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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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의 여러 기능 중에는 '지난 오늘'을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활동량이 적은 편이었으므로 자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눈에 띄는데, 과거의 기록을 볼 때마다 낯뜨거운 얼굴이 되는 일이 잦았다. 과거의 나의 글에서 비치는 미숙함, 투박함, 어리석음이 '왜 그때의 나는 이렇게 썼을까', 또는 '왜 그때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을까'라는 질문을 피워내고 거기에서 부끄러움이 타오르는 것이다(이따금 내가 쓴 댓글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그때 드는 감정은 어린 시절에 썼던 일기(고등학생 이후로 쓰지 않았던 그것)를 다시 들춰보았을 때 느꼈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때로는 지우거나 비공개로 전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두는데, 아무리 부끄러운 일이었어도 그때의 내가 가졌던 감정과 생각들 역시 나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공적인 공간에 게시하는 글이지만, 이런 글들도 내가 건너온 시간을 기록한 일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범람하는 에세이의 시대에 황정은이 첫 에세이로 《일기日記를 내놓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기야말로 에세이의 맹아(萌芽)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가장 사적이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아 누구나 쓸 수 있었던 에세이, 텍스트의 외연을 확장시킬 가능성을 품고 있었을 에세이의 근원이 일기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일기'라는 제목과 형식에서 어떤 결의 같은 것을 느꼈다.  자신이 그동안 느꼈던 생각과 감정을 맹아의 형태로, 다시 말해 원형(原形)으로 담담히 써보겠다는 작가의 결의를.


가장 사적인 형식이기에 '나'라는 세계의 바깥으로 나온 일기는 빛을 보지 못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장 사적이어서 소중할 수 있는 감정과 상념이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감정을 말한다는 것"(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172쪽)이라는 말처럼, 일기는 가장 사적인 글이라는 사소함으로 바깥의 당신과 연결되고자 분투하는 글쓰기가 아닐까. 그리고 황정은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언어를 허투루 보지 않으려는 감각으로 자기 고유의 상념을 바깥과 연결하려는 듯하다. 그리고 오랜 독자로서 나는, 그 상념들이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었으면 바라는 것이다.


〈일기〉로 시작해 〈일기〉로 끝나는 열한 편의 일기에는 파주로 이사를 한 뒤 겪는 작가의 다양한 일상이 담겼다. 황정은의 오랜 독자는 읽으면서 작가의 일상을, 또는 작가의 소설이 발아(發芽)된 원체험을 새로이 알아가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오랫동안 내 눈을 붙잡아두었던 것은 언어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감각이었다. 일상에서 쓰는 단어에 담긴 무심함을 포착해내던 작가의 시선은 일기에서도 여전하다. 특히 "안다"에 대한 서술을 보면서 나는, 오래 전 '이해한다'는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던 일이 떠올라 흠칫 놀랐다.


내 이웃들이 반달터에 두고 있는 관심을 나는 안다고 썼지만 실은 '아니까'라고 쓰는 데 하루를 망설였다. '안다'고 쓰거나 말해야 할 때 나는 매우 축소된다. 내가 그것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내가 그걸 모른다는 것을 안다. 알아버린 것을 모르는 척, 안다고 말해야 할 때 나는 순진한 척을 하며 무언가를 단념하고 있고 그래서 안다고 말하는 것이 내게는 늘 얼마간 책임을 지는 일로 느껴진다. (29쪽)


산보를 하고 식물을 기르는 장면을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이효리가 고사리를 말리는 장면을 보며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에 과정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164쪽) 하는 대목을 읽으면서 '내가 아는 황정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안도하기도, 매년 목포항을 찾는 작가의 모습을 보면서 처연함에 젖어들기도 했다. 많은 이야기들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 일기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였다. 빨간 머리 앤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소년〉과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맹아가 된 경험과 《어린이라는 세계》를 거쳐 아동 학대의 현실로 이어지는 과정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이를 통해 작가는 에세이에 흐르는 정조를 서서히 독자에게 물들인다.  학대 당하는 어린이를 보호할 수 없는 구조(構造)와 어른의 상투성을 지적하는 작가의 말이 호소력을 갖는 것은 이러한 연결 때문일 것이다. 그 정조의 끝에서 "매번 미안하다는 손글씨 릴레이를 반복할 수는 없다. 몇년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미안하다는 말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60~61쪽)라는 문장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자문하게 된다. 나도 혹시 아파하기만 했을 뿐, 어른의 상투성을 버리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쭉 읽으면서 나는 아마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보다 좋은 글은 없겠다고 짐작했었다. 〈흔痕〉을 읽기 전까지는.


