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랑 노는 것보다 책이랑 노는 게 훨씬 좋다고 수줍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그것이 사람이랑 잘 놀 줄 몰라서. 라는 의미에 좀 더 방점이 찍혀 있었는데, 요즘은 정말 책이랑 노는 게 즐겁다.

책의 내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문장이 다시 눈에 차오르고 차올라서 말없이 책을 들고 있는 게 행복하다. 이런저런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지만, 나 혼자 다른 공기를 마시고 있는 느낌이랄까.

 

새삼 이런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건, 기록. 때문이다.

책의 어느 시점, 문장, 순간에 대해서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알라딘 서재가 없었으면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행위가 아니라 발상 자체가 말이다.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기거나 서평을 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책들은 전체로서가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으로 내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이야기의 사소한 편린이 나에게 꼭 박히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

자유롭게 '순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멋진 서재들을 보면서 용기를 받기도 했다. 말 한 마디 나눠본 적도 없는 분들이 괜시리 친구 같았다. 아, 이래서 서재를 떠날 수 없구나 늘 생각하곤 했다.

 

내가 요즘에 쓰는 방법은 '에버노트'를 이용하는 것인데, 이거 꽤, 아니 엄청나게 즐겁다.

기억하고 싶은 키워드며, 등장인물들의 아름다운 이름들이며, 언젠간 가고 싶은 책 속의 그곳들까지 마음 내키는대로 남기고 있다. 가슴을 후벼파는 문장들은 사진으로 찍어  오려둔다. (무려 OCR 로 저장이 된다. 사진 안에 글씨까지 검색이 된다는 거~)  컴퓨터와 스마트폰, 아이패드까지 넘나들며 쓸 수 있어, 언제든 책이 있는 곳에 함께 할 수 있다. 이러면서 책 읽기가 3십만 배 쯤 더 재밌어졌다.

 

그래서 요즘도 폭풍 독서가 이어지고 있다.

가장 좋았던 책은 제프리 무어의 <아무 일도 없었고, 모든 일이 있었던>.

이 책은 한 문장 한 문장이 극세사 이불처럼 나를 폭 감싸주어서, 도무지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다시 읽고, 다시 웃고, 다시 읽고, 다시 기억하곤 했다.

푸른숲의 디아더스 시리즈는 표지 얘기를 안하고 넘어갈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데, 너무 쓰다듬어서 지문이 사라질 정도로. 그런데 요즘 이 시리즈가 안나오는 거 같다. 쳇.

 

 

하루키의 책도 다시 읽었다. 가장 좋아했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십대 초반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니 감회가 .... 새록새록 촌스럽고, 허세작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모두 기억해냈다.

(새로 표지 예쁘게 나온 녀석은 번역자가 다르니, 분위기가 좀 다르려나)

 

 

 

지금은 칼럼 매캔의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를 읽고 있고, 이럴수가. 코리건이 죽었다.

짬짬이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읽는다. 이것도 도통 진도를 나갈 수 없다. 어쩜, 이래. 어쩜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지 하면서. 어떤 건, 두 페이지 전체를 캡쳐해 놓기도 했다. 진짜, 어쩜 이래.

 

에세이로는 강상중의 <도쿄 산책자>를 읽는데, 이건 인문 에세이인지, 강상중 화보집인지 좀 헷갈린다.

 

 

그리고 어제는 묵혀두었던 만화책 <네가 없는 낙원> 14,15권을 연달아 읽었다. 정말 사랑스러운 만화다.

아~~~~~~~ 이럴 순 없어~~~~ 하면서. 야가미와 카즈야. 나는 절대로 누군가를 선택할 수 없다~~

지구라는 땅을 밟고 싶다는 토모에의 꿈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만화를 연재하던 잡지가 폐간되었다는데, 16권은 언제쯤 볼 수 있으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