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먼저간 아드님께 부끄럽지 않은 어머니셨습니다. 넓은 치맛자락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의 야트막한 산그늘이 되어 주셨고, 늙고 오래된 몸으로 젊지만 게으른 몸을 깨워주셨습니다.  

당신의 먼저 간 아들을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 처럼 당신 역시 그렇게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아드님 곁에서 편안하시길....이.소.선 .어.머.니  

 

1천만 노동자의 어머니 끝내 잠들다...이소선 여사 소천

노컷뉴스 | 입력 2011.09.03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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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이대희 기자]

"내가 못 다한 일, 어머니가 꼭 이뤄주소. 내가 죽고 없으면 엄마가 댕기면서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단결해서 싸워야 한다'고... 그렇게 외쳐 주소"

41년 전, 화상으로 온 몸에 붕대를 감은 22살 아들이 숨이 넘어가기 직전 당부한 유언이다.

아들 전태일의 마지막 말을 지키는 것, 그것만이 고인의 살아가는 삶의 이유였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였던 이소선 여사가 3일 소천했다. 향년 81세.




고인은 한 노동자의 평범한 어머니였지만 1970년 11월 13일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날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며 분신자살하면서 고인은 민주화 투사로 거듭났다.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였지만 아들과의 약속을 위해 '전태일'이 돼 살아갔다.

전태일 열사에게 자극 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벌이며 고인을 찾아왔다.

고인은 이렇게 찾아온 이들을 연결시켜 주거나 공권력에 쫓기는 이들을 숨겨줬다.

수배중이던 고 조영래 변호사를 애인으로 위장시켜 경찰의 포위망을 뚫기도 했고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장기표씨를 숨겨주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김대중 정부 시절 중반까지 20년 넘게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생활을 하며 4번이나 구치소에 다녀왔다.

노동자의 대모였던 고인에게 나이가 더 많았던 문익환 목사나 김대중 대통령도 깍듯하게 '어머니'라 불렀을 정도였다.

1986년에는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이들의 유족들을 모아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유가협)을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고 죽기 직전까지도 고문을 역임했다.

1989년에는 유가협 회원들과 함께 135일 동안 의문사 진상 규명 농성을 벌였고 1998년에는 의문사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법 제정을 위한 422일 천막농성을 진행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의 현장에는 언제나 고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쓰러져 병상에 눕기 직전까지도 부산 한진중공업 3차 희망의 버스를 타는 일을 상의했을 정도였다.

별세하기 전까지도 아들 전태일이 공장에서 남은 천으로 만들어 앞 뒤 색깔이 다른 겨울 속바지를 입었던 고인.

누구와도 바꿀 수 없었던 아들 전태일을 잃은 천불이 일어 신경안정제를 먹어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 숱했다.

"나는 올 때까지 다 와서 이 달에 갈지 훗 달에 갈지 몰라. (40년동안) 갈 데 안 갈 데 다 다녔는데 변한 게 없어서, 우리 아들한테 가서 할 말이 없어서 큰 일인기라"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짊어졌던 고인.

우리가 고인을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가 아닌 고인의 이름 석 자 이소선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2vs2@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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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이 중요한 모니프다. '전선야곡' 을 전선의 낭만이 아니라 갑돌이의 아들, 철수의 아버지로 해석상 전환 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죽음=전쟁'에 반대하는 '보편적 휴머니즘'으로 승화시킨다. '전선야곡'을 부르는 화자에게 '전쟁터'는 '사지'이며, 정한수 떠놓고 기다리는 어머니가 있는 '고향'은 '생'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극단의 간절함이 있다. '어머니와 고향'으로 상징되는 생의 욕구는 '죽음'을 종용하는 권력과 전쟁에 대척점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남과 북 그리고 이념을 초월한다. '전선야곡'은 이 영화에서 '반전'의 주제를 매우 자연스럽게 극중에 융화시키며 또 관객에게 전이시킨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이자 매체인 것이다
 

 영화는 각종 전쟁영화에서 다루어진 클리세들을 적당히 가지고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도 있고 ,<웰컴투 동막골>, <태극기 휘날리며>도 있으며, <지옥의 묵시록>과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잠시 휴전한 1차 세계대전 이양기)와 <라이언일병구하기>까지...


