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02.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완독. 페소아의 불안의 서(봄날의책)에 대한 글로 마무리. 잠들기 전의 상태에서 썼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글이 인상적이었다. 불안의 책(문학동네)을 예전에 읽으면서 밑줄을 수도 없이 긋고 그걸 정리해보겠다면서 일일이 적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제풀에 지쳐 어느 순간 읽기를 멈추고 그대로 덮어두었더랬다. “가장 무방비한 감각과 감정을 기록하는작업. 그 작업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불안정한 들과 나와 나 사이에 있는, 신이 망각한 빈 공간속의 를 마주하는 시간. 페소아의 수많은 이명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페소아의 이명에 관한 책도 많이 사두었는데 여전히 읽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리스본에서도 인상깊었던 장소들 중 하나가 페소아 박물관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였건 수면 직전에 씌어졌을 이 책은 어느 정도까지의 각성 상태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지를 입증하려는 듯하다. 동시에, 지독한 각성 상태가 잠과 꿈과 가장 흡사하다는 것도 입증을 하려는 듯하다. 또한, 불안의 서의 페르소나인 '소아레스'를 이미 미쳐 있는 자이자 미쳐버린 지 너무나 오래되어 도리어 정상에 가까워진 자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다. 보통의 사람들이 정상적인 척을 하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고 파악할 때,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미 관성이 되어 버려 감지할 수 없는 것까지를 볼 수 있는 '진짜 인간'의 상태. 이미 미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각성 상태. (209)


어쩌면 이 책이 "잠을 위한 찬가"가 아닐까. "나는 잠자는 듯이 글을 쓴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지루하기 때문에 일을 하듯이, 때때로 나는 아무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글을 쓴다. 나는 꿈꾸는 상태에 빠진다. 생각하지 않는 자라면 그런 백일몽 속에서 자신을 잃겠지만, 나는 글을 쓰면서 나를 잃는다. 나는 산문으로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참혹하고도 가열찬 불안과 상념이 범람할 때에 그리하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만 같은 상태가 될 때에, 그 무게로부터 완전히 달아날 수 없다면, 달아나는 일과 가장 닮은 행위는 그것에 대하여 무방비하게 감각하고 그걸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210)


어설픈 현자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여정이 곧 삶이라고 우리를 속여왔지만, 실은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해야 하는 여정이 곧 삶일지도 모른다. 나를 맴도는 어설프고 주눅 든 나, 나에게 해로운 것만을 달콤하게 권하는 협잡꾼인 나, 나에게 위선 아니면 위악만을 가르치는 감독인 나, 나에게 거짓 눈물과 거짓 한숨과 거짓 웃음을 사탕처럼 던져주는 사육사인 나, 그래서 무엇을 하며 살아도 어딘지 모를 불안과 불쾌감을 그림자처럼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나. 그 모습을 비웃는 구경꾼인 나. 그런 나와 결별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포기하는 것만이 방법일지도 모른다. 꽃나무가 더 이상 꽃나무이기를 포기하는 꽃 지는 계절처럼, 장마가 더 이상 장마이기를 포기하는 쨍한 다음 날 아침의 맑은 하늘처럼. 포기와 체념의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을 알려면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더 현명한 환멸에 도착한 이후여야 하리라. (212-213)


불안의 서는 불안에 대한 갖은 해명에 지쳐 있는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불안함에 대하여 충분히 숙고하여 불안의 편에 서 있지만 그 입장마저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나와 나 사이를 커다란 괘종 시계의 추처럼 똑딱이며 왕복운동을 하고 있어서 그 현기증마저 이제는 관성이 되어버린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가끔은 나와 내가 나란히 벽에 기댄 채 헐렁하게 손을 잡고 앉아서, 창문으로 들어온 네모난 햇빛이 시간과 함께 조금씩 움직여 나와 나의 테두리를 온전히 가두는 느낌을 아는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세상의 모든 현혹으로부터 완전하게 비켜서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현혹의 무상함을 일깨우기 위해 독자를 현혹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하여 독자를 현혹하지 않은 채 불모의 사막지대를 펼쳐 보이고야 만다. '이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구나'라는 감동을 독자는 굳이 느낄 필요가 없다. 단지, 모든 고백은 "내 비루한 존재가 삶 앞에서 자신을 위장한다는 현상을 견디기 위하여 적혔을 뿐이니까. (215-216)


