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곳은 마음껏 열고, 닫을 곳은 닫는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주절주절 말할 때와, 멍하니 혼자 있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거릴 때, 여러 가지 상황에 놓이는 것이 인간이니까, 방도 거기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는 게 좋다, 고. - P271

"한 점의 틈도 그늘도 없는 완벽한 건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은 아무도 못 만들어. 언제까지나 주물럭대면서 상대방을 기다리게 할 만한 것이 자신한테 있는지, 그렇게 자문하면서 설계해야 한다네."
- P286

마리코의 형태는 태어났을때부터 쭉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있다. 지금 옆에 앉아서 숨을쉬고, 말하는 마리코가 사랑스러웠다. 성급한 욕망과는 색채가다른 감정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마리코의 침실에 벌레 소리가 울려 퍼진다. 서로의 손이 움직이고, 몸이 닿고, 말이 형태를 이루기를 그만둘 때, 닫힌 입이 다시 살짝 열린다. 바닥에 가라앉아서 잠들어 있던 감각이 자극을받아서 떠오른다. 몇 번을 되풀이해도 싫증나지 않고 좀더 강하고 선명하게 태어나는 이 감각은 어디에서 솟구치는 것일까. 아무리 깊게, 흔들리고, 자기가 사라질 것처럼 느껴도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이 감각이 사람의 마음속 저 깊이태어나면서부터 있었던 암흑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그리운 어둠, 우리는 그 따뜻한 어둠 속으로 서로의 숨결을 확인하고 호흡을 맞추면서 한없이 내려갔다.
- P311

자연의 형태나 색채가 합리적인 이유만으로 태어났다면 예컨대 꽃에게, 새에게, 나무에게 이다지도 많은 종류와 변화가 초래되었겠는가. 박새의 가슴께에 흑백으로 그려진 무늬는 왜 그렇게 생겼는지, 각각의 개체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형태나 색은 그것을 지니는 자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먼 옛날부터 시간을 들여 찾아왔고, 그냥 계승되어가는 것이다.
- P328

그러나 움막이라면 아주 잠시라도 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불을 멍하니 보는 여백 같은시간이 있었을 거야. 인간에게 마음이 싹튼 것은 그런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집 안에 계속 있으면 점차 견딜수가 없어져서 밖에 나가고 싶고, 자연 속을 걷고 싶고, 나무와꽃을 보고 싶고, 바다를 보고 싶다고 원하게 되지. 인간의 내면같은 것은 나중에 생긴 것으로 아직 그다지 단단한 건축물은 아니라는 증거일 거야. 집 안에서만 계속 살 수 있을 만큼 인간의내면은 튼튼하지 못해. 마음을 좌우하는 걸 자기 내부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찾고 싶다. 내맡기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 P337

젊을 때는 시간이 되는대로 도면에 달라붙어 숨이 막힐 듯한 완성을 목표로 일했다. 그 때문에 등한시한부분이 손도 대지 못한 채 남겨진 것은 알아채지도 못하고.
잘된 것도, 잘못된 것도 해체하면 똑같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속 깊이 아쉽다고 생각한 일은 별로 없다. 해체되는 집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면 그 나름의 운명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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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갓 구운 빵이니까 올리브오일에 발사믹, 거기에 후추를 갈아서 찍어먹자고. 그거면 배가 불러도 머리는 잘 돌아가니까. - P104

나는 이 조용하지 않은 고요함이 좋았다. - P104

"그러니까 나는 부엌일을 안 하는 건츅가 따위 신용하지 않아. 부엌일, 빨래, 청소를 하지 않는 건축가에게 적어도 내가 살 집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어."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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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런저런 감정이 밀려올 때 마치 ‘감정 = 나‘인 것처럼 ‘이런 일로 슬퍼하는 / 불안해하는 / 화를 내는 내가 싫다.‘ 같은 평가 ‘질‘을 그만두도록 해요. 그저 슬플 때는 ‘내가 지금 슬프구나‘, 기쁠 때는 ‘내가 지금 기쁘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감정은 평가할수록 나빠질 수 있다는 것, 기억해요. - P40

많은 괴로움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나를 괴롭히기 때문에 발생하곤 합니다. 곱씹기가 대표적인 예인 셈이죠. 딱히 겪지 않아도 되는 불필요한 불행을 스스로 늘려 가는 것이니까요. 곱씹기는 내가 나를 고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합니다.
고민이 많고 내가 나한테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때,
모두 머릿속에서 내가 나한테 떠드는 말일 뿐 실제가 아니라는 걸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자아야, 좀 조용히 해.‘라고 속으로 말해 보는 것도 좋아요. 사는 건 이미 충분히 힘든데 겪지 않아도 되는 불필요한 불행까지 스스로 만들지는 말아야 하잖아요.
- P45

