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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치는 강가에서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책장을 넘기기가 망설여졌다. 들여다봐선 안될 것을 보고만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에 지나치게 동화되는 나같은 독자에겐, 이 소녀들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비밀스러운 듯 했다. 아니나다를까, 첫페이지에서 마리코는 작은 열쇠가 달린 일기장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일기장에 달린 자물쇠는 마음만 먹으면 단 한 번의 충격으로 망가뜨릴 수 있는 조악한 물건이었지만 소녀들은 그 작고 허술한 장치에 자신의 비밀을 맡겼다. 다른 누군가가 읽으면 부끄러워 죽고 싶을 일기장. 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멋진 누군가가 읽어주었으면 하는 일기장. (12)
그래, 그 일기장을 펼쳐 본 느낌이었다. 이토록 조심스럽고 은밀하며, 때로는 급박하고 간절한 이야기를 봐버린 느낌. 흘끗 들여다 보았을 뿐인데 더이상 발을 빼지 못할 것처럼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비밀 이야기에 은근슬쩍 나를 포함시켜 버렸다. 나는 훔쳐보는 사람이자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할 증인이 되어 버렸다.
이야기는 세 소녀의 입장에서 진행되는데, (아니, 사실은 네 소녀지만) 세번째로 이야기를 하는 소녀 마오코의 입장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사건과는 상관없는 제삼자, 가까이에서 끝을 지켜봐줄 사람. (258)
이 소년 소녀들에게는 어른이 되기 전에 밝히고 가야만 하는 비밀이 있다. 누구든 그렇지 않으랴. 그것은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하며 은근슬쩍 펼쳐보여질 때도 있고, 혼자서 납득이 갈 때까지 몇번이고 곱씹다가 너덜너덜 헤져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이들처럼 가슴에 묵직하게 남아서 늘 서로를 감시하고 옭아매다가 상처를 헤집어야만 풀리는 것들도 있다.
그들은 어린 시절 어느 여름 모두 무언가에 가담했다. 그들의 경험은 매우 단편적인 거라서, 정확한 시작과 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끊임없이 마음에 짐을 지며 살아왔다. 누구하나 쉽게 입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상처는 제멋대로 썩어들어갔다. 가끔씩 상대를 원망하고 의심하는 게 오히려 마음편하기도 했으나, 그러한 원망의 한켠엔 죄책감이 있다는 걸 모두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 여름이 왔다. 이 여름, 학교 축제가 끝나고 나면 그들은 졸업을 해야만 할 터이고, 그러면 영영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매끄럽게 해결되지 않았지만, 모두들 죄책감과 원망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걸 공감하게 되면서 상처는 서서히 녹는 듯 했다. 정작 진실이 무엇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서로를 보듬으며 함께 뛰놀던 어린시절의 순수함을 되찾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정말 그들이 천사처럼 아름답게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모든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여름축제도 막을 내렸다. 그 소년 소녀들은 굽이치는 강가에서 천사같던 한 소녀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이제는 어른이 되겠지, 유년의 상처를 보듬어 안은 채 서로의 모습을 닮아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