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우포늪에 갔다 왔다.

태어나서 예찬이가 실체로는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았다.그래서인지 아이의 눈은 우주선에서 지구를 바라본 눈을 닮아있었다. 녹색 풀밭 사이에 앉아 있는 예찬이는 자연과 하나된 듯 했다.그래서 <아이들은 자연이다>라고 했나보다. 자주 먹던 딸기대신 '뱀딸기'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되었다. 한 손에는 '뱀딸기'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메꽃'을 쥐고 '무당벌레'를 쫓아가던 아이의 눈길은 ..아름다왔다. (사진을 아직 컴퓨터로 옮기지 않아서...나중에..)

우포늪은 조용했고...우리는 길을 잘못들어 비포장 제방길을 달리기도 했다.'여행이란 그런거다'라고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말이다. 

....

....

오늘은 날씨도 흐리고...좀 가라앉는다. 시끄럽구 싶지도 또 너무 가라앉아 있고 싶지도 않은 그런 날이다....알렉산드라 페리의 춤이 보고 싶어졌다.

발레를 1년에 한 두 번 정도 DVD 공연물로 보는 수준이니...발레에 대해 말은 더하기는 쉽지 않다.하지만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나의 한명으로 꼽히는 알렉산드라 페리정도는 매니아가 아니어도 아는 척 할 수 있지 않을까....그녀는 지난해 은퇴했다. 최고의 줄리엣으로 꼽히는 발레리나였다.

그녀의 춤을 보면...나처럼 몸치들도 춤을 추고 싶어진다. 제대로된 춤은 아니어도 그냥 원초적인 몸짓이라도 말이다. 브루스 윌리스가 어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악당을 물리치고 야구장인가 축구장인가 그 위에서 추는 춤같은 거라도 말이다. ^^

알렉산드라페리의 줄리엣은 좀 지루할 수도 있으니...스팅과 함께한 이것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너무 시끄럽지도 너무 조용하지도 않은 흐린 날에 말이다.

....인트로가 좀 길기때문에...기다리기 지루하면 2:00 정도 부터 보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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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8-05-19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긴 날씨가 맑지만, 맑음에도 충분히 보기 좋았습니다. 갑자기 종아리의 알들이 바짝 긴장해버렸어요.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 영화제목이 좀 길다. 제목만큼이나 상영시간도 길다. 대략 2시간 40분 정도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볼 수 없다.

바로 DVD로 나왔다. 전주 국제 영화제를 찾았던 행운아들은 이 영화를 큰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행운아들이고 그들의 심미안에 박수를...

올해 나를 가장 기쁘게 했던 영화는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였다. 내 주변 반응은 '그게 도대체 뭔 말이에요' '뭐야..끝이 그게' '아...진짜 답답하네' 가 대부분이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봉태규가 나온 <가루지기>에 더 큰 박수를 보낼 듯 하다. 취향이야 취향이니까..박수를 보내도 상관없다.하지만 자신의 예술적 경험의 일천함과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의 부재를 자신의 무기로 삼아 당당하게 그런 류의 영화를 매도할 때는 정말 정말 마야코프스키의 싯구를 실행에 옮기고 싶어진다.

이 영화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후에 가장 훌륭하다. 서부시대 실존했던 제시 제임스라는 갱 역학을 맡았던 브래드 피트는 이 영화로 부활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하다.

영화는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열차 강도 한 번 이외에는 별 다른 액션이 없다. 영화 제목이 이미 제시 제임스의 죽음을 밝히고 있으니까 제시 제임스가 로버트 포드에게 죽는다는 것을 알려도 그닥 스포일은 되지 않을 듯 하다. 제시 제임스가 죽는게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20살이 된 로버트 포드가 제시 제임스 일당에 합류하면서 시작한다.로버트 포드 역을 맡은 유약하며 지적으로 보이는 친구는 커시 애플렉이다. 이름이 좀 낯익지 않은가? <굿 윌 헌팅> <아마게돈> 등에 출연했던 밴 애플렉의 동생이다.

로버트 포드는 제시 제임스의 추종자다. 요즘말로 하면 열혈 팬이다. 그의 기사를 수집하고 그와 관련된 픽션들을 모두 읽는다. 심지어 그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까지 기억해낸다. 이 소심해보이는 청년이 장차 제시 제임스의 암살자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제시 제임스는 우상이자 아버지이고 또한 절대적 가치이다. 그랬던 그가 왜 제시 제임스를 죽이고 할 까? 니체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아들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함이었을까...아니면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의 주인공처럼 절대적인 미에 대한 타나토노스적 충동이었을까..

