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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ㅣ 언더그라운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성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꾸려가며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중받고 박수받아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더그라운드>에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절로 옷깃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성실한 인생들에 대한 감동 때문이 아니었을까.
<언더그라운드>는 1995년 일본에서 벌어진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사건의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르뽀집이다. 700쪽이 넘어가는 두툼한 책은 묵직한 주제만큼이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무려 12명이 사망하고 6천여 명의 부상자를 낳은 사건이니, 그 피해자들의 증언은 얼마나 처참하고 원통할 것인가.
그런데 첫 번째 인터뷰부터 내 예상이 빗나갔다. ‘이즈미 씨는 가나자와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외국항공회사 홍보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라고 시작되는 문장은 무색무취의 담담한 어조였다. 사건보다는 인간을 먼저 보고 싶다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대로 조용히 한 사람의 살아온 길이 적혀 있었다. 누군가는 가난한 농가의 둘째 아들이었고, 누군가는 거품경제 때 산 주택 융자금 때문에 매달 허덕이고 있다고 했다. 초롱초롱한 눈에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휴일마다 딸들과 소프트볼 연습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1995년 3월 20일 월요일 아침, 이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린가스가 담긴 비닐봉지가 터졌다.
각기 다른 노선 다섯 대의 지하철에 여섯 개의 사린 봉지가 터졌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린가스가 서서히 지하철 안을 채웠다. 사린이 담긴 비닐봉지를 끌어내던 역무원의 손을 타고 사무실에 가스가 가득 찼다. 매캐한 공기를 참다못한 누군가가 발로 사린 봉지를 차냈고, 플랫폼에 떨어진 사린은 건너편 플랫폼까지 죽음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사린가스가 가득 찬 채로 서너 정류장을 더 달리다 멈춘 지하철 뒤로 줄줄이 지하철이 정차했고, 역시 사린이 가득 찬 플랫폼으로 사람들을 토해냈다. 역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이 쓰러진 사람을 돕다가 함께 가스를 마시고 중독이 되기도 했다.
영문도 모른 채 사람들은 눈앞이 캄캄해졌고, 구토를 했고 쓰러졌다. <눈먼 자들의 도시>처럼 사람들의 동공은 작아지고 작아져 모든 게 어두워졌다. 거대한 불길이나 지축을 흔드는 폭발음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조용히 하나둘 쓰러져 갔다. 이 얼마나 무서운 광경인가. 길 건너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걸어가고 있는데, 이쪽에서는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다니.
문제는, 이 거대한 부조리한 상황을 맞닥뜨린 것이 영화 속의, 혹은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나와 같은 보통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범죄를 만난 평.범.한 사람들. 이 사건 이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고, 가족을 잃은 사람도 있으며, 직장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소중하게 여겼던 취미가 하루아침에 쓸데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똑같은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래서 지겨우리만큼 비슷비슷하게 반복되는 인터뷰지만, 결코 어느 하나 가볍지 않았다. 평범하고 묵묵하게, 건실하고 일관되게 자신의 삶을 살아온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결코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질 수는 없었다. 결코 그럴 순 없다. 온전하지 않은 정신에도 작가의 손가락을 꼭 쥐며 미소짓던 여인을 어찌 피해자 A씨로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사린가스를 터뜨린 놈들 또한 어디에선가 봤을 법한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작가가 마지막에 밝혔듯이, 거대한 시스템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누군가의 이야기에 자신의 자아를 의탁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이야기로 살아내는 것. 그것은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