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는 도망치고 싶은 기억들이 세월의 무게에 밀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곱게 바래졌다. 구정물이 흐르던 지저분한 다세대주택이 라일락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되새겨지는 순간, 매캐한 연탄가스와 코를 찌르던 옥외변소의 냄새는 붉은 라일락의 취할 듯한 향기로 덮어졌다. 그렇게 덮은 채로 그냥 둘 것을. 그만두면 안되냐는 우돌의 외침의 새삼 생생하다. 그야말로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열심히 사랑하고, 제 자식 먹이고 입히며, 아등바등 살았을 뿐이다. 잘 살고 싶은 마음들이 비틀어져 여기저기 더러운 고름들이 스며나오고 있던 걸을 굳이 알은체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추악한 범죄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보는 내내 속이 아리고 아리다. 수빈의 나이는 내 나이과 거의 같다. 예닐곱 살에 내가 살던 다세대주택도 그녀의 기억처럼 생생하다. 안채에 세 살았던 우리. 아빠와 부부싸움을 하면 도망갈 곳도 없던 우리 엄마는 건넌방 할머니방에 몰래 숨어 아빠 눈을 피했다. 건넌방 앞에는 아침마다 병에 든 우유가 배달되었는데 그 우유 맛보려 건넌방 할머니방에 갔다가 피신가 있던 엄마를 찾아냈다. 몇달을 졸라 겨우 선물받은 미미 인형을 가지고 동생과 다툰 날, 동생이 내 인형은 옥외변소 똥통에다 던져 버렸다. 그 일로 부모님께 무진장 혼났지만, 끝내 건질 수 없었던 미미 인형의 다리만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나는 그 시절을 결코 아름답다고 기억할 수 없다. 그저, 아름다웠다고 믿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