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솔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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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초파리 돌보기> ★★☆

  삶에서 단 하나의 이유를 찾을 수는 없다는 것. 근본적인 원인도 확실치 않다는 것. 수많은 이유들이 모여 하나의 삶을 이룬다는 것. 삶의 맨얼굴과 서사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설가의 고뇌가 담겨있지만 이를 풀어내는 이야기에 작가 본인의 목소리와 그림자가 너무 짙다.

 

김멜라, <저녁놀> ★★★

  기발한 화자 설정의 전략이 시니컬한 블랙 유머의 밑바탕을 마련해주고, 두 여성의 불안하면서도 깊은 사랑 이야기와 딜도의 목소리가 이루는 낙차가 인상적이다. 딜도의 자뻑과 두 여성의 따스함을 모두 포착해내는 작가의 솜씨는 돋보이나 커플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낼 때 (분명 내가 화자라고 말하는) 딜도는 화자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그 자리에 작가가 들어서서 말해준다.

 

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

  자기고백적 퀴어 서사가 특유의 진솔함과 라이트한 톤으로 독자들을 붙잡아왔지만, 그 다음으로 새로이 나아가야 할 길은 여기가 아닐까.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소설을 오랜만에 만나 반갑고, '퀴어'라는 말만으로 무지개의 모든 색깔을 지칭할 수 없음을 새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명명하기의 문제와 부유하는 정체성에 대한 생각도.

 

김지연, <공원에서> ★★★

  언제나 홀로 있으면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비명 말고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는 것에 대한 분노, 폭력을 당한 피해자임에도 강요받는 윤리적 지위에 대한 묘사는 작품에 넘실거리는 생생한 감정 덕분에 요동친다. 어느 한쪽의 감정으로 기울지 않고 생에 대한 의지로 끝맺는 부분이나 '개 같다'는 언어의 전복으로 매듭짓는 것도 인상적. 다만 차별의 구조를 내재한 언어의 탐구는 작가의 목소리가 강하게 들어가 인물의 목소리와 동화되지 못한다.

 

김혜진, <미애> ★★★☆

  좋은 사람이 되고픈 인정욕망과 자신의 '없음'을 입증하며 도움을 받고픈 이의 생존욕망의 거래가 보여주는 현대 사회의 계급적 인간관계도. 사소한 일에서 보여지는 양측의 생생한 욕망의 민낯은 풍속도 같아 씁쓸하고, 언뜻 관계회복의 희망을 암시하는 듯한 결말도 자본주의적 욕망에 잡아먹히는 것처럼 보인다. 희망의 모습을 찾는 작가의 말과 달리 암담해 보이는 미래.

 

서수진, <골드러시> ★★★

  그들만의 아메리칸 드림이 허상으로 사라졌듯이 진작에 산화해버린 관계를 어떻게든 붙잡아 보려던 몸부림. 타지에서 뿌리를 내리려던 시도와 황금광의 역사가 겹쳐지고, 그들의 끝나버린 사랑의 역사도 함께 겹쳐진다. 끝나버린 관계에 대한 쓸쓸함으로 여운을 오래 남기지만 황금광이나 노을의 은유는 전형적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서이제, <두개골의 안과 밖> ★★★

  단조롭고 도식적일 수 있는 윤리적 주제를 형식적 실험으로 돌파하고자 했던 소설로 읽힌다. 이미 박민규나 황정은과 같은 작가들에게서 익히 보아왔던 형식적 실험임에도 돋보이는 건 근래에 이러한 실험을 시도하는 작가를 보지 못했기 때문. 동물들의 목소리와 고통을 어떻게든 인간의 언어를 통해 그들이 느끼는 그대로 담고자하는 노력과 작가의 고뇌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지만 그것이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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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5-1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개인적으로 작년 것이 훨씬 좋았어요. 이번 수상작들은 완독에 실패했어요. 세세한 분석 잘 읽고 갑니다.

