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같은 시절이 휘몰아쳐 갔는데, 여전히 몇권의 책이 머리에 남아 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 기시 유스케의 <천사의 속삭임> 
추석 연휴를 끼고 집안일을 하다가 잠시 짬이 나거나, 아이가 낮잠을 자거나 할 때 읽으려고 들었던 책이어서, 짬짬이 조금씩 읽으려고 했건만. 이 책이 어떤 책인 줄 모르고 그런 깜찍한 생각을 한 거지.
지금까지고 한탄하고 후회하고 있다.
이 책은 그렇게 읽어서는 안되는 책이었던 게다. 그 소름끼치고 끔찍한 영상이 머리 속에 둥둥 떠다니는데, 전을 어떻게 부치며, 물줄기를 뚫고 설거지는 어떻게 하며, 침대맡에서 단잠은 어떻게 잔단 말이냣.
내가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을 처음 읽던 시절을 깜빡 잊고 말았다. 말초부터 전율이 내달리게 만드는 그 글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그 기시 유스케의 글인 걸 어떻게 잊고 있었지? 이 책 덕에 거의 일주일을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선충 생각에 아침마다 찌뿌드드 했다.
절대로 쉽게 덤비지 마시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시라. 한번 손에 들면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물리적인 책은 저 멀리 던져 버렸어도, 손 끝에 눈 끝에 그 글들이 눅진하게 달라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덮어줄 말랑말랑한 연애 소설 같은 걸 찾으려고 책장을 뒤지다 뒤지다 지금 포기하고 돌아앉은 참이다. 

비슷하게 즐겁게 읽었던 소설은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픽처>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이야기나, 새로운 삶을 다시 살아가야 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만족스럽고 행복했던 인생이었는데, 왜 그런 이야기들이 끌리는 지는 모르겠다. 그저 일반적으로 인간은 그런 이야기를 동경하는 법이라고 해두자.
흥미롭고 재미있기도 했지만, 자의든 타의든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하는 내용의 소설들은 제법 클리셰가 많은 편이라, 식상한 구석이 종종 있었다. (이런 류의 소설로는 켄 그림우드의 <리플레이>를 따라갈 게 별로 없다는 생각. 흠흠.) 

한국소설로 편혜영의 <재와 빨강>도 읽었는데, 이름모를 전염병과 쓰레기, 쥐가 득실거리는 이미지의 묘사는 탁월했다. 그러나 '글'과 '이야기'의 무게균형이 묘하게 기울어져 있어서 책을 덮고는 아쉬움이 남았다. 다음 작품을 또 기대해 보겠다. 

 

 

여행기로 예전부터 한두 꼭지씩만 골라 읽었던 강동진의 <빨간벽돌창고와 노한 전차>를 처음부터 다시 숙독했다. 여행기라기보다는 일본의 근대유산 기행기의 성격이 강하고, 간혹 논문처럼 학술적인 내용도 찾아 볼 수 있어 숙독해야 마땅한 책이다. 근대 건축과 근대적 유산들을 보존하고 이용하여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는 일본의 여러 도시들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예전에 오타루 여행을 준비하면서 오타루의 창고들을 보존하려는 시민단체들을 알게 되어 놀라웠는데, 80년대 즈음부터 일어난 이런 움직임이 일본에 상당히 많았다. 일본의 소도시들을 다니다 보면 늘 자신의 고장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게 바로 진정한 도시의 자산이요, 미덕이라는 점을 절로 깨닫게 된다. 작년에 다녀왔던 오노미치의 경우도 그 대표적인 경우였는데, 역사적 유산과 근대의 산업유산을 적절히 조화시킨 소도시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더불어 지금 나의 도시, 내가 나고 자란 도시의 오늘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만화책은  모리 카오루의 <신부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전처럼 만화방에서 죽치고 살지도 못하고, 대여점도 이용하지 않다보니, 새 만화 시작하기가 참 쉽지 않다. 구입해서 보기에는 편차가 너무 크고, 그나마 헌책으로 되파는 것도 쉽지 않은 이유이다. 자연히 믿을만한 작가의 후속작으로만 소심하게 손을 뻗고 있다.
<엠마>에서 익히 본 대로, 수줍고 순진하지만 불과 같은 열정을 지닌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게다가 당시 영국의 복식에 대한 집착(즐겁고 귀여운 집착이었지만)을 바탕으로 한 그림이 이번에는 중동과 유목민들의 기하학적인 무늬로 그대로 옮겨왔다. 기둥이나 문틀의 문양을 새기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는, 내용과 상관없이 눈이 다 즐겁다. 아하~ 재밌겠는데, 하고 촉수를 꿈틀대고 있는데, 어느새 2권이 나왔다. 얼른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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