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플레이 1
켄 그림우드 지음 / 프리미엄북스 / 1996년 12월
평점 :
절판


정말 만화같은 설정이다.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 계속해서 18살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것.
터무니없는 설정이라고 코웃음마저 쳤던 건 그것이 기막히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젊은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 실수를 만회하고 기회를 이용할 수 있는 건, 너무 좋은 거잖아. 결별 직전의 아내와도 이번엔 행복할 수 있고, 궁상맞은 월급쟁이 생활도 벗어날 수 있고, 미녀를 옆에 끼고 돈을 뿌리며 살 수도 있고, 아이들에게 세계 곳곳의 비경을 보여 줄 수도 있으니.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잖아, 실수는 몇번이고 만화할 수 있으니.

풋, 음... 정말이지 내 생각은 왜 이렇게 유아적인 수준인 걸까. 왜 이렇게 단편적인 거야.
계속해서 다시 태어난다는 건 계속해서 죽는다는 거라는 걸, 계속해서 뭔가 이룬다는 건 계속해서 뭔가 잃는다는 의미인 걸. 제프가 3번째로 삶을 되풀이할 때 즈음에야 알 수 있었다. 그가 운명을 저주하고 신을 원망하며 통곡을 할 때에야 비로소 그가 너무나 가엾고 측은했다.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마다 딸을 잃었고 아내를 잃었고 친구를 잃었으며, 부를 잃었고 명예를 잃었고 신뢰를 잃었다. 그가 얻었던 많은 것들은 새로운 인생으로 눈을 뜨게 되는 순간 한줌의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갔다. 그는 언제나 새로 시작해야 했으며, 더군다나 그 출발점은 점점 그에게 불리해져 갔다. 그것은 흡사 게임과도 비슷했다. 그가 얼마나 희망을 가지고 버틸 수 있는지, 그가 언제까지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지 그 무언가가 계속해서 그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리플레이되는 제프의 삶이 신의 뜻이라면 그 신은 가장 잔인한 신일 것이며, 그것이 제프의 운명이라면 그 운명은 가장 잔혹한 운명이 될 터였다. 그냥 실수하며 평생을 후회하고 살지언정 나는 결코 리플레이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제프도 처음엔 희망에 부풀어 온갖 낙관적인 상상에 휩싸였으리라. 이 책을 읽으며 퇴근하는 길에 나도 다음 생에선 스페인어를 전공해야겠다, 다음 생에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나가 살아야지, 다음 생에선 출판쪽일을 해보고싶다며 별별 생각을 꽤나 진지하게 할 정도였으니, 제프는 어땠을지 대강은 짐작이 간다.
모든 것이 흐트러진 것은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이 있기 직전부터였다. 그의 의도가 개입되는 순간 모든 것은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인류의 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을 몇번이고 봐야만했던 그의 참담한 기분을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가 어찌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도 있다는 것, 아니, 오히려 더 악화되는 일들도 많다는 걸 알게된 순간의 그 참담함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제 과거는 예측불허의 공간이 되어 버렸다. 그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사실들로만 가득찬 세상,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차라리 미래였다.
무엇 하나 그의 의지대로 되어가지 않았다. 세상을 구원하고자 한 그의 의지는 오히려 세상을 절망으로 쳐박는 듯 했고, 동지를 만나고 싶던 그의 의지는 미치광이만을 보게했다. 사랑하던 여인은 그를 오해하기도 했다. 무한반복될 것 같던 그의 리플레이는 천천히 그의 자만과 욕망을 침식해갔다.

그럼에도 제프가 생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는 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다. 그가 허무주의에 허우적대지 않았다는 것 또한 너무나 감탄스러운 일이다. 나는 이렇게 단 한번의 생에도 재미가 없고 허무해 질 때가 많은데 말야.
반복되는 삶에서 모든 것을 마모시키고, 무엇에도 깨지지 않을 본질적인 것만을 남겼기 때문일까. 그리고 그 본질적인 것은 역시나 사랑? 제프처럼 본질만을 정제해서 살 수 없는 나로서는 뿌옇고 거칠게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과거는 또다른 미래이듯이 미래 또한 또다른 과거일 뿐이라면, 또다른 가능성 앞에 놓여진 제프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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