아무 2022-05-15 12:48   좋아요 0 | URL
전 개인적으로 작년보다는 올해가 더 좋았습니다~ 작년에도 수상한 작가들의 작품을 한번 더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
정지돈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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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에 대한 책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것, 또는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벼운 거닐음, 걸으면서 만난 대상에 대한 성찰, 한가로운 여행의 산책길? 정지돈의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은 이와 같은 독자의 기대를 가볍게 벗어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산책은 각각의 글의 실마리로 기능하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고, 굳이 연관성을 찾자면 그는 거리보다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는 텍스트를 산책하는 일에 더욱 주력한다.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에서 정지돈이 강점을 둔 곳은 '서울과 파리'가 아니라 '생각한 것들'인 것이고, 생각은 그의 소설들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텍스트들의 인용으로 이어진다.

 

  언제나처럼 온갖 텍스트들과 자신의 지인들(실제 혹은 허구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글쓰기이건만, 왜 하필 산책일까? 그것은 "서서 쓴 글"과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된다. 정지돈은 글쓰기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앉아서 쓴 글"은 리얼리즘, "누워서 쓴 글"은 모더니즘이다. "서서 쓴 글""앉아서 쓴 글""누워서 쓴 글"의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그는 말하지만, 이런 글쓰기가 그의 지향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강해졌다.


서서 쓰니까 앉아 있을 때처럼 긴 시간 집중하거나 계획을 세울 수 없으므로 글의 구조는 임의적이고 즉흥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누워 있을 때처럼 편안하지도 않으니 내면 깊숙이 들어갈 수도 없다. 조금 더 설명하면 서서 쓴 글은 걸으면서 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에 쫓기듯이, 의식 깊숙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표층에 머물면서, 전체의 구조나 다음 챕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글쓰기. 기억과 관찰을 토대로 하지만 부정확하고 우연적이며 가볍고 산만한 글쓰기. (173, 강조는 인용자)


  글을 읽다보면 종종 인용된 텍스트나 그의 발화에서 단도와 같은 통찰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더 들어가지 않고 다른 텍스트를 끌어오거나 지인들의 이야기로 빠진다. 김빠지는 웃음을 주는 지인들의 이야기는 유머의 기능에서 끝나지 않고 과속방지턱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까. 끝없는 텍스트의 인용 역시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표층에 머무는 글쓰기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깊이보다 넓이를 지향하는 듯한. 이 두 가지 요소가 "걸으면서 쓴 글"이 흔히 도달하는 '아포리즘'과의 구별점일까.


  "임의적이고 즉흥적"이며 "부정확하고 우연적이며 가볍고 산만한 글쓰기"에 대한 정지돈의 지향은 리베카 솔닛을 통해 소환되는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 산책에서도 만날 수 있다. "수동성이자 불확실성이고 정체성으로부터의 탈출". "훌륭한 시민, 단일한 자아, 사회로부터 주어진 역할에서 벗어나는 것, 비환원적이고 주관적인 상태로 돌입하는 것, 책임을 방기하고 의미를 지연시키는 것."(91) 그래서 그가 발터 벤야민의 '플라뇌르'나 구보에 눈길을 돌리는 것도 납득이 된다. "현란한 소비문화"에 정신이 팔려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는 도시 산책자. 그로 인한 "지각의 산만"(101)은 불확실성과 정체성 잃기를 닮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산책-글쓰기'가 플라뇌르라는 개념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사실 플라뇌르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파리라는 도시에서 난립했던 특정한 종류의 걷기와 걷기를 기록한 텍스트에서 발견한 아이디어를 작가들이 재창조한 것뿐"(83)이라면서. 플라뇌르라고 규정되었던 남성들의 이중성1)을 비판하는 것은 정체성 형성과 개념화를 거부하고 목적으로부터 탈주하는 글쓰기를 지향하는 그에게 당연한 귀결일까. 이런 '산책하듯 글쓰기'는 책의 말미에 가면 "에라스뮈스-분위기"와 만난다.

