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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주장하는 것은, 인류가 다른 영장류들과 달리 문명을 건설하고 지구 위에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가 '협력''친화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아는 것처럼 자연선택은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정하게 행동하는 개체들에게 우호적으로 작용하여 우리가 유연하게 협력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122)시키는 쪽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의 요지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인류의 추악한 면, 혐오에서 제노사이드까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폭력의 난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자기가축화를 통해 친화력이 강화되면서, 우리 집단 구성원을 위협하는 외부자에 대한 공격성도 강화시켰다고. 그리고 진화과정에서 외부자들에 한정하여 마음이론(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 신경망을 둔화시키는 능력, 즉 비인간화하는 능력을 뇌가 획득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학자들의 한 윤리적 딜레마 실험은 외부자에 대한 우리의 행동에 옥시토신이 어떤 극적인 효과를 일으키는지 잘 보여준다. 실험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먼저 피험자들에게 6인조 바닷가 동굴 탐험대의 구성원이라는 지위를 부여했다. 그리고 대원 1명이 동굴 입구의 작은 구멍에 빠진 상황을 제시한다. 그 대원을 빼내지 않으면 밀물 때 동굴이 물에 잠겨 모두가 익사할 것이며, 구멍에 빠져 머리가 수면 위로 올라와 있는 대원만 살아남을 것이다. 동굴 안에 고립된 대원 중 한 사람에게는 다이너마이트가 있다.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여 입구를 넓힌다면 구멍에 빠진 대원은 죽겠지만 나머지 그룹은 살릴 수 있다. 이때 피험자들은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한 시나리오에서는 구멍에 빠진 남자에게 헬무트 같은 네덜란드인 이름을 붙였고, 다른 시나리오에서는 그 남자에게 아메드 같은 아랍인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네덜란드 남자들에게 옥시토신을 비강으로 흡입하게 하고 같은 질문을 했을 때, 아랍 이름일 때보다 네덜란드 이름일 때 구멍에 빠진 사람을 희생시키겠다는 답변이 25퍼센트 적게 나왔다. (185)


  책에는 우리가 타인을 인간화/비인간화할 때 마음이론 신경망을 담당하는 뇌의 부위가 선택적으로 활성화/비활성화된다는 실험들이 다수 제시된다.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을 변형한 밴듀라의 실험에서는 권위에 대한 복종보다 타인의 비인간화가 더욱 잔인한 행동을 하도록 추동한다는 결과를 만날 수 있다. "학생들에 대해 인간적인 평가를 들은 감독관들은 가장 약한 강도의 충격을 주었고, 비인간적인 평가를 들은 감독관들이 가한 충격의 강도는 2배에서 심지어 3배까지 높았다. () 밴듀라가 감독관들에게 그 징벌이 정당한지 묻자 80퍼센트가 비인간화된 학생들의 징벌에 동의한 반면 인간화된 학생들의 징벌에는 20퍼센트만이 동의했다."(216~217) 다양한 실험 결과를 제시하고 난 뒤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외부인을 비인간화하는 능력은 자신과 같은 집단 구성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만 느끼는 친화력의 부산물이다. () 다정함, 협력,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종 고유의 신경 메커니즘이 닫힐 때, 우리는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226) 현대 사회는 우리를 더욱 극단의 상황으로, 다시 말해 타인을 쉽게 비인간화할 수 있는 심리적 조건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 사회에서 계급과 주거의 문제를 꾸준히 이야기하고 있는 김혜진의 장편들에는 충분히 연대할 수 있는 조건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세계의 무자비한 질서에 휩쓸려 서로를 외면하거나 적대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불과 나의 자서전에서 ''는 주해와 서로의 시간과 감정을 함께 나누며 연대의 싹을 틔웠지만 재개발이라는 이름의 계급적 분할 아래 주해가 처한 상황을 외면한다. 중앙역에서 노숙인으로 살아가는 ''는 사랑에 빠진 여자와 함께 살 수 있는 방 한 칸을 얻기 위해 일을 구하게 되는데, 그 일은 철거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철거민들을 폭력도 불사하며 거리로 내모는 일이다. 9번의 일에서 '9'으로 지칭되는 주인공은 몸바쳐 일해온 통신회사에서 점차 밀려나는 처지로, 온갖 압박에도 평생을 의지한 회사라는 끈을 붙잡기 위해 분투한다. 점차 밀려나 결국 회사를 떠나는 동료들, 회사에 의해 죽음에 이른 동료를 보면서도 그는 자신이 믿어왔던 회사라는 실체에 매달린다. 하청업체까지 밀려나 다시 회사로 돌아갈 기회를 잡기 위해 그가 해야 하는 일은 거주민들의 거센 항의를 물리치고 통신탑을 세우는 일이다. 거주민들의 항의와 폭언, 시위를 진압하면서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더 이상 그런 것들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자 더 이상 중요한 것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200)