아..돌아온 브래드 피트...

브래드 피트는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뽀쏭 뽀송한 그였을때가 가장 좋았다.

그 이후..나는 그에 대해 별 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파이트 클럽>에서 뭔가 좀 다른 느낌을 주었지만...

이 영화로 한 방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제시 제임스라는 인물은 이 영화에서 정말 매력적이다. 그가 '안티 히어로'로서 매력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악마적으로 집요하면서 이웃집의 선량한 가장이기도 하다. 그가 어린 아이를 상대로 고문에 가까운 폭력을 행사하고 나와서 잔설이 남아 있는 벌판에서 말에 기대어 우는 장면은 그의 복잡한 내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성과 속'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다.또한 '폭력과 침묵'을 동시에 품고 있는 사람이다. 브래드 피트는 이런 양가적인 내면을 가진 인물을 하나로 브랜딩해 내는 일에 성공했다.



영화는 아주 느릿 느릿 진행된다. 중반부까지는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그러나 싶을 정도다. 마치 첼리비다케의 브루크너 교향곡을 듣는 느낌이다. 지붕에서 땅을 향에 떨어져 내리는 거미줄처럼 흔들거리며 중심으로 치닫는다. 장면들은 눈 내리는 소리처럼 침묵과 침묵 사이를 매운다. 실제 영화에서도 눈 덮인 장면이 자주 나온다. 서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눈 내린 장면은 이 영화에서 처음 본다.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느린 템포 속에서 극적 사건을 맞아서 느림과 느림을 충돌시켜 긴장감을 극화하는 방식이다. 이건 정말 눈여겨 볼 만하다. 여러 장면들에서 그런 '느림의 긴장감'을 맛볼 수 있는데...위 사진에 나온 씬도 그런 장면 중에 하나이다. 두 형제가 제시 제임스라는 거목을 잡으로 들어가기 전에 시선을 나누는 장면이다. 누런 풀빛이 눕는 와중에 아무런 대사도 없이 둘의 얼굴과 펌프질하는 물 떨어지는 장면가지고 거사를 앞둔 긴장감을 표현해낸다. 이런 표현이 좀 뭣하지만 아름다운 장면이다. 영화는 씬과 씬 사이의 이동장면이나 나레이션 장면에서 매혹적인 장면을 선사한다. 때로는 화각을 왜곡하거나 유리를 통해 비춰지는 장면들로 미장센을 구성함으로써 다분히 몽환적이고 선적인 느낌을 준다. 

영화는 제시 제임스 암살 이후에 조금 더 진행된다. 제시 제임스를 800번을 죽인 로버트 포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슴을 누군가에게 한 웅큼 움켜 잡혀 있는 먹먹함을 준다. 돌아보니 영화 내내 제시 제임스는 타자였을 뿐 로버트 포드가 나의 한 구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조연같은 주역이기도 했고 그의 시점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려는 카메라 앞에서도 나는 로버트 포드의 좌심방 한쪽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시 제임스는 로버트 포드의 뒷덜미를 바라보면서 의자에 앉아 시거를 피우고 있다.  

영화 길다. 그런데 이 영화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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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5-13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 너머 어려와서 잘 오지 말아야지 생각하다가
좋다, 아름답다
이런 평 쓰신 거 보니
왜 이렇게 위로가 되는 걸까요
지금도 영화 본 거, 책 읽은 거(소설로만)
양 손에 꼽힐 정도지만
좋다, 아름답다의 책이나 영화는 보고 싶다 읽고 싶다
생각해요
그렇다고 보고 읽고는 거의 못하지만요
비가 와서 세상이 깨끗해 보이네요

드팀전 2008-05-13 09:15   좋아요 0 | URL
^^어려울때도 있고 아닐때도 있고가 주관적인거라서..참 그러해요.^^
어려운 걸 쉽게 쓰려면 충분한 소화가 있어야지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으며 할 수 있으련만 그렇게 하기까지에는 제 능력이 아직 부족하겠지요..

이 영화도 스토리는 단순해보여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지도 모르지요.
날씨가 좋아서 눈이 맑아집니다.

