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무어가 멀리 하늘 너머로 간 날, 지구의 많은  라디오방송국들은 그의 음악을 그의 긴 여행의 동반자로 전파에 담아 보냈다.  수 백 광년 떨어진  어느 별의 외계인이 먼 미래 어느날 오늘 공중을 날아다닌 라디오 전파를 수신한다면 "어, 오늘은 왜 이렇게 비슷한 사람의 목소리가 일제히 송신되고 있을까? 이건 무슨 신호지? "라며 갸웃할 것이다. ^^ 칼 세이건식 유머다. 

그가 죽었던 날 나는 창고 속에 갇혀 있는 게리무어의 45회전EP가 꺼내 듣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거렸다. 내가 처음을 산 게리무어의 음반이기 때문이다.  고 1때였나 모르겠다. 게리무어의 '파리지나 워커웨이'라는 곡이 무지하게 궁금했다. 하여간 락 음악을 꽤 듣고 있었는데 그 곡과는 인연이 안닿았다. 각 종 음악잡지를 보면 게리무어의 최대 명곡이라고 하는데 그 때까지 단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그 땐 듣고 싶은 노래를 더블 클릭 한 번으로 찾아 들을 수 있던 시기가 아니었다. 음반 가게에 가도 게리무어의 음반은 찾기 힘들었다. 빽판을 뒤져봤는데 그날 마침 없었는지 게리무어의 그 음반은 아니었다. 라디오에서도 잘 나오지 않았다. 

 "이것 참 ...명곡이라는데 낭만적인 곡제목만 알지 노래를 들을 수가 있어야지... 라디오를 그렇게 듣는데도 이 곡이 한 번 안나오다니...도대체 DJ들은 뭐하는 사람들인지...명곡이라는데... "  하여간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즐겨 듣던 전영혁씨의 프로그램에서 간간히 게리무어의 곡이 흘러나왔지만 그 '파리의 산책로'는 아니었다. 콜로세움2 나 게리무어가 씬리지의 필리뇻을 돕기 위해 참여했던 - 내 기억에 2장이었는데 정확치 않다- 음반들, 그리고 그가 솔로 데뷔하고 나온 다른 음반들 이런 것만 간간히 나오는 것이었다. (...아...게리무어때문에 콜로세움2나 씬리지를 다시 연상하다니...씬리지의 음반들을 소개하던 전영혁의 글들과 잡지 사진으로만 눈요기하던 구하기 힘든 음반들. 잡지의 종이 재질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볼게 별로 없던 시절이다 보니 같은 잡지를 보고 또 보던 시절이었다. 그런 반복학습때문에 여전히 그 계보도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나보다. 씬리지의 게리무어 뒤를 이었던 매력적인 이름의 기타리스트 스노위 화이트.....이 사람도 이후 블루스로 전향한다만.그 뒤를 존 사이크스...) 

그렇게 시간은 흘렀갔다. 그러던 어느날, 레코드 샵에서 우연히 라이센스로 나온 45회전 EP를 보게되었다. Emty room이 두 가지 버전으로 있었고 parisienne walkerways도 두 가지 버전으로 실려있었다. 

늘상 33회전으로만 되어 있던 LP플레이어가 45회전으로 쌩쌩 돌며 드디어 그 곡이 흘러나왔다. 특히 라이브 버전에 있던 간주 부분의 피드백 소리는 새파랗던 청춘에게 섬광을 하나 던졌다.  이 음반이다. 

 

"아우.."   

 

 

제일 앞에 있는 검은 장미 음반이 씬리지 시절의 게리무어를 엿볼수 있는 음반이다. 그리고 최고의 락 드러머로 알려진 일찍 세상을 떠난 코지파웰의 솔로 음반(내가 저걸 성음테이프로 가지고 있었는데..저기도 게리무어가 기타리스트로 참여했었다.) 그 다음 음반이 존메이어밴드와 플리트우드맥의 명기타리스트 피터 그린을 추모하며-게리무어가 가장 존경하는 기타리스트 중 하나였다- 만든 음반이다.(그러고보니 요즘 게리무어 음반은 없다. 그다지 듣지 않았다는 증거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게리무어는 블루스에 좀 더 많은 관심을 보였고 국내에는 Stll got the blues로 공전의 히트를 거두었다. 라디오를 틀면 어디서나 그 곡이 흘러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대학가의 맥주집 앞에 가면 전신만신에 게리무어의 히트곡 음반들이 흘러나왔다. 주로 락발라드류의 음악이었지만 맥주 거품과는 꽤나 잘 어울렸던 기억이 난다. 

