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류승완 감독이 최고작을 꼽는다면 나는, <다찌마와 리>를 꼽을 것이다. <베를린>이나 <부당거래>같은 장르의 영화는 류승완 감독보다 훨씬 더 잘 만들 수 있는 감독이 많다는 걸 상기시켜 줄 뿐이다. <베테랑>은 <베를린>이나 <부당거래>의 어정쩡함을 극복하고 류승완표 영화 특성을 만들어낸 지점이기도 하다. 그럼 류승완 영화의 특성은 뭔가. 직설화법이다. 에둘러말하거나 정교한 스토리 따이는 류승완 감독이 잘 하는 게 아니다. 류승범의 발성법처럼 내지르는 화법. 단순하고 직설적인데서 오히려 웃음을 파생시킬 수 있다. 그리고 액션에 리듬감이 있어서 박자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같아 폭력적 장면에서 묘하게 상쾌함이 있다. 폭력적 장면을 즐기지 못하는 편인데도 말이다.

 

2.

한 영화 속에 두 개의 영화가 존재한다. 영화 시작 한 지 20분이 지나도 유아인이 안 나와서 내가 상영관을 잘못 찾아 앉아있나, 의심했다. 포스터에는 분명히 유아인이 있었는데 내가 다른 영화랑 착각했나, 하고 내 기억력에 깊은 회의를 품고 있을 때 비로소 유아인이 등장했다. 한 영화에 두 영화를 담다니. 광역수사대를 소개하는 오프닝이기도 하지만 20여 분 간의 오프닝은 하나의 단편영화로도 완전한 형식을 갖춘다. 그저 인물소개만이 아니라 기승전결까지 이어지는 오프닝 아닌 오프닝. 그리고 분위기가 바뀌어서 유아인이 등장하고 본편이 상영된다. 영화가 지루할 수 없다. 실제로 액션이 넘치는 영화가 아닌데 끝나고 나면 액션으로 넘치는 영화로 잔상이 남기도 한다.

 

재벌2세의 개망나니 짓을 정의로운 광역수사대가 밝힌다는, 판타지로 가득찬 게 내용이다. 이 영화에서 내용을 왈가왈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조태오가 마지막에 수갑을 차고 외친다. "이 거 푸는데 얼마나 걸릴거 같아? 한 시간이면 돼"하는 자신감을 보여준다. 이 대사는, 전체 판타지 영화에서 도드라지게 현실적이다.

 

3.

이 영화에서 여러가지 유형의 폭력이 나온다. 오프닝에서는 각본 짜 놓은 코미디처럼 박자가 맞는 자해(?)도 등장한다. 싸움의 종류에는 엔딩에서처럼 서로 맞부터 싸우는 장면도 있지만 오프닝은 힘보다는 박자에 중심을 둔 액션이다. 대치하는 인물이 형식적으로는 공권력과 재벌이지만 재벌은 누구한테나 폭력을 휘두른다. 조태오가 취미로 하는 격투기는 조태오를 마치 로마시대의 귀족이나 왕의 위치로 데려간다. 격투기의 본질은, 재미라서 파이터들 당사자들은 목숨을 내놓고 귀족을 즐겁게 하는 의무를 지녔다. 의무를 해 내지 못하면 죽을 운명인 게, 귀족 혹은 재벌의 마인드.

 

4.