에필로그의 마지막 말은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어느 부분에선 작가의 생각의 흐름을, 그것을 표현한 문장의 결을 따라가기 어려웠지만, 사랑이 으레 그러하듯 그것을 나의 문장으로 읽어내는 것도 내 몫이다. ‘사랑이 아닌 사랑함에 대해 고민해보았던 시간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사랑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사랑함에 대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함은 사랑과는 다른 얼굴이어야 한다. 사랑은 사랑을 재배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사랑을 돌아보고 돌보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을 사랑해온, 사랑을 명사로 고정하는 사랑의 담론들에 비켜서서, 사랑이 더 이상 감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게 내버려두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학습해온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힘도 없다. 하지만 사랑함은 그렇지 않다. 삶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세상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223)



24.12.03.
















딕테읽기. 서문?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딕테(Dictee, 받아쓰기)에서 몇 차례 길을 잃고 더듬더듬 읽는다. 천주교의 미사와 화자의 의식의 흐름이 뒤섞인 듯한 파편적인 글들. 겨우겨우 졸음을 쫓으며 읽다가 문득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니 말도 안 되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한 순간에 과거로 회귀하는 듯한 소식들을 끊임없이 찾아보느라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한 사람이 이렇게나 우리 시대를 퇴행시킬 수 있다는 것에 허망함과 환멸을 느끼며. 그것을 어떻게든 일단 막아냈다는 것에 안도하며.


각 장의 제목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홉 뮤즈와 그들의 고유 예술 영역을 차용하여 명명한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Mnemosyne)가 아흐레 동안 제우스(Zeus)와 동침하여 아홉 명의 뮤즈 신을 낳듯, 책의 구성은 가톨릭 의식인 ‘9일간의 기도(novena)’로 이루어져 있다. 차는 기도 의식을 관장하는 인물이자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여주인공 화자 말하는 여자를 소개한다. 유관순과 잔 다르크, 만주 태생인 차학경의 어머니 허형순 여사와 성 테레사가 있다. 언어와 문화의 경계에 선 여성들이자 주체적 인물이다. 이들 목소리를 빌려 자신이 경험한, 디아스포라적 삶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 「딕테가 돌아온다, 하퍼스 바자, 2024.11.07.

(https://www.harpersbazaar.co.kr/article/1872954)



24.12.04.


딕테계속 읽기. 제우스와 므네모시네의 아홉 딸들의 이름이 목차처럼 나오는데 그 중 클리오 역사에는 유관순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관순의 서사와 기억과 기록에 대한 조각들. 앞선 글에 비하면 읽기에는 수월하나 송곳처럼 드러나는 단상들에서 멈칫멈칫한다. 시적인 것 같기도, 무의식 같기도 한 것. 어제의 여파인지 어떤 구절에 오랫동안 눈이 머물렀다. 기록하고 끊임없이 기억하는 이유.


왜 지금 그 모든 것을 부활시키는가. 과거로부터. 역사를, 그 오랜 상처를. 지난 감정을 온통 또다시. 그것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다. 지금 그것을 불러일으켜 잊힌 역사를 망각 속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말과 영상 속에서 또 다른 말과 영상을 조각조각 끄집어내어, 잊힌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43) 



24.12.05.


딕테계속 읽기. 칼리오페 서사시는 작가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구성되어 있다. 만주에서 작가 자신처럼 이방인이었던 어머니의 삶이 꿈과 같은 몽환적인 장면들과 얽힌다.



24.12.06.















오늘 받은 책 중엔 어떤 어른이 있었는데, 책 상태를 확인하고자 펼쳤다가 인쇄된 사인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사이 찾아온 이 난장의 겨울에서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문장들.



딕테계속 읽기. 멜포메네 비극에는 분단 이후 1962년의 사건이, 오빠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며 읽어내려 노력해보고, 군인과 경찰이 나오는 대목에선 자꾸 계엄령과 군인들의 모습이 상기된다.


경찰과 군인들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신들을 복제하여, 당해낼 수 없는 숫자로 배가하여 그들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들의 직무 이행과 그들에게 주어진 신분은 그들의 고향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들의 형과 누이, 그들의 아이들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 그들 자신의 핏줄기보다 더 멀리 나아갑니다. (96)



24.12.08.