비로그인 2008-05-19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모잘라서 어려울 때와 아닐 때의 기복을 넘어서려면 죽을 만큼 노력을 해야 해요
죽을 만큼 힘 쓰고 났더니 사는 게 말이 아니네요
사느라고 충분히 저를 읽지를 못해요
일주일 동안 또 행복하세요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예술사 이야기 지식전람회 21
조중걸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키치란 무엇인가?>에서 아브라함 몰르는 키치에 대하여 '인간 존재 방식의 한 유형으로 키치를 이해하는 것이 키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했다. 키치를 사전적 의미인 '저급한 싸구려 예술품','이발소그림'에서 존재 조건으로 급상승 시킨 것이다. 그런 신분상승이 있었다고 키치가 싸구려의 옷을 훌훌 벗어 던지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몰르의 키치에 대한 지적은 작품이라는 대상에만 한정되어 있는 상식적 '키치'를 재전유하는 것이다. '키치가 존재 조건'이라는 것은 '그건 키치적이야' 라고 말하는 주체 역시 일정정도 '키치'라는 조건에서 벗어 나지 못한 다는 뜻이다. 마치 '키치 근본주의'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지적처럼 앎의 시작은 그런 존재 조건에 대한 각성부터 일 지도 모른다.

"키치는 어떤 세계관에 의해 뒷받침된 미학,거의 철학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건 인식이 제외된 아름다움이고 사물을 아름답게 만들어 남에게 환심을 사려는 의지이며 총체적인 순응주의입니다" (밀란 쿤데라)

다른 이들도 많이 그런 것 같던데 나 역시 '키치'라는 말을 밀란 쿤데라의 세계적 베스트셀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아름다움>에서 처음 만났다. 이미 십 여년전 일이어서 정확히 뭐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쿤데라가 거의 한 챕터를 자신의 '키치론' 에 할애하고 있었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먼저 '키치'란 무엇인가? 내가 그동안 기억하는 가장 짧고 확실한 키치에 대한 서술은 "키치적 인간의,키치적 작품에 대한 요구' 이다. 이것은 아브라함 몰르의 인식론과 같은 지평이다. 수용자와 대상 사이에 상호관계와 그것의 외연화에 시각을 맞춘 것이다.

"키치는 하나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태도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작품으로서의 키치보다는 작품을 대하는 감상자의 태도와 작품과 맺는 그의 심적 관계가 오히려 키치의 본질이다."

<키치,우리들의 행복한 세계>에서 저자 역시 이같은 방식을 취한다. 저자는 우선 예술의 양식을 3가지로 구분한다. 쾌락과 배설 욕구에 호소하는 통속 예술, 수용자와의 거리두기를 통해 존재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수예술, 그리고 자기만족을 통해 환상을 창조하는 키치이다.

키치가 현 존재의 삶의 양식이라는 것은 두가지 토양을 갖는다. 하나는 '신'의 부재가 선언된 근대성에 있다. 이성을 댓가로 자연에서 소외된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허공에 색칠을 해야만 했다. 키치는 진실에 대한 절망적 요구를 거짓된 답변으로 응한다.

키치의 출발은 산업혁명 이후 불어난 프티부르주아적 소비주의와 깊은 관려이 있다. 근본적으로 키치는 노동의 소외를 소비를 통해 만회하려는 자본주의적 형식에서 시작한다. 고된 노동을 한 노동자에게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것은 통속 예술이지 많은 시간과 경험을 요구하는 순수예술은 아니었다. 통속 예술은 합목적적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여 소비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잉여가 존재한다.  좀 더 교육받은 자들의 문화적 소비는 일종의 차별화를 요구한다.

"키치는 민주적이고 중간적이고 조촐한 것,즉 프티 부르주아적인 것이다. 키치는 단지 숫자만을 고려하며,절대 다수의 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민주적,공리적 예술 양식이다." " 사물에 대한 키치적 이념은 행복의 반예술이다. 키치는 위장된 예술로서 진정한 예술을 소멸시키고 그 속물근성으로 사용가치마저 전락시킨다.이러한 키치의 주요 고객은 중산층이다. "

