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2021년의 독서를 정리하자면 권태기로 시작해서 회복기에 접어들며 마무리한 해였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북플에서 제공하는 독서 통계를 보아도 상반기의 그래프는 바닥을 기다가 7월부터 회복하는 모양새를 보인다.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2021년 당신의 기록'에서도 작년보다 훨씬 책을 덜 산 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것도 권태기의 영향일까? 독서 목표량은 2021년 새해를 맞으며 세웠던 목표에 미치지 못했지만(나의 목표는 60권 이상이었다..) 작년 11월부터 시작된 독서 권태기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나 자신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마 남은 기간 동안 지금 읽고 있는 책 중에 완독할 수 있는 건 없을 듯하니, 지금까지 읽은 책들 중에서 올해의 결산을 시작해보자..
📚올해의 문학
시와 소설에 국한해서 말하자면(이렇게 쓰고 올해 시집을 한 권도 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올해 읽은 작품 중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만한 것은 안타깝게도 없었다(그래서인지 올해 내가 읽은 소설 중에는 별 다섯 개가 없다). 다른 분야에 비해 읽은 책이 적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전체적으로 읽은 책 수가 줄었으니). 그럼에도 한 권을 꼽자면 올해 내가 읽은 문학 중 가장 훌륭하다고 느꼈던 책은 윌리엄 트레버의 《펠리시아의 여정》이 되겠다. 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물론이요, 사건이 전개될수록 긴장감이 더해지는 솜씨는 거장의 그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장편이었다. 단편으로 유명한 작가라고 알고 있었기에 장편도 이 정도라면 단편은 어떨까라는 기대를 품게 한 작품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트레버는 이 작품을 "선함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힌 바가 있는데,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정녕 인간의 순수한 선의가 세계에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다 결말에 다다르면, 마음의 구원이라는 것은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에 이르러야 도달하는 것인가, 라는 쓸쓸함이 찾아오는 것이다.
올해 가장 좋았던 작품과는 별개로, 읽기의 재미만으로 보았을 때 나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주었던 소설은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과 박서련의 《체공녀 강주룡》이었다. 《반쪼가리 자작》은 분량도 짧은데다 빠르게 지나가는 에피소드에서 칼비노의 위트를 발견할 수 있어 좋았고, 《체공녀 강주룡》은 올해 읽은 소설 중 가장 시원시원한 전개를 보여주어서 좋았다. 물론 강주룡이라는 실존인물의 서사가 주는 힘이겠지만. 박서련의 건투를 바라는 바이며, 칼비노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기사》만 읽으면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을 다 읽는 셈인데, 다 읽은 후에는 사놓고 오랫동안 미뤄놓았던 《모든 우주만화》를 내년에 완독하기를 바란다..
📚올해의 에세이
에세이를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에세이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에세이가 범람하는 시대여서 이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는 책들도 몇 권 된다. 알라딘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어린이라는 세계》도 감명깊게 읽은 책이지만, 그럼에도 오랜 독자로서 황정은의 《일기日記》를 올해의 에세이로 고른다. 담담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소박한 일상도, 거기에서 여전히 날카롭게 포착하는 세계에 대한 감각도, 가장 내밀한 형식과 내용에서 오는 감동도 마냥 다 좋았다. 인간이라는 종(種)에 대한 환멸과 비관을 날로 갱신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160쪽)는 문장은 나에게 오래오래 되새겨질 문장이다.
📚올해의 청소년
어쩌다보니 청소년 문학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읽고 있는데, 대부분은 재미있게 읽더라도 소위 '청소년 문학스러움'이라는 클리셰에 마주해 마냥 좋은 평가를 내리지는 않는 편이다. 그러나 '청소년 문학'이라는 범주로 가둬버릴 수 없을 만큼의 질문과 깊이를 주는 작품들이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종종 내 앞에 나타난다. 2019년의 《페인트》가 그랬고, 올해 읽은 《유원》이 그랬다. 언니가 목숨을 던져 살아남은 아이, 그리고 아이에게서 언니의 모습만을 보는 어른들, 그리고 도무지 의인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이의 은인. 이들을 바라보는 주인공 '유원'의 심리를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는 만만치 않다. 작품의 얼개를 이루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 설정과 심리는 프리모 레비가 말했던 '생존자의 죄책감'에 대해서도 생각할 여지를 준다. 결말은 '청소년 문학스러움'으로 끝나지만, 과정을 읽는 것만으로도 일독의 가치는 충분했다. 작가가 앞으로 인간의 심리를 더욱 파고드는 작품들을 많이 내주었으면 좋겠다.