어비읽기. 내가 읽었던 김혜진 작가의 장편들이 연상되는 단편들이 몇 개 보인다. 초기 단편집이어서 내가 읽은 이후의 작품들과 구별되는 건 블랙코미디적인 요소들. 바틀비의 후계인가 생각했지만 먹방 bj가 된 어비(어비)아웃포커스의 엄마, 한밤의 산행의 소년이 그렇다. 마냥 웃을 수 없는 건 이들이 처한 문제가 겨냥하는 것은 결국 이 세계, 생존을 위한 투쟁이 디폴트가 되어버린 구조이기 때문.



딕테에라토 연애시를 읽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 보니 페이지 번호는 순서대로인데 페이지가 서로 바뀌어 인쇄된 부분들이 있어 연결이 되지 않았다. 발견한 만큼은 알라딘에 문의를 남겨놓았는데, 애초에 파편적인 텍스트라 내가 미처 발견 못했는데 더 많은 곳에 뒤죽박죽이 된 페이지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만 커졌다. 북펀딩으로 받은 도서가 이렇게 오다니... 에라토는 성녀 테레즈에 대한 이야기.




) 오늘(24.12.10.) 아침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으나 일하는 중이어서 받지 않았는데 문의한 내용에 대한 문자가 와 있었다. “원서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다라는 이야기... 궁금한 점은, 원서는 아마도 영어이거나 프랑스어일 것으로 보이는데 페이지의 내용을 작가가 뒤죽박죽으로 섞은 것이 이렇게 구현이 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뒤의 해설까지 읽으면 그 의도와 편집에 대해 알 수 있을까? 혹시 몰라 문의한 내용과 해당 페이지를 캡처해서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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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8.














사랑이라니, 선영아읽기. 점차 선영과 진우와 광수의 삼각관계가 서서히 드러나는 중.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난 후에 다시 읽으니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는 김연수 특유의 고유어 사용도 많이 줄었고, 사건에 들어가기 전 상념처럼 서술되는 사변들도 줄었다. 그동안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쫀쫀하다'는 말은 원래 옷감의 발이 대단히 고르고 곱다는 뜻이다. 쫀쫀한 인간들이 가장 살차게 구는 게 조금 삐져나온 보풀이다. 아직은 비인지 눈인지 구별하기 힘든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11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광수는 꽃보다 아름다운 신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다면 꽃이 아니라 신부만 바라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광수는 그만 부케를 보고야 말았다. 친구 명희를 향해 선영이 던지려던 부케의 오른쪽 윗부분에 부러진 채 달랑달랑 매달린 팔레노프시스 한 송이가 광수의 마음에 재를 뿌렸다. 그건 새로 산 스웨터의 오른쪽 어깨 부분에 삐져나온 털실 한 올과 비슷했다.

쫀쫀하다'의 반대말은 얼멍얼멍하다'. 얼멍얼멍한 스웨터라면 그 털실 한 올은 옷의 일부가 되고 쫀쫀한 스웨터라면 불필요한 보풀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게 보풀 때문이었다고 악쓰면 악쓸수록 자신이 얼마나 쫀쫀한 인간인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다들 알겠지만, 그건 사람 됨됨이의 문제지, 불길한 예감의 문제가 아니다. 삶이 왜 죽음과 같은 절망에 이르는지 아는가? 그건 스스로 무덤을 팠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세상에 팔레노프시스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란 없다. 광수는 그 사실을 몰랐다. (11)


일단 온 존재가 완전히 비워지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랑은 ''를 무한히 확장시킨다. 사랑에 빠졌을 때, ''는 질투로 몸이 달아 자살을 떠올리는 심약한 청년이 되기도 하고 어떤 투정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너그러운 성자가 되기도 하고 청소차가 지나가는 새벽 거리를 비스듬히 누워서 바라보는 페인이 되기도 한다. ''는 레너드 코헨의 노래처럼 권투 선수와 의사와 운전수가 될 수도 있고 안치환의 노래처럼 그대 뺨에 물들고 싶은 저녁노을이나 그대 위해 내리는 더운 여름날의 소나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이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다. 사랑의 종말이 죽음으로 비유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데, 그러면서 무한히 확장됐던 '는 죽어버린다. 진우의 말처럼 한번 끝이 난 사랑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죽음은 비가역적인 과정이다. 사랑의 종말도 그와 마찬가지다. 확장이 끝난 뒤에는 수축이 이어지 게 된다. 사랑이 끝나게 되면 우주 전체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확장됐던 ''는 원래의 협소한 ''로 수축된다. 실연이란 그 크나큰 '를 잃어버린 상실감이기도 하다. (46)


