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무슨 말들을 하는지 집중하고 보려고 해도 넉줄 이상 읽기가 힘들다. 원래 없던 관심을 갑자기 키울 수도 없는 법. 하던데로  눈팅과 무관심의 역학 법칙을 지속하기로 한다. 복학생 형님 같은 전지적 위로 따위는 오글거려서 어차피 체질에 맞지도 않으니 더 말할 것도 없고.

 

2.문득 책장의 책을 뒤적이다 눈에 들어온 문장.

 

사유,/즉 자신의 강압 메커니즘 속에 자연을 반영하고 되풀이하는 사유는/ 자신의 철두철미함 덕분으로 /스스로가 또한 강압적 메커니즘으로서의 /'잊혀진 자연'임을/ 드러낸다.  <계몽의 변증법> 중에서...

 

/ 표기가 되어있다. 문장이 잘 안들어올 때 밑줄 긋고 다시 문장을 나누어 읽으며 하는 짓이다. 문장이 안들어오는 이유는 이해부족도 있겠고, 그 문장을 읽던 당시 딴 생각을 해서 일 수도 있다. 음악에 잠시 귀를 기울인다거나, 뭔가 성적인 생각을 한다거나, 업무와 관련된 일을 미리 시뮬레이션한다거나...하여간 딴짓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클래식이다. 니체나 벤야민,아도르노 같은 이들의 글을 보고 있으면 좌절감이 생긴다. 이런 사유에 이런 문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인가 하고 말이다. 

 

3. 오늘 낮, 회사 자료실에 들렀다가 <한겨레21>을 잠시 열어봤다. 지난주 것 같았다.<건축학 개론>이 특집이다. 결국 '세대론'의 반복인 셈이다. 90년대의 소비세대의 문을 연 신세대가 자라나서 이젠 복고적 소비중심축으로 등장한 셈이다. 문화시장의 트렌드가 7080세대에서 이제 90세대로 넘어온다는 뜻이다. 징후는 <나는 가수다>의 폭발적 인기부터 예감된 것이다. <건축학 개론>은 이를 명백히 가시화시켰다. 

 

<건축학개론>의 첫사랑 이야기 속에 윤대녕의 <상춘곡>의 한 문장이 인용되었다. <상춘곡>이라는 단편은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저 윤대녕의 희미한 그림자일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를 처음 알게된 작품<천지간>은 TV문학관에 나온 심은하와 김상중 때문에 유독 기억이 생생하다만. 하여간  기자가 인용한 글은 이거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멀리서 얘기하되 가까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서로의 생에 다만 구경꾼으로 남은들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마음 흐린 날 서로의 마당가를 기웃거리며 겨우 침향내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된 것이지요......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

 

......

뭐라고 해야할까?  기쁜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20대 아니 이후 30대 어느시절, (워낙 철이 늦게드는 사람이라) 나이 들어 만나고 싶던 그 지점에 도착했다. 비로소. 오는 길이 쉽지 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이렇게 왔다는.  늦었나 싶어 부끄럽기도 하고 머쓱거리며 대견스럽기도 하다는.

 

물론 나는 앞으로도 더 떨릴테고, 그 떨림을 자책과 자부심으로 안고 운명처럼 살겠지만, 저 문장을 읽고 난 뒤 내게 밀려온 감정은 그거였다. 이제 거기까지 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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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2-04-19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80년대 중반생인데 90년대가 2000년대보다 더 친숙해요. 90년대엔 초중딩으로서 맘껏 텔레비전도 보고 언니 오빠들 쫓아다니며 놀았는데 고등학교 들어가고 나니 공부하느라 누가 가요프로 1위 하는지도 모르겠더라구요. 3월 초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90년대 특집하는데 입을 헤 벌리고 봤죠. 드팀전님의 그곳에 다다른 그 마음이 이해간다고 하면 혼날려나요? ㅋㅋㅋ

드팀전 2012-04-20 09:40   좋아요 0 | URL
제가 좀 느려서 그런 거니까 전혀 문제될 꺼 없습니다. 모든게 육체적 나이와 정비례관계로 가는 것은 절대 아니니까요. ㅎㅎㅎ
 

 