📚올해의 교양
'이걸 교양이라고 분류해도 되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넓게 보아 소위 '입문'의 역할을 해주는 책들까지 묶어서 선정을 했다. 관심 분야의 원전보다 입문서가 더 많은 책장이지만 원전도 입문서도 읽은 것은 많지 않다는 것이 함정. 그리하여 올해의 교양은 그동안 내가 모으던 철학이나 사회학이나 사상가의 입문서와는 전혀 다른 분야의 책, 《나의 비거니즘 만화》가 차지했다. 비거니즘에 대한 책은 굉장히 많이 나왔고 여전히 나오고 있지만, 이런 쪽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비거니즘이 무엇인지, 우리의 식탁을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들(여기에는 지구도 포함된다)이 고통 받아야 하는지를 차분하게 전달해주는 책. 작가 자신의 다짐과 실천의 과정, 그 안에서 느꼈던 여러 감정들을 함께 담았다는 점이 이 책이 가진 매력 중 하나였다. '무해의 시대'로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첫 발돋움으로 추천할 만한 책이 되겠다.
📚올해의 과학
과학 분야의 책을 많이 읽자는 것이 올해의 다짐 중 하나였으나 이미 처참히 실패해서, 환경 분야의 책까지를 후보에 올리고 고민을 했다. 가장 쉽게 읽힌 책을 찾자면 심채경의 책이겠으나, 지난한 학교 교육을 거치며 머릿속에 박혀있던 고정관념을 흔들어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고른다. '적자생존'이라는 오랜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친화력과 자기가축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들을 다루는 전반부를 읽으며 신선한 주장과 신기한 실험들에 매료되었었다. 후반부에 주제가 점차 사람으로 확대되면서 이것이 과학책인가 사회학 책인가를 헷갈릴 만큼 익숙한 사례가 많아져 새로움은 덜해졌지만, 앞부분을 읽으며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생물학적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추천할 만한 책. 게다가 많이 어렵게 쓰지도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감사의 글'을 읽으면서 트럼프의 당선이 미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를 실감한 책이기도 하다. 저자들이 자기가축화 가설의 창시자나 지지자로 언급하고 있는 학자들의 책들도 많이(또는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
📚올해의 사회
올해 많이 읽은 책 중에는 사회 문제라는 분야로 묶일 만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종종 한국 사회는 냉철한 이론과 분석보다 경험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경향이 강한 사회라는 생각을 하지만('내가 해봐서 안다', '~해보지도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이해하겠냐' 같은 부류의 말을 정치 뉴스에서 얼마나 자주 접하는지), 그럼에도 엄혹한 현실을 직접 마주한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울림이 있다. 언어의 한계를 딛고 목소리들을 담은 노작(勞作)이 정말 많이 있었지만 내가 고를 수밖에 없었던 책은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이다. 작은 화면 속의 현실이 얼마나 악랄하고 치밀했는지를 충분히 담지 못해(다시 말하면 탐사보도적 글쓰기가 충분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무지했던 시대의 눈을 뜨게 해줬다는 점에서 우리는 저자들에게 빚을 졌다. 책의 목소리가 오래오래 울리기를, 그리고 홍수와 같은 사건들에 묻히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여담으로 이런 분야의 책 중에서 내가 기대했던 책 중 하나는 《중간착취의 지옥도》였다. 플랫폼 노동이 만연해진 시대의 민낯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책. 하지만 이래저래 순서가 밀려 결국 펼치지도 못한 채 내년을 기약하게 되었다...
📚올해의 표지 : 없음
읽은 책뿐만 아니라 올해 산 책까지 포함해서 고민을 했지만 올해의 표지로 꼽을 만한 책은 없었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도스토옙스키 컬렉션》이 있겠지만, 올해의 표지로 고를 만큼의 새로움과 강렬한 인상을 남기진 않았다. 내년에 더 좋은 표지를 만나길 기대하며 마무리하도록 하자. 참고로 작년 나의 원픽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호크니 에디션이다...