 이 영화가 이런 저런 유사한 영화의 데자뷰를 불러일으키면서도 구조적 완결성을 놓치치 않은 것은 감독의 주제의식에 대한 끈을 끝까지 놓치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라는 것 말이다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이다윗이란 배우가 이 곡을 부를 때 이 영화가 다다를 지점이 예견된다. 그리고 이 곡은 일전을 앞두고 거대한 생의 합창으로,반전의 합창으로, 반권력의 합창으로 애록고지를 울린다. 이런 노래를 통해 메시지를 스크린 안과 밖으로 투사하는 방식은 매우 현명하고도 효과적이다 
 
다니엘 J 리버틴의 <호모 무지쿠스>란 책에 보면, 인류는 언어/음악과 공진화한다. 특히 음악은 언어와는 다른 소통 매체로 자리잡는다. 즉 음악은 "정직한 신호를 전달하는 체계, 소통자의 진정한 감정 상태와 동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다. 저자는 이어서 감정을 나타내는 신호로 치자면 음악보다 나은게 없다고 말한다. 즉 영화에서 '전선야곡' 이 만드는 남과 북의 병사들의 감정체계는 생의 정직한 신호로 스크린 바깥까지 전이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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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솔아,할아버지께서 부르셔.네 하고 달려가면" 나이가 40대 이상이면 이 노래를 불렀던 이자람양을 기억할 것이다. 현재 그녀는 33살이고(아직 결혼여부는 모르겠으나 미혼일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광대'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부럽다 했는데, 하여간 이 친구의 행보를 보면 그 말이 맞다싶기도 하다. 이벤트 '예솔아'로 끝날 수 도 있었지만, 그녀의 부모와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자기 길을 갔다. 그리고 자기 세계를 만들더니 이제는 진짜 '광대'가 되었다.  

언젠가 '아마도 이자람 밴드'의 노래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지난 6월에 두번째 창착 판소리<억척가>를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물론 서울에서)첫번째 판소리는 <사천가>였다. 유명한 브레히트의 '사천의 착한 여인'을 옮긴 것이다. 요즘은 그럴 일이 없겠으나, 내 대학 시절엔 브레히티의 작품은 끊이지않고 공연되었다. 아마추어 연극패든 프로 극단이든 연중 어느 곳에서든 브레히트가 있었을 것이다. 

판소리 리뷰를 하나 올리고 나서 두리번 거리다가 이자람의 두번째 <억척가>의 철지난 예고를 보게되었다. 수지타산을 맞춰야 하는 지방 공연기획사가 미디어의 호들갑스런 관심을 끌지도 못한 이 공연물을 상연할리는 없다. 그리하여 부산에서 보기 쉽진 않을게다. "확 내가 기획사를 차려버려."했다가는 주로 망한다.ㅠㅠ 

어쨋거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공연들을 좀 보러가야한다.  

하여간 이자람이 앞으로 얼마나 멋진 광대가 될지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 흥미롭다.  

난 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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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모르지만...그는 그저 다른 장식들로 치장을 한 세련된 척하는 사회진화론자일 뿐이다. 그리고 사회 진화론자들에 대해서는 친절하게도 불관용하는 것이 당신과 나의 공통점이다.(인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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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새벽 3시 30분. 눈을 떳다. 한 잔의 물을 위 속으로 떨어뜨렸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트위터로 한진중공업 소식이 타전된다. 이정희 의원이 병원에 실려갔다. 정동영 의원의 글도 보인다.  마음 속에 커다란 추 하나가  가라앉는다.  이 늦은 시간에 신발 끈을 묶는다면 이것도 하나의 과잉일게다. 실제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토요일은 9시에 출근을 했다. 7-8월 매주 토요일 출근이 예상된다. 아침부터 하늘을 몇 번 씩 처다봤다. 구름을 봐도 십분 뒤의 날씨를 알 수 없었다. 물기만 잔뜩 머금고 있기만을 바랬다.장마라고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바깥에서 하는 일에 날씨는 가장 큰 복병이었다. 오전 내내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전 일은 비교적 수월하게 처리했다.   