하늘에서 절친 필 리뇻과 연주하고 있을 게리 무어를 추억하며 몇 곡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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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많고, 즐거운 일도 많은데 교활한 여우같은 이 미친 존재들과 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는 이 짓이야 말로 돌아보면 내가 가장 후회할 일 중에 하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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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늦은 밤 책을 보다가 허리도 뻣뻣해서 TV를 틀었다. BBC에서 만든 <빅뱅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 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틈틈히 보는 분야가 -교양 수준의- 수학, 물리학, 우주과학 등이어서 '어라'하면서 보게 되었다.  

질문은 프로그램 타이틀 처럼 당연하며 또 간단하다. 우주 탄생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빅뱅' 그 이전에 무엇이 있었나? 만약 우주가 '무'에서 나왔다면 도대체 어떻게 '무'에서 무엇이 만들어질 수 있는가?  <평행우주>의 저자 미치오 카쿠 교수가 던지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NASA는 우주상태에 준하는 실험실을 만들지만 완전한 '무'의 우주와는 다른다. 시간과 공간 같은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 '무'이다. 하지만 NASA의 실험실이 만든 '무'는 한계가 있다. 3차원 속의 '무'이기 때문이다. 뒤에 가서 그는 '무'를 '완전한 무'와 '전제된 무'- '물질이 없는 상태의 무' 로 나누어 정의한다. 이곳은 완전한 진공상태로 오로지 에너지만 존재한다.(더 이상 에너지의 성질에 대한 설명은 없으나 인간이 알고 있는 우주의 4가지 에너지로 추정된다.) 그리고 작은 충돌들의 결합. 그러다가 '빅뱅'이라는 대폭발을 맞는다. 어쨋거나 우주는 완전한 무에서 출발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두가지 '무'를 설정하는 방식으로 이를 돌파하는데 철학적 해결책으로는 가능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는지는 다큐멘터리에 나와 있지 않다. 

 

  이후 설명되는 것이 가장 유명한 빅뱅 이론의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온 인플레이션 이론이다. 편평성과 지평선 모순의 해결이라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후반부로 가면서 '빅뱅의 반복 '같은 일종의 영원회귀하는 순환론적 우주 가설등도 등장한다.    

 

  다큐멘터리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게 제작되었지만 좀 더 공부 해보면 사실 쉽지 않은 개념들이다. 이론적 적합성의 수식까지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교양 수준에서는 좀 더 알고 싶어서 과학책들을 많이 본다. 상대성 이론은 단단히 마음 먹고 꼼꼼이 보고 있다.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다. 초등학교 때 부터 자연과 우주의 신비보다 사회와 인간의 구조가 궁금했던 나로서는 더더욱... 하지만 다년간 다져진 세속적 경향으로 인해 결코 우주론적 초월로는 가지 않을테니 염려마시라. 종교적 초월론과 함께 질색인 것 중에 하나가 그런 논리 철학이나 과학론적 초월론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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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전 10시 40분 오랜 기간 정들었던 자동차를 폐차장으로 실어 보냈다. 잠시후면 해체를 위해 폐차장 수술대에 오를 것이다. 

 지난 주는 폐차문제로 정신이 사나왔다. 화요일 자동차를 타고 창원에 갔다. 목적지를 앞에 두고 시동이 꺼졌다. 몇 년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저속에서 rpm이 떨어지고 시동이 꺼지는 현상이다. 당시 문제는 엔진 분사과정에 있었다. 인젝터라는 부분을 손보고 괜찮아졌다. 일단 부산으로 와야했기에 속도를 가급적 떨어뜨리지 않고 창원에서 일을 마친 후 부산까지 왔다.(따지고 보면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안전불감증이란 이런 거) 고속도로에서야 가속폐달을 쓰기때문에 별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문제는 도심에 들어와서 신호대기로 정차하면 신호가 꺼지는 것이다. 시동이 꺼지면 사이드브레이크를 쓰고 가속페달을 밟아 rpm을 유지하며서 겨우 겨우 단골 정비소까지 왔다. 간단한 문제인 줄 알았는데 엔진 실린더의 헤드가 나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대략 70-80만원 정도의 수리비를 요구했다. 

사실 지난해 요맘때 명절을 쇠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집 앞에서 차가 퍼져서 80만원 정도를 주고 수리했다. 그 때도 긴급출동한 정비사가 새차 교체를 고려해 보라고 요구했으나 2년 정도 더 탈 계획으로 눈물을 머금고 수리했다. 차는 97년형이었고 내 계획은 15년은 타는 것이었다. 올해로 14년째가 된 셈이다. 