"네가 싸우는 상대는 알기 쉽지. 하지만 네가 왜 싸우는지는 알기 어렵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나오는 말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저 대사가 쓰인 장면이 주인공의 사형 집행 전날이라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영화의 내러티브 자체가 혁명의 역사,또는 정치의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요소들을 압축해 놓았기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앞으로의 이야기를 맥락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여기저기 들여다보면, 이 둘 다 너무 잘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것이 미력한 내겐 오히려 불편하다. 특히 두 번째 질문에 반사적으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실을 말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쉬운 일이된다. 그것을 어렵게 하는 것은 외부적 억압때문이지 진실 자체 때문은 아니다. 억압이 어렵게 만드는 것이지 진실이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이 시대에 누군가 진실에 대해 말한다면 그에게 씌여질  처방전은 '히스테리'이거나 '분열증'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누구나 진실을 말하는 데 그는 진실에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 중 최악은 넘기는 책장에 따라 주체를 주채하지 못하는 일부 독자들이다. 혁명가의 책을 읽는 순간 검은 깃발 아래 설 듯 말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붉은 깃발이 그의 머리 위에 있다. 다른 종이뭉치를 끝내고 나면 그는 녹색 휘장을 두르고 휘파람을 불고 서있다.  말을 바꾸어 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로지 문자적 감응을 즉각 즉각 배설하고 있을 뿐이다. 이 과정이 시간의 발효 속에 제대로된 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습관적 위장 장애로 인한 설사에 지나지 않을 경우도 많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거기에 열광한다. 장인지 똥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곳에 오로지 포토샵을 하지 않아도 날것으로 어여쁜 단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아름다운 말들로,또는 가정된 진실로 그 말들이 '진실로'-여기서 '진실로'라는 말은 본인도 결코 의식하지 못하는 순수한,또는 순진한이라는 차원이다.- 도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 민주, 평등, 우정, 사랑, 정의, 관용, 조화..... 이 모든 말들은 입에 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어찌 이 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가치가 마뜩치 않다고 고개를 저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만,

영화<대부>에 돈 꼴레오네의 말은 참고 삼을 수 있을 듯 하다.

 

"모임을 주선하겠다고 내게 오는 놈, 그 놈이 배신자다." (로저 에버트 <위대한 영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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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2-04-05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해자가 피해자의 얼굴로, '순진한 피해자'의 얼굴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자기정당화와 변명이 화려한 수사와 혁명의 언어로 전치하는 것 같고요. 건강하시죠? 안부글 남기러 들렀다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글 읽고 갑니다.

드팀전 2012-04-05 09:02   좋아요 0 | URL
^^ 반가와요. 부산에는 벚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1.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1번 BWV 1007>을 듣는다. 첼리스트 요요마가 이곡의 영상화 작업을 통해 봄 그려내려고 했던 이유가 어슴프레 기억난다. 도시 구석 구석에 작은 햇살조각이 뿌려질 것 같다. 바흐의 악보들 사이로, 현이 울려내는 공명들 사이로 나풀거리는 나비를 상상한다.'뻘밭 구석 이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데를 기웃거리다' 온 것 같다. 그럼에도 특유의 미소와 온화함을 잃지 않는....

 

에밀 시오랑은 '바흐가 없었다면 신은 권위를 잃었을 것이다' 라고 썻다. 이 말을 다시 쓰고 싶어진다. '바흐가 없었다면 인간은 자존을 잃었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2. 리뷰가 안써진다. 아니 쓰기 싫어진다. 리뷰나 글을 쓰는 행위도 물리법칙에 적당히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유비적인 사실같다. 한동안 리뷰나 글을 쓰지 않다보니 이젠 그런 욕구마저 현저히 감소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성의 간계이다. 리뷰 자체가 주는 효과와 기회비용를 비교한다는 것이다. 실제 대단치 않은 리뷰 한 편을 쓰는데도 1-2시간은 소요된다. 예전에는 그것 나름의 효용에 만족을 느꼈다. 그런데 분명 효용은 체감의 법칙을 따른다. 리뷰를 쓰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하고 싶은 것이 많다.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고, 책도 꽤나 진도를 내어 읽을 수 있다. 그것도 아니면 지난 책들을 뒤적이며 정리를 해 볼 수도 있다.(이 작업은 올해 습관적으로 꼭 해보고 싶다. 최근에 쓴 몇 편의 리뷰도 그 와중에 쓰게 된 셈이다.)

 

그런데 정작 리뷰를 쓰지 않으며 확보된 시간에 그에 대체될 만한 유용한 일을 하는 것만도 아니다. 인터넷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그 시간을 허비할 때도 있고 영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도색적인 스샷을 기웃거리다 끝날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책을 읽고, 또 어떤 문장은 매우 공들여서 고민해보고 하는 시간을 갖지 못한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지만 리뷰에 대한 아쉬움은 별로 없다. 그래서 자꾸 리뷰와 멀어져 간다.