나는 '정치미학'이라는 측면에서 한국 사회 진보 내에서의 '키치적인 정치 미학'이 반드시 논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소박,조촐한,자기만족적 진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센티멘털에 의한 정치 아닌가 하는 점을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잃을 것이 없으면 문제될 것 없는 진보' , ' 내 지붕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유토피아도 허용할 수 있는 진보'. 슬라보예 지젝은 그런 키치적인 '정치 미학'을 두고 '휴가 기간 중에 하는 좌파'라는 말로 비꼬았다. 쉽게 말하면 정치적 이념의 토대가 분명히 자유주의적 개량주의 지평에 서 있는데 실제로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적 아나키즘'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본다. 마르크스가 비판하기도 했던 '하부구조'가 빠진, '과학성'이 결여된 즐거운 '혁명' 상상이다. 나 역시 가끔 그런다. 그리고 이런 질문도 해본다.'이것은 키치적이 아닌가?" 현재로서 나의 답은 그것은 '키치적'이다. 지젝은 <혁명이 다가온다> 서문에서 예를 들었듯이 '월스트리트에서도 <자본론>을 즐겨 읽는다' 는 것은 혁명적 사상 또한 키치적으로 탈취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키치는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한 위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 여물통이 외양간에 있으면 키치가 아니지만 식당 한 구석에 박혀 있으면 키치가 된다. 월스트리트 증권맨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 변혁 사상의 핵심이 아니라 '키치적 요구' 정도 였을 것이다.

 키치는 우동 먹은 포만감에 기생한다. 곧 꺼져 버리고 마는 밀가루 국수 처럼 작품 자체와 소통하지 못하고 자신의 환상과 소통하며 비위를 맞추는 태도와 결합한다. 키치는 '이차적 눈물이다.' 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키치적 감상자들에게 예술은 자기 센티멘털리즘을 위한 하나의 기회일 뿐이다....키치는 통속적인 예술에 있어서의 단순한 감상보다는 훨씬 더 증대된  반성적인 거리를 가진다.그러나 그 반성적 거리는 작품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지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자신에게로 집중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키치는 사이비 예술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의 존재 조건을 어떡게 전복시킬 것인가가 남는다.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에서는 인상주의를 시작으로 예술사에서 키치를 전복하기 위한 시도들을 소개한다. 그런 실천작업들 속에서 전복가능태의 아이디어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상주의의 주관성의 소멸은 표현주의와 기능주의에 와서 진화한다.표현주의에서는 정신의 자발성과 이념을 추가하여 키치를 넘어서려고 한다.기능주의적 입장은 꾸밈없는 아름다움이라는 목적론적인 유용성을 강조하여 키치적 너덜거림을 업앤다. 다다이즘은 키피를 적으로 규정하고 달콤한 쾌락 대신 혐오를 선택했다. 미적 혐오를 통해 허위의식을 까발리는 역설적인 방식이다. 아방가르드 미학을 옹호했던 수잔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선보였던 '캠프'라는 개념은 이런 '혐오의 미학'이 대중화 또는 유희화되는 과정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저자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키치적 해체를 위한 실천들을 엿본다.  모더니즘이 가진 절대성과 내재적 통일성을 그리스 플라톤 시대로의 회귀로 본다.그리고 메타 픽션이라는 형태의 자기부정을 통해 가공의 세계를 만들고 '창조와 삭제'의 놀이를 통해 키치를 극보하는 포스트모던 예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나보코프,마르케스, 바셀미, 존 파울즈 등의 작품들을 통해 환각과 유희를 통한 자기구원에 열중인 포스트모던 소설들을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것이 '키치'적이라는 것을 알고 그 실험을 극으로 밀고 가서 삭제하거나 놀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지극히 키치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존재 양식으로 피할 수 없는 키치에 대한 유희적 탈출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키치를 해체할 수 있는 방법을 고급 예술의 창조성 안에서 찾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처음부터 '예술천하삼분지계' 를 해버린 상황에서 키치를 극복하는 방식이 통속 예술에서 찾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키치에 대한 자기 인식과 그를 해체하고자 하는 현대 예술의 미학에 대한 거리감을 좁힐 필요가 있다. 저자가 '시대착오적'인 모든 예술은 '키치'라고 저자가 말한 이유는 과거의 미술이 결코 수준이 낮다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인들의 달콤,상쾌한 접근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요한다는 것으로 읽혀야 한다. 즉 현대 예술은 난해하다고 고개를 돌리고 허구한 날 고흐나 르느와르가 주는 '자기감동'에 묶여 있으면 키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21세기는 고흐나 고갱이 살았던 시대보다 더 많은 사고와 감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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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5-02 23:00   좋아요 0 | URL
한국 문화로 치자면... 궁중화가에 상대되는 민화가 키치고,
정악에 상대되던 민속극, 판소리 등이 키치였고,
광대들에 의해 전승되던 온갖 놀음들이 키치문화라고 볼 수도 있겠죠.
우리집 거실에도 제가 그린 키치가 한편 있습니다. ㅎㅎㅎ