 

  정지돈은 "에라스뮈스-분위기""특정한 목적이나 주장, 대의에서 자유로워도 된다는 아이디어"이자, "어느 쪽 편을 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태도이며 단지 지식의 즐거움과 삶의 기쁨에 헌신해도 된다는 해방감"(265)이라고 말한다. 에라스뮈스는 애매모호함과 변덕스러움으로 당대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공격받았지만 "빈민의 가련한 처지나 군주의 탐욕 등 세속적 사안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발표할 기회를 좀처럼 놓치지 않았", "폭력을 혐오하는 사람, 평민에 공감하고 소박한 영혼에 공감하는 사람"2)이었다. 그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확실하게 고정된 모든 것"3)에 대한 두려움이자, 자신이 주장하는 "대의가 대의로 전락하는 것을 차단"(263)하기 위함이었다고 크라카우어는 해석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는 정지돈도 공감하는 사유/생활방식, "우리로 하여금 대의 없이 사유하고 생활할 수 있게 해줄 사유방식 및 생활방식이 있을 가능성"(261)을 찾아낸다. 어떤 식으로도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글쓰기. 그것은 자신만의 인장을 글에 새기고 싶은 모든 작가들의 염원이 아닐까. 정지돈은 자기 나름의 방식을 찾아 꾸준히 쓰고 있을 뿐.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드는 이 산문에서 누군가는 파리와 서울의 산책에 대한 서술에 주목할 것이고, 누군가는 목차의 제목부터 유사-지인들의 이야기에 이르는 김새는 유머들에 주목할 것이고, 누군가는 '구보'와 플라뇌르의 이야기에 주목할 것이다. 나로서는 정지돈의 글쓰기론에 대해,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었던 독서였다. '남북조 시대의 예술가'를 읽을 때는 문단에서 소위 '너드한' 이들이 동지를 얻지 못해 외로웠겠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앞으로도 내가 그의 소설-산문을 찾아서 읽을 일은 없겠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꾸준히 이어가며 자신만의 자리를 찾기를 바라는 바이다. 목적지 없이 관조하는 산책처럼.






1) "플라뇌르는 한편으로는 상품과 여성을 시각적으로 소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화의 속도를 거부하고 생산자가 되라는 압력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새로 생겨난 상업 문화에 저항하는 동시에 매혹되는 양가적 인물이다."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김정아 옮김, 2017, 323)

2)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끝에서 두번째 세계, 김정아 옮김, 2012, 25

3) 같은 책, 26



울프와 발저의 산책이 좋은 이유는 그들이 걷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않았고 우울해하지도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의 산책은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것이었지만 멜랑콜리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걸을 때만 진정으로 쾌활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산책과 글쓰기가 가진 유일한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거나 결말을 맺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실한 어느 지점에서, 주제와 의도, 인과와 의무를 망각한 지점에서만 진정한 글쓰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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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2-17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그런 작가였구나 (정지돈이 다시 보이는 글) 왜 이 사람은 지식 자랑 하고 앉아있나, 그래 너 아는 거 많다! 이런 마음이었었는 데.. 제 안의 시큰둥이 좀 변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 2022-02-17 21:56   좋아요 1 | URL
제가 읽은 정지돈의 책도 <내가 싸우듯이>와 이 책이 전부입니다ㅎㅎ 읽으면서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어서 두 권 다 궁금한 책들에 대한 지식을 얻은 것으로 만족한 편..^^

공쟝쟝 2022-02-17 22:57   좋아요 1 | URL
저는 <영화와 시> 보고 좋아서 소설 찾아 읽었는 데 소설이 너무 이상해서 ㅎㅎㅎ 아 나랑 안맞네, 했었거든요! 근데 이런 태도의 글쓰기 였다면! 다른 책 한번 더 찾아보겠어요. 정지돈님아, 만약에 제가 또 찾아 읽게되면 아무님한테 고마워해라!
 
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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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북플의 여러 기능 중에는 '지난 오늘'을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활동량이 적은 편이었으므로 자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눈에 띄는데, 과거의 기록을 볼 때마다 낯뜨거운 얼굴이 되는 일이 잦았다. 과거의 나의 글에서 비치는 미숙함, 투박함, 어리석음이 '왜 그때의 나는 이렇게 썼을까', 또는 '왜 그때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을까'라는 질문을 피워내고 거기에서 부끄러움이 타오르는 것이다(이따금 내가 쓴 댓글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그때 드는 감정은 어린 시절에 썼던 일기(고등학생 이후로 쓰지 않았던 그것)를 다시 들춰보았을 때 느꼈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때로는 지우거나 비공개로 전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두는데, 아무리 부끄러운 일이었어도 그때의 내가 가졌던 감정과 생각들 역시 나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공적인 공간에 게시하는 글이지만, 이런 글들도 내가 건너온 시간을 기록한 일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범람하는 에세이의 시대에 황정은이 첫 에세이로 《일기日記를 내놓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기야말로 에세이의 맹아(萌芽)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가장 사적이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아 누구나 쓸 수 있었던 에세이, 텍스트의 외연을 확장시킬 가능성을 품고 있었을 에세이의 근원이 일기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일기'라는 제목과 형식에서 어떤 결의 같은 것을 느꼈다.  자신이 그동안 느꼈던 생각과 감정을 맹아의 형태로, 다시 말해 원형(原形)으로 담담히 써보겠다는 작가의 결의를.