  봐요. 일이라는 건 이런 겁니다. 얘 다리가 왜 이렇게 된 줄 알아요? 그까짓 옳고 그른 것 구분을 못 해서 다리 병신이 된 줄 압니까? 일이라는 건 결국엔 사람을 이렇게 만듭니다. 좋은 거, 나쁜 거. 그런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해요? (206)

  뉴스 속에는 힘없고 선량한 주민들과 끈질기게 설득 작업을 펼치는 회사가 있었다. 더 나쁜 쪽으로 그를 몰아붙이는 회사도, 사택을 빼곡하게 둘러싸고 그와 동료들을 가둬두다시피 하는 주민도 없었다. 대치와 주재, 진심과 설득 따위의 실체 없는 말들로 묘사되는 이곳의 상황은 아주 먼 곳의 일처럼 여겨졌고 그로선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209)













  주거라는 조건, 빈곤이라는 조건이 그들을 세계 바깥으로 몰아내고 역외 계급underclass이라는 이름으로 배제시켰지만, 그들이 자신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일은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짓밟거나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일이다. 조금이나마 나은 처지에 있더라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것은, 다시 말해 자신들을 몰아넣은 사회 시스템에 대한 저항과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나도 언제든지 그들과 같은 처지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사회는 타인에 대한 비인간화를 부추기고, '9'처럼 우리는 그들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9'의 말과 생각을 읽으면서 문득, 용산 참사에 대한 재판정 참관기를 떠올린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망루에 누가 있다고 들었습니까.

전철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까.

전철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2009109일 법정, 특공대원과 변호인의 질의응답에서

(황정은, 입을 먹는 입, 문학동네2009년 겨울호)















  앞서 등장한 사람들의 모습은 아이히만에게서 아렌트가 발견했던 '무사유'의 모습과도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음.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않음. 타인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음. '사유하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의 조건서문에서도 등장하며,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듯 보인다. "사유하지 않음, 즉 무분별하며 혼란에 빠져 하찮고 공허한 '진리들'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뚜렷한 특징이라 생각된다." 혐오와 배제의 언어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더욱 빠르게 퍼지고,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한 배척의 감정을 부추기고, 그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러한 무사유가 우리의 뇌에선 비인간화로 귀결된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 구조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사그러들고, 개인의 책임만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들은 그런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사회가 은연중에 우리에게 심어놓은 감각(common sense)이 아닐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념의 대립보다 혐오를 자양분 삼아 몸집을 키워가는 부족주의적 사고가 전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부족주의적 사고의 기반에 외부인에 대한 비인간화가 깔려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비인간화를 막고 집단 내 구성원의 개념을 확장하는 방법 중 하나로 '접촉'을 이야기하지만, 이런 책들을 읽고 있으면 공고히 다져진 사회 시스템이 주는 압박과 무게에 암담해지고 막막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인류는 분명 이전보다는 나아졌겠지만, 스스로 세워낸 체제에 잠식당하며 더욱 은밀해지는 폭력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치적 부족주의를 읽었다면 조금 더 논의를 풀어갈 수도 있었겠으나 아직 펼쳐보지 못했으므로 이쯤에서 매듭을 지어야겠다. 다만 읽기를 마칠 때마다 실감하는 것은 사유와 공감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항상 의문을 품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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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당선 축하드려요 *^^*

아무 2022-03-09 01:0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3-08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아무 2022-03-09 01:06   좋아요 1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2.















 

지금 읽고 있는 책들 중 하나인 정지돈의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이하 당신)'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서울''걷기''파리'에 대한 작가의 일상, 단상, 인용이 나열된다. 이미 그의 소설집을 읽어봤었기에 별다른 기대 없이 보았고 에세이도 역시 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예술과 삶의 뒤섞임을 인용이라는 방식으로 형상화하는 그의 작법은 에세이에서도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절반 가량 읽으면서 내가 얻은 수확이 있다면 '플라뇌르(flâneur)'와 파리에 관련된 책들에 대한 호기심 정도? "솔직히 말하면 플라뇌르는 지겨운 개념"(46)이라고 저자는 한탄하고 백인 이성애자 남성에 한정되었던 것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읽으면서 종종 나는 저자가 21세기적인 의미로 플라뇌르를 재개념화하고 싶은 게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책에는 산책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드러나기도 하고 쇼핑몰과 소비문화에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하지만 더 들어갈 것 같으면 어느새 그는 자신의 '글쓰는 친구들'(오한기, 금정연, 이상우, 그리고 가끔 박솔뫼)의 이야기로 빠진다. "걷는 이야기는 언제나 길을 잃고 헤맨다"(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25)는 말처럼.