세상의 다른 모든 일들은 나이든 사람들이 잘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일만은 모험을 겁내지 않는 젊은이들의 전공 분야다. 젊은이들은 아직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47-48)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혼자서 빠져나올 때마다 뭔가를 빼놓고 나온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사랑이 되풀이될수록 그 관계 속으로 밀어넣을 만한 게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쯤이면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더이상 헷갈리지 않게 되는데, 그건 이제 불타는 사랑이란 자신보다 더 어린 사람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나이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소진됐기 때문에 더이상 사랑에 소진될 수 없을 때, 우리는 사랑 외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래서 인류는 실연의 상처로 멸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그럭저럭 굴러온 셈이다. (48)



24.11.25.

사랑이라니, 선영아완독. 한 줄로 정리하자면, 이 당시 김연수 작가의 사랑론과 두 남자의 찌질한 사랑 이야기의 이중주.


하지만 어떤 사람을 향해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그건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봤다는 뜻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일은 아무도 없는 나이트클럽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춤을 추는 일과 흡사하다. 이때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한눈에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애정이 없다면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사랑해", 그 대담한 말을 통해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먼저 누구인지 보여주겠다. 이번에는 네가 너를 보여줄 차례다. 그래서 "사랑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다.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거나 못 들은 걸로 치거나. 못 들은 걸로 치겠다, 그건 나한테 네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마라, 우리 사이는 사회적인 관계다'라는 뜻이다. (63-64)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만 할 단계는 나이트클럽 플로어를 비비며 강종거리기 바로 직전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연습하게 마련이다. 나이트클럽 화장실에서 연습하든, 자기 방에서 러닝셔츠 바람으로 연습하든, 연습할 때는 객관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줄 거울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눈이 아니라 '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야만 하기 때문이다. 거울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천산지산 갈라졌던 자신의 정체성을 추슬러 하나의 ''로 끼워맞추는 조련찮은 수고를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 온전한 하나의 정체성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64)

 

그러므로 다시 한번,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냈다는 뜻이다. 사랑의 대상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기형도는 그 집 앞이라는 시를 이렇게 끝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비가 2에서는 이렇게 끝을 냈다.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왜 기형도는 이 세상 누구와도 닮지 않은 위대한 혼자에 대한 얘기로 시를 끝맺었을까? 사랑이 끝나면 자신에 대한 사랑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애당초 "사랑해"라고 말하기 위해 거울을 보며 연습할 때 봤던 그 얼굴을 향한 사랑만이. 1982828, 기형도는 일기장에 "언제나 나는 진실로 연애다운 사랑을 할 것인가"라고 썼지만, 그런 점에서 그는 늘 연애중이었다. (66)


그러므로 다시 한번,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만 '진실로 연애다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추구하는 것…… 자신의 자아를 저 밑바닥까지 찾아 헤매는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부부다. 우리는 사랑의 학교에 앉아 현대사회라는 불확실한 무방비도시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된다. 세상을 바꾸는 건 이 학교의 모범생들이다. 이 모범생들은 꽃다발과 샴페인과 밸런타인 카드가 있던 자리에 대중심리서와 부부클리닉과 자기계발서를 갖다놓는 식으로 신학기 환경미화 활동을 끝맺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탈낭만적인 사회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67)


"그럼 어렵게 얘기해줄까? 이타심은 아래를 향한 감정이야. 타인을 사랑하는 감정이라고. 그럼 이기심은 뭐냐? 위를 향한,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이야. 이렇게 자존심 상해서 살 수 없으니까 고쳐 달라. 이게 바로 이기심이야.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알겠어? 나는 80년대에 데모했던 새끼들 대부분이 그런 심정으로 돌 던졌다고 생각해.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 보여주려고. 그러니까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인 것 아니겠어?" (81-82)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한 타인이다. 우리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혼신의 힘을 바쳐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가 모르는 부분은 영영 남게 된다. “너는 절대로 알지 못한다"를 영어로 작문하라면 "You never know"가 될 것이다. 하지만 대화에서 관용적으로 쓰일 때, 이 문장은 '어쩌면' 혹은 '아마도'를 뜻한다.