오후에는 외부 설치해서 일을 꾸려야 했다. 외주 장비 업체팀이 속속 도착했다. 그리고 몇 번을 물어봤다. "바깥에서 하실 겁니까?" "곧 비가 올지도 모르는데"  

점심 식사 전까지 몇 번씩 모여서 회의를 했다. 준비된 외부에서 진행할 것인가 작은 강당으로 들어갈 것인가. 최종 결정은 내가 해야만 했다. 

일단 준비된 대로 야외로 결정했다.  외주 업체팀들은 부랴 부랴 짐을 내리고 장비를 설치했다. 대략 1시간-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예정된 시간을 1시간 앞두고 비가 슬슬 내리기 시작했다. 5분...10분....일하는 모든 스텝들이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스텝 중 하나가 오더니 " 00씨 결정해야 돼. 더 기다릴 껀지 아니면 다 접고 실내로 들어갈 껀지"  현장에 있는 30-40명의 성인 남자들이 군데 군데 천막 안으로 몸을 숨겼다. 몇 몇은 담배를 피우며 하늘 한번 쳐다보고 바닥의 빗방울을 바라봤다. 내 얼굴 한번 쳐다보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더 늦출 수는 없었다.  

비는 거세졌다. 장비를 모두 뜯고 다시 세팅하는데 얼마쯤 걸릴지 물어봤다. 대략 1시간-1시간 30분. 

 결정해야 했다. 

 " 들어갑시다."  "미안해요.어쩔 수가 없네. 다들 이동 준비해주세요." 군데 군데서 한숨과 불평의 소리가 들려왔다. 

비는 직접 맞으면 아플 정도로 쏟아졌다. 

전기장비를 다루는 친구들은 비를 가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장비에 뒤집어 씌웠다. 그리고 우의도 없이 2층 강당으로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속옷까지 모두 젖었음에 틀림없다. 신발과 양말이 온전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실내로 들어가니 아무래도 갑갑할 수 밖에 없었다. 실내는 에어컨이 틀어져 있었다. 그러나 매우 더웠다. 그럭 저럭 일을 마쳤다. 돌아가는 길에 외주업체팀 중 오늘 가장 큰 고생을 한 친구 둘을 불렀다.  20대의 젊고 순박한 친구들이다. 뭐 해 줄 건 없고 지갑에서 10만원을 꺼내서 목욕하고 가라고 주머니에 꽂아 주었다. 두 친구 다 손사래를 쳤다."이러시면...괜찮습니다.다음에 맛있는거나 사주세요." 라고 느릿한 사투리로 말했다. "그건 그거구...너네들 지금 옷 다 젖어서 어디 찜질방이라고 갔다가 집에 들어가라.뇌물 주는 것도 아닌데 뭐." 라고 하고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에 손인사 한번하고 돌아가는 차에 올랐다.  

 7시 넘어서 회사에  돌아올 수 있었다. 몇 몇이 밥이나 먹고 가자고 했다. 중국집에서 고추잡채, 탕수육, 짬뽕, 그리고 소주 시켜 놓고 저녁을 먹었다. 계속 비는 내리고 8시 30분쯤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매우 매우 긴 하루였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가 어찌되었나 궁금했다. 9시 k방송국의 뉴스를 틀었다. 20분 가까이 뉴스를 봤는데 관련 소식은 없었다.   

결국 새벽 3시에 일어나서 트위터로나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호우주의보를  뚫고 내려와서 폭우 속에 앉았던 사람들. 공권력이 그들에게 준 선물은 색칠한 매운 물대포였다. 달리 할 말이 없다.    

 

영도에서 분노 속에 비 맞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곳까지 이어지는 도시고속도로를 바라보았다. 듣고 있던 바흐에 정지 버튼을 눌렀다. 살짝 창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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