 














의외로 정지돈의 이번 에세이에서 가장 자주 등장했던 인물은 고다르가 아니라 리베카 솔닛이었다.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걷기라는 행위에 대한 두툼한 책을 이미 냈기도 하고, 책의 한 꼭지를 '플라뇌르, 또는 도시를 걷는 남자'라는 이름으로 할애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신에 종종 등장하는 인용구가 인상 깊게 남아서 주문을 했고, 오늘 첫 꼭지를 읽었다('플라뇌르~'도 궁금하지만 개념어 사전같은 책이 아니면 목차를 구성하는 저자의 의도를 중시하는 편). 솔닛을 읽는 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이후 두 번째인데, 역시 나의 에세이 취향은 당신보다는 이쪽인 듯했다. 솔닛의 에세이가 가진 힘은 아마 글에서도 보이는 행동력과 에너지, 명쾌하면서도 생각의 깊이가 보이는 문체 때문이 아닐까.

 

























당신에서 등장하는 서울 얘기보다 파리 얘기에 눈길이 가는 것은, 읽으면서 내가 잠시 보았던 파리를 떠올리며 비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년째 서울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뚜벅이로 살고 있는 나에게는 각종 도로들(이를테면 차를 타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강변북로)도 낯설고, 의외로 '서울로7017'도 낯설다. 오히려 파리를 이야기할 때 나는 처음 드골 공항에 내려서 TER을 탔을 때 보았던 더러운 좌석, 맡았던 악취,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을까 싶었던 두려움을 떠올리고, 지하철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때 역에서 맡은 악취를 떠올리고, 넓은 광장과 돌길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과 오래되어 보이는 정경을 보며 부풀었던 마음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런 파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정지돈이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고 밝히는 책에는 메리 매콜리프의 예술가들의 파리시리즈와 아녜스 푸아리에의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 좌안 1940-50이 있었다. 전자는 예전부터 모아놓고() 있었고(4권을 마저 사야 한다), 후자는 일기日記에서도 언급된 책이어서 구비해놓고 있다. 새해를 막 넘길 무렵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독서 목표 중에는 '파리와 관련된 책들이 좀 모였으니 몰아서 읽어보자'라는 것도 있었다. 정지돈의 책이 생각만 하고 있던 목표를 다시 떠올려줬다고 해야 하나. 파리에 유독 관심을 두는 건 3년 전의 여행에서 가장 많은 인상을 남겼고, 꼭 다시 가보고 싶은 도시로 남아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나는 정지돈처럼 스탕달 신드롬이 오지는 않았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정지돈의 책을 읽는 의의는 몰랐던 작가나 책들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나름대로 정리한다. 그만큼 사고 싶은 책에 대한 욕구가 늘어나는 것이 흠이지만. 이번에 끌린 솔닛의 책은 이미 내가 좋아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으니 나름 성공적이었다. 다만 남은 절반에서 당신에 대한 나의 평가가 달라질지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독서모임에서 다루려면 완주해야 한다. 차차 읽어 나가는 걸로 하고, 오늘의 발견인 걷기의 인문학으로 마무리하자. 이 책의 아래에는 '걸어가는 인용문'이 있다. 본문의 아래쪽에 한 줄로 쭉 이어지는 걷기에 대한 인용문의 연속. 오늘 나의 눈길을 끌었던 인용문은 개리 스나이더라는 사람의 것이었다. "어릴 때 우리가 한 장소에 대해 알게 되는 방법, 공간 속의 관계들을 시각화하는 방법은 걸으면서 떠올리는 것뿐이다. 장소를 가늠하고 장소의 크기를 가늠하는 방법은 우리 육체와 우리 육체의 역량뿐이다."(블루마운틴스의 쉼 없는 발걸음)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표시를 한 부분은 이것이었다.