질투란 상대방에 대해 모든 걸 알게 됐다고 생각한 게 착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러니까 어쩌면이나 '아마도'라는 부사로 시작되는 문장이 하나둘 마음속에서 떠오를 때, 부록처럼 따라오는 감정이다. 그리고 후보선수가 주전선수에 대해 늘 그런 마음을 갖듯이 딸린 감정은 본래 감정을 위협하고야 만다. 그래서 때로 질투는 사랑을 강화시키는 게 아니라 파탄내기도 한다. (89-90)


사랑이 입을 열면,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다. 사랑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됐다면 거기서 멈춰야만 한다. 너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즉 너무 알려고 하지 말아야만 한다. 너무 사랑한다는 말은 상대방의 정체성마저 요구하는 일이다. 그건 무방비도시의 어둠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너무 무리한 요구다. 현대적인 사랑의 방식이란 우리가 절대로 알지 못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마도' 혹은 '어쩌면'으로 시작되는 문장의 본뜻이 'You never know’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걸 모르면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갈 수는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90-91)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뿐이다. (105)


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만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한때 우리가 뭔가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물. 질투가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사랑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105-106)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당장 죽어도 좋다는 느낌이 들 때다. 그때 삶은 죽음을 뛰어넘는다. 삶이 죽음이라는 엄청난 장애물을 뛰어넘는 데 지렛대로 사용하는 게 바로 사랑이다. 외계인이 없다면 멀더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처럼 사랑은 장애물을 뛰어넘어야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장애물을 만난 두 연인의 사랑을 다룬 영화 페드라를 수입한 한국의 영화 관계자는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을 붙였던 것이다. (106)


사람들은 저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존재다. 예컨대 1천 송이의 꽃이 있다고 치자. 한 송이 꽃은 1천 송이 중 하나의 꽃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한 송이 꽃이 없다면 999송이의 꽃은 존재할지언정 1천 송이의 꽃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사랑을 한다는 건 그 한 송이 꽃을 통해 1천 송이의 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 자신도 1천 송이의 꽃이 되는 한 송이 꽃이라는 사실을 납득하는 일이다. (118-119)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의 몇 부분은 일종의 '어휘용례사전'처럼 읽히는 데가 있다. 가령 그가 진눈깨비를 두고 아령칙하다'라는 형용사에 어울리는 물질"(10)이라고 정의할 때, 혹은 광수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쓰인 쫀쫀하다'라는 형용사와 그 반대의 뜻인 '얼멍얼명하다라고 하는 두 단어로 소설 전체의 주제를 개관할 때, 나아가서는 알다'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know'를 플라톤의 향연과 성경 창세기로까지 소급하여 어원학적 설명을 시도할 때, 우리는 혹시 이 소설이 몇 개의 어휘를 중심 얼개로 삼은 어휘도상학적 소설은 아닌지 의아해할 지경에 이른다. 왜냐하면 이 각각의 어휘들에 따라 인물들이 배치되다시피 하고 있고, 소설의 주제 역시 이들 어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144-145)


사실 광수는 '쫀쫀하다'. 그리고 그의 짝패(double)인 진우는 '아령칙하다' 혹은 얼얼하다'. 광수는 ’know'의 의미를 과신한다. 반면 진우는 ‘know'의 의미를 알맞게 폄하할 줄 안다. (145)



24.11.26.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마저 읽기. 4부는 시집 또는 책에 대해 작가가 쓴 글이 실려 있는데, 읽어본 적이 없는 이병률 시인의 시집에 대한 글보다는 최승자 시인에 대한 글이 더 피부에 와 닿는다. 이 시대의 사랑즐거운 일기에서 내 머리를 후려쳤던 강렬하고 날선 언어들은 이후의 시집들에서 점점 사그러들었는데, 내가 앞의 두 권 외의 다른 시집들을 읽었지만 머릿속에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오래 전 작가가 이 책에서 다룬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를 펼쳤을 때도 치열함보다 달관(또는 체념)의 정서가 흐르는 듯하여 오래 읽지 못하고 덮어두었었다. 김소연 시인의 글에서도 시집 한 권보다 시 세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미처 못 보았던 최승자의 아프면서 날카로운 시적 언어를 보는 동시에 이를 탐독했던, 정서적 혼란과 온갖 실존적 고민은 다 짊어진 것처럼 살고 있던 과거의 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간 최승자에게 바쳐졌던 찬사와 걱정 들은, 그가 이 세계에 일체의 편승도 하지 않았다는 염결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결함을 알아보는 이는 많았어도, 그 염결함을 잘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들은 최승자의 시세계에 전적인 탑승을 하지 않음[못함]으로써, 이 세계에 편승하고 있었던 우리의 염결하지 못함을 되려 염결하게 지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183)