📚올해의 발견
올해 가장 큰 수확이 되었던 발견은 바로 《서울리뷰오브북스》이다. 시작부터 정기구독했던 《악스트》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고 아무것도 구독하지 않고 있을 때 지식과 독서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켜 주었던 잡지. 읽을 때마다 모든 꼭지에 만족하지는 않지만(그런 잡지가 있을까?) 여러 학자들의 글을 보며 지적인 욕구(혹은 허영심?)를 자극받고 도전하고픈 책들을 늘려주는 잡지였다(그만큼 지갑이 가벼워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판적인 서평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로 보이는데, 주례사 비평을 지양하겠다는 0호의 호기가 계속될지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봐야겠다. 매번 밀리는 느낌으로 읽고 있다는 것이 함정. 3호는 한 꼭지밖에 읽지 못했고, 4호는 아직 주문하지 않았다..
📚올해의 책📚
50권이 채 안되는 리스트 중에서 올해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올해의 책은, 바로 《사이보그가 되다》였다. 장애학이라는 분야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나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생각할 거리를 정말 많이 남겨주었던 책. 김초엽과 김원영의 글쓰기 스타일을 비교하며 읽는 것도 이 책의 재미 중 하나였다. 사이보그라는 은유, 진보하는 과학기술에 달라붙는 온정적 시선, 테크노페티시즘과 트랜스휴머니즘 등 이 책에서 장애와 관련하여 다루는 주제는 넓고도 깊다. 두 필자 모두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고, '사이보그'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글을 연재했기에 정신적 장애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나, 후속작으로 미진했던 부분을 다룬 책을 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할 만큼 좋았던 책. 독서 모임을 준비하면서 읽었던 책이라 매우 투박하게 정리를 하며 읽었는데, 조만간 다시 천천히 읽으면서 정돈된 리뷰를 한 번 써보고 싶다.
정리하다 보니 9개나 되는 선택지를 만들어 버렸다. 연초에 세운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 못하고 해를 마무리하는 것이 다반사이지만, 연말이니만큼 반성은 조금만, 자축은 조금 더 얹는 마음으로 갈무리하는 해가 되었으면 한다. 내년에는 60권이라도 넘기자는 다짐을 (또) 하며, 내년의 목표들도 조만간 한번 풀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리뷰오브북스 3호》의 첫머리에 실린 김영민 교수의 기획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자. 내년에는 더 열심히 읽고 쓰며 책의 세계를 여행하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
모든 여행은 세 번 떠난다. 먼저 상상을 통해 그곳으로 떠난다. 그다음, 몸을 움직여 그곳으로 떠난다. 끝으로, 기억을 통해 다시 한번 그곳으로 떠난다. (…) 독서도 여행이다. 독서라는 여행도 세 번 떠난다. 우리는 책을 펼치기 전에 상상을 통해 먼저 책과 만난다. 그다음, 마침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한다. 읽고 난 뒤, 기억을 통해 다시 한번 책을 여행한다. (18쪽)
책을 다 읽은 뒤, 서평 쓰기를 통해 다시 한번 그 책을 여행한다. 서평을 쓰는 사람만큼 철저하게 책을 다시 읽는 사람이 있을까. 서평은 단순한 줄거리 요약이 아니기에, 저자가 제시한 경로를 수동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적극적으로 내용을 재구성한다. 이 능동적인 과정이 없다면, 독서 체험은 쉽게 휘발된다. 서평을 쓰지 않은 독서는 여행기를 쓰지 않은 여행과 같다. 쓰기를 통해 여행은 비로소 자기의 여행이 된다.
여행이란 떠나는 일만큼이나 돌아오는 일이다. 돌아오지 않으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잠적이거나 실종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일은 쉽지 않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는 결국 떠나는 일에 비해 돌아오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이야기다. 각종 폭풍우와 요정들이 오뒷세우스의 귀환을 막는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고향은 더 이상 그가 떠나기 전의 모습이 아니다. 서평 쓰기는 책의 세계로 떠난 자신이 고향에 돌아오려는 집요한 노력이다. 서평 쓰기를 통해 책 여행자는 비로소 여행으로부터 돌아온다. 영혼을 뒤흔든 책을 만나고 마침내 돌아올 수 있을 때, 독자는 더 이상 책 읽기 전의 자신이 아니다. (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