 

다시 말해걷기를 주제로 삼는 것은 어떻게 보자면 보편적 행동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음식을 먹는 일숨을 쉬는 일과 마찬가지로 걷는 일에도 성애적 의미에서 영적 의미까지혁명적 의미에서 예술적 의미까지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문화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그때야 비로소 걷기의 역사가 생각과 문화의 역사(다양한 보행다양한 보행자들이 저마다 자기의 시대에 추구한 다양한 기쁨과 자유와 의미의 역사)의 일부가 되기 시작한다그런 생각이 두 발로 지나간 곳에 장소가 만들어졌고그렇게 만들어진 장소가 다시 그런 생각을 만들어냈다걸었기에 골목과 도로와 무역로가 뚫린 것이고걸었기에 현지의 공간 감각과 대륙 횡단의 공간 감각이 생겨난 것이고걸었기에 도시들공원들이 만들어진 것이고걸었기에 지도와 여행안내서와 여행 장비가 생긴 것이다멀리까지 걸어갔으니 걷는 이야기책들과 시들이 쓰인 것이며순례와 등산과 배회와 소풍을 기록한 방대한 분량의 책들이 쓰인 것이다역사의 풍경에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우리를 역사의 현장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바로 그 이야기다. (리베카 솔닛걷기의 인문학,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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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021년의 독서를 정리하자면 권태기로 시작해서 회복기에 접어들며 마무리한 해였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북플에서 제공하는 독서 통계를 보아도 상반기의 그래프는 바닥을 기다가 7월부터 회복하는 모양새를 보인다.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2021년 당신의 기록'에서도 작년보다 훨씬 책을 덜 산 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것도 권태기의 영향일까? 독서 목표량은 2021년 새해를 맞으며 세웠던 목표에 미치지 못했지만(나의 목표는 60권 이상이었다..) 작년 11월부터 시작된 독서 권태기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나 자신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마 남은 기간 동안 지금 읽고 있는 책 중에 완독할 수 있는 건 없을 듯하니, 지금까지 읽은 책들 중에서 올해의 결산을 시작해보자..


📚올해의 문학

  시와 소설에 국한해서 말하자면(이렇게 쓰고 올해 시집을 한 권도 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올해 읽은 작품 중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만한 것은 안타깝게도 없었다(그래서인지 올해 내가 읽은 소설 중에는 별 다섯 개가 없다). 다른 분야에 비해 읽은 책이 적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전체적으로 읽은 책 수가 줄었으니). 그럼에도 한 권을 꼽자면 올해 내가 읽은 문학 중 가장 훌륭하다고 느꼈던 책은 윌리엄 트레버의 펠리시아의 여정이 되겠다. 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물론이요, 사건이 전개될수록 긴장감이 더해지는 솜씨는 거장의 그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장편이었다. 단편으로 유명한 작가라고 알고 있었기에 장편도 이 정도라면 단편은 어떨까라는 기대를 품게 한 작품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트레버는 이 작품을 "선함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힌 바가 있는데,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정녕 인간의 순수한 선의가 세계에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다 결말에 다다르면, 마음의 구원이라는 것은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에 이르러야 도달하는 것인가, 라는 쓸쓸함이 찾아오는 것이다.













  올해 가장 좋았던 작품과는 별개로, 읽기의 재미만으로 보았을 때 나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주었던 소설은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과 박서련의 체공녀 강주룡이었다. 반쪼가리 자작은 분량도 짧은데다 빠르게 지나가는 에피소드에서 칼비노의 위트를 발견할 수 있어 좋았고, 체공녀 강주룡은 올해 읽은 소설 중 가장 시원시원한 전개를 보여주어서 좋았다. 물론 강주룡이라는 실존인물의 서사가 주는 힘이겠지만. 박서련의 건투를 바라는 바이며, 칼비노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기사만 읽으면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을 다 읽는 셈인데, 다 읽은 후에는 사놓고 오랫동안 미뤄놓았던 모든 우주만화를 내년에 완독하기를 바란다..













📚올해의 에세이

  에세이를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에세이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에세이가 범람하는 시대여서 이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는 책들도 몇 권 된다. 알라딘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어린이라는 세계도 감명깊게 읽은 책이지만, 그럼에도 오랜 독자로서 황정은의 일기日記를 올해의 에세이로 고른다. 담담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소박한 일상도, 거기에서 여전히 날카롭게 포착하는 세계에 대한 감각도, 가장 내밀한 형식과 내용에서 오는 감동도 마냥 다 좋았다.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환멸과 비관을 날로 갱신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160)는 문장은 나에게 오래오래 되새겨질 문장이다.