〈흔痕〉은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고 쓴 독후감의 형식을 취하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내용은 가장 내밀하고 아픈, 그래서 더욱 처절한 경험이다. 그래서 바깥으로 내놓을 때 가장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경험. 감추고 싶었던 흔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을 고통이었겠지만, 그래도 이를 내놓은 것은 《헝거》가 자신에게 전해준 용기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려는 마음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읽는다. 이 경험이 당신만의 것이 아니며, "그 수치심은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183쪽) 그렇기에 더욱 용기를 내어 발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흔痕〉이 전하는 이야기는 가장 사적이고 깊숙한 경험이면서 동시에 그 힘으로 타인과 연결을 이루는, 그래서 감정의 울림이 독자에게 크게 닿는 일기이다. 거기에서 나는 근원적인 감정의 맹아를 보고, 처연한 문장에 담긴 고통을 느끼고, 그 상처를 생각하며 아파하는 것이다.


새로 지을 집터에 원래 살던 맹꽁이를, 아이들이 냅다 던져버린 가물치를, 6716번 버스에 탔던 트랜스젠더 여성을, "전에 거기 머물던 사람들과 그들이 겪은 일"(131쪽)을, 세월호 유가족을 생각하며 쓴 일기들을 읽으며, 여전히 작가는 이 세계가 '비-존재'로 만들어버리려는 존재들을 호명하고 있구나, 우리가 세계의 문법에 익숙해져 무심코 뱉는 혐오와 차별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소설보다 구체적인 체험의 모습으로 오는 감정은 더욱 곡진하고 처연하다. 앞으로 작가가 쓸 소설들도 이토록 폭력적이고 엄혹한 세계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분투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한 명의 독자로서 작품을 오래오래 만날 수 있도록 작가의 건강을 염려하고 희구한다. 언제나 독자들에게 건네는 인사처럼, 당신도 건강하고 평안하시기를.





그래도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 예컨대 당신의 건강을 바라고 사람의 선의를 믿고 굳이 희망하는 마음을 나는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겠다는 믿음 말고, 희구하며 그쪽으로 움직이려는 믿음이 아직 내게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안엔 내가 그것을 잃지 않기를. - P160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마음들을 나도 사랑합니다.

다들 평안하시기를.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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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이사를 꿈꾸며

6.

그저께는 오랜만에 책탑을 정리했다. 바닥에 쌓기 시작한 책탑은 한 번 쌓기 시작하면 정리하기가 쉽지 않아 새로 들어온 책은 재배열되지 않고 계속 위로만 쌓이게 된다. 그러다보니 균형이 맞지 않아 나의 뒤척거림 한 번에 책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일도 잦았다. 간만에 큰 맘을 먹고 책탑을 재배치하면서, 마음 먹은 김에 바닥에 쌓은 책을 조금이나마 줄여보자는 생각으로 책장도 정리를 시작했다. 이래저래 무사히 정리를 마쳤지만 책탑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책탑까지 정리를 한 것이 이례적인 일이라 사진을 몇 장 찍어두었다. 본가에 있는 내 방과는 규모도 책장 크기도 천지 차이인지라 얼마나 더 쌓일지를 생각하면 암담하기만 하다.
















다 읽은 책은 쌓이는 대로 바로 택배로 보내버리기 때문에 지금 가지고 있는 책 중에 90%는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읽지 않고 끌어안고 있는 책 중에는 새해에는 꼭 조금씩 읽기 시작해서 완독하자고 다짐했던 책들도 있다. 주로 누구나 읽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나는 읽지 않은 (벽돌)책들이 대부분이다. 여전히 그 책들은 책장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번 주의 나는《타타르인의 사막》을 다 읽었고, 《서울리뷰오브북스 2호》를 드디어 펼쳤으며(이미 3호가 나온 지 오래이고 곧 4호가 나올 것 같다), 공쟝쟝님의 엮인글을 보다가 '무해함'이라는 단어에서 《서울리뷰오브북스 1호》에 실린 김홍중의 글(<무해의 시대>)이 떠올라 '무해'에 대한 간단한 단상과 함께 정리해보려 하였으나 생각보다 《일기》의 리뷰가 잘 써지지 않아 뒤로 미뤄두었다(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일기》의 리뷰는 처음으로 한글이 아닌 에버노트에 쓰고 있고, 컴퓨터로 쓰기 → 앱으로 종종 보면서 어색한 부분 찾기 → 다시 컴퓨터로 수정하기의 루틴을 반복하는 중이다. 오늘 처음으로 로지텍 블루투스 키보드(k380)를 사용해 보았고(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노트북 자판과 사뭇 다른 위치 감각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다...


책들을 정리하고 보니 은근히 모이기 시작한 시리즈들이 많은데, 다행히 나는 누군가가 1권을 선물하면 그것을 전부 사야 할 정도의 책수집벽을 가진 것은 아니어서 전체를 모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시리즈는 그리 많지 않다. 몇 개만 나열하자면 이렇다.