그런 기억이 있었으니 다시 또 80만원의 수리비라는 말에 '이제 끝이구나' 라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고액을 들여 수리한다고 해도 다른 쪽에서 문제가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 폐차 쪽으로 방향을 잡고 긴급서비스를 통해 일단 집까지 견인했다. 당장 폐차에 대한 방법이나 절차,보상금 같은 것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폐차라는 과정을 통해 폐차장과 폐차대행사가 영업이익을 얻는 방식을 나름 알게되었다. 대행사가 그렇게 많은 것도 폐차라는 과정에 꽤 괜찮은 부가이익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차 안에서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을을 옮겨놓아야 했다. 

주차장에 옮겨 놓은 자동차는 자신의 운명이 다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묵묵. 늘 대던 주차장에 서 있는 자동차인데도 아직 수명이 남아 있는 자동차들 사이에서 흑백 사진 처럼 보여졌다. 폐차를 위해 주차장에서 대기 중인 내 차는 그렇게 하루 사이에 '과거'의 시간 속을 달리고 있었다.  

이 차는 내가 돈 벌어서 처음 산 자동차였다. 다른 주인 밑에서 7년을 있었고 또 내 곁에서 7년을 있었다. 차를 처음 샀던 해 남도 여행을 했다. 해남 들녘으로 해지는 모습도 함께 보았으며 김제 평야에서 소나기를 몰고가는 먹구름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기도 했다. 이른 새벽 진통을 하는 아내를 싣고 조산원으로 달렸던 것도, 태어난 두 아이를 안전하게 지금 살고 있는 집까지 옮겨 주었던 것도 이 차였다. 오디오질을 좌절당한 내게는 가끔 음악 감상실이 되어 주기도 했고 또 가끔은 실내등을 밝힌 독서실이 되어 주기도 했다.  

몇 번 장거리 운행을 마치고 길 중간에서 고장이 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목적지를 몇 백 미터 앞두고 멈추어섰다. 그래서 차에 대한 애정 어린 농담으로 "그래도 이 차가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우리를 지켜준다니까...힘이 딸릴 때까지 최대한 안전한 곳까지 와서 기절하잖아."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난 주말, 또 다른 정비소에 가서 타이어와 오디오를 탈착했다. 타이어는 같은 아파트 사는 이웃에게 주었고 오디오와 스피커는 일단 보관했다. 주말이어서 견인을 할 수 없었던 관계로 일단은 그정비소에서 이틀 밤을 두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 폐차 견인업체와 인도약속을 잡았다.  

지난 한 주 동안 자동차를 의인화 하려는 '감상주의'때문에 무척 심란했었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그 감상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다.  톰 행크스의 영화<캐스트 어웨이>에서 주인공은 무인도 생활에 말벗이 되어준 배구공 '윌슨'(스포츠용품 브랜드이다)이 실수로 바다로 떠내려가자 위험을 무릅쓰고 건지려고 한다. 결국 망망대해로 떠나가는 '윌슨' 배구공을 보며 마치 친구를 남겨두고 온 듯 오열한다. 물론 내 차에 대한 감상은 정황상 무인도에서 대화 상대였던 톰 행크스의 '윌슨' 만큼 강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폐차 결정 초기에 비해 일주일 가량이 지난 지금은 감기 치료에 필요한 시간만큼 감상을 치료하기에도 적당한 시간은 되었다. 처음에 폐차 결정을 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회고적 글을 쓰려고 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처음에 마음 속을 스치는 상념들을 글로 썼다면 마치 사춘기 소년이 밤에 쓰는 편지처럼 얼설픈 감상과 회고적 감정의 편린들이 춤을 추었을 것이다.(사춘기 여인들은 좋아할지 모르나 이건 내가 보기엔 가장 끔찍한 글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정들었던 사물에 대한 의인화의 감정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견인차를 기다리면서 매번 장거리 운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습관적으로 했듯이 운전석 앞 바디에 손을 대고 "수고했어"라며 인사했다. 견인차 기사를 기다리며 오늘은 평소보다 더 오래 손을 대고 있었다. "그동안 수고했고, 고마웠다. 덕분에 무사히 다닐 수 있었어."라고 말이다.

 견인차 기사에게 35만원의 고철값을 받고 차를 인도했다.  차가 사라져 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비록 쇠로 만든 기계덩어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리하는 것이 정든 사물에 대한 예의 아닌가 싶었다. 투박하게 견인차에 실려 자동차가 점점 멀어졌다. 켜 놓은 비상등이 마치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듯 깜빡였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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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조간 신문을 점심 식사 하면서 보게되었다. <소금꽃 나무>의 저자이기도 한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결국 크레인에 올랐다.  고 김주익 위원장이 올랐던 그 곳이다. 85호 크레인. 몸에 익은 용접공의 기억을 되살려 용의주도하게 자물쇠를 녹이고 그녀가 또 고공에 올랐다.    