가장 사적인 형식이기에 '나'라는 세계의 바깥으로 나온 일기는 빛을 보지 못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장 사적이어서 소중할 수 있는 감정과 상념이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감정을 말한다는 것"(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172쪽)이라는 말처럼, 일기는 가장 사적인 글이라는 사소함으로 바깥의 당신과 연결되고자 분투하는 글쓰기가 아닐까. 그리고 황정은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언어를 허투루 보지 않으려는 감각으로 자기 고유의 상념을 바깥과 연결하려는 듯하다. 그리고 오랜 독자로서 나는, 그 상념들이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었으면 바라는 것이다.


〈일기〉로 시작해 〈일기〉로 끝나는 열한 편의 일기에는 파주로 이사를 한 뒤 겪는 작가의 다양한 일상이 담겼다. 황정은의 오랜 독자는 읽으면서 작가의 일상을, 또는 작가의 소설이 발아(發芽)된 원체험을 새로이 알아가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오랫동안 내 눈을 붙잡아두었던 것은 언어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감각이었다. 일상에서 쓰는 단어에 담긴 무심함을 포착해내던 작가의 시선은 일기에서도 여전하다. 특히 "안다"에 대한 서술을 보면서 나는, 오래 전 '이해한다'는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던 일이 떠올라 흠칫 놀랐다.


내 이웃들이 반달터에 두고 있는 관심을 나는 안다고 썼지만 실은 '아니까'라고 쓰는 데 하루를 망설였다. '안다'고 쓰거나 말해야 할 때 나는 매우 축소된다. 내가 그것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내가 그걸 모른다는 것을 안다. 알아버린 것을 모르는 척, 안다고 말해야 할 때 나는 순진한 척을 하며 무언가를 단념하고 있고 그래서 안다고 말하는 것이 내게는 늘 얼마간 책임을 지는 일로 느껴진다. (29쪽)


산보를 하고 식물을 기르는 장면을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이효리가 고사리를 말리는 장면을 보며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에 과정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164쪽) 하는 대목을 읽으면서 '내가 아는 황정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안도하기도, 매년 목포항을 찾는 작가의 모습을 보면서 처연함에 젖어들기도 했다. 많은 이야기들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 일기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였다. 빨간 머리 앤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소년〉과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맹아가 된 경험과 《어린이라는 세계》를 거쳐 아동 학대의 현실로 이어지는 과정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이를 통해 작가는 에세이에 흐르는 정조를 서서히 독자에게 물들인다.  학대 당하는 어린이를 보호할 수 없는 구조(構造)와 어른의 상투성을 지적하는 작가의 말이 호소력을 갖는 것은 이러한 연결 때문일 것이다. 그 정조의 끝에서 "매번 미안하다는 손글씨 릴레이를 반복할 수는 없다. 몇년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미안하다는 말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60~61쪽)라는 문장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자문하게 된다. 나도 혹시 아파하기만 했을 뿐, 어른의 상투성을 버리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쭉 읽으면서 나는 아마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보다 좋은 글은 없겠다고 짐작했었다. 〈흔痕〉을 읽기 전까지는.


〈흔痕〉은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고 쓴 독후감의 형식을 취하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내용은 가장 내밀하고 아픈, 그래서 더욱 처절한 경험이다. 그래서 바깥으로 내놓을 때 가장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경험. 감추고 싶었던 흔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을 고통이었겠지만, 그래도 이를 내놓은 것은 《헝거》가 자신에게 전해준 용기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려는 마음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읽는다. 이 경험이 당신만의 것이 아니며, "그 수치심은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183쪽) 그렇기에 더욱 용기를 내어 발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흔痕〉이 전하는 이야기는 가장 사적이고 깊숙한 경험이면서 동시에 그 힘으로 타인과 연결을 이루는, 그래서 감정의 울림이 독자에게 크게 닿는 일기이다. 거기에서 나는 근원적인 감정의 맹아를 보고, 처연한 문장에 담긴 고통을 느끼고, 그 상처를 생각하며 아파하는 것이다.