📚올해의 청소년

  어쩌다보니 청소년 문학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읽고 있는데, 대부분은 재미있게 읽더라도 소위 '청소년 문학스러움'이라는 클리셰에 마주해 마냥 좋은 평가를 내리지는 않는 편이다. 그러나 '청소년 문학'이라는 범주로 가둬버릴 수 없을 만큼의 질문과 깊이를 주는 작품들이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종종 내 앞에 나타난다. 2019년의 페인트가 그랬고, 올해 읽은 유원이 그랬다. 언니가 목숨을 던져 살아남은 아이, 그리고 아이에게서 언니의 모습만을 보는 어른들, 그리고 도무지 의인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이의 은인. 이들을 바라보는 주인공 '유원'의 심리를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는 만만치 않다. 작품의 얼개를 이루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 설정과 심리는 프리모 레비가 말했던 '생존자의 죄책감'에 대해서도 생각할 여지를 준다. 결말은 '청소년 문학스러움'으로 끝나지만, 과정을 읽는 것만으로도 일독의 가치는 충분했다. 작가가 앞으로 인간의 심리를 더욱 파고드는 작품들을 많이 내주었으면 좋겠다.













📚올해의 교양

  '이걸 교양이라고 분류해도 되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넓게 보아 소위 '입문'의 역할을 해주는 책들까지 묶어서 선정을 했다. 관심 분야의 원전보다 입문서가 더 많은 책장이지만 원전도 입문서도 읽은 것은 많지 않다는 것이 함정. 그리하여 올해의 교양은 그동안 내가 모으던 철학이나 사회학이나 사상가의 입문서와는 전혀 다른 분야의 책, 나의 비거니즘 만화가 차지했다. 비거니즘에 대한 책은 굉장히 많이 나왔고 여전히 나오고 있지만, 이런 쪽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비거니즘이 무엇인지, 우리의 식탁을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들(여기에는 지구도 포함된다)이 고통 받아야 하는지를 차분하게 전달해주는 책. 작가 자신의 다짐과 실천의 과정, 그 안에서 느꼈던 여러 감정들을 함께 담았다는 점이 이 책이 가진 매력 중 하나였다. '무해의 시대'로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첫 발돋움으로 추천할 만한 책이 되겠다.













📚올해의 과학

  과학 분야의 책을 많이 읽자는 것이 올해의 다짐 중 하나였으나 이미 처참히 실패해서, 환경 분야의 책까지를 후보에 올리고 고민을 했다. 가장 쉽게 읽힌 책을 찾자면 심채경의 책이겠으나, 지난한 학교 교육을 거치며 머릿속에 박혀있던 고정관념을 흔들어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고른다. '적자생존'이라는 오랜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친화력과 자기가축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들을 다루는 전반부를 읽으며 신선한 주장과 신기한 실험들에 매료되었었다. 후반부에 주제가 점차 사람으로 확대되면서 이것이 과학책인가 사회학 책인가를 헷갈릴 만큼 익숙한 사례가 많아져 새로움은 덜해졌지만, 앞부분을 읽으며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생물학적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추천할 만한 책. 게다가 많이 어렵게 쓰지도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감사의 글'을 읽으면서 트럼프의 당선이 미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를 실감한 책이기도 하다. 저자들이 자기가축화 가설의 창시자나 지지자로 언급하고 있는 학자들의 책들도 많이(또는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












📚올해의 사회

  올해 많이 읽은 책 중에는 사회 문제라는 분야로 묶일 만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종종 한국 사회는 냉철한 이론과 분석보다 경험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경향이 강한 사회라는 생각을 하지만('내가 해봐서 안다', '~해보지도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이해하겠냐' 같은 부류의 말을 정치 뉴스에서 얼마나 자주 접하는지), 그럼에도 엄혹한 현실을 직접 마주한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울림이 있다. 언어의 한계를 딛고 목소리들을 담은 노작(勞作)이 정말 많이 있었지만 내가 고를 수밖에 없었던 책은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이다. 작은 화면 속의 현실이 얼마나 악랄하고 치밀했는지를 충분히 담지 못해(다시 말하면 탐사보도적 글쓰기가 충분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무지했던 시대의 눈을 뜨게 해줬다는 점에서 우리는 저자들에게 빚을 졌다. 책의 목소리가 오래오래 울리기를, 그리고 홍수와 같은 사건들에 묻히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여담으로 이런 분야의 책 중에서 내가 기대했던 책 중 하나는 중간착취의 지옥도였다. 플랫폼 노동이 만연해진 시대의 민낯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책. 하지만 이래저래 순서가 밀려 결국 펼치지도 못한 채 내년을 기약하게 되었다...













📚올해의 표지 : 없음

  읽은 책뿐만 아니라 올해 산 책까지 포함해서 고민을 했지만 올해의 표지로 꼽을 만한 책은 없었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도스토옙스키 컬렉션이 있겠지만, 올해의 표지로 고를 만큼의 새로움과 강렬한 인상을 남기진 않았다. 내년에 더 좋은 표지를 만나길 기대하며 마무리하도록 하자. 참고로 작년 나의 원픽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호크니 에디션이다...


