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탐닉
세노 갓파 지음, 송수진 옮김 / 씨네21북스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아주 오래도록, 느리게, 그야말로 탐닉하며 읽었다. <작업실 탐닉>
단정하게 제목이 써있고 서서히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표지가 길을 가다가, 일을 하다가 간혹 생각날 정도였다. 책을 덮으면 단단한 만듦새를 손으로 쓰다듬어 보기도 했다. 띠지에 그려진 그림들을 오려둘까 생각도 했다. 아마 이 많은 작업실들을 내 발로 다녀오고,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내 손으로 만져본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게다. 

세노 갓파의 그림은 매력적이다. 정교하고 세밀한 그림인데 묘하게 투박하고 빈틈이 있다. 특히 책들이 무수히 놓여진 작업실을 보면 그 아슬아슬한 균형감과 정돈되지 않은 듯 하지만 모두 제자리인 질서가 느껴진다. 의자에 살짝 붙여둔 테이프 자국까지 빠짐없이 그려내는 심정은 어떤 걸까. 작게 놓여진 메모지 하나가, 꽃병의 꽃이, 책상위의 펜이 모두 그 작업실 주인의 열정과 고집과 노력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된 걸까.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작업실을 그린 책이 아니다. 49명의 작업실을 통해 49명이 지금의 그로 있기까지의 시간과 인내와 노력을 그린 책이다. 그래서 생소한 분야인 기상청 지진예지 정보과의 모습이나 외과병원의 수술실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거대한 기계나 도구들의 쓰임을 잘 알 수 없어도, 그것을 손에 잡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알 수 있다. 놀랍게도 그 마음이 그림에 보인다. 보이지 않았다면 그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꼬여있는 전화줄이나 반쯤 찬 쓰레기통까지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면 의미없이 지워졌을 것이다.  

 

그래서 한참을 보다보면 그림을 뱅뱅 돌려가며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동서남북 각 방향을 볼 땐 그 방향의 벽이 위로 향하도록 책을 돌리는 것. 아, 이 문으로 들어오면 책상이 바로 보이는구나, 이렇게 서서 복사를 하겠네, 이 앉은뱅이 책상에 앉으면 전화기가 바로 닿겠구나. 그러다보면 어느새 평면이 입체로 변하고, ‘지금 이 순간’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으로 변한다. 울컥하는 감동은 아니지만, 서서히 마음이 젖는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가며 썼을 누군가의 다짐이 생생하게 느껴져 책상 위에 붙어 있다는 메모지의 글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유쾌하게
.(12)

그림이 이 책 최고의 미덕이지만, 세노 갓파의 글 역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재주가 있다. 막연히 ‘갓파’라는 이름 때문에 익살맞고 재치있는 글을 상상했었다. 기상천외한 일들을 종종 벌이고 다니는 전설적인 호기심의 대가라고 그를 소개하길래, 글도 요란스러울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 만난 본 그의 글은 오히려 명료하고 진지하다. 그가 비교적 잘 아는 분야의 전문가를 대할 때에나 잘 모르는 분야의 전문가를 대할 때에나 한결같다. 진지하게 탐구한다. 미리 준비하고 꼼꼼하게 묻는다. 그러다가 알았다. 이 사람, 정말 궁금했구나.
나는 그의 ‘놀이가 일이고, 일이 놀이다’라는 사고방식 속에 숨어 있는 성실함을 보았다.(256)



덧붙임 ) 이렇게 세상을 그리는 사람이 우리 나라에도 한 명 있다. 최호철. 삐뚤빼뚤한 선 안에 무수한 집과 무수한 차와 무수한 길과 무수한 ‘사람’이 있다. 이런 책 하나 안 내나 싶었는데, 역시나 근래에 나왔네.  <최호철, 박인하의 펜 끝 기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