드팀전 2008-05-04 21:55   좋아요 0 | URL
그런 개념은 아닌 듯 합니다.키치라는 문화적 현상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미적 개념이기 때문에 전자본주의적 단계에 무조건적으로 적용해서는 곤란합니다.키치는 다분히 근대적 개념으로 접근해야될 듯 합니다.
글샘님이 쓰신 개념은 귀족 예술/민중 예술이라는 역사적 개념에 가까와 보이는군요.오히려 그런 개념을 적용하자면 그것은 키치가 아니라 대중예술의 성격과 유사해 보입니다.

비로그인 2008-05-02 23:03   좋아요 0 | URL
예술이 뭔데
詩가 뭔데
지가 무슨 예술이라고

어느 시인이 자신의 시에 그러셨다 하시니
여기다 한 표 던집니다

드팀전 2008-05-04 15:32   좋아요 0 | URL
예술의 자기부정 정신이 키치를 드러내고 탈출하는 한가지 방법이라고 저자가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인상주의나 표현주의 그리고 다다같은 것들은 역사적으로 한 시대의 주류적 예술이 담고 있는 가치관에 대한 '부정의 정신'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이 시대에 필요한 '부정의 정신'은 무엇일까 라는 겁니다.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삶,예술,가치들의 문법들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것이겠지요.

비로그인 2008-05-05 09:04   좋아요 0 | URL
너머 어려우믄 무서와서
도망가고 자퍼져요
어려우믄 무서와요
 

아침 6시 운동 가다가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1부 마지막곡 으로 <인터내셜널가>가 나왔다. 한국어로 부른 노래는 또 놀랄 인간들이 많을테니까 PD가 외국곡으로 선곡했다. 누가 불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고 락 비트로 편곡된 곡이었다.

노동절 아침에 듣는 <인터내셔널가>.그것도 라디오에서...갑자기 그 라디오에 잘 들었다고 문자라도 남겨주고 싶었으나 핸드폰을 들고 오지 않았다.

 

.................................아래는 레디앙 기사를 재인용합니다.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던져라...” 오늘은 메이데이. 해마다 5월 1일이 되면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해방을 향한 영원한 투쟁을 선언한다. 이 때 반드시 부르는 노래가 바로 “인터내셔널가”다. 인터내셔널가는 도대체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걸까?

 인터내셔널가의 아버지는 파리꼬뮌에 전사로 참여했던 프랑스인 외젠 포티에Eugene Pottier다. 사회주의자였으며 운수노동자였고, 시인이었던 그가 파리꼬뮌을 기념하기 위해 1871년에 쓴 시가 노래의 기원이 됐다. 당시의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은 이 시를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에 맞춰 불렀다. 그러던 중 1888년 역시 프랑스인인 피에르 드제이테Pierre Degeyter가 곡을 만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터내셔널가의 멜로디는 이때 처음 생겨났다.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노래는 아닌 셈이다. 드제이테는 곡을 만들면서 운율 등을 고려해 가사를 일부 수정했다. 따라서 포티에가 파리꼬뮌의 시기에 쓴 원작 시는 그 이후 프랑스 안에서도 점차 잊혀졌다. 지금은 자료로만 남이 있을 뿐이다. 라 마르세예즈에 맞춰 부른 인터내셔널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참여했던 제1인터내셔널의 주제가가 됐다. 그러나 첫 번째 인터내셔널은 이 노래가 나온 다음해인 1872년에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의 분열로 인해 사실상 문을 닫았다. 드제이테가 새로 곡을 붙인 인터내셔널가는 1889년 두 번째 인터내셔널이 결성되자 즉각 사회주의자들의 찬가로 채택됐다. 이후 유럽을 넘어서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75종이 넘는 다양한 가사가 존재 ▲