📚올해의 발견

  올해 가장 큰 수확이 되었던 발견은 바로 서울리뷰오브북스이다. 시작부터 정기구독했던 악스트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고 아무것도 구독하지 않고 있을 때 지식과 독서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켜 주었던 잡지. 읽을 때마다 모든 꼭지에 만족하지는 않지만(그런 잡지가 있을까?) 여러 학자들의 글을 보며 지적인 욕구(혹은 허영심?)를 자극받고 도전하고픈 책들을 늘려주는 잡지였다(그만큼 지갑이 가벼워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판적인 서평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로 보이는데, 주례사 비평을 지양하겠다는 0호의 호기가 계속될지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봐야겠다. 매번 밀리는 느낌으로 읽고 있다는 것이 함정. 3호는 한 꼭지밖에 읽지 못했고, 4호는 아직 주문하지 않았다..






















📚올해의 책📚

  50권이 채 안되는 리스트 중에서 올해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올해의 책은, 바로 사이보그가 되다였다. 장애학이라는 분야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나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생각할 거리를 정말 많이 남겨주었던 책. 김초엽과 김원영의 글쓰기 스타일을 비교하며 읽는 것도 이 책의 재미 중 하나였다. 사이보그라는 은유, 진보하는 과학기술에 달라붙는 온정적 시선, 테크노페티시즘과 트랜스휴머니즘 등 이 책에서 장애와 관련하여 다루는 주제는 넓고도 깊다. 두 필자 모두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고, '사이보그'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글을 연재했기에 정신적 장애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나, 후속작으로 미진했던 부분을 다룬 책을 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할 만큼 좋았던 책. 독서 모임을 준비하면서 읽었던 책이라 매우 투박하게 정리를 하며 읽었는데, 조만간 다시 천천히 읽으면서 정돈된 리뷰를 한 번 써보고 싶다.













  정리하다 보니 9개나 되는 선택지를 만들어 버렸다. 연초에 세운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 못하고 해를 마무리하는 것이 다반사이지만, 연말이니만큼 반성은 조금만, 자축은 조금 더 얹는 마음으로 갈무리하는 해가 되었으면 한다. 내년에는 60권이라도 넘기자는 다짐을 () 하며, 내년의 목표들도 조만간 한번 풀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리뷰오브북스 3호》의 첫머리에 실린 김영민 교수의 기획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자. 내년에는 더 열심히 읽고 쓰며 책의 세계를 여행하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


모든 여행은 세 번 떠난다. 먼저 상상을 통해 그곳으로 떠난다. 그다음, 몸을 움직여 그곳으로 떠난다. 끝으로, 기억을 통해 다시 한번 그곳으로 떠난다. (…) 독서도 여행이다. 독서라는 여행도 세 번 떠난다. 우리는 책을 펼치기 전에 상상을 통해 먼저 책과 만난다. 그다음, 마침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한다. 읽고 난 뒤, 기억을 통해 다시 한번 책을 여행한다. (18쪽)

책을 다 읽은 뒤, 서평 쓰기를 통해 다시 한번 그 책을 여행한다. 서평을 쓰는 사람만큼 철저하게 책을 다시 읽는 사람이 있을까. 서평은 단순한 줄거리 요약이 아니기에, 저자가 제시한 경로를 수동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적극적으로 내용을 재구성한다. 이 능동적인 과정이 없다면, 독서 체험은 쉽게 휘발된다. 서평을 쓰지 않은 독서는 여행기를 쓰지 않은 여행과 같다. 쓰기를 통해 여행은 비로소 자기의 여행이 된다.

여행이란 떠나는 일만큼이나 돌아오는 일이다. 돌아오지 않으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잠적이거나 실종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일은 쉽지 않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는 결국 떠나는 일에 비해 돌아오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이야기다. 각종 폭풍우와 요정들이 오뒷세우스의 귀환을 막는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고향은 더 이상 그가 떠나기 전의 모습이 아니다. 서평 쓰기는 책의 세계로 떠난 자신이 고향에 돌아오려는 집요한 노력이다. 서평 쓰기를 통해 책 여행자는 비로소 여행으로부터 돌아온다. 영혼을 뒤흔든 책을 만나고 마침내 돌아올 수 있을 때, 독자는 더 이상 책 읽기 전의 자신이 아니다.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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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2-30 0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원]에 대해서는 좋은평을 많이 보았는데 잊고 지냈네요. 저도 읽어보려고 담아갑니다.