 

그나마 리뷰라도 써야 글 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을텐데...

 

 

3. 최근에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를 읽었다. 알튀세르는 대학교 때 여기저기서 공부한 경험이 있다. 온통 문화나 담론의 영역에서 놀 때마다 이런 것들은 나를 끌어내려 주는 중력이다. 니체적인 의미와는 반대로 긍정적인 의미다. 나는 이걸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시지프스같은 방식이다. 물론 내가 애정을 가진 철학자나 분야들도 있다. 그들의 사고와 사고 방식들. '유용한' 이란 단어는 미흡하다. 그들의 사고와 문장들 그리고 사유의 방식들은 크고 작건간 '혁명적'이다. 그들의 고지에서 미흡하나마 문제의식을 나눈다. 그리고 다시 또 내려오고, 또 다시 그들에게 올라간다.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는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책은 아니다. 대학교 다닐때 교수는 칠판에 자주 '건물'을 그려서 이걸 설명했다. (우리는 축구장이라고 불렀다.) 간략하게 도식화해서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으로 서술된다.  

 

생산양식= 생산력 + 생산관계 

 

상부구조/하부구조

 

상부구조의 자율성

최종심급의 경제적 토대

 

억압적 국가장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이데올로기 일반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

1)이데올로기의 물질성

2)이데올로기의 호명.

3)주체화의 문제

 

보론) 1)생산력에 대한 생산관계의 우위

        2)계급투쟁의 우위

 

<재생산에 대하여>은 책의 구조 자체도 매우 효과적이다. 자크 비데의 서문/ 알튀세르의 본문/보론(비판에 대한 반비판 성격) / 70년에 나온 유명한 에세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이다. 마지막 에세이는 전체 <재생산에 대하여>에 대한 알튀세르 자신의 요약본이기도 하다. 많은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는 사람은 마지막 에세이와 비판에 대한 반비판 성격의 보론 부분만 읽어도 된다. 

 

번역을 논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서 그저 인상비평정도지만. 오탈자가 눈에 띈다. 그리고 문장 자체가 어법에 껄끄러운 것이 꽤 있다. 좋은 번역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과연 이것이 좋은 번역인가라고 묻는다면 망설이게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일반독자가 비문때문에 알튀세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4.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6번의 가보트...연주자는 오필리아 가이야르.

 창 밖은 이미 봄인데

 도대체 뭐 하는 거지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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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12-04-01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ola!

드팀전 2012-04-02 17:59   좋아요 0 | URL
^^
 

기대를 안고 페이퍼를 썻다가 약간의 성질과 함께 지웠던 적이 있다.(요즘은 뭐 끄적였다가 많이 지우는 편이다. 삭제된 페이퍼에는 제각각의 이유가 있다.ㅋㅋㅋ)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에 대한 것이었다. 개봉 소식을 듣고 "그래!" 하면서 기대의 페이퍼를 썼다. 그런데 곧 실망의 페이퍼가 되고 말았다. 지방에서는 볼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맞다면 국내 오직 단 한 곳에서만 개봉했다. '아트 하우스 모모'

 

'약간의 성질'의 원인은  '개봉'이라는 기대감과 '단 한 곳의 개봉관'이라는-더 있을 수도 있겠으나 내가 아는 바로는- 추정된 '사실' 사이의 낙차 때문이다.

 

어떤 분의 페이퍼를 보다가 그 때 생각이 나서....하여간 그렇다는거다. 

 

 라스 폰 트리에감독의 <멜랑콜리아>의 오프닝도 매우 유명했다. 친구들만을 위해 열어놓은 페이스북에서는 꽤 오래전에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ㅎㅎ 두 영화를 보면 비동시성의 동시성 같은 것을 느낀다. 고전 영화를 연상시키는 흑백의 롱테이크와 패션잡지의 화보와도 같은 감각적 느린 영상. 벨라 타르의 음악은 스코어였고 폰 트리에의 음악은 바그너다.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 오프닝의 독백이 니체 이야기이다.

 

 

http://youtu.be/v32n4lCG0OA

 

라스폰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 오프닝, 음악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서곡이다.

 

 

http://youtu.be/2kP-vuOy8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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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을 표현하는 가장 우호적이고 적절한 말은 '전투적 자유주의자'이다. 최근에 트위터 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여전히 그는 그답다. 진중권의 싸가지 없음이라는 에티켓과 멘털리티를 가지고 그를 싫어 할 수 있다. 내 개인적으로도 그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고 만날 기회도 없다. 친하게 지내려면 김제동 같은 이들이 훨씬 재미있고 즐겁지 않겠는가? 

