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 팬으로서 내가 겪는 가장 큰 딜레마는 트릭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장르적 특징 중 가장 중요한 '트릭'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추리소설을 '추리'하지 않으며 읽기 때문이다.
내가 추리소설을 위시한 미스터리 소설과 SF, 환상소설 등 이른바 장르소설이라 불리는 소설군을 좋아하는 것은,
장르적 요소들로 짜여진 거대한 체계에 내던져진 인간들이 고민하고 상상하며 방황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선 쉽게 잊고 살던 것들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비일상적 경험을 통해 새삼 바라보게 된다 는 설정 자체가 마음에 드는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 선과 악에 대해, 우연과 필연에 대해, 평범과 비범에 대해, 사랑과 증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장르적 특징에 기대는 것은 나름대로 손쉬운 방법이니까.

그런데, 장르 소설들의 장르적 요소라는 것은 문학 속에서, 인간 속에서 용해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성격과 특징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면서 그 요소들 자체가 어떤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게 된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구성되는 순간 그 구성되어진 인과관계와 동의상황과는 별개로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걷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장르적 특징들에 천착하는 장르소설들이 출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고, 이러한 점에 끌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장르소설과 순수소설 간의 경계가 그다지 의미있지 않다고 보는 나로서는 장르적 특징에 지나치게 천착하는 소설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 그 중에서도 추리소설의 트릭은 좀 유별나게 경계하는 편.
트릭을 위한 트릭, 그거 참 별로다.

물론, 추리소설에선 트릭이나 일정한 설정이 소설 구상 단계의 첫걸음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첫걸음일 뿐이며, 그 트릭을 어떻게 구현해내느냐, 어떻게 살을 잘 붙혀서 인간적인 숨을 쉬게 하느냐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비슷한 의미에서 '반전'이라는 것에 대한 반감도 상당히 크다...)
가끔은 '이런 건 예상 못하겠지?', '이렇게 허를 찌를 줄은 몰랐을 거야', ' 모두들 속아넘어 가겠지' 하며 킥킥 거리고 있을 모습만 잔뜩 떠오르는 소설들이 있다. 작가의 예상대로 깜빡 속아넘어가 대단하다며 감탄하게 되는 경우라면 대성공이겠지만, 간혹은 짜증날 때가 있기도 한다는 건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내가 계속 공감하며 함께 고민하고 방황해주었던 그 모든 문제들이 뒤에 밝혀질 깜짝 트릭을 받쳐주기 위한 위장이었을 뿐이라는 느낌이 들기라고 하면, 좀 화나지..
그러니 대단한 트릭이나 깜짝놀랄 반전을 준비하고 있는 작가라면 세심하게 신경써 주시길. 속았다는 느낌에서 끝나면 또 모르지만, 사기당했다는 허망함이 들면 큰일이니까.

<미륵의 손바닥>은 어떤 경우였느냐 하면... 좀 짜증난 경우다. 이 책이 종종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와 비교되곤 하는데, 그래도 그 책은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고 넘어갔을 인물 설정의 문제에 허점을 찔러놓고 나머지 사건 진행 상황은 정직하게 그렸다. 하지만 <미륵의 손바닥>은 두 명의 주인공을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사건의 가장 중요한 장면들을 생략했다. 수상한 신흥종교쪽으로 관심을 몰아가는 건 좋았지만, 빠짐없이 보여주고 있는 듯 보이는 주인공들의 활동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쏙쏙 지워버린 건 너무하지 않나 싶다. 이건 반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다지 수긍할 수 없는 반칙.

사실, 아직까지 화가 다 안 풀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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