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예술사 이야기 지식전람회 21
조중걸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키치란 무엇인가?>에서 아브라함 몰르는 키치에 대하여 '인간 존재 방식의 한 유형으로 키치를 이해하는 것이 키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했다. 키치를 사전적 의미인 '저급한 싸구려 예술품','이발소그림'에서 존재 조건으로 급상승 시킨 것이다. 그런 신분상승이 있었다고 키치가 싸구려의 옷을 훌훌 벗어 던지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몰르의 키치에 대한 지적은 작품이라는 대상에만 한정되어 있는 상식적 '키치'를 재전유하는 것이다. '키치가 존재 조건'이라는 것은 '그건 키치적이야' 라고 말하는 주체 역시 일정정도 '키치'라는 조건에서 벗어 나지 못한 다는 뜻이다. 마치 '키치 근본주의'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지적처럼 앎의 시작은 그런 존재 조건에 대한 각성부터 일 지도 모른다.

"키치는 어떤 세계관에 의해 뒷받침된 미학,거의 철학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건 인식이 제외된 아름다움이고 사물을 아름답게 만들어 남에게 환심을 사려는 의지이며 총체적인 순응주의입니다" (밀란 쿤데라)

다른 이들도 많이 그런 것 같던데 나 역시 '키치'라는 말을 밀란 쿤데라의 세계적 베스트셀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아름다움>에서 처음 만났다. 이미 십 여년전 일이어서 정확히 뭐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쿤데라가 거의 한 챕터를 자신의 '키치론' 에 할애하고 있었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먼저 '키치'란 무엇인가? 내가 그동안 기억하는 가장 짧고 확실한 키치에 대한 서술은 "키치적 인간의,키치적 작품에 대한 요구' 이다. 이것은 아브라함 몰르의 인식론과 같은 지평이다. 수용자와 대상 사이에 상호관계와 그것의 외연화에 시각을 맞춘 것이다.

"키치는 하나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태도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작품으로서의 키치보다는 작품을 대하는 감상자의 태도와 작품과 맺는 그의 심적 관계가 오히려 키치의 본질이다."

<키치,우리들의 행복한 세계>에서 저자 역시 이같은 방식을 취한다. 저자는 우선 예술의 양식을 3가지로 구분한다. 쾌락과 배설 욕구에 호소하는 통속 예술, 수용자와의 거리두기를 통해 존재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수예술, 그리고 자기만족을 통해 환상을 창조하는 키치이다.

키치가 현 존재의 삶의 양식이라는 것은 두가지 토양을 갖는다. 하나는 '신'의 부재가 선언된 근대성에 있다. 이성을 댓가로 자연에서 소외된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허공에 색칠을 해야만 했다. 키치는 진실에 대한 절망적 요구를 거짓된 답변으로 응한다.

키치의 출발은 산업혁명 이후 불어난 프티부르주아적 소비주의와 깊은 관려이 있다. 근본적으로 키치는 노동의 소외를 소비를 통해 만회하려는 자본주의적 형식에서 시작한다. 고된 노동을 한 노동자에게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것은 통속 예술이지 많은 시간과 경험을 요구하는 순수예술은 아니었다. 통속 예술은 합목적적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여 소비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잉여가 존재한다.  좀 더 교육받은 자들의 문화적 소비는 일종의 차별화를 요구한다.

"키치는 민주적이고 중간적이고 조촐한 것,즉 프티 부르주아적인 것이다. 키치는 단지 숫자만을 고려하며,절대 다수의 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민주적,공리적 예술 양식이다." " 사물에 대한 키치적 이념은 행복의 반예술이다. 키치는 위장된 예술로서 진정한 예술을 소멸시키고 그 속물근성으로 사용가치마저 전락시킨다.이러한 키치의 주요 고객은 중산층이다. "

나는 '정치미학'이라는 측면에서 한국 사회 진보 내에서의 '키치적인 정치 미학'이 반드시 논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소박,조촐한,자기만족적 진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센티멘털에 의한 정치 아닌가 하는 점을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잃을 것이 없으면 문제될 것 없는 진보' , ' 내 지붕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유토피아도 허용할 수 있는 진보'. 슬라보예 지젝은 그런 키치적인 '정치 미학'을 두고 '휴가 기간 중에 하는 좌파'라는 말로 비꼬았다. 쉽게 말하면 정치적 이념의 토대가 분명히 자유주의적 개량주의 지평에 서 있는데 실제로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적 아나키즘'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본다. 마르크스가 비판하기도 했던 '하부구조'가 빠진, '과학성'이 결여된 즐거운 '혁명' 상상이다. 나 역시 가끔 그런다. 그리고 이런 질문도 해본다.'이것은 키치적이 아닌가?" 현재로서 나의 답은 그것은 '키치적'이다. 지젝은 <혁명이 다가온다> 서문에서 예를 들었듯이 '월스트리트에서도 <자본론>을 즐겨 읽는다' 는 것은 혁명적 사상 또한 키치적으로 탈취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키치는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한 위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 여물통이 외양간에 있으면 키치가 아니지만 식당 한 구석에 박혀 있으면 키치가 된다. 월스트리트 증권맨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 변혁 사상의 핵심이 아니라 '키치적 요구' 정도 였을 것이다.