아무 2021-12-30 20:38   좋아요 1 | URL
연초에 읽었는데도 기억에 오래 남는 소설이었습니다^^ 다락방님 이틀 남은 올해 잘 마무리하시고 평안한 새해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scott 2022-01-07 17: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ㅅ^

아무 2022-01-08 16:21   좋아요 0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좋은 글과 책 추천 부탁드려요~

이하라 2022-01-07 18: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아무 2022-01-08 16:20   좋아요 0 | URL
축하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책읽기가 이어지는 새해 되시길 바랍니다~

mini74 2022-01-07 1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님 책 결산 넘 좋았습니다 축하드려요

아무 2022-01-08 16:21   좋아요 1 | URL
좋으셨다니 저도 좋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1-07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밤,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아무 2022-01-08 16:22   좋아요 0 | URL
축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1-08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님!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2-01-11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재밌어요 ㅋㅋㅋ 정리하다보니 선택지가 9개 ㅋㅋㅋ 하나 더 하고 열개 찍으시지! 아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 올해는 책태기에서 나오셔서 능동적인 서평쓰기의 여행에 합류해주시지요😼

아무 2022-01-13 14:44   좋아요 1 | URL
다음 결산에서는 머리 굴려서 10개 채워보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서평도 자주 써야 감각을 잃지 않을 텐데요😅 책태기에서 벗어난 것에는 공쟝쟝님의 응원도 한몫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리뷰이든 북튜브이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10.


  이 서점을 내가 알게 된 건 언제, 어떤 매체를 통해서였을까? 월간 이었나, 아니면 팟캐스트? 어쨌든 초창기부터 '위트앤시니컬'이라는 이름은 내 눈길을 끌었고, 언젠가 꼭 한 번은 방문해보겠다는 마음도 먹었었다. 다만 시를 다른 분야의 책들만큼 자주 읽는 편이 아니어서 그런지, 차일피일 미뤄오기만 하다가 결심을 한 지 몇 년 만에 드디어 방문하게 되었다.

 

  '위트앤시니컬'은 대학로에 위치한 '동양서림'2층에 있는 시집서점이다. 유희경 시인이 운영하는 것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곳. 동양서림에 들어가 나선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나타나는 공간은 작지만 따뜻한 느낌을 준다. 시집과 시에 관련된 서적만으로 빼곡히 들어찬 공간은 색다르면서 묘한 울림이 느껴졌다. 중간중간 붙어있는 포스트잇에서 시인의 추천도 하나씩 살펴보던 나는 어떤 시집에 눈길이 머물렀다. 대학생 시절 나를 붙들고 있었던 최승자 시인의 시집 리커버판을.

 














  알라딘에 검색해보니 '문학과지성 시인선 디자인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것은 작년 12월인데,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보니 연말이라 일에 치여 열심히 찾지 않던 시기인 듯하다. 표지의 질감, 쨍한 형광색의 표지, 문지 시인선 같지 않은 낯선 글꼴과 편집 스타일을 하나하나 훑으며 어느새 나는 시집을 한 손에 쥔 채 서점을 돌고 있었다. 감정의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를 함께 했던, 오래도록 가슴 속에 박혀 있던 시집에 대한 향수랄까.

 


  3년 전 그의 초기 시집 두 편을 읽으면서 내 나름의 감상을 정리하고([링크]존재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이후의 시집들을 연거푸 찾아서 읽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을 뒤흔들었던 날카롭고 섬뜩한 이미지와 언어, 허무와 죽음만이 상존하는 세계에서 치열하게 발버둥치는 화자의 분투는 즐거운 일기에서 끝난 듯했다. 가장 최근작인 빈 배처럼 텅 비어를 읽다가 덮은 것도 어떻게든 존재론적인 고독과 고통을 언어와 이미지로 붙잡으려는 시는 없고 '()'만 남은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첫 시부터 살아 있다는 것이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찍이 나는)고 말했기에 남은 것은 이제 공()과 허무뿐인 것인가. 세월이 지나 시인의 "괴로움 / 외로움 / 그리움 /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내 청춘의 영원한)은 이제 닳고 닳아 둥글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공(球)과 공(空). 독자였던 나는 이제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삼십 세) 온다는 서른도 넘겼는데, 나이를 먹으며 단단해진 것이라 생각했던 마음도 사실은 시를 읽던 그때보다 닳아버린 것일까?

