1. 조르주 페렉 선집(수집완료)—문학동네 컬렉션이 있지만, 펭귄클래식코리아에서 나온 《사물들》과 《W 또는 유년의 기억》, 열린책들에서 나온 《임금 인상을 위해 과장에게 요구하는 기술과 방법》까지 모아야 시리즈가 완성된다. 다 모았으나 내가 읽은 건 《사물들》,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공간의 종류들》뿐이다.













































2. W. G. 제발트 전집(수집완료)—여기저기에 쪼개져 있는데, 제일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건 역시 문학동네 쪽이다. 창비에서 나온 책은 구판본을 이미 가지고 있었지만 개정판이 (저렇게 깔끔하게) 나와서 새로 구입했고, 《공중전과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3.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수집중)—가장 열심히 모으는 것 같지만 이 중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을지(아니, 읽을 능력이 될지) 알 수 없는 책들. 《일반 기호학 이론》은 앞부분을 읽다가 너무 어려워서 덮어두었고, 제대로 읽어본 것은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정도다. 내가 무엇을 안 샀는지 헷갈릴까봐 따로 메모를 해두는 컬렉션이기도 하다..


(x가 구입한 것이고, 빈칸은 아직 구매하지 못한 것이다.)


이 외의 시리즈들은 많아도 다 모으겠다는 생각까지는 미치지 않는 것들이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 안토니오 타부키 선집, 조르조 바사니 선집, 워크룸프레스의 제안들 시리즈 등등... 언제나 책을 둘 공간을 고민해야 하는 입장에선 이 정도에 그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한편, 지난주에 했던 주문 중 여태껏 오지 않은 책들이 있었다. 한 권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최근에 이제는 준비가 되었나 싶어서 알라딘에 들어가 본 나는 처음 보는 광경을 목격했다. 출판사에서도 재고가 없어 제작 중이라는 알림을.



현재 알라딘에 들어가 보면 《여름 별장, 그 후》는 일시품절 상태라고 뜬다. 제작 중이라는 것은 한 쇄를 새로 찍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한 권만 만들고 있다는 것일까? '모던 클래식' 시리즈를 하나씩 철수시키고 있는 듯한 민음사의 행보를 보았을 때는 한 권만 만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한 명의 고객을 위해 그렇게 비효율적인 일을 할까 싶기도 하다. '모던 클래식' 시리즈 중 일부는 점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편입되고 있고(이것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작가 한정인 것 같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판형과 문장 부호 표기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안 좋은 소식이다. 더 사라지기 전에 '모던 클래식' 시리즈를 그러모아야 하는 것일까?


책장 정리에 대한 이야기에서 책에 대한 푸념으로 끝나는 페이퍼가 되었다. (나만 못 지킬까 전전긍긍하는 듯한) 연재에 대한 아이디어가 전혀 없는 시기가 (오래) 있고, 아이디어는 많지만 산만하고 아득한 상태로 정리되지 않아 쓰지 못하는 시기가 있는데, 오랜만에 후자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미 시간이 늦었으니 《일기》에 대한 감상을 조금이라도 끄적이러 가야겠다. 다음엔 조금 더 단정한 글을 연재하길 스스로에게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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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10-30 09: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귀여운 민트 알람시계도 이뻐요!!! 남의 집에 있는 책 보는 건 왜 이렇게 재밌을까요?? 더구나 이렇게 정성스런 페이퍼를 접하면 더 그런 것 같아요. 글은 나중에 쉬는 시간에 읽어 볼게요!!

아무 2021-11-01 19:10   좋아요 0 | URL
저 시계를 산 지 벌써 5년이 되어가네요. 알람 기능은 금방 고장이 나서 지금은 시간 확인용으로만 씁니다^^ 구경 중의 제일은 책장 구경인 것 같기도😉