유아인. <밀회>에서 유아인이 원래 저렇게 연기를 잘 했나, 감탄했다. 사실 그 전에는 유아인이 나오는 무언가를 본 적이 없기에 비교할 수 없다. 청년의 불안을 표정만이 아니라 제스쳐 전체에 그 아우라가 묻어나서 정말 보고 있으면 그 불안이 고스란이 전해져왔다. 아무튼 <밀회>를 보고 홀딱 반했는데 <베테랑>에서는 더 반하겠다. 내적 울분이 있고 폭력적 가정환경에서 자라 폭력적 성향이 폭발한다. 꼭지가 돌면 나오는 광기 어린 눈빛과 비열한 표정이, 원래 그런 사람같은 인상을 준다. 남자배우들은 좋은 배우가 많은데 여자배우는 최근에 누굴 보고 감탄했는지 잘 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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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6 18:09   수정 | 삭제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7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6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7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1953년 작으로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첫번째 장편영화고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 포스터인데 재밌어서 올려본다. 이 포스터를 보면 60년대 한국영화 포스터 느낌도 난다. 개봉 당시에 여배우의 파격적 노출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직접 본 감상은, 여배우의 뒷모습 누드씬이 있는데 그게 막 강조되는 영화가 물론 아니다. 뜻밖인 건 베리만 감독도 초기에는 서사 중심의 극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도 얼굴 클로즈업이 이따금씩 사용되긴 하지만 눈에 두드러지진 않는다. 베리만 감독 영화란 정보 없이 본다면 베리만 감독 영화인지 알아채기 힘들 수도 있겠다.

 

2.

"배드 걸 이야기"란 홍보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착한 여자 이야기는 아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17세 아가씨가 술주정하는 아버지의 구타로 집을 가출해서 여름동안 남자 친구랑 보트에서 지낸다. 그리고 임신을 해서 19살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어린 남편은 사회가 원하는 가장이 되려고 노력하다보니 바쁘다. 집세를 내려고 일도 하고 더 번듯한 직장을 가지려고 학교도 마치려고 한다. 하지만 모니카한테는 다 부질없는 일처럼 보인다. 바쁜 남편, 엄마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딸은 자유로운 영혼을 구속한다. 직장에 나간다고 하고 남편의 고모한테 딸을 맡기고 놀러나가고 집세를 낼 돈으로 옷을 산다. 남편과 말다툼을 하면서 하는 말이, "입을 옷도 없는데 집세가 뭐가 중요해". 아, 모니카!! 그러니까 모니카는 17세다. 소비사회의 진정한 고수처럼 보이는 나이고 이성보다는 감정이 중요한 때이다.

 

3.

모니카의 남편 해리는 모니카를 사랑하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가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모니카와의 유대는 오히려 흔들리고 깨진다. 조그만 배에서 매일 똑같은 버섯볶음과 수프를 먹는 일상을 묘사하는데, 감독은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모니카의 기질은 자유를 사랑하면서도 물질적 욕구를 버릴 수 없는 것처럼 묘사된다. 정신적으로는 풍요롭지만 물리적으로 불평 하고 해리는 집으로 돌아가 직장을 갖겠다고 설득하지만 모니카는 거부한다. 출산 후 보트가 아닌 집에 사는 건 모니카한테는 물질적 안정을 줄 수는 있지만 정신적 고갈을 의미한다. 해리한테 모니카는 감당하기 힘든 상대다. 감정적인 여자와 이성적인 남자가 만나서 불같은 사랑을 잠시하고 그 다음은 현실로 돌아와 지지고볶는 단계로 이어진다.

 

4.

평화로운 복지국가 스웨덴의 사회 분위기도 영화를 보면 상당히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이다. 모니카의 행동을 말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 가장에 대한 의무와 책임, 그리고 아내에 대한 의무 등을 모니카의 질풍노도를 통해 에둘러 말한다. 사실 겉으로 보면 평화로운데 안을 들여다보면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게 커플 관계고 또 사람의 관계다. 나쁘다, 좋다를 말하기 전에 각자의 입장이 있고 그 입장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지가 관계의 질과 지속성을 결정한다. 모니카와 해리는 전혀 다른 기질의 사람이기도 하고 또 사회화 과정에서 사회화의 정도를 다르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모니카가 저항이란 태도를 택했다면 해리는 순응이란 관점을 택했다. 저항과 순응은 불협화음을 낼 수 밖에 없다. 평범하고 평화로운 가정 혹은 관계란 불협화음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지에 달려있다. 모니카가 보기에 해리 역시 배드 가이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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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8-02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리만의 영화를 좋아합니다. 이 영화는 처음인데 어떤 경로로 볼 수 있나요?