새로 지을 집터에 원래 살던 맹꽁이를, 아이들이 냅다 던져버린 가물치를, 6716번 버스에 탔던 트랜스젠더 여성을, "전에 거기 머물던 사람들과 그들이 겪은 일"(131쪽)을, 세월호 유가족을 생각하며 쓴 일기들을 읽으며, 여전히 작가는 이 세계가 '비-존재'로 만들어버리려는 존재들을 호명하고 있구나, 우리가 세계의 문법에 익숙해져 무심코 뱉는 혐오와 차별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소설보다 구체적인 체험의 모습으로 오는 감정은 더욱 곡진하고 처연하다. 앞으로 작가가 쓸 소설들도 이토록 폭력적이고 엄혹한 세계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분투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한 명의 독자로서 작품을 오래오래 만날 수 있도록 작가의 건강을 염려하고 희구한다. 언제나 독자들에게 건네는 인사처럼, 당신도 건강하고 평안하시기를.





그래도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 예컨대 당신의 건강을 바라고 사람의 선의를 믿고 굳이 희망하는 마음을 나는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겠다는 믿음 말고, 희구하며 그쪽으로 움직이려는 믿음이 아직 내게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안엔 내가 그것을 잃지 않기를. - P160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마음들을 나도 사랑합니다.

다들 평안하시기를.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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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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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에서 다뤄지는 워킹 푸어의 현실은 2000년대 초반이지만, 현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뿐더러, 책 속의 현실보다 지금이 더욱 악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생활 곳곳에 공기처럼 스며든 신자유주의는 빈곤은 나태함과 태만의 소치라는 관념을 주입하고, 인성 검사와 약물 검사, 오리엔테이션과 같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모멸감과 자괴감을 안기기도 한다.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그들은 중산층과 고위 계층의 눈에 띄지 않도록 분리되고 배제되며, 그들이 버는 돈으로는 최소한의 생계조차 유지하기 힘들다(에런라이크의 위장 취업기는 이 명제를 증명하는 과정이다). 아직은 호황기를 누리던 2000년대의 미국 경제에서도 왜 그들은 부당한 임금과 노동 조건에서 탈출하려 하지 않았는가? 그 답은 우리가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제적 인간이 아니라는 데 있다.


처음에 나는 동료들이 적극적으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지 않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왜 그들은 내가 허스사이드에서 제리스로 옮겼던 것처럼 급여가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지 않는 걸까? 그 해답의 일부는 인간은 구슬과 다르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구슬과 달리 거취를 결정할 때 적지 않은 마찰을 경험하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가난할수록 기동성이 더 떨어지기 마련인데, 차가 없는 저임금 노동자들은 흔히 차가 있는 친척의 도움을 받아 출퇴근을 한다. 이것은 매일 반복되고 어떤 경우에는 출퇴근길에 보모의 집이나 탁아소에 들르도록 부탁해야 한다. 따라서 일자리를 옮기게 되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지형학적 난관에 봉착할 수도 있고 어찌 됐든 이제껏 차를 태워주던 친척에게 새로운 직장에 맞춰 경로를 바꿔 달라는 미안한 얘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276)

 