 1900년대 인터내셔널가 악보의 표지 아마 ‘생일축하’노래 정도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불려지는 노래가 인터내셔널가일 것이다. 심지어는 같은 나라 안에서도 서로 다른 가사들이 존재할 정도다. 가장 많은 것은 영어로 된 인터내셔널이다. 영국에서만 두 가지의 다른 가사가 존재한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확실히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미국에서는 영국에서 수입된 가사를 부르다가 전국단일노조 운동을 벌였던 아나코생디칼리스들인 IWW가 1900년대에 만든 새 가사가 표준이 됐다. 이외에도 캐나다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부르는 조금 다른 형태의 영어가사가 존재한다. 이처럼 같은 영어권이면서도 서로 가사가 다르고 특히 인터내셔널의 영어 번역은 구어체의 문장과 딱딱한 단어들의 남발로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영국의 좌익 뮤지션인 빌리 브랙Billy Bragg은 1990년 미국의 저명한 포크가수인 피트 시거Pete Seeger와 함께 새로운 영어 가사를 만들었다. 쉬운 단어와 현대영어에 맞춘 가사로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들이 노래를 부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현재는 영국에서는 빌리 브랙의 새 가사가 널리 통용되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나이 많은 좌익들을 제외하고는 새 가사로 바뀌는 추세라고 한다. 이외에도 독일어나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모두 대여섯개 이상의 다른 가사를 가지고 있다. 초기에 프랑스 가사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생기기도 했고,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서로 다른 내용을 집어넣으면서 차이가 생기기도 했다. 에스파냐어의 경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라는 지리적 차이 때문에 가사에 변형이 생기기도 했다. 반면 러시아어 가사는 하나뿐이다. 망명 중인 레닌이 초기 번역 중 하나를 선택해 ‘공인’한 이후 아무도 가사에 손을 대지 않았다. 레닌의 권위 때문이었는지 당에 대한 공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서로 다른 한글 가사도 3개나 있다

일제시대-북한 가사의 후렴에는 ‘판갈이 싸움이니’라는 구절이 나온다. 민주노동당의 ‘판갈이’ 구호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일어나라 저주로인 맞은 주리고 종된 자 세계 우리의 피가 끓어 넘쳐 결사전을 하게하네. 억제의 세상 뿌리 빼고 새 세계를 세우자. 짓밟혀 천대받은 자 모든 것의 주인이 되리. [후렴] 이는 우리 마지막 판가리 싸우미니 인터나쇼날로 인류가 떨치리. 이는 우리 마지막 판가리 싸우미니 인터나쇼날로 인류가 떨치리 하느님도 임금도 영웅도 우리를 구제 못하라 우리는 다만 제 손으로 헤방을 가져오리라 거세인 솜씨로 압박 부시고 제것을 찾자면 풀무를 불며 용감히 두드려라 쇠가 단김에 [후렴] 반복 우리는 오직 전세계의 위대한 로력의 군대 땅덩어리는 우리의것이니 기생충에게는 없으리 개무리와 도살자에게는 큰 벼락 쏟아져도 우리의 머리 우에는 찬란한 태양이 비치리 [후렴] 반복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글로 된 가사도 여러 개가 존재한다. ‘어, 우리말로 된 인터내셔널가가 또 있다고?’하며 놀라겠지만 한국어 인터내셔널가는 모두 3종류다.

 우선 일제시대에 ‘인터나쇼날’이라는 제목으로 불린 첫 번째 가사가 있다. 정확히 인터내셔널가의 한글 번역이 언제 이뤄졌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대략 1922년 일본어 가사가 처음 만들어진 이후로 추정된다. 한글 가사와 일어 가사는 서로 내용이 달라 일본가사를 번역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일본 가사의 특이한 후렴구조가 한글 가사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일본가사를 참고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일제시대의 가사는 지금도 북한에서 불려지고 있다. 다만 제목은 ‘국제가’ 또는 ‘국제공산당가’라고 한다. 주로 의전용으로 사용되며 북한 민중들이 일상적으로 부르는 노래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전쟁을 통해 좌익과 이에 연관된 모든 것들이 분서갱유 당했기 때문에 ‘인터내셔널가’는 완전히 잊혀져 버렸다. 80년대 들어 민중음악 활동가들이 외국에서 악보를 다시 들여오면서 복원됐다. 처음에는 영어 가사를 직역한 듯한 노래말로 매우 투박한 인상이었다. 제목도 “역사의 새 주인”이었다. 이후 보다 매끄럽게 한글 가사를 다듬은 노래가 전노협 시기 노동운동 노래패를 통해 보급됐다. 이 가사가 지금 우리가 부르는 “인터내셔널가”다.