넙치 2015-08-02 09:4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또 우시겠네요^^;;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했던 영화에요.

프레이야 2015-08-02 10:27   좋아요 0 | URL
아.진짜 서울 ㅠ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잉마르 베리만 특별전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골라서 제법 봤는데 이 영화는 없었던 것 같아요. ㅎㅎ

넙치 2015-08-05 10:35   좋아요 1 | URL
네, 이 영화는 베리만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 알려진 영화에요. 첫장편영화라서 그런지 베리만 영화의 전형적(?) 특성들을 슬쩍슬쩍 엿보는 재미도 있어요.

그래도 부산은 다른 도시보다는 기회가 풍성하니 상영기회를 한 번 기다려보심이^^
 

1.

양고기를 안 먹는다는 한 친구가 있다. 겨울에 파리에서 가서 어린 양고기인줄 모른 채 양고기 요리를 먹었다. 지금까지 하는 말이 파리에서 먹은 음식 중 그 음식이 가장 맛있었다고. 얼마 전에 어린 양고기라고 알려주었더니 자긴 원래 양고기 안 먹는 사람인데 그럼 양고기를 먹은 거냐고, 놀람과 원통(?)함을 토로한다.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나는 애니매이션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재미없는 애니매이션을 안 좋하는 거 였다고 정정해야할 듯. 영화를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재미없는 영화를 안 좋아하는 것처럼. 취향에 대한 호불호란 얼마나 주관적이고 부질없는지. 한 후배가 말은 모순되고 인간의 감정을너무 거칠게 표현해서 언어 자체에 회의적이라고 했다. 뭘 좋아해, 안 좋아해, 하고 쉽게 내뱉지 말아야지, 해보지만 쉽진 않을 듯.

 

2.

애니매이션하면 기본적으로 아이들이 쉽게 접근한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상영관에는 아이들이 그득했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기억과 기억의 재생에 관한 걸 다루고있으며 꽤 정교하게 뇌 상식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이들의 관점에서 한 번 보려고 했다. 아이들은 뭘 볼까? 캐릭터들의 움직임은 줄거리와 상관없이 매력적이다. 각각의 캐릭터들의 동작범위, 심지어는 눈을 깜박이는 각도마저도 큼직해서 그 차체로 시각적으로 자극이 된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조이가 봉봉~하고 경쾌하게 부르는 리듬이 맴돈다. 나도 봉봉~ㅋ 사소해서 어른이 되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행위, 가령, 눈을 깜박인다는가 말하는 상대를 바라본다든가, 하는 행동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뭐 현실에서 그런식으로 행동하면 더위에 정신줄 놨다고 볼테지만 중요한 건,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지는 것들이 애니매이션을 통해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한테 새로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3.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본 건 사람의 감정을 기억에 의존하는 지점이다. 기억에 따라 감정이, 혹은 감정에 따라 기억이 배치된다. 다른 주로 이사와서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한 소녀가 가진 과거 기억을 통해 감정 역할이 명쾌하게 분류된다. 실제에서 감정과 기억의 상관관계가 명쾌할 수 없지만 아무튼 소녀의 감정 스펙트럼을 통해 슬픔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한다. 표면적으로는 기쁨이 본부에서 이탈을 해서 벌어지는 비극같지만 실은 슬픔이 기저에 없으면 공감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교훈적 이야기다. 중요한 지점인데 모두가 즐거워야한다고, 즐거움을 강요받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즐기지 않는 자 유죄"란 표현까지 나왔다. 즐거움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고 살아간다. 특히나 쏠림이 심한 한국사회에서. 소녀를 통한 교훈은, 기쁨은 자기 중심적일 수 있지만 슬픔이 없다면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으로 나아갈 수 없다. 자신만의 감정이 소중한 사람은 표면적 기쁨에만 몰입할 수 있다. 타인의 감정을 살필 수 있는 감정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온전한 감정이 작동한다.