한겨레 신문 "8년전 비극의 크레인 올라.." www.hani.co.kr/arti/society/area/457677.html 

김진숙 위원의 편지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

"세벽 세 시 고공 크레인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를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이미 고인이 된 정은임 아나운서가 김주익 위원장의 비보를 듣고 그날 방송의 오프닝에서 한 말이다. 반복되길 원하지 않지만 반복되는 비극이다.

 한진중공업은 부산 영도에 있다. 배를 만드는 곳이다. 며칠 전 나는 한진중공업 때문에 정신없이 바빠져 버렸다. 부산시청에 양해를 구해서 시청 광장에서 할 일이 하나 있었다. 3주전에 시청에 양해를 얻었다. 그리고 별 일 없이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전날 퇴근길에 한진중공업의 48시간 연좌집회가 그 곳에서 있다는 소식을 알게되었다. 경찰청에서 우리 쪽에서 하는 일을 모르고 집회 신고를 내준 것이다. 집회 허가는 경찰청 관할이니 시청 측 담당자가 그것까지 알 일은 없다. 공무원이라해도 서로 다른 성격의 기관이다 보니 이런 업무에서 연계될리 만무하다.  

 결국 우리가 먼저 잡은 장소였는데 민주노총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된 셈이다. 경찰청 담당자도 일이 그렇게 되었느냐며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민주노총에 몇 시간이라도 양해를 구해보라고 했다. 처음부터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설령 가능하더라도 모양새가 말이 안된다. 결국 내가 장소를 바꿀 수 밖에 없었다.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민주노총도 거기서 뭔 일이 있는지 알수 없었고 나 역시 그랬고 시청도 그렇고 경찰청도 그렇다. 광장 사용에 대해 시청-경찰청 연계만 잘 되어 있었어도 문제가 없었겠지 말이다.  내가 땅을 치면서 억울해 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나야 자리를 바꾸면 좀 업무적으로 수습해야할 일도 늘고 불편한 일이었지만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400명이 실직할 판이다. 그에 따른 가족들까지 생각해보면 그 수는 더하다. 조금 더 가면 조선소 특성상 한진중공업은 하청업체가 많다. 하청업체의 연쇄적 도산과 그 가족들까지 생각하면...숫자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하여 나는 한진중공업때문에 피해를 본 축에 끼지만 조금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원망할 생각이 없다.   

 최소한 노동자들의 파업때문에 길이 좀 막혔다고-미리 알아보지 않는 자기 잘못은 생각치도 않고- 또는 밥 먹고 들어오는 길에 1인 시위하는 자들 때문에 몇 발짝 더 돌아가야 한다고  울컥거리는 인간 따위는 되지 않는다. 책 좀 편히 사려는데 시끄러워 심란하다고 하는 것도 매한가지다. (안다. 그런 인간들 많은거. 내 입장에서 그거 한마디로 규정해 줄까?  나쁜 족속들이 인간되기란 참으로 힘들다.딱 그거다.) 

지난해 이맘때 쯤 조지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 길>이란 책이 나와서 책 좀 읽고,생각 좀 있다는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2010년 나온 '올해의 책' 같은 목록에도 들어 있었다. ) 조지 오웰의 책을 보며 진짜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이 시대의 위건부두 사람들은 어디있는가? 조지 오웰이 애정을 가지고 담아내려 했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조지 오웰의 '위건부두사람들'은 아껴지는데 이 시대의 '위건부두사람들'은 잘 눈에 안들어온다면 그게 바로 책이 만든 청맹과니가 아니고 무엇인가? 속이지 마라. 자기를 속이지 않는것이 글을 읽는 첫걸음이다.   

모든 싸움에서 가장 큰 적은 외로움이다. 고 김주익 위원장도 그리고 또 김진숙 위원도 모두 싸움에 익숙해온 사람들이다. 나같은 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절박하고 또 그 절박함이 만든 강인함으로 무장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단단한 그들도 매번 새롭게 갱신되는 외로움이란 적과 마주쳐야 한다. 이런 걸 알려야 하는 지역의 언론이라고 하는 것들은 400명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는 외면하고 각급 기관장들을 초대해서 안면찍기에나 정신이 팔려 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사실은 별로 없다. 대신 나는 외롭게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을 지지하고 한진중공업 노조의 투쟁을 지지한다. 단 1명의 몫만큼 더 친구가 되어주는게 자본과 언론에 고립되어 '무지몽매한 폭력주의자", "막무가내 노동자" 등으로 외로와져가는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예의이며 작은 연대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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