마지막으로, 실패한 한 남자 곁에

한사코, 실패한 한 여자가 눕는다.

-「문명부분

 

"마지막으로, 실패한 자곁에 "한사코, 실패한" 자가 나란히 눕는 일. 이것은 사랑의 진짜 장면이 아닌가. 낭만주의적 꿈도 아니고, 위악이거나 자학도 아니고, 에로스니 필리아니 아가페니 등으로 구분할 필요도 없는, 사랑하는 연인들만의 비밀한 실제 모습이 아닌가. 한 남자가 마지막 실패를 하고서 누워 있을 때, 필사적이고도 계속적으로 한사코 실패를 거듭해온 한 여자가 곁에 가서 눕는 일. 최승자의 사랑은 이런 것이었다. "너는 날 버렸지,/이젠 헤어지자고/너는 날 버렸지"로 시작하여 "나쁜 놈, 난 널 죽여버리고 말 거야/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 거야"를 거쳐서, "오 개새끼/못 잊어!"로 끝을 맺은 Y를 위하여는 이 맥락에서 다시 읽혀야 할 것이다. "죽여버리고 말"겠다는 말 뒤에 "다시 낳고" 말겠다는 말이 이어지고, "개새끼"라는 말 뒤에 "못 잊어"가 이어지는 시인의 도저한 사랑. (188-189)


이렇게 최승자는 여성이라는 주체가 얼마나 아프게 탄생되어야 했는지를, 사랑의 서사를 통하여 아픈 모습 그대로, 실패한 모습 그대로 드러냈던 시인이었다. 아버지를 초월한 여성, 남성의 타자가 아닌 주체로서의 여성,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여성으로서 출생신고를 한, 우리 시대의 첫번째 시인이었다. 시인은 악을 쓰며 산고를 치르는 어미였고, 동시에 공포 속에서 태어나고 있는 아기였고, 동시에 아기를 받아 안던 산파였다. 혼자서 그렇게 태어났다. (190) 


최승자가 이끌었던 1980년대의 시는 "시적 화자라는 하나의 가면persona이 없어져버렸"던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한 공통분모였다. “기존의 시적 관습보다는 자기 진술의 진실성에서 시적 감동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 민얼굴의 시들은 "진실의 추한 모습을 드러낸 용 기와 순수에만 가치를 둘 수는 없다. 발설된 추의 세계와 발설하는 자의 용감하고 아름다운 태도, 이 둘의 격차'가 주는 충격이 최승자 시의 진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 격차에 관해서라면, 이 시집도 여전한 가치를 지닌다. 지독하고 치열했던 열기가 사라진 자리에 표표하고 괴이한 권태가 자리 잡은 것이 다를 뿐이다. (195-196)


파국의 파토스가 문학의 귀결점이라는 사실에 그 많은 시인이 동의해왔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파국의 파토스를 끝까지 수행해온 시인을 우리는 목격해본 적이 없다. 최승자는 끝까지 살아남아, 이 길에서 이탈하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 되어 있다. "그가 겪은 정신적 위기는 개인적 위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시가 멀지 않아 감당해야 할 위기이기도" 하다는 걸, 우리는 최승자의 곁에서 예감할 수 있다. (204-205)