싫어하는 사람이 남이라면 심한 경우 절교를 하거나 연락을 차단하는 등 다신 보지 말자고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면요? 나의 행동, 생각, 외모가 싫다면 하루하루가 불행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나는 나를 차단할 수도, 나와 헤어질 수도 없으니까요.
이렇게 나 자신과는 결코 떨어질 수 없고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결코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떠올려 봐요.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한다던가 자꾸 지적을 해 대고 너 참 한심하다며 나를 깎아내리는 말을 자꾸 하는 사람과는 한 시간도 같이 있고 싶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내가 만약 나에게 이런 최악의 사람이라면, 끊임없이 잔소리와 나쁜 말들을 쏟아 낸다면,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항상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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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원래 그래 같은 말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믿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감각을 아직 떨쳐 내지 못했다. 나는 어떤 말을 들으며 자랐는가. 사회는 전쟁터라는 말, 함부로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 착하면 손해라는 말,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는 말. 약육강식, 각자도생, 승자독식,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덮기 전에도 숱하게 들어온 말들, 그런 말을 비난하면서도 이용하던 사람들. - P133

바이러스는 아직도 진화하는 중일까. 겨우 백신을 만들어도 바이러스의 진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계속 연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그런 종족이다. 사명감이나 책임감 같은 이상한 감정이 탑재되어 있다. 세상이 이렇게 망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며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에는 이 재앙을 살인과 광기의 축제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내개는 책임감도 광기도 있다. 그 두 가지가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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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지나의 희망인지도 모른다. 국경을 넘거나 벙커를 찾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희망. 과거를 떠올리며 불행해하는 대신, 좋아지길 기대하며 없는 희망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대신 지금을 잘 살아 보려는 마음가짐.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 P55

원한다면 내가 이발도 해 줄게.
건지는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빗어 올리며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 머리 기르니까 약간 원빈 같지 않아?
나는 다시 놀랐다. 원빈이라니. 놀라운 말이다. 재앙 이후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단어였다. 틈만 나면 사이드 미러를 보며 머리를 빗어 올리던 건지는 그러니까, 그때마다 원빈을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떨 때 보면 강동원 같기도 하고,
건지는 계속 놀라운 말을 했다.
- P61

이렇게 달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우리만 모르는 해답을 다른 이들은 찾아낸 것 아닐까. 살아남은 모든 사람이 이런 식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낯설지 않은 생각이었다. 어른이 된 뒤 지속적으로 들던 의구심, 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덮치기 전에도 종종 하던 질문들……. 목숨을 걸고 한국을 빠져나와서도 비슷한 생각만 하고 있다니. 사고의 시스템 자체가 바뀌지 않아 달라진 상황에서도 같은 질문만 던지는 나는결국 단과 다를 바 없다. 업그레이드되지 않은 내비게이션 같았다. 아니라면, 나란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은 질문만 던져 댈 그런 인간인 것이다. 생에 마지막 숨을 내뱉으면서도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고민할 인간.
- P87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처럼 시간 개념도 널뛰었다. 엊그제가여름이었는데 벌써 연말이라거나, 추석 지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설날인가. 그렇게 놀라다 보면 어느새 1년이 지나있었다. 월급 들어오는 날짜를 기준으로 한 달을 가늠했다.
정해진 날짜가 되면 통장에서 돈이 우수수 빠져나갔다. 열심히 버는데도 늘 쪼들렸다. 중요한 일을 다음으로 미루거나 대충 처리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가족 여행, 가족사진, 생일 파티, 칭찬과 위로, 오늘은 어땠어? 키가 이만큼이나 컸네, 안아주고 사랑한다 말하는 것, 오늘을 기억하고 내일을 기대하는것,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잘 자라고 말해 주는 것.
정신을 차려 보면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 P89

이러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아도 소용없었다. 아이들이 아니면 개수대의 그릇에게 화를 냈다. 세탁기 속 뒤엉켜 있는 빨래에게 화를 냈다. 소음이 심한 청소기를 돌리며 화를 냈다. 허공을 떠도는 먼지를 향해 화를 냈다. 화장품 살 시간을 따로 내지 못해 아이들 로션을 같이 발랐고 세탁소에 겨울 외투 맡길 시간이 없어 가을 점퍼를 연말까지 입고 다니다 몸살을 앓기도 했다. 말라 죽은 화분과 유통 기한 지난 음식과 철 지난 옷들과 낡은 신발과 재활용 박스와 고장 난 물건 등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집 안 곳곳에 그저 쌓여 갔다. 집은 점점 좁아졌고 아이들의 비밀은 늘어났고 단은 말이 줄었고 나는 비쩍 말라 건조해졌다. 분명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 최선이 답은 아니란 생각이 세금 고지서처럼 주기적으로 날아들었다. 삶이 마디마디 단절되어 흘렀다. 직장에서의 나와 아이들 앞에서 나와 단을 대할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내가 징그러울 만큼 달랐다. 나라는 사람이 흐트러진 퍼즐 같았다. 애초의 내가 어땠는지 밑그림은 기억나지 않았고 퍼즐은 흩어진 채 여기저기 떠돌았다. 무언가 미세하게 어긋나고 있어서먼 훗날 완벽하게 분리될 것만 같았다. 나와 내가 나와 단이 나와 아이들이,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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