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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조사관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5년 10월
평점 :
내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치밀한 범죄와 이를 풀어가는 추적 과정 때문이 아니다. 인간성을 잃게 되는 순간의 망설임과 고통이 역설적으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이고, 선과 악, 생과 사의 모호한 경계를 추적해야 하는 사람의 끊임없는 고민을 들여다 보면서 선악 생사의 무게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을 담되 지나치게 현실적이지는 않은 추리소설들을 좋아한다. 세밀하기는 해도 지나치게 조밀하면 안된달까.
여하튼, 그러다 보니 한국 추리소설은 잘 읽게 되지 않았다. 적당히 이국적인 장소와 적당히 거리감있는 번역문이 좋았지.. 간혹 읽게 되는 한국추리소설에선 꿈틀대며 살아있는 대화체나 너무 익숙해서 냄새까지 느껴지는 거리의 모습들이 지나치게 생생해서 좀처럼 거리를 둘 수가 없었다. 압사당하는 느낌이라고까지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 적나라한 범죄의 모습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뉴스를 보는 것 같아서 내 사고와 내 감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내가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인데, 영화를 보다보면 내 감정과 내 사고가 피어날 틈이 없다. 화려한 시각적 효과들과 완성체인 배우들을 보다보면, 어느새 그냥 멍하니 있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몸이 후루룩 빨려들어갔다 나오는 것처럼.
그러다가 송시우의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을 꽤 기분좋게 읽었고, 망설임없이 그녀의 두번째 책까지 집어들게 되었다. 왜 망설임이 없었는지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이제는 좀 알겠다. 사실, 책을 읽는 내내 골똘히 생각했다. 왜 이 이야기들은 다른 걸까 하고.
두어 시간은 생각해 본 것 같은데, 결론은 어떤 `틈` 같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내가 마음껏 인물에 동화하고 마음껏 사건을 둘러보고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틈.
말하자면 이 소설에는 그런 게 있더라. 인권위 조사관이라는 묘한 포지션(사건과는 약간 떨어져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그 안의 사람을 보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고민하고 실수하는 주인공들을 사려깊고 침착하게 그려낸 작가의 역량 덕이 더 크다. 게다가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그것도 범죄 이야기를!!) 를 미스터리로 멋지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한국`추리소설의 재미까지 알게 해 주었다.
아낌없이 별 다섯 개 주고 또다른 이야기까지 기다리련다~ 이왕이면 조사관 시리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