 키치는 우동 먹은 포만감에 기생한다. 곧 꺼져 버리고 마는 밀가루 국수 처럼 작품 자체와 소통하지 못하고 자신의 환상과 소통하며 비위를 맞추는 태도와 결합한다. 키치는 '이차적 눈물이다.' 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키치적 감상자들에게 예술은 자기 센티멘털리즘을 위한 하나의 기회일 뿐이다....키치는 통속적인 예술에 있어서의 단순한 감상보다는 훨씬 더 증대된  반성적인 거리를 가진다.그러나 그 반성적 거리는 작품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지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자신에게로 집중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키치는 사이비 예술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의 존재 조건을 어떡게 전복시킬 것인가가 남는다.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에서는 인상주의를 시작으로 예술사에서 키치를 전복하기 위한 시도들을 소개한다. 그런 실천작업들 속에서 전복가능태의 아이디어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상주의의 주관성의 소멸은 표현주의와 기능주의에 와서 진화한다.표현주의에서는 정신의 자발성과 이념을 추가하여 키치를 넘어서려고 한다.기능주의적 입장은 꾸밈없는 아름다움이라는 목적론적인 유용성을 강조하여 키치적 너덜거림을 업앤다. 다다이즘은 키피를 적으로 규정하고 달콤한 쾌락 대신 혐오를 선택했다. 미적 혐오를 통해 허위의식을 까발리는 역설적인 방식이다. 아방가르드 미학을 옹호했던 수잔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선보였던 '캠프'라는 개념은 이런 '혐오의 미학'이 대중화 또는 유희화되는 과정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저자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키치적 해체를 위한 실천들을 엿본다.  모더니즘이 가진 절대성과 내재적 통일성을 그리스 플라톤 시대로의 회귀로 본다.그리고 메타 픽션이라는 형태의 자기부정을 통해 가공의 세계를 만들고 '창조와 삭제'의 놀이를 통해 키치를 극보하는 포스트모던 예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나보코프,마르케스, 바셀미, 존 파울즈 등의 작품들을 통해 환각과 유희를 통한 자기구원에 열중인 포스트모던 소설들을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것이 '키치'적이라는 것을 알고 그 실험을 극으로 밀고 가서 삭제하거나 놀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지극히 키치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존재 양식으로 피할 수 없는 키치에 대한 유희적 탈출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키치를 해체할 수 있는 방법을 고급 예술의 창조성 안에서 찾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처음부터 '예술천하삼분지계' 를 해버린 상황에서 키치를 극복하는 방식이 통속 예술에서 찾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키치에 대한 자기 인식과 그를 해체하고자 하는 현대 예술의 미학에 대한 거리감을 좁힐 필요가 있다. 저자가 '시대착오적'인 모든 예술은 '키치'라고 저자가 말한 이유는 과거의 미술이 결코 수준이 낮다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인들의 달콤,상쾌한 접근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요한다는 것으로 읽혀야 한다. 즉 현대 예술은 난해하다고 고개를 돌리고 허구한 날 고흐나 르느와르가 주는 '자기감동'에 묶여 있으면 키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21세기는 고흐나 고갱이 살았던 시대보다 더 많은 사고와 감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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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5-02 23:00   좋아요 0 | URL
한국 문화로 치자면... 궁중화가에 상대되는 민화가 키치고,
정악에 상대되던 민속극, 판소리 등이 키치였고,
광대들에 의해 전승되던 온갖 놀음들이 키치문화라고 볼 수도 있겠죠.
우리집 거실에도 제가 그린 키치가 한편 있습니다. ㅎㅎㅎ

드팀전 2008-05-04 21:55   좋아요 0 | URL
그런 개념은 아닌 듯 합니다.키치라는 문화적 현상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미적 개념이기 때문에 전자본주의적 단계에 무조건적으로 적용해서는 곤란합니다.키치는 다분히 근대적 개념으로 접근해야될 듯 합니다.
글샘님이 쓰신 개념은 귀족 예술/민중 예술이라는 역사적 개념에 가까와 보이는군요.오히려 그런 개념을 적용하자면 그것은 키치가 아니라 대중예술의 성격과 유사해 보입니다.

비로그인 2008-05-02 23:03   좋아요 0 | URL
예술이 뭔데
詩가 뭔데
지가 무슨 예술이라고

어느 시인이 자신의 시에 그러셨다 하시니
여기다 한 표 던집니다

드팀전 2008-05-04 15:32   좋아요 0 | URL
예술의 자기부정 정신이 키치를 드러내고 탈출하는 한가지 방법이라고 저자가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인상주의나 표현주의 그리고 다다같은 것들은 역사적으로 한 시대의 주류적 예술이 담고 있는 가치관에 대한 '부정의 정신'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이 시대에 필요한 '부정의 정신'은 무엇일까 라는 겁니다.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삶,예술,가치들의 문법들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것이겠지요.

비로그인 2008-05-05 09:04   좋아요 0 | URL
너머 어려우믄 무서와서
도망가고 자퍼져요
어려우믄 무서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