저소득 노동자들이 경제적 인간과 다른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경제학 법칙이 제대로 적용되려면 우선 선택을 하는 주체인 개인이 자기에게 주어진 선택의 범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저임금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조언을 구할 곳이 없다. 손에 들고 다니는 기기도, 케이블 방송을 볼 수 있는 채널도, 컴퓨터 웹사이트도 없다. 이들에게 구직 정보를 제공하는 유일한 소식통은 직원 구함이라는 안내문과 구인 광고뿐이며, 그나마 급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듣지 못하기 일쑤다. 따라서 누가 어디서 얼마를 받고 일한다는 정보는 입소문을 통해 듣는 게 다인데, 그마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문화적인 이유로 전파 속도가 아주 느리고 다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77~278)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하 리얼리스트)에서 결핍은 시야를 좁혀 자신의 즉각적인 부족함, 5분 안에 시작하는 회의, 내일 지불해야 하는 청구서에만 초점을 맞추게 한다.”(리얼리스트, 66)라고 이야기한다. 빈곤층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에는 정신적 대역폭의 수축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에런라이크가 레스토랑과 청소 업체, 월마트에서 만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금 조건의 불합리성을 견디는 이유에는 누구라도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맥락(리얼리스트, 66~67)이 존재한다. 차가 이 되기도 하는 상황”, “몸이 아프거나 부상을 입어도 이를 악물고 참고 일해야하는 상황”, “병가 수당도 의료보험도 없으니 오늘 하루 일을 못하면 당장 내일 식료품을 살 돈조차 없는 절박함(288)이 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더 나아졌을까?

 

노동의 배신2001년에 나왔고, 한국어판에는 10년 후에 에런라이크가 덧붙인 후기가 함께 실려있다. 저자는 일자리마저 줄어든 현실, 가난을 범죄로 만들고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 학대와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현실을 보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로부터 10년이 더 흐른 지금도 상황은 그리 변한 것 같지 않으며, 여전히 임대료는 그들이 받는 임금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고, 사회는 그들을 가장 비민주적이고 자유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작업 공간에 몰아넣어 선택의 폭을 한없이 축소시킨다. 그들이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임금을 달라고 요구할”(296) 때에 경제가 휘청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리의 머릿속에 주입되어 있지만, 노동의 대가에 무관심하고 이를 평가절하하는 사회의 종말은 더욱 빠르지 않을까?

 

에런라이크는 말미에서 우리가 느껴 마땅한 감정은 수치심(296)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생계의 필수조건을 충족하며 살아가는 삶의 기반에는 그들의 노동이,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고 행해지는 노동이 있기 때문이다. 워킹 푸어의 양산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일조한 것이 없더라도(죄책감은 흔히 특정한 행위(behavior)에 대해 느끼는 감정으로 설명된다), 그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지 않아야 우리의 생활이 유지되는 현실의 방조자로서 우리는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뜻일 테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사회 구조는 우리가 불합리함에 의문과 분노를 갖지 못하도록 노동의 흔적을 감춰버리는 데 능숙하다. 청소 업체가 다녀간 집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워킹 푸어를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박애주의자(296)라고 지칭한 것은 워킹 푸어가 있어야 작동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에 대한 조소로 읽힌다. 빈곤에 대한 비난의 시선을 담은 안경을 벗고 그들과 함께 연대할 때, 그들의 저항에 지지를 보낼 때 하늘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 우리 모두가 더불어 더욱 잘 살게(296) 되지 않을까. 나는 그들과 다르다며 눈감을 수도 있겠지만, 언제고 그들이 곧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지난 20년 동안 노동을 대하는 자본주의의 모습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 불평등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극단적인 불평등을 향해 치닫는 일종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노동력을 확보하려면 너무 적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도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들, 심지어 더 메이즈의 사장 같은 피라미 경영자들도 노동자들에게서 몇 킬로미터는 떨어진 과하게 높은 경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경영자들은 자신을 위해 일할 노동자를 특정 범주의 사람들 중에서 뽑아야 하지만 그 범주의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실제적인 경험보다는 계급 또는 인종에 관한 편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앞서 설명한 억압적 경영을 해야 한다고 믿고, 개인의 영역을 침해하는 약물검사와 인성검사를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하지만 이 모든 일에 드는 비용이 엄청나고(매니저 한 사람을 쓰는 데 1년에 2만 달러 이상, 약물검사 한번에 100달러 정도 든다), 이렇게 억압하는 데 비용을 많이 쓰다 보니 임금을 낮게 유지해야할 수밖에 없다. - P285