 

일체의 싸가지 없음은 배제하자. 그리고 그가 던지는 문제의식을 따라가다보면 나는 내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부분과 닿는 점이 있다. '합리성'과 '독립성'이다. 내가 그와 다른 점은 그보다 '덜 전투적' 이며 '덜 자유주의적' 이라는 사실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는 때로 그것이 사실이나 진실과 관련이 떨어지더라고,의지와 힘의 문제로 돌파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여기에는 윤리적 딜레마가 늘 상존한다. 목적의 정당성과 수단의 정당성 사이의 긴장 같은 것이다. 나는 때로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폭력적 요소가 늘 그림자처럼 따라간다. 이런 폭력적 요소를 지양하도록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결코 순수한 형태의 합일은 도래하지 않는다. 현상적으로 목적과 수단이 동시에 정당화 될 수 있는 최소 접점을 찾고자 하는는 가치 지향만이 가능하다.  합리적 개인들의 다양한 의견 수렴이 힘을 최소한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답이 나온다. 다원적 책임을 통한 위험의 분배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전제에 대한 메타적 질문이 반드시 따라온다. '누가 합리적 개인인가?' 라는 원초적 문제말이다. 숙의민주주의나 의사소통민주주의에 반드시 달라 붙는 기본적 질문이다. 이 딜레마는 이런 논리에서 결코 풀리지 않는다. 내가 하버마스류의 의사소통론에 대해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부분은 그것때문이다.

 

진중권이 나꼼수를 비판의 주종은 팬덤 현상과 나꼼수의 음모론이다. 나는 나꼼수가 조중동과 대적해 성공적인 대안미디어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것은 조중동이 쓰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카운터를 날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조중동이라는 '깡패' 에 대해 '건달'의 방식으로 MB만 노린 것때문 말이다. 만약 MB만 노리지 않고, 더 광범위하게 체제 자체를 건드린다면 대중은 어렵고,두려워서, 모이지 않는다. 언젠가 말했듯이 나꼼수 강점은 나꼼수의 약점이 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걸 진중권은 음모론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나꼼수가 제기한 문제들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면 나꼼수는 '아니면 말고'' 내가 첨부터 그랬잖아, 소설이라고' 라는 식으로 말하고 빠져나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방식은 아주 오랫동안 공공연하게 조중동과 보수언론이 써왔던 방식이다.  일단 팩트의 정확성에 대해서, 즉 나꼼수가 말하는 것이 단순히 음모인지 아닌지는 정보력과 정보량 자체가 떨어지기 때문에 지금 당장 뭐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개연성이 있는 음모는 작은 팩트상에서 문제를 만들 수는 있지만 실제 전체적으로 사실관계의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스탠스다. 

 

진중권이 트윗에서 연일 이슈를 만드는 것은 단지 음모론때문만은 아닌것 같다. 더 큰 이유는 '팬덤현상'이다. 진중권은 이 '팬덤'을 견디지 못한다. 그가 독설을 퍼부어 세간의 관심을 끈 사건들을 보면 '팬덤'과 관련있다. 심형래의 디 워 사건, 황우석 사건 등등... 문제를 다수의 대중들이 진영논리로 가지고 판단해 버리는 것. 이것을 합리성을 추구한다는 자유주의자 진중권은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가 '전투적 자유주의자'이다. 정치적으로 그는 '사민주의자'에 가깝다. 어떤 이는 자기가 스타가 못되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이야기해버리면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히틀러가 악마여서 파시즘이 발생했다는 것과 똑같은 논리니까. 나는 이 지점에 대해 진중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가 언젠가 '오빠' 이외에 '-빠'가 되어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그게 그거다. 어떤 이는 진중권이 미국 소고기 수입때 앞서 나가서 선동한 걸 가지고 뭐라고 한다. 그 때 자기가 영웅되니까 가만있고, 지금은 자기가 뒷방 늙은이니까 비판한다고. ㅎㅎ  소고기 때 도대체 어떤 '-빠'가 있었을까? 진중권이 칭찬은 받긴했지만 그 시위에서는 어느 누구도 '빠'인적도,'빠'가 된 사람도 없었다. 자발적인 시민 참여였고 자유주의자 진중권 역시 개인적으로,또 소속된 당의 당원으로 참가를 한 거 아닌가? 팬덤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나꼼수의 음모론과 비키니 사건때문에 나꼼수 열풍이 이제 조금 차분해졌는가 모르겠다. 진중권은 그의 트윗에서, 나꼼수 주요 성공 원인에 '반MB-노무현-민주당' 을 들었다. 나꼼수에 몰광(내가 만든 말이다. 몰빵으로 열광하는 )하는 내 친구들도 살펴보면 대개 그 라인이다. 그것이 대중의 정치적 염원이고 현상태의 지표라면 그런 현상은 그 자체로 인정한다. 문제는 그런 현상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합리적 정당성을 얻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는 나꼼수 현상을 지지하고- 비록 2-3번 밖에 듣지 않았지만- 20대 청년들이 자기계발서보다 김어준의 책을 열심히 펼쳐보는 것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차원에서 나는 나꼼수의 한계와 비판의 주머니도 차고 있던 사람이다. 그 현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지만 열광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이참에 나꼼수의 문제와 진영논리들을  조금 더 차분하게 바라볼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진중권이 비키니와 관련된 최근 트윗에는 만약 '그 말을 MB가 했다면 어떻게 했을래?' 라고 반문했다. 아마 MB가 했으면, 탄핵 가자고 햇을 것 같다. 나꼼수가 사과해야 하는게 맞다. 첫번째, 사과할 만한 내용이다. 두번째, 이 문제로 발목 잡히면 곤란하다는 기술적 차원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내가 고등학교 때인가 매우 궁금했던 질문이 그거 였다. "만약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대로 선량한 민족이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면 만약 한국이 일본을 식민지배했으면 어땟을까?"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답게, 일본인을 평등하게 살기 좋게 해주었을까?"  답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문제 넘어서 있었다. 국가 폭력이나  제국주의와 식민담론이런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즉 '한국 대 일본'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면 오로지 '우리는 남과 달랐을거야'라는 옹색한 답변 밖에 얻지 못한다.

