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고마비의 계절이 되어 그런가 나는 계속 살이 찌고 있다.
....는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여하튼 가을 문턱을 넘어서면서 아무런 계기도 없이 독서에 탄력이 붙어서, 5분 10분 짬짬이 책을 읽는데도 무지 몰입이 잘 되고 있다. 리뷰를 써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괜찮은 책들인데도, 리뷰쓰기가 귀찮아서 이렇게 대강 넘어가는 게 미안할 뿐이다.
어쩌다 보니 온다 리쿠의 책이 두 권이었다. <여름의 마지막 장미>는 몇 페이지를 읽자마자 농밀한 숨막히는 공기가 훅하고 퍼져오길래 다시 덮을까 했었다. 하지만 죽음이 변주되는 새로운 장이 하나씩 펼쳐질 때마다 아, 이래서 내가 끊지를 못해, 하고 자조했다. 그래, 끊기가 쉽지 않다. 우수하고 아름답고 야성적이며,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파멸적인(233) 이야기.결말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사실, 온다 리쿠의 에세이는 더 좋았다. 제목부터가 매력적이지 않은가. <구석진 곳의 풍경>이라니. 게다가 장정은 어찌나 우아한지. 대놓고 고급스럽다기보다는 다소곳한 숙녀의 맛이 난달까. 출판사 이름은 또 어떻고. 무려 '책읽는수요일'
여행 에세이를 표방하고 있지만, 잡지사의 요청에 의해 이곳저곳을 다녀온 감상을 모은 책이라 다소 함량미달로 보이는 글들도 섞여 있다. 서울편도 그렇고. 하.지.만. 나는 몇몇의 글들이 너무 좋아서 충분히 끌어안을 수 있다. 그녀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오래된 도시들에 대한 감상들은 참 좋았다.
밤의 나라를 걷고 있자니 정말 '밤의 바닥'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밤의 바닥'을 얼큰히 취한 기분으로 걷고 있으면 쥐죽은 듯 조용한 아라이케의 수면이 어슴푸레 반짝이며 옛 도시에 있다는 실감이 샘솟는다.(173)
이런 글들. 아. 나라에 가야겠다.
구마모토의 말고기 얘기는 또 얼마나 신나던지. 돌다리 얘기도 귀를 쫑긋하고 들으며 다 메모해 두었지만, 사실은 그녀가 침이 마르도록, 아니 침을 줄줄 흘리면서 감탄해 마지않던 말고기회. 거기에 그 엄청난 양의 술들. 아, 그걸 다 먹어야겠다.
독서동아리 활동 때문에 토마스 H 쿡의 <붉은 낙엽>도 읽었다. 지난 번에 읽은 책이 영~~~ 아니었기 때문에 여름가기 전에 추리소설 읽자고 우겨서 고른 책이었는데, 여름보다는 역시 가을에 맞는 소설이었다. 쉴새없이 몰아치는 미국식 스릴러 쯤은 예상하고 있었는데, 어 어어어어... 읽는 내내 비에 젖은 낙옆처럼 온몸이 다 축 쳐져서, 빠져나오느라 고생했다. 이 작가가 <밤의 기억들>의 그 사람이라는 것을 왜 까먹었던 거지. 우울한데 가슴도 좀 아프고, 넌더리가 나다가도 안쓰럽고 뭐, 그런. 에잇, 알고 싶지 않은 감정이지만, 알았다고 해서 후회되지는 않는다.
역사책도 한 권 읽었다. 이연식이 쓴 <조선을 떠나며>는 1945년 패전과 함께 조선을 떠나야 했던 재조 일본인들의 향방을 추적한 글이다. 주제부터가 무척 매력적이었는데, 그에 못지않게 내용도 재미있었다. 수년간에 걸친 꼼꼼한 자료조사와 준비가 느껴져 글쓴이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였는데, 다양한 사례가 등장하여 지루할 틈이 없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에게는 패전으로 본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 자체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게다가 그 과정에는 귀환 수단부터 시기, 소지 물품과 재산 처분 문제까지 무수한 문제가 산적해 있었고, 필연적으로 그 과정에 모리배와 사기꾼들이 끼어들었다. 일본 정부의 대응은 무책임했고, 조선인들의 반감은 생소했다.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가 바로 이 부분이었는데,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과 서로 다른 지역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인으로서의 조선인은 전혀 관심도 없고 접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해방과 함께 터져나온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과 일련의 파괴행동이 매우 생소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습기까지 할 정도로 서러운 이야기이다.
이밖에도 민족 문제를 떠나 인간적으로 안타까운 이야기들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 근본적인 원인과 책임 문제를 더욱 확실히 해야한다는 문제제기까지 모두 경청할 이야기들이었다.
아.. 이 책은 리뷰를 써야하는데. 진짜 그래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