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06-09-18 03:05]
위기의 인문학 살길은…
어린이용 역사책 부탁하자 “나를 어떻게 보고”
“업적을 대중과 공유하려는 열린태도 가져야”
[조선일보 이한수기자, 유석재기자]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벌써 10년 됐다. 대학의 인문학 관련 학과와 학생 수가 해마다 10%씩 급감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문·사·철 분야의 폐강·폐과는 이제 뉴스도 아니다. 지난 15일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의 ‘인문학 (위기)선언’, 그리고 오는 26일에 있을 전국 80여개 대학의 ‘인문학 성명’ 등은 벼랑 끝 절규다. 그런데도 ‘위기’라는 말만 반복될 뿐 인문학을 살리는 논의가 보이지 않는다. 길은 없을까.
서울대 출신으로 대학에서 강사를 하고 있는 동양사학 전공의 M씨는 일간지에 서평을 썼다가 지도교수로부터 “그런 짓을 하면 대학에 자리를 잡기 어렵다”는 충고를 들었다. M씨는 “진지하게 공부하라는 뜻으로 이해했지만 대중적인 작업을 경원시하는 학계의 풍조에 기가 질렸다”고 말했다. 인문사회 학술서를 주로 내던 P출판사는 최근 역사학과 B교수에게 어린이용 역사책을 써달라고 제안했다가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책을 쓰라고 하느냐”는 대답을 들었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중과의 소통을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상아탑에 갇혀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안대회 명지대 교수(한문학)는 “과거에는 양주동 선생처럼 학문적으로 대단한 분들이 대중들에게도 최고의 논객으로 통했다. 60~70년대부터 인문학이 대중과 멀어지면서 위기를 불러오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도 최근 박제가의 여성 편력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가 “이게 무슨 한문학이냐”는 질책을 들었다고 했다.
대중서를 내면 학계에선 ‘매장’되는 풍토다. 이 때문에 ‘베스트셀러’ 대부분은 교수 출신이 아닌 ‘재야 학자’가 쓰는 기현상도 일상화됐다. 교보문고 2006년 상반기 인문과학 베스트셀러 20권 중에서 현직 국내 대학교수인 인문학자가 쓴 책은 ‘글쓰기의 전략’(정희모 등·연세대), ‘미쳐야 미친다’(정민·한양대) 등 단 두 권뿐이다.
숭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덕일씨는 역사학 분야에서 베스트셀러를 내고 있지만 그의 책은 학계에서 거의 인용되지 않는다. 이씨는 “그런 경직성이 대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민속학자인 주강현씨도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대학 사회를 성토했다. “교수 채용 때 실력보다는 ‘끼리끼리 나눠먹기 식’이 문제입니다.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공부하지 않는 인문학자의 위기죠.”
물론 지나친 학문 대중화는 또 다른 위기를 부를 수 있다. 고운기 연세대 연구교수(국문학)는 “인문학은 근본적으로 대중과 소통하기 어려운 기초 학문이다. 학문의 대중화를 강조하면 오히려 더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적 연구와 대중적 전파 작업은 인문학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양 날개다. 조규익 숭실대 교수(국문학)는 “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대중과 공유하려는 열린 태도를 가질 때 인문학의 위기는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한수기자 hslee@chosun.com )
(유석재기자 [ 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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