 

이거 매우 폭력적인 (?) 상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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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6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6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2-02-06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씨는 자신만의 중도좌파 잣대를 중도우~좌파 에게 일률적으로 일반화시켜 적용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합리성을 이성적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진중권의 냉소적인 모습을 보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논쟁을 하는게 아니라 마음에 칼을 간 상태서 논쟁을 하는 것으로만 보입니다. 제가 유추해보기로는 공부한 내용의 영향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 니체같은 냉소적 스타일의 철학 및 미학자들, 아류맑스식의 논쟁습관(가령,인터내셔널 내 논쟁서 심하게 몰아부쳐 낙인찍는 점),그리고 서양철학 특성에서 비롯된 한계(마음에 대한 이해부족) 비롯된 것 같습니다. 풍자가 아닌 냉소적 쾌 추구 성향, 사람의 주인이랄수 있는 마음보다 합리적 이성을 우위에 두는 사고방식, 싸우면 끝장보는 아류맑스 특유의 논쟁문화 이런게 습관화된 사람같습니다. 나이먹으며 성숙해져 논쟁 덜하면서도 상대를 설득하는 힘을 가져야하고 그게 아니면 마음의 적이라도 만들지 않아야하는데 말입니다.

진중권씨 말은 이성적으로 맞는 부분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자기식 스타일이 아닌 사람들 마음에 벽을 만들거나 심하면 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진보논객 중에서 진보측에게 득과 실을 동시에 가장 많이 가져다주는 인물이 진중권씨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른 측면서 보면 10% 이하의 진보측 지지율 현상유지하는데 가장 기여하는 논객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살피지 못하는 융통성없는 합리성, 중용의 균형감이 없는 논쟁스타일은 진보측을 늘 현상그대로 유지시킬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스타일이 아닌 다른 스타일의/다른 입장을 지닌 사람들의 방법에서 배울게 많고 다른 입장의 방법으로 생각해보아야 자기스타일을 객관화시키고 균형감각을 터득해서 성장하는데, 그게 15년 동안 전혀 안됐던 대표적인 진보논객이 진중권씨라고 생각합니다. 합리성에 대한 일관적 추구성향이 매우 쎈 고수이니 그 장점을 바탕으로 마음에 대한 친화력도 보완하면 금상첨화일텐데 이 둘을 상반되는 걸로 잘못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소림권 고수인 상태서 태극권 연마를 못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드팀전 2012-02-06 16:03   좋아요 0 | URL
진중권이 적을 만드는 방식에 대한 적절한 설명인듯 합니다. '논쟁도 다 사람의 일이다'라고 하는 인본적인 접근이 그에게 부족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일단 그것은 그의 한계인지라 다른 이들이 그와 같은 방식을 취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가 '이성적으로 맞는 부분'이 있다면, 거기서 취할 부분이 무엇인가를 구분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