최승자의 시세계를 부정의 시학 또는 비극의 시학으로 읽는 것은, 방법적 부정과 방법적 비극으로 읽는 것은, 비천한 시어와 비천한 주체의 카니발로 읽는 것은, 추한 현실을 지독한 직시로 보여주었다고 읽는 것은 대부분 정당하지만 부분적으로는 부당하다. 부정과 비극이, 비천함과 추함과 독함이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되었으며 어떤 예감에 의해 추동되었는지, 지금에 와서야 실마리가 제대로 보이는 까닭이다. 최승자만의 혹독한 예감이 리얼리티가 되어 있는 지금, 최승자가 '아픈 자'라면 우리는 병들었지만 아프지 않은 자라고 표현해야 옳지 않을까. 최승자가 혹독한 예감에 시달리는 예민하고 건강한 시인이었고 자신의 상태에 대한 자각이 누구보다 정확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지금의 우리는 도대체 누구일까.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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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진주의 결말」과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을 읽음. 「진주의 결말」은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한 사람을 이해하게 되면서 이 세계가 명료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실상은 카오스일 뿐 우리가 상대를 이해한다는 착각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이라는 이야기.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85)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 역시 기만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저의 수많은 모습 중에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것들만 모아 저라는 이미지를 만들었으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앞뒤가 척척 맞겠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그것은 기만입니다. 실제의 제 삶은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지지 않거든요. 제가 선택한 제가 그럴싸한 이야기였듯이 선생님이 분석한 저 역시 또다른 그럴싸한 이야기겠지요. <사건의 결말> 제작진이 편집한 저 역시 하나의 이야기이고요. 그러나 아시겠지만, 저는 그 어떤 이야기도 아니에요. 저는 혼돈 그 자체입니다. 카오스 그 자체예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87)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 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달을 향해 걷는 것처럼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이라고. 그래서 저는 치매에 걸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아빠의 마음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한 거예요. 그래서 불을 질렀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어요. 이해만 있었죠. 소방관들이 우리집의 유리창을 깨는 걸 보고 제 속이 얼마나 시원했게요, 가슴이 얼마나 벅차올랐게요. 저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거든요. 그 순간 전 모든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워진 거예요." (97)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은 한 사람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시간마저 광대하게 느껴지는 고비사막에서, 시간의 흐름이 바위를 깎아내듯 정미에 대한 그리움도 깎이고 파묻히리라는 깨달음을 얻은 인간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


고비사막에서 보는 하늘에는 시간적인 광대함도 담겨 있었다. 밤이 되자 어둠 속에서 고대의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사시대, 혹은 아직 인간이 지구에 나타나기 이전의 원시적인 하늘. 별들만이 가득한 하늘. 광활하게 펼쳐진 공간처럼 시간 역시 계속 뻗어나갔다. 과거로, 더 먼 과거로, 시간이 시작되던 그 순간까지. 그렇게 시간은 쌓이고 또 쌓여 한없이 깊어졌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사막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에서 본 ‘깊은 시간deep time’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깊은 시간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107)

과거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익숙한 아름다움, 무엇인지 그 정체를 잘 알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면 미래의 아름다움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아름다움,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모순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러니까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아름다움이다. 이 미래의, 두렵지만 우리를 매혹시키는 아름다움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건 우리에게 밤이 찾아와 피로해진 우리 육체가 잠들 때다. 과거라는 이름의 유령들은 잠든 우리 곁을 지키지만, 이제 우리는 거기에 없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깨어난다. (108)


"글쎄. 난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고 생각해. 지금 슬퍼서 우는 사람에게도. 우리는 모든 걸 이야기로 만들 수 있으니까. 이야기 덕분에 만물은 끝없이 진화하고 있어. 하지만 난 비관주의자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으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 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어. 그게 나의 믿음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 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 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 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120-121)


24.11.14.

「엄마 없는 아이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사랑의 단상 2014」를 읽음.
「엄마 없는 아이들」은 대학생 시절 연극 동아리에서 잠시 만나 동질감으로 이어졌던 감정과 상실의 감정이 우연한 만남으로 떠오르게 된 이야기.


태어날 때 엄마가 필요했던 것처럼, 죽을 때도 누군가 필요한 것일까? 기쁨으로 탄생을 확인해준 사람처럼, 슬픔으로 죽음을 확인해줄 사람.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죽 음을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음은 인식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유예된다. 죽어가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살아 있는 것이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 (133)

명준이 이제는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얼굴은 유동한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에 따라 조금씩 과거의 얼굴에서 미래의 얼굴로 바뀌어간다. 그렇게 우리의 얼굴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거기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게 예술이 하는 일이라고도. 배우는 표정으로 그 시간적 간극을 압축해 조명 아래에서 드러내 보인다. 현재의 얼굴에 과거를, 또 미래를 모두 담고서. 얼굴의 유동적 가능성을 믿지