공쟝쟝 2021-10-31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페이퍼도 참 좋으네요. 역시 페이퍼엔 책탑사진이 첨부파일로 들어가야 제 맛입니다. 그나저나 아무님의 책장은... 누가봐도 너무 문과적 문과적 문과적 책장이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다. 전 그래도 주식책이랑 비트코인 책 있음... 지난 달에는 김상욱의 양자역학 책도 구입.. (뭐래) 아무튼 책 수집이나 읽기에는 집착하지 않으나, 좋아하는 작가의 제목은 다 꿰고, 읽은 책에 대한 정리를 좀 해야 읽은 것 같은 느낌, 적어도 내 책장을 파악하고 있어야 안심이 됨(나만 아는 책장 범주화?!) 이런 것들은 저만 하는 것이 아니었더라는사실을 발견해 살짝 안도하며.
제 생각에는 말이죠. 글은 역시 잘 쓰려고 하면 절대 쓸 수 없습니다. 잘쓰려는 마음의 글을 살짝 미뤄두고, ‘이런 글‘을 쓰시기를 권해요. ㅋㅋㅋ ‘주간‘ 아무르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아무 2021-11-01 19:13   좋아요 1 | URL
이 댓글을 보고 분명 과학책도 좀 모았는데?라고 생각하고 찾아보니 과학 관련 책들은 전부 책탑의 맨 아래에 있네요? ㅋㅋㅋ 주식과 비트코인은 제가 정말 1도 몰라서 이제는 종종 걱정을 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살아가는 데 무리는... 없겠죠? 읽은 책에 대한 정리도 꼬박꼬박 해야 하는데 그것도 참 큰일입니다. 메모를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구요(내용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훨씬 많음). 응원과 격려에 감사드리고, 저도 ‘주간‘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ㅎㅎ
 
















5.

요즘 읽고 있는 황정은의 『일기』 중 「민요상 책꽂이」에는 책갈피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등장한다. "도톰한 집게 모양의 책갈피나 복잡한 형태로 종이를 깨무는 클립 책갈피는 도대체 뭐하자는 사물인지 모르겠다. 그걸 종이에 끼우고, 끼우는 단계에서 이미 종이가 구겨지거나 하는데, 책을 덮으면 책 무게에 눌려 책갈피에 물린 종이가 꼬집힌 것처럼 구겨지고 앞뒤 종이에도 집게나 클립 모양으로 자국이 남는다. 오래두지 말고 얼른 독서를 끝내면 될 일이지만 독서는 중단될 때가 많다."(82쪽) 이 부분을 읽다가 문득, 내가 쓰고 있던 책갈피를 보았다. 이번 신간을 구매하면서 굿즈로 함께 판매하던(증정이 아니다. 마일리지를 내야 하니까) 소위 팝업 책갈피를.




나도 금속 책갈피나 클립형 책갈피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이번 기회에 한번 이용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함께 구입(그렇다. 마일리지를 냈으니까)한 것이었다. 『일기』의 색깔과 맞기도 하고. 몇 차례 사용한 뒤 내가 얻은 결론은 '역시 못 쓰겠다.'는 것이었다. 자석으로 책장을 집는 구조인데 이미 고무자석부터 두껍고, 집게형이니까 두께도 두 겹이 되니 책을 덮었을 때 매우 거슬린다. 가방에 책을 항상 넣고 다니는 입장에서 책 바깥을 비집고 나오는 책갈피는 구겨짐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그러니 더욱 정이 안 갈 수밖에. 작가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힌 유형의 책갈피를 굿즈로 함께 내놓은 건 왜일까?


작가와 달리 나는 책갈피를 많이 모으는 사람이다. 편리함과 필요도 이유이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예뻐서. 신간이 나올 때마다 주는 책갈피를 덥석덥석 모으는 시기는 넘겼지만 종종 동네서점을 들렀을 때 예뻐서 눈길이 가는 책갈피엔 손을 내밀게 된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모은 책갈피는 얼마나 될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책장 한 켠에 쌓아둔 책갈피를 하나하나 진열하기 시작했다.




몇 개는 어떤 책 속에 얌전히 잠들어 있겠지만, 읽다 말고 오랫동안 방치한 책의 책갈피는 종종 빼고 있으므로 이것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과거의 나는 책갈피에 대한 뚜렷한 호불호가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나, 지금의 나는 플라스틱이나 코팅된 책갈피보다는 종이 책갈피가 좋고, 종이 책갈피도 지나치게 빳빳하면 싫다. 너무 두껍지 않으면서 빳빳하지 않고 책 바깥으로 삐져나오지 않고 그 안에 있는 듯 없는 듯 표시만 내주는 것... 그리고 예뻐야 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양장본에 흔히 달려있는 가름끈인가 싶지만, 전집류가 아니라면 나는 양장본과 문고본 중 문고본을 고르는 사람이다. 어쩌라는 것인지.