 

4.

휴가철이다. 즐길 의무도 좋지만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방콕에서 슬퍼할 자유를 찾는 것도 휴가를 건강하게 보내는 방법이 아닐까.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순간 감정들이 균형을 이룰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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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7-31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고기 말씀하시니...생각이 나는데요..몽생미셸 인근의..프리살레...
어린 양고기 요리 말입니다. 소금기 머금은 풀을 먹고 자라서 고기 자체에 간이 되어있다는..
예전에 갔을 때는 가격때문에 못 먹었는데..
뭐, 천금이나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생각하니 후회가 됩니다...

넙치 2015-08-02 00:21   좋아요 0 | URL
어, 전 처음 듣습니다^^;
여행지에서 흔히 저지르는 실수죠ㅡㅜ 그리고 돌아와 후회를..^^;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존 말루프

 

오늘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을 보러 갔더니 BBC에서 만든 70분 짜리 다큐 Who took nanny's pictures?를 상영해줬다. 존 말루프가 만든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보다 훨씬 격조있는 관점으로 비비안 마이어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룬다. 존 말루프의 다큐를 보고 있노라면, 본인이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낸데 대한 열광으로 가득차있다. 그 열광은 그에게 가져다 줄 부와 명성, 즉 잿밥에 관심이 있어보인다. 어찌보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인터뷰이들이 주로 비비안 마이어를 내니 시절에 직접 만났던 이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기괴한 행동에 대해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에 BBC 다큐는 비교적 객관적 태도를 유지하려고 한다. 인터뷰이들이 주로 사진가들 혹은 사진 관련자들이어서 비비안 마이어의 개인적 삶은 작품세계를 해석하기 위해 도구로 가져온다.

 

 

한 사람을 정의하는 일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편견이 있는 일인지. 객관적 관점이란 원래 없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현상을 바라볼 때, 바라보는 이의 시선은 개인적 경험에 갇힐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모든 시선은 주관적이라고 비약할 수 있겠다. 마이어 역시 그랬다.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유추하건데 본인의 출생(할머니는 사생아 어머니를 낳고 뉴욕으로 건너왔고 나중에 어머니가 뉴욕으로 와서 마이어의 아빠를 만나 맨하튼에서 마이어가 태어난다. 할머니는 내니였고, 어머니는 메이드였다)을 부정하거나 미화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건 분명하다. 중산층 가정에서 내니로 살았던 마이어는 거리를 배회하면서 거리 사진을 찍었다. 피사체는 주로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사람, 즉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점에서 의문점을 제기할 수 있다. 마이어는 중산층 가정에서 소외된 계층에 속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가는 순간,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담는 역전된 위치에 속했을 수 있다. 카메라 렌즈를 감당해야하는 사람들은 길에서 배회하는 이들, 평범한 행인들이 대부분이다. 가끔 우연히 마주친 유명인(달리나 오드리 햅번, 커크 더글러스)도 담은 걸 보면 마이어가 택할 수 있는 피사체는 거리에 나온 사람들인 게 분명하다. 즉 피고용인의 입장을 벗어날 수 있는 게 카메라였을 수 있다.

 

마이어의 사진은 경쾌하고 정지된 이미지인데도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마이어가 죽을 때까지 15만장이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존재 이유였기 때문일 수 있다. 사진을 알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지 않을 걸로, 지금까지는 알려져 있다. 다큐 시작부분에 한 사진작가가 이런 말을 한다. "별이 되려면 일단 죽어야 한다"고. 마이어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말년을 보냈고 죽었다. 이제 그 죽음 속에 비밀이 담겨져있고 사진은 살아남았다. 마이어의 생전의 삶도 작품도, 이제 그 작품을 보는 이들의 손에 놓여있다. 그녀의 작품과 비밀스러운 삶은 보는 이의 렌즈를 통해 재해석되고 회자될 것이다. 마이어가 뉴욕과 시카고 거리의 행인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듯이, 우리는 우리의 경험이란 렌즈를 통해 마이어를 담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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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7-26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 어디서 하고있어요? 이미 지나간 전시인지요? 존 말루프의 다큐를 저도 보았는데 어딘지 미비한 점을 BBC 다큐가 대신할 것 같군요. 보고싶어집니다.