 인터내셔널가의 어두운 면 인터내셔널가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해방, 국제주의를 찬양하는 노래다. 하지만 이 노래가 항상 영광 속에서만 불려졌던 것은 아니다. 우선 당연하게도 20세기 초반까지 대다수의 나라에서 인터내셔널가는 금지곡이었다. 이에 상관없이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은 집회와 모임에서 노래를 합창했지만 이는 경찰의 단속 대상이었다. 1917년 혁명 이후 인터내셔널가는 소비에트연방의 국가가 됐다. 그러나 스탈린은 히틀러와의 전쟁 중인 1944년 이 노래 대신 새로 만든 ‘소련찬가’를 국가로 삼았다. 인터내셔널가의 국제주의를 소련찬가의 애국주의로 교체한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코민테른(제3 인터내셔널)을 해체했다. 그 이전인 1935년 모스크바는 프랑스 공산당에 프랑스어 인터내셔널가 중 군대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낸 구절을 부르지 말라고 지시했다. 프랑스와 관계 개선을 추진하던 소련이 프랑스 군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터내셔널가는 전 세계 노동계급과 사회주의자들에게 국제주의와 국경을 넘어선 단결을 호소하는 노래다. 이념은 달라도 사회민주주의자부터 공산주의자까지 모두 이 노래를 부르지만 때로는 이념적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포르투갈에서는 지금도 공산당원들과 사회당원들이 서로 다른 가사의 인터내셔널가를 부른다. 칠레 사회당과 공산당의 인터내셔널가도 조금 차이가 있다. 인터내셔널가와 얽힌 비극적 기억 중의 하나는 1989년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 사건이다. 당시 광장에 모여 개혁을 요구하던 학생들은 운동가로 이 노래를 불렀다. 아마도 1980년 서울의 봄 때 서울역에 모인 대학생들이 많은 사람이 아는 고향의 봄이나 애국가를 부른 것과 비슷한 이유로 중국의 학생들도 인터내셔널가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노동자 군대의 각성’을 노래하다 인민해방군이 보낸 탱크에 희생됐다.

 영화를 통해 만나는 인터내셔널 ▲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의 포스터 인터내셔널가는 워낙 많이 알려진 노래고 또 노동운동과 좌익운동을 상징하는 노래인 만큼 이런 주제를 다룬 영화나 기록 영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앞서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인터내셔널가가 자취를 감췄다고 했는데 한번 이 노래가 대중적으로 공개된 적이 있다. 65년 개봉된 영화 <닥터 지바고>에는 1분 정도 이 노래가 배경으로 깔리는 장면이 있다. 아마 전쟁이후 인터내셔널가가 남한에서 공공연하게 공개된 첫 번째 사례이겠지만 이게 무슨 노래인지 알아챈 사람은 그리 만치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혁명을 취재한 미국의 공산주의자 언론인 존 리드의 삶을 다룬 영화 <레즈>에서는 시종일관 이 노래가 흘러나와 인터내셔널가를 배우는 교재로는 따 안성맞춤인 영화였다. 그러나 워런 비티 같은 인기스타가 나오고 아카데미 감독상까지 받은 영화임에도 1981년이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국내개봉은 못했다.

인터내셔널가가 가장 인상적으로 사용된 영화는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일 것이다. 스페인 내전을 다룬 이 영화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모인 국제여단의 전사들이 파시스트들과의 전투에서 죽은 동지를 묻으며 장송곡 대신 이 노래를 합창하는 장면이 나온다. 국제주의라는 노래의 테마를 이보다 더 잘 살려낸 장면은 앞으로도 보기 드물 것이다. 인터내셔널가를 들을 수 있는 영화 중 가장 황당한 것은 <에어포스 원>이다. 해리슨 포드가 테러리스트 잡는 대통령으로 나온 이 ‘무협영화’를 보면 러시아에 체포된 카자흐스탄의 독재자 장군이 테러리스트들의 협박으로 풀려나는 장면에서 감옥 안의 죄수들이 독재자를 위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반북집회에 모인 우익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격이다. 인터내셔널가는 카피레프트일까? 많은 사람들이 인터내셔널가는 좌파의 노래고 오래된 곡이니까 저작권과 상관없이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 노래는 지금도 저작권의 보호를 받고 있다. 프랑스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인터내셔널가는 2014년까지 저작권을 보호받는다. 이 노래를 작곡한 피에르 드제이테는 1932년 사망했다. 작가의 사후 70년 동안 저작권을 인정하는 프랑스 법에 의해 2002년까지 보호를 받지만 두차례의 세계대전동안의 기간을 제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2014년까지 보호되는 것이다. 실제로 2005년 프랑스의 한 영화 제작자가 이 노래를 사용하기 위해 1,000유로를 지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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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5-01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 덕에 처음으로 들어봤어요 ^^; 얼마전엔 미국 국가도 모르냐고 구박받았었는데 -_-; 지미 헨드릭스가 기관총 소리 흉내 내던 그 동영상 보다가요 ㅋㅋ

근데 레닌 아저씨가 저렇게 생겼었군요. 전 체 게바라 같은 이미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

바람돌이 2008-05-0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어포스원에서 인터내셜가는 정말 황당 그자체였죠? 부르르 했어요. ㅎㅎ
전 오늘 아침 출근길에 차 없는거보고 아 노동절이구나 했어요.