이렇게 무수히 많은(개수를 세진 않았다) 책갈피를 나는 잘 쓰고 있는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갈피를 잡는 데 쓰진 않고 수집가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고민은 '독서가가 아닌 장서가가 되고 있는가'라는 고민과 겹치는 듯하다.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학문이 본래 '여가'라는 뜻을 가졌듯이, 여가가 없는 이들은 텍스트를 읽을 틈이 없다."(강유원, 『책과 세계』, 6쪽)고는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핑계처럼 들린다. 총기와 끈기와 열기는 점차 사그러들고 있고, 끝나지 않을 숙제처럼 쌓여있는 책들을 보며 몸서리칠 때가 있다. 가장 애정하는 작가 중 한 명의 신간을 찬찬히 읽으면서, 그 책이 떠올리게 해준 책갈피들이 다시 내가 갈피를 잡고 매진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인지를 생각한다. 항상 바쁜 와중에 짬을 낼 수 있는 시간 활용법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것보다 필요한 건 알고 싶다는 마음가짐, 그리고 '책읽기의 괴로움'에서도 재미(흥미가 아니다)를 찾을 줄 아는 마음일 것이다. 어쩌다보니 책읽기를 장려해야 하는 직업을 갖게 된 터라 "무턱대고 읽으라고 하니까 읽지 말고 책읽기가 재밌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저 말은 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일기』로 돌아와서, 절반이 조금 넘게 읽고 느낀 바는 '황정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구나'라는 것이다. 에세이에 흐르는 정조(調)와 소설의 그것이 마치 하나인 것 같다는 인상은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윤리적) 태도가 곧 소설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것이 소설세계가 좁아진다는 비판을 낳을 수도 있겠으나(나에게도 약간의 염려가 있다), 나는 소설부터 에세이까지 일관된 그 태도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이성복, 「그날」)는 일은 없겠구나, 당신은 더 민감하게 아프고 세계의 병듦을 말하겠구나, 라는 안도감을.





여담) 책갈피에 대한 이야기에는 포스트잇 플래그에 대한 언급도 있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2019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사인을 받을 때, 내 책에 빽빽하게 붙어있는 플래그를 보자 그는 본인도 책을 읽을 때 자주 쓰는데 썩지 않더라...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썩지 않는 플래그를 열심히 사고 붙이고 있다. 때때로 기억하기 위해 붙이는 것인가, 아니면 언제고 돌아보겠지라는 마음에 붙이고 보는 것인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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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10-25 17: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두 플래그 이야기에 뜨끔 했어요. 책갈피를 모으시는 이웃분들이 있군요. 이렇게 또 새로운 책에 딸려오는 부수적인 취미들을 하나 알아갑니다. 아무님의 황정은 리뷰는 찾아서 읽게됩니다. 심상치 않은 가을바람…! 건강하시기를. 총총~

아무 2021-10-25 22:55   좋아요 3 | URL
가끔은 수집벽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황정은 작가의 책은 가급적 리뷰를 쓰려고 노력하는데, 돌이켜보니 『연년세세』를 읽고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네요... 찾아서 읽어주심에 감사드리고, 앞으로 좀더 부지런해져서 분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을 날씨가 정말이지 심상치 않네요. 오락가락... 공쟝쟝님도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그럼 저도 이만 총총...

그레이스 2021-11-05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아무 2021-11-07 21:02   좋아요 1 | URL
오늘에야 당선된 걸 알았네요😅 감사합니다^^

초딩 2021-11-07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아무 2021-11-07 21:03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주말 잘 마무리하시길 바라요^^
 

4.

어제 부모님 집으로 내려왔다. 이러저러한 우려가 없지는 않았으나 같은 수도권...이라서 엄명을 받고 내려오게 되었는데(지하철로 2시간 30분 거리), 이곳의 분위기도 매우 한산하고 썰렁하다. 내려올 때마다 항상 가는 카페를 왔는데, 언제나 절반은 채워져 있던 넓은 공간에 한 팀만 있었다.















집으로 내려올 때는 항상 집에 둘 책을 가방 한가득 챙겨서 오게 된다.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읽었거나 당분간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은 책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택배로 보낸 책들이 상자에 그대로 담겨 나를 반기므로 가져온 책과 상자 속 책을 꺼내 서가 정리를 하는 게 첫번째 일과였지만, 이번에는 일거리 때문에 노트북을 챙기게 되어 내려와서 읽을 책만 챙기게 되었다. 첫번째 일과가 간소화된 셈이다. 내려와서 읽을 책 역시 무게를 고려하게 되므로 서울에서 읽고 있던 벽돌책은 생략하고 적당한 분량의 책을 고르게 된다. 그래서 읽은 책이 아니라 읽고 있는 책이 자꾸 늘어나는 것인가.















크지 않은 서가이지만 읽은 책은 많지 않아서(북플은 내가 가진 책의 1/4만 읽었다고 알려준다) 둘러보면 읽고 싶은 욕구를 부르는 책들이 자꾸 생겨 올라갈 때를 고민하게 된다. 이번에 내 눈길을 끈 것은 『예술가들의 파리』 시리즈와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였다. 두께 때문에 가져다 놓고 다시 못 올라가는 책들. 이런 책이 한둘이겠냐마는, 이런 생각을 매번 할수록 서가 이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이 든다. 하지만 서가가 가까워지면 내가 더 읽을 수 있을까, 더 열심히 모으게 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읽기보다 모으는 데 치중(또는 집착)하고 있는 몇 개의 시리즈를 보고 있자니 더 그렇다(조르주 페렉 선집이나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같은 책들).