넙치 2015-07-26 09:06   좋아요 1 | URL
8월 초까지 성곡미술관에서 하고 있어요. 전시도 재밌고 특히 BBC 다큐 꼭 보세요.^^

appletreeje 2015-07-26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성곡미술관에서 하는군요.^^ 일간 다녀와야겠습니다~
넙치님~ 늘 고맙습니다!!^^

프레이야 2015-07-26 10:08   좋아요 0 | URL
이럴때 정말 서울 살지않아서 속상해요ㅎㅎ. 일단 검색해봐야겠어요.

넙치 2015-07-27 14:22   좋아요 0 | URL
제가 뭘했다고요...애플트리님.^^
티몬에서 1천원 싸게 티켓 구입할 수 있어요ㅋ

프레이야 2015-07-26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월 20일까지 하네요. 감사!!

넙치 2015-07-27 14:24   좋아요 0 | URL
아, 글쿤요! 근데 프레이야님 서울에 안 사시는군요^^;
서울에만 문화가 집중되는 현상에 우는 분들 많으시죠..;;;

프레이야 2015-07-27 14:31   좋아요 0 | URL
네 ‥늘 그게 ㅠ 지금 보고픈전시가 많더라구요. 프리다 칼로, 헤세, 앤디워홀 등.
하루 날 잡아 갈까해요^^
 
무탄트 메시지 - 그 곳에선 나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었다
말로 모간 지음, 류시화 옮김 / 정신세계사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한 친구가 최근에 까뮈의 책을 다시 읽고 감명을 받았단다. 사실, 많은 고전이라고 분류되는 책들은 어릴때는 이해할 수 없다. "젊은 날에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때는 사랑인 줄 모른다"는 노랫말처럼 젊음은 많은 것을 놓치고 젊음에만 집중을 하는 경향이 있다. 살다보면 계획은 틀어지기 마련이고 무수한 우연은 필연을 낳고 필연 속에는 개인의 의지가 들어있다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된다. 인생은 결코 뜻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흘러가는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을 때쯤, 모든 고전은 유의미하게 된다고 믿는다. 친구가 까뮈의 부조리를 깊이 깨닫고 추천한 책이다. 그런데 받고 보니 정신세계사 책이고, 류시화 번역이다. 이 두 가지 사항만으로 유추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다.

 

나는 차라리 돌베개나 울력에서 나온 책을 선호하는 편이라, 책 자체는 좋은 말로 가득차 있는데도 내게는 울림보다는 약간 교조적으로 다가온다. "좌뇌 사회"에 살고 있고 좌뇌 사회를 떠날 수 없는 이한테 호주원주민 참부족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동화처럼 보인다. 우뇌에 호소하는 시적 감수성에 기반한 지혜를 풀어놓는다. 다 옳은 말이다. 신은 인간이 필요해서 만든 것이며 공동체 멤버와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공유하는 아주아주 이상적 공동체를 말한다. 그런데 너무 이상적이면 그럴듯함이 사라진다. 호주 아웃백을 맨발로 걷고 자연이 주는 식량을 먹고 밤이면 별로 가득한 하늘을 이불삼아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시간은 저자만의 독특한 경험으로 구경하는 심정으로 읽게 된다. 즉 이 책이 가진 장점이 저자의 과도한 의욕으로 저자의 경험 자체를 타자화하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공감이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는 아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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