  일찍이 절판되었던 그녀의 산문집이 난다 출판사에서 연거푸 다시 나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해 반갑게 구매하여 쟁여놓고 있다(한 권은 이미 왔고 한 권은 예약구매를 했다). 아직 펼쳐보진 않았지만(그러기엔 당장 다음주까지 읽어야할 책이 있다..) 오래 되었으면서 새로운 산문에서 때로는 처절하고 때로는 시니컬했던 언어들을 다시 만나길 기대한다. 오랜만에 다시 본 이 시대의 사랑의 자서(自序)에서 말하듯, 아무리 고통과 절망과 폭력의 언어여도 그것을 "꿈꾸는 건강한 힘"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시인의 언어이니까.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존재한다. 그는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 그리하여 시는 어떤 가난 혹은 빈곤의 상태로부터 출발한다. 없음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없음의 현실을 부정하는 힘 또는 없음에 대한 있음을 꿈꾸는 힘, 그것이 시이다. 그 부정이 아무리 난폭하고 파괴적인 형태를 띤다 할지라도 그것은 동시에 꿈꾸는 건강한 힘이다. 그리하여 가난과, 그 가난이 부정된 상태인 꿈 사이에서 시인은, 상처에 대한 응시의 결과인, 가장 지독한 리얼리즘의 산물인 상상력으로써 시를 만든다.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자서

















  《이 시대의 사랑말고도 두 권의 책을 더 골라 계산을 했다. 하나는 시집, 하나는 시론집. 오랫동안 인터넷 주문을 애용하다 보니 서점의 자체적인 도장을 본 지도 오래 되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으며 시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을 좁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다음에 방문할 때는 주인장인 유희경 시인의 시 세계도 알아두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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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2-18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트앤시니컬 시집서점 기억해야겠어요.
다음주에 혜화동 갈 일이 있는데 시간 내어 봐야겠어요. 책도장도 깜찍하네요.
무한화서 저도 좋아하는 책입니다.
최승자 산문집 하나는 이미 모셨고 하나는 예약해 뒀어요. 리커버판 강렬합니다.
열흘 정도 남은 올해 알차게요 아무 님.

아무 2021-12-19 10:18   좋아요 1 | URL
조용하고 아담한 그 느낌이 좋았습니다^^ 프레이야님도 남은 올해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주의: 《반쪼가리 자작》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9.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은 메다르도 자작이 포격을 받아 몸이 반으로 잘리면서 악한 반쪽과 선한 반쪽 자작으로 나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결말에 이르면 두 자작은 한 여인을 둘러싸고 결투를 벌이다가 서로의 단면을 베면서 쓰러지고, 의사가 두 자작을 결합시켜 완전한 몸을 찾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선과 악의 이분법보다는 완전성을 잃고 분열된 현대의 인간상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히는데, 두 번의 세계대전이 지난 이후에 발표된 이 작품에서 칼비노는 고대의 조화로운 인간성, 또는 완전성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현대란 이성 중심의 세계관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던 핵심적 가치들이 무너지고 단 하나의 보편적인 이론보다 개별적인 실존이 부상하기 시작한 시대가 아니었던가?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의 소외된 가치에 눈을 돌리고 이성이라는 신화에 금이 가기 시작한 시대. "거대 서사에 대한 회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겐 전체성보다 파편화가 더 익숙하다. 그럼에도 다시 하나가 되어 온전해지고 더욱 현명해진 메다르도 자작과 나무 위에서 세계와 거리를 두고 조감하며 저항하는 코지모 남작에게 눈길이 가는 건 완전성, 전체성을 향한 욕망 때문일까? 복잡다단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제1의 원리, 또는 내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완전무결한 가치에 대한 욕망 같은 것 말이다.


아마도 우리는 자작이 온전한 인간으로 돌아옴으로써 놀랄 만큼 행복한 시대가 열리리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상이 아주 복잡해져서 온전한 자작 혼자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 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 114

















  고체처럼 단단하고 굳건했던 질서들이 액체처럼 유동하는 현대 사회에서 보편적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로의 회귀일까? 전쟁 이후의 세계에서 칼비노는 완전성과 조화로운 인간의 회복을 말하고, 거대 서사가 붕괴된 시기를 포스트모던이라 이름 붙인 리오타르는 담론의 파편화를 증대시켜 사회가 다원적인 성격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거칠게 표현하자면). 전체가 아닌 파편,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 우리의 눈길이 가도록 이끄는 것이 문학이 아닌지를 잠시 생각하고, 그럼에도 세계를 조감하는 이성이 여전히 필요한 시기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고, 파편화(혹은 개별화)와 완전성(또는 전체성)이 아니라 둘 사이의 긴장을 항상 유지하는 것이 이상적인 길이 아닌 것인지를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일천한 지식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흐름 없는 생각에 이름을 붙일 언어와 지식이 더 쌓인다면 파편과 전체에 대한 미완의 논의를 머릿속에서 다시 풀어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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