으로 쓰는 소설이나 만화를 볼 때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이질감이다. 이 이질감은 한국의 사고방식에 익숙한 내가 일본의 사고방식이 드러난 소설을 볼 때의 이질감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니까 역사물을 볼 때의 이질감은 배경과 주인공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아, 그러니까 이질감이 아닌 괴리감이라고 표현을 해야겠다. 맞다. 정확한 표현이다. 괴리감.
이러한 괴리감은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역사 소설에서 흔히 발견된다. 예전에 썼던 이사벨 아옌데의 『운명의 딸』에서도 여주인공은 19세기로 뛰어든 20세기의 여자라는 느낌을 주었다. 배경과 인물의 괴리감은 소설을 읽는 내내 기분이 껄끄러워지게 만든다. 이러한 괴리감은 역사 로맨스 소설에서 특히 강하게 드러난다. 줄리 가우드의 역사 로맨스에 나오는 현대적으로 발랄한 여주인공들이나 김지혜의 『공녀』에서의 예영의 행동 양식, 20세기 초, 조선의 여인으로는 도저히 봐 줄 수 없던 이선미의 『경성애사』에서의 나경. (아, 경성애사는 정말 잊고 싶은 소설이다. 생각하면 괴롭다. 쯧.) 그러한 소설들에서의 여주인공은 매직아이의 영상 같다. 배경과 잘 버무려져 얼핏보면 숨겨져 있는 것 같으나 집중해서 읽다보면 완전히 도드라져서 배경과 전혀 다른 모양이 되고 마는.
그런 소설들의 틈바구니에서 송우혜의 『하얀 새』는 배경과 인물의 완벽한 일치감으로 가치를 가진다.
17세기,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대단한 명문거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역시나 이름난 명문 거족의 집안 외며느리로 들어가게 되는 이승효라는 여인을 주인공으로 쓰고 있는 이 소설은 주인공의 매력도를 높이기 위해 어설프게 독자에게 아첨하지 않는다.
주인공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시대에 어울리지도 않는 인간 평등사상을 대입한다거나,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준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인공 승효는 17세기, 명문 거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사대부 가문의 며느리가 된 딱 그 차원에서 만큼만 사고하고 행동한다. 몸종이 도망을 치자 분노에 치를 떨고 자신의 몸종이 도망친 것에 수치스러워 하며, 집안을 위협하는 면천된 종의 이야기를 듣자 당장에 살의를 느끼고 실제로 청부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종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거나 얌전만 빼는 양반가의 새아씨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도적이 들어 집에 불을 질렀을 때,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도 불을 끄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되, 뒤에 가서 그것이 사대부가의 아낙으로서 체통을 잃은 일이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며(7. 불속의 길 中), 강화도까지 쳐들어온 몽고군에게 잡혀 인질이 될 때에는 앞서 도망치던 자신의 몸종 철원네에게 "달아나라! 둘 다 죽을 필욘 없다!"(p.220) 라며 그녀를 도망칠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그 어떤 장면보다 시대와 인물의 완벽한 일치감을 보여주었던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라 하겠다.
「"썩 나가거라! 네 예가 어디라고 들어와서 감히 방자한 짓거리를 하느냐."
서릿발이 돋도록 차가운 옛 주인의 얼굴을 흘끗 본 유월이가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서 불만스런 얼굴로 나갔다.
그 여자가 뉜가. 어떤 관계인가. 지금같이 어려운 때 그런 연줄을 만나면 잘 다독여서 덕을 좀 입어야 할 텐데 어찌 그렇게 야멸차게 내쫓는가.
주위에서 시끌쩍하게 말이 일어났지만, 승효는 먼저 자세로 도로 누워서는 입 한번 벙긋하지 않았다. 마음 깊은 데서 탄식이 일었다. 난세, 난세…… 하고 아우성치는 소리들이 높더니 내 이제 정녕 난세의 얼굴을 보았구나. 도망쳤던 종이 비단으로 몸을 감고 어엿하게 얼굴 쳐들고 제 발로 나타나 건들거려도 주인으로서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으니 이 이상 무엇을 더 볼 게 있으리요. 가슴에 커다란 얼음덩이가 들어앉았다.」
송우혜, 『하얀 새』, 푸른숲, 1996, p. 230
이 장면을 읽는 순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무리 견문이 넓고 도량이 활달하다 하나 평생을 규중에 갇혀 지내는 여인네의 몸이다. 읽은 책이라 해 봐야 공자왈 맹자왈 또는 내훈(內訓)정도가 다 일 것이니 시대를 제대로 읽어내는 눈이 있을 리 없다. 그런 그녀에게 난세란 고작, 도망친 종을 치죄하지 못하는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사람이란, 언제나 아는 만큼 보는 법이니까.
소설의 결말에서 작가는 승효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끝까지 시대와 밀착되어 있는 승효의 행동을 잘 보여준다. 승효의 강인한 성품과 엄격한 유교 윤리는 '심양'이라는 한 지점과 '장쇠 일가'라는 한 노비의 일가를 통하여 시대에 맞게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의미에서 참 괜찮은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96년에 책방에서 빌려서 한번 읽었었는데, 그 뒤로 절판되어 구하지 못하다가 얼마 전 헌책방에서 사들였다. 책대여점의 도장도 찍혀있고 스티커도 붙어있었지만 뭐 어떤가. 괜찮은 책을 다시 구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제발, 괜찮은 책들은 다시 좀 찍혀 나왔으면 좋겠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