언젠가는 한 곳에 모이게 될 때도 있겠지 생각하며 이제 읽어야겠다. 카페에 있을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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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가 이사를 꿈꾸며2—5년차 원룸 생활자의 책장
    from 아무님의 서재 2021-10-29 23:04 
    6.그저께는 오랜만에 책탑을 정리했다. 바닥에 쌓기 시작한 책탑은 한 번 쌓기 시작하면 정리하기가 쉽지 않아 새로 들어온 책은 재배열되지 않고 계속 위로만 쌓이게 된다. 그러다보니 균형이 맞지 않아 나의 뒤척거림 한 번에 책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일도 잦았다. 간만에 큰 맘을 먹고 책탑을 재배치하면서, 마음 먹은 김에 바닥에 쌓은 책을 조금이나마 줄여보자는 생각으로 책장도 정리를 시작했다. 이래저래 무사히 정리를 마쳤지만 책탑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다.
 
 
막시무스 2020-09-30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가 참 단정하네요! 책 읽는 즐거움이 저절로 생기겠어요!
행복한 추석명절 되십시요!ㅎ

아무 2020-09-30 18:01   좋아요 1 | URL
실상 1년에 열 번도 보지 못하는 서재입니다..^^;; 막시무스님도 추석 잘 보내세요~

scott 2020-09-30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가들의 파리 시리즈 저도 눈독 들이고 있던 책들이네요. 두께에 놀라고 가격에 놀라고 ㅎㅎ 컴퓨터 옆에 가지런하게 꽃혀 있는 책들은 가장 가까이두고 보시는 책들인가봐요추석연휴 가족들하고 따스하게 보내세요

아무 2020-09-30 23:24   좋아요 0 | URL
아 저건 사실... 책장에 자리를 더 만들어보려고 벽돌책을 최대한 다 꺼내서 책상에 진열한 겁니다. 양쪽에 북엔드를 세우고...^^;; 가장 가까운 책들이 되어야 할 텐데.. ㅎㅎ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syo 2020-09-30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책장은 엉망진창인데, 아무님 서재는 손대면 손 베겠어요! 깔끔!

아무 2020-10-01 00:26   좋아요 0 | URL
많이 넣기 위해 정리를 열심히 한 경우입니다. 조그마한 공간이라도 만들고자.. 서울의 제 방은 저렇게 깔끔하지 않아요^^;;

공쟝쟝 2021-10-26 09:42   좋아요 0 | URL
그러게...... 진짜 책장 정갈하시네요 🤭나와 다른 종족이다...

아무 2021-10-27 09:29   좋아요 1 | URL
지금 제 방은... 허허..^^;; 조만간 시즌2를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scott 2020-12-31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님 서재방에 2021년 연하장 놓고 가여
2021년 새해 행복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021년 신축년
┏━━━┓
┃※☆※ ┃🐮★
┗━━━┛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아무 2021-01-12 00:04   좋아요 1 | URL
축하 감사합니다. 연말연시를 이런저런 일에 치여보내느라 확인하지도 못했었네요^^; scott님도 새해에 건강 잘 챙기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3.

원래는 주간 문학동네(http://www.weeklymunhak.com/)에서 읽은 문유석 작가의 글에서 『사람, 장소, 환대』가 떠올라 사형 제도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 차이... 같은 걸 정리해보고자 했으나(정확히 말하면 체사레 베카리아의 사형 제도에 대한 입장과 이에 대한 문유석 작가의 반박), 읽고 있는 책들에 치여 이미 읽은 책을 뒤적일 시간이 충분치 않아 잠시 미뤄두었다. 그래서 이번 주에 생각한 것은 사형 제도보다는 훨씬 가벼운... 내 밑줄긋기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에 대한 소고(小考)이다.
















학생 시절의 나는 책을 굉장히 깨끗하게 보는 사람이어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다는 건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언제부터 책에 표시를 하기 시작했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군 제대 이후로 추정된다), 확실한 건 그 시작은 밑줄이 아니라 책 한 귀퉁이를 접는 것이었고, 여기에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뒷표지에 실린 김연수 작가의 추천사에 쓰인 한 단어, "도그지어"가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점이다(지금 생각하면 왜 '독스이어'가 아니라 '도그지어'인지 알 수 없지만).