가난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빈곤을 일반적으로 어렵지만 어찌어찌해서 넘어갈 수 있는, 생존 자체는 위협받지 않는 상태로 이해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곁에 늘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빈곤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의 심각성은 더욱 짐작하기 어렵다. 점심을 과자나 핫도그 빵으로 때웠다가 근무 시간이 끝날 때쯤이면 현기증이 나 기절할 지경이 되는 것을, 차가 ‘집‘이 되기도 하는 상황을, 몸이 아프거나 부상을 입어도 이를 악물고 ‘참고 일해야’ 하는 상황을, 병가수당도 의료보험도 없으니 오늘 하루 일을 못하면 당장 내일 식료품을 살 돈조차 없는 절박함을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경험들은 지속할 수 있는 삶, 심지어는 만성적 결핍에 시달리는 삶의 일부라고도 할 수 없으며 낮은 수준의 처벌을 끊임없이 받는 것이라고밖에는 말할수 없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어떻게 정한다 할지라도 이들이 처한 상황은 응급 상황에 해당한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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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드릴게요 - 정세랑 소설집
정세랑 지음 / 아작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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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을 처음으로 읽은 게 20187월이었는데, 이후 나는 정세랑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궁금해하고 찾아보는 독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초기작들이 개정판으로 꾸준히 나온 것도 한몫을 했겠지만. 목소리를 드릴게요도 마찬가지여서 처음 출간되었을 때 구입하고 띄엄띄엄 읽다가 이제야 다 읽게 되었는데,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재미와 흡입력 있는 이야기가 모두 충족된 독서 경험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정세랑의 작품세계, 특히 SF나 판타지의 세계를 요약하면 상상력에서 발아하여 관계에 다다르는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 소설에서도 정세랑의 독특한 발상은 작품에 재미를 주는 요소 중 하나였으며, “SF 소설집이라는 소개에 걸맞게 그녀의 상상력은 여전하다. 지렁이가 세상을 리셋해버리는 이야기부터(리셋) 살인 충동을 일으키는 목소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감금되어 살게 된 선생님의 이야기까지(목소리를 드릴게요). 다만 이 작품들은 상상력에서 출발한 세계를 구축하고 진행시키는 것엔 그리 관심이 없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들의 관계에 초점을 둔다(리틀 베이비블루 필이 예외적이다). 이들이 서로의 차이와 감정을 받아들이고 함께 나아가는 연대가 작품의 주된 정서를 이루며(이는 정세랑의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이를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이 작품에 온기를 부여한다. 차갑고 냉정하게 서술하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인물을 대하는 작가의 시선, 즉 그대로 마무리해도 좋을 결말에 헬기 하나를 보내는 따뜻함(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에 기인한다. 이러한 따뜻함이 때로는 군더더기나 작위적인 서술을 부르기도 하지만(피프티 피플), 인물들을 사랑스럽게 만들고 독자들을 끌어모으는 작품의 힘이 아닐까 싶다.

 

다채로운 상상력을 특장으로 지닌 작가이지만, 어떻게 우리는(또는 인류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지구를 포함한)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할까에 대체로 수렴하는 경향 탓인지 나는 단편을 읽으며 종종 정세랑의 다른 작품을 떠올렸다. 11분의 1을 읽을 때는 지구에서 한아뿐,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읽을 때는 보늬알다시피, 은열(옥상에서 만나요에 수록)을 떠올리는 식으로. 이는 작가가 지향하는 인간형을 뚜렷이 드러낸다는 측면에선 장점일 수도 있겠으나, 작품세계를 좁아지게 만든다는 한계점도 존재한다. 하지만 자신이 쓰고 싶은 상상력의 이야기가 있고, 우리가(또는 인류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독자들이 생각해볼 수 있도록 그들 앞에 가볍게 쏘아올릴 수 있는 걸로 작가는 만족하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뒤쪽에 실린 단편들이 더 좋았고, 나는 정세랑의 작품에서 괴짜들이(너드(nerd)한 사람들이) 함께 우왕좌왕하며 함께하는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차별, 환경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가볍고 재치 있는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 역시 작가의 필력일 것이다. 앞으로도 정세랑의 작품을 읽으면서 인간 존재의 치열한 투쟁이나 세계의 묵직함을 느끼게 될 일은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앞으로도 나는 그녀 특유의 재미와 발상, 그리고 따뜻함을 기대하며 책장을 펼치리라. 이는 나 역시 작가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며, 인물들 사이에 느껴지는 온기를 현실에서도 마주하길 바란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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