글샘 2008-05-02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철북에선가... 인터내셔날가가 나요죠. 정말 가슴을 후끈하게 하는 노래였는데요...
이젠 그 별들은 다 어디로 간 건지...

팥쥐만세 2008-05-1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의 글을 두번째로 찜해갑니다.
인터내셔날가 고마워요.
 

PD수첩’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보도에 시청자들 경악!
[뉴스엔] 2008년 04월 30일(수) 오전 09:43   가| 이메일| 프린트

[뉴스엔 김예나 기자]
한국정부는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며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있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광우병에 걸려 사망한 사건이 보도돼 시청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29일 방송된 MBC 'PD수첩-긴급취재!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편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방미일정에 맞추어 급속도로 진행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에 많은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사상 최대 쇠고기 리콜사태와 함께 버지니아에 살았던 여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사유가 인간광우병일 것이라는 의혹이 전해지고 있어 충격을 안겨줬다. 미국에서조차 안전을 확신할 수 없는 미국산 쇠고기. 하지만 새 정부는 국민의 먹거리 안전보다는 미국의 강압에 떠밀려 요구조건 모두를 수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인간 광우병으로 사망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미국 버지니아에 살고 있던 아레사 빈슨의 정확한 사인은 2~3개월이 지나야 판명된다고 했다. 만일 광우병이라고 밝혀져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당장 철회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미국 의학당국의 역학조사와 국제수역사무국(OIE)의 판정이 날 때까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허용해야 한다는 황당한 사실을 보도했다.

현재 미국산 쇠고기의 세계 3대 수입국은 한국을 비롯해 일본과 중국이다. 하지만 이번 협상결과 검역기준 중에서 한국이 가장 허술한 조건으로 체결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에 한국정부의 관계자는 일본과 중국 역시도 한국과 같은 검역기준으로 완화될 것이라는 안일한 태도만 보이고 있어 시청자들의 분통을 터뜨리게 했다.

충격보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광우병 오염물질은 단 0.001g만으로도 인간에게 광우병을 일으킬 수 있으며 심지어 이 오염 물질은 소독하거나 끓여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전했다. 유전자구조로 광우병에 유독 취약한 한국인은 인구의 95%에서 발병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돼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농수산부에서는 미국산 쇠고기가 100%는 장담할 수 없으나 99.9% 안전하다며 얼마든지 먹어도 된다는 다소 책임 회피적인 발언을 해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이날 방송 중 SMS 시청자 의견에서는“우리는 안 먹으면 되지만 막 초등하교 입학한 아이의 급식으로 나온다면 끔찍하다”,“왜 저런 걸 돈까지 주며 수입을 해서 사먹어야 하는지. 그냥 줘도 안먹을 건데 더럽네요.진짜”,“미국과의 우호관계와 국민의 안전을 맞바꾼 거 같네요. 분노가 듭니다”,“싼 소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소고기를 먹는 기회를 제공하는 겁니다”,“미국사람도 꺼려하는 광우병쇠고기!!목숨을 걸고 먹어야 합니까? 무섭습니다”등 시청자들의 거센 비판의 목소리가 빗발쳤다.

시청자들의 분노는 방송이 끝난 후에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프로그램 시청자 게시판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인 정부를 비판하며 이와 관련된 후속보도를 요청하는 글들이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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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8-04-30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청자'들은 그동안 몰랐나봐요? ㅡ..ㅡ;; 이거 몇년전부터 숱하게 떠들어대던 거였는데.. 다들 관심이 없었나..

마늘빵 2008-05-0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 하나 먹고 쓰러져야 정신차리겠죠. -_-

글샘 2008-05-01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과 중국 역시도 한국과 같은 검역기준으로 완화될 것이라는 훌륭한 의견...
이런 논리적인 사고력의 반짝임이 존경스럽습니다.
미... 친... 소...와 이메가의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