시작은 가벼웠으나 어느새 나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접기에 밑줄긋기를 추가했는데, 이때 내가 애용한 것은 스테들러의 주황색 형광 색연필이었다. 그렇게 접기+밑줄긋기+중요한 부분은 포스트잇 종이 플래그에 메모 후 붙이기로 정착하는 듯 했으나, 너무 많이 접다보니 책 아래 두께가 늘어나 책이 잘 꽂히지 않는다는 문제에 봉착했고, 이후 접기는 더이상 하지 않은 채 포스트잇 스티커 플래그+색연필로 밑줄긋기로 단순화되었다. 현재는 가끔 중고로 되팔고 싶은 책을 넘길 수 없다는 문제로 인해 밑줄긋기는 웬만해선 하지 않으며 긋더라도 연필이나 샤프를 사용한다. 점점 간소화되고 있지만 밑줄을 긋는 양이 간소화되고 있는지는...


오프라인으로 밑줄을 긋는 건 이러한데, 온라인으로 기록을 남기는 건 다른 문제다. 살고 있는 공간이 넓지 않아 책을 모두 가지고 있을 수 없는 입장(비율로 따지면 내 집에 30%, 부모님 집에 70% 정도가 있다)에선 생각나는 책의 구절을 찾아볼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알라딘에 끄적이기 시작하면서 적재적소에 내가 원하는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는 욕구도 한몫을 했으리라. 처음에는 책을 다 읽고 그었던 밑줄을 모두 한글 문서로 타이핑하는 방법을 썼으나, 시간도 많이 걸리고 불편하다는 문제에 부딪혔다. 그러고 나서 내가 눈을 돌린 것은 온라인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밑줄긋기 앱들이었다.


(주의: 여기서부터는 앱들에 대한 편파적인 시각이 반영되었을 수 있으며, 특정 앱을 홍보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음)



처음으로 내가 사용한 것은 '리드그라피(Readgraphy)'라는 앱이었다. 지금은 거의 들어가보지 않지만 남겨놓은 메모가 아까워 지우지 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들어가보니 내가 처음 메모를 남긴 것은 3년 전(『한나 아렌트의 말』이 최초의 기록인데 정확한 날짜가 안 나온다)이었다. 당시에 사용할 때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현재 얼리버드로 유료 회원과 똑같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 처음에는 열심히 해보려 했으나 앱이 여러모로 나와 맞지 않았다. 앱으로 밑줄을 긋는 것도 다 읽은 뒤 한 번에 하려니 일일이 책을 쫙 펴서 찍는 것도 일이었거니와(따라서 메모 하나에 모든 밑줄이 다 들어갔다), 당시에는 따로 하이라이트 표시를 할 수도 없었고 내용 검색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페이지순으로 정렬할 수가 없었고(이 역시 내가 못 찾은 건지는 알 수 없다. 3년 전의 내가 더 기계치였으므로), 책들의 서지사항이 잘 검색되지 않았다. 사진에 나온 『움베르토 에코』는 당시에 검색이 되지 않아 내가 직접 입력하고 표지를 찍은 것이며, 『글래머의 힘』은 표지가 검색되지 않아 그냥 둔 것이다. 아무튼 당시에 많은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에 나는 곧 책의 내용을 텍스트로 변환해줄 수 있는 앱을 찾기 시작했다.



중간에 MS에서 제공하는 앱을 이용한 적이 있으나(PDF 문서를 워드로 변환하는 것이었는데, Office Lens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텍스트 변환을 했을 때 외계어가 나오는 경우가 너무 많아 금방 지웠고, 그 후 가장 오랫동안 애용하던 것은 북플 앱의 사진으로 밑줄긋기 기능이었다. 생각보다 꽤 정확하게 사진 속 내용을 텍스트로 옮겨주고(알파벳 포함), 컴퓨터로 알라딘서재에 쓸 때와 달리 밑줄의 분량에 제한이 없으며(나는 한 페이지 반 정도의 분량까지 하나의 밑줄로 기록한 적도 있다), 내가 글을 쓰는 알라딘서재에 기록이 남으니 쉽게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텍스트로 옮기는 과정이 완벽한 건 아니어서 내가 매번 교정을 해야 했는데, 특히 띄어쓰기에 가장 많은 오류가 났고 'ㅙ'나 'ㅖ'와 같은 이중 모음이나 잘 쓰지 않는 단어는 자주 오타가 났다(사진의 예시는 굉장히 잘 된 경우이다). 이걸 일일이 교정하면서 올리면 타이핑하는 것과 비슷한 속도가 났다. 대략 200~300페이지의 책을 읽은 뒤 밑줄을 모두 옮기는 데 1~2시간 가량이 걸렸으니까. 또한 알라딘서재에 게시글의 형태로 올라가기 때문에 읽을 때마다 밑줄긋기를 하면 한 권의 책에 대한 기록이 중구난방으로 남으므로, 다 읽은 뒤에 한 번에 긋다보면 또 시간이 오래 걸렸다(내가 독보적 서비스로 밑줄을 긋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때나 밑줄을 그어도 책별로 모아주면서, 페이지 순으로 정리해주고 핵심어별로 정리할 수 있는 앱이었다.



