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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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북플의 여러 기능 중에는 '지난 오늘'을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활동량이 적은 편이었으므로 자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눈에 띄는데, 과거의 기록을 볼 때마다 낯뜨거운 얼굴이 되는 일이 잦았다. 과거의 나의 글에서 비치는 미숙함, 투박함, 어리석음이 '왜 그때의 나는 이렇게 썼을까', 또는 '왜 그때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을까'라는 질문을 피워내고 거기에서 부끄러움이 타오르는 것이다(이따금 내가 쓴 댓글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그때 드는 감정은 어린 시절에 썼던 일기(고등학생 이후로 쓰지 않았던 그것)를 다시 들춰보았을 때 느꼈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때로는 지우거나 비공개로 전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두는데, 아무리 부끄러운 일이었어도 그때의 내가 가졌던 감정과 생각들 역시 나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공적인 공간에 게시하는 글이지만, 이런 글들도 내가 건너온 시간을 기록한 일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범람하는 에세이의 시대에 황정은이 첫 에세이로 《일기日記를 내놓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기야말로 에세이의 맹아(萌芽)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가장 사적이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아 누구나 쓸 수 있었던 에세이, 텍스트의 외연을 확장시킬 가능성을 품고 있었을 에세이의 근원이 일기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일기'라는 제목과 형식에서 어떤 결의 같은 것을 느꼈다.  자신이 그동안 느꼈던 생각과 감정을 맹아의 형태로, 다시 말해 원형(原形)으로 담담히 써보겠다는 작가의 결의를.


가장 사적인 형식이기에 '나'라는 세계의 바깥으로 나온 일기는 빛을 보지 못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장 사적이어서 소중할 수 있는 감정과 상념이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감정을 말한다는 것"(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172쪽)이라는 말처럼, 일기는 가장 사적인 글이라는 사소함으로 바깥의 당신과 연결되고자 분투하는 글쓰기가 아닐까. 그리고 황정은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언어를 허투루 보지 않으려는 감각으로 자기 고유의 상념을 바깥과 연결하려는 듯하다. 그리고 오랜 독자로서 나는, 그 상념들이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었으면 바라는 것이다.


〈일기〉로 시작해 〈일기〉로 끝나는 열한 편의 일기에는 파주로 이사를 한 뒤 겪는 작가의 다양한 일상이 담겼다. 황정은의 오랜 독자는 읽으면서 작가의 일상을, 또는 작가의 소설이 발아(發芽)된 원체험을 새로이 알아가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오랫동안 내 눈을 붙잡아두었던 것은 언어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감각이었다. 일상에서 쓰는 단어에 담긴 무심함을 포착해내던 작가의 시선은 일기에서도 여전하다. 특히 "안다"에 대한 서술을 보면서 나는, 오래 전 '이해한다'는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던 일이 떠올라 흠칫 놀랐다.


내 이웃들이 반달터에 두고 있는 관심을 나는 안다고 썼지만 실은 '아니까'라고 쓰는 데 하루를 망설였다. '안다'고 쓰거나 말해야 할 때 나는 매우 축소된다. 내가 그것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내가 그걸 모른다는 것을 안다. 알아버린 것을 모르는 척, 안다고 말해야 할 때 나는 순진한 척을 하며 무언가를 단념하고 있고 그래서 안다고 말하는 것이 내게는 늘 얼마간 책임을 지는 일로 느껴진다. (29쪽)


산보를 하고 식물을 기르는 장면을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이효리가 고사리를 말리는 장면을 보며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에 과정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164쪽) 하는 대목을 읽으면서 '내가 아는 황정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안도하기도, 매년 목포항을 찾는 작가의 모습을 보면서 처연함에 젖어들기도 했다. 많은 이야기들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 일기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였다. 빨간 머리 앤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소년〉과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맹아가 된 경험과 《어린이라는 세계》를 거쳐 아동 학대의 현실로 이어지는 과정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이를 통해 작가는 에세이에 흐르는 정조를 서서히 독자에게 물들인다.  학대 당하는 어린이를 보호할 수 없는 구조(構造)와 어른의 상투성을 지적하는 작가의 말이 호소력을 갖는 것은 이러한 연결 때문일 것이다. 그 정조의 끝에서 "매번 미안하다는 손글씨 릴레이를 반복할 수는 없다. 몇년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미안하다는 말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60~61쪽)라는 문장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자문하게 된다. 나도 혹시 아파하기만 했을 뿐, 어른의 상투성을 버리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쭉 읽으면서 나는 아마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보다 좋은 글은 없겠다고 짐작했었다. 〈흔痕〉을 읽기 전까지는.


〈흔痕〉은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고 쓴 독후감의 형식을 취하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내용은 가장 내밀하고 아픈, 그래서 더욱 처절한 경험이다. 그래서 바깥으로 내놓을 때 가장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경험. 감추고 싶었던 흔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을 고통이었겠지만, 그래도 이를 내놓은 것은 《헝거》가 자신에게 전해준 용기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려는 마음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읽는다. 이 경험이 당신만의 것이 아니며, "그 수치심은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183쪽) 그렇기에 더욱 용기를 내어 발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흔痕〉이 전하는 이야기는 가장 사적이고 깊숙한 경험이면서 동시에 그 힘으로 타인과 연결을 이루는, 그래서 감정의 울림이 독자에게 크게 닿는 일기이다. 거기에서 나는 근원적인 감정의 맹아를 보고, 처연한 문장에 담긴 고통을 느끼고, 그 상처를 생각하며 아파하는 것이다.


새로 지을 집터에 원래 살던 맹꽁이를, 아이들이 냅다 던져버린 가물치를, 6716번 버스에 탔던 트랜스젠더 여성을, "전에 거기 머물던 사람들과 그들이 겪은 일"(131쪽)을, 세월호 유가족을 생각하며 쓴 일기들을 읽으며, 여전히 작가는 이 세계가 '비-존재'로 만들어버리려는 존재들을 호명하고 있구나, 우리가 세계의 문법에 익숙해져 무심코 뱉는 혐오와 차별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소설보다 구체적인 체험의 모습으로 오는 감정은 더욱 곡진하고 처연하다. 앞으로 작가가 쓸 소설들도 이토록 폭력적이고 엄혹한 세계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분투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한 명의 독자로서 작품을 오래오래 만날 수 있도록 작가의 건강을 염려하고 희구한다. 언제나 독자들에게 건네는 인사처럼, 당신도 건강하고 평안하시기를.





그래도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 예컨대 당신의 건강을 바라고 사람의 선의를 믿고 굳이 희망하는 마음을 나는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겠다는 믿음 말고, 희구하며 그쪽으로 움직이려는 믿음이 아직 내게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안엔 내가 그것을 잃지 않기를. - P160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마음들을 나도 사랑합니다.

다들 평안하시기를.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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