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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황석영이라는 작가와 처음 만난 것 아버지가 읽으시던 <장길산>이었다. 10권이라는 방대한 양의 <장길산>은 임꺽정과 홍길동 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 몰라도 뭔가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며 교양 수업에서 독후감을 써야 했던 <무기의 그늘>도 월남의 민주화를 위해 싸운 전쟁으로 알고 있던 내 인식의 틀을 깨뜨려 주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역사를 통해 바라봐야 할 것들을 제시하던 그가 최근에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손님>이라는 작품을 통해 한국동란의 와중에 친구간에 이웃간에 총부리를 겨누던 상처를 굿이라는 방법을 통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모습을 제시한 그가 <심청>을 통해 한여자의 몸과 마음을 통해 19세기 열강에 수탈당하던 동아시아 주변의 아픔을 풀어놓더니 이제는 바리데기 설화를 빌어 다시 화해와 용서를 이야기한다.
당간부의 일곱번째 딸 바리의 목소리를 빌어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북녘의 참상과 생존을 위해 강을 건너 만주에서 극한의 생존위기에 처하고 밀항선을 타고 가는 내용까지는 <심청>과 <손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영국에서 겪게되는 9.11과 미국과 이슬람간의 전쟁 그리고 많은 이민 노동자들의 애환 등 작가의 관심의 영역이 단순히 민족적 아픔과 상처를 넘어 세계의 곳곳에 있는 약자들의 아픔을 얘기하고 단순히 아픔에 대한 복수와 투쟁이 아니라 남편을 죽인 정부에 대한 용서나 모성으로 그러한 것을 극복하는 바리의 모습을 통해 상처주는 자와 상처받는자 그리고 용서받는자와 용서하는 자가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이다.
부모에게 버림 받지만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와 화해하는 바리공주의 설화처럼 혹독한 세상과 자신에게 주어지는 가혹한 운명 속에서 자신을 고난에 빠지게 했던 이들을 다 용서하는 바리의 모습이 이젠 단지 우리 민족만의 토속적인 무속신앙이나 설화가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인간애로 승화해 나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