'하이라이트'라는 앱을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어떤 커뮤니티에서 국어교사가 학생들에게 독서 수업을 온라인으로 진행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후기를 보고, 새로운 밑줄긋기 앱인가 싶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사용한 바를 토대로 이야기해보면, 밑줄긋기의 인스타그램 같다는 느낌을 준다. 책의 서지사항은 바코드만 잘 인식시키면 제대로 찾아내며, 내가 읽을 때마다 매번 찍은 내용을 책별로 분류해주고(세번째 사진의 체크박스 옆에는 내가 기록한 메모의 숫자가 쓰여 있다), 입력할 때 해시태그를 넣으면 해시태그별로도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읽으면서 수시로 사진을 찍어 올려도 분류가 잘 된다는 점에서 현재까지는 만족하며 사용하는 중이다. 다만 여기도 안정적이지 않아서 새로 태그를 넣으려고 수정을 하면 책이 최근에 글을 올린 책으로 바뀌어 수정이 되지 않는다든지, 올린 게시물의 사진을 저장할 수 없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해시태그 외에 책 속 내용으로 검색이 되는 건 아니어서 해시태그를 잘 입력해놓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구절로 검색을 할 수 있으려면 현재로서는 에버노트 프리미엄 말고는 방법이 없는 듯하다. 난 프리미엄 요금제를 쓰고 있지만, 아직 사용이 익숙하지 않아 블로그나 기사 등을 스크랩하는 용도로만 쓰고 있다..















정리하고 보니 밑줄을 긋지 않던 내가 이렇게 수없이 밑줄을 긋고 그것을 텍스트화하려는 사람으로 변화한 것은 나이를 먹으면서 생기는 기억력의 감퇴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어릴 때 읽었던 책은 여전히 그때의 느낌이나 줄거리도 생생한데, 날이 갈수록 최근에 읽은 책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놀라면서 말이다. 나의 감정, 사고, 지식의 폭을 넓혀준 책들을 계속 기억하고 싶다는 욕망이 저장에 대한 욕망을 촉진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것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다는 욕망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망각이 인간의 삶에 필수적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내가 망각하고 싶은 것만 버리고 책에 대한 기억은 끌어안은 채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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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떻게 읽으시나요?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1-10-27 19:49 
    좋은 책을 읽고 나면 알라딘 서재 리뷰를 찾아서 읽는 편이다. 그러다가 가끔 책 만큼 좋은 리뷰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런 방식으로 나만 알고 있는 서재들이 늘어간다. (가끔 찾아가 좋아요 폭탄을 투척하고 가는 제 관심이 부담스럽다면 여러분 알려주세요. 눈팅만 하고 갈께요.)<디디의 우산>을 읽고 난 후 찾아낸 알만한 사람들은 다아는(?) 황정은리뷰 맛집 아무님이 월간 아무르를 연재하고 계셨다. (사실 주간 아무르였는 데 올라오는 속도를 보니
 
 
공쟝쟝 2021-10-26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페이퍼 좋아요.🥲 남의 책장, 남의 책탑, 남의 독서 루틴 보는 거 왤케 즐겁죠?
플래그(빌린책,벽돌책) + 연필 + 색연필(형광펜)/ 에서 점점 팔거까지 생각하면서 연필로 희미해지는 것도 그렇고 ㅋㅋㅋ
읽고 날아가버리는 것이 아쉬워서, 온라인 기록을 모색하다 결국 북플 스캔(!)과 에버노트(와 비슷한 베어 노트)에 정착하게 된 것도 그렇고. 너무 공감되요.
정말 가볍게 시작한 독서가 여러가지 의식(?)을 갖춘 어떤 무엇이 되어버린, 그러나 그것들을 고안해내면서 스스로 뿌듯하고 또 이게 뭐시다냐 싶어질 때.

아무 2021-10-27 09:32   좋아요 1 | URL
참고로 하이라이트 앱은 더이상 업데이트가 진행이 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아무리 스캔을 올려도 분류가 되지 않아 지금은 ‘리더스‘라는 앱으로 갈아탄 상태입니다. 하이라이트에 올린 것도 꽤 많아서 앱을 지우진 못하고..😥
다 가지고 있지 못할 거라는 걸 알기에 점차 밑줄의 방식이 희미해지는 것 같아요. 책을 읽는 분들마다 나름의 의식을 갖고 계실 텐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고 계신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ㅎㅎ

공쟝쟝 2021-10-27 10:06   좋아요 1 | URL
그러네요, 한가한 투데이를 맞이하여 저도 한 번 써볼까요? 엮인글 달아놓을 테니 와서 읽어주세요. 그리고 저는 위의 방식으로 주간(월간?) 아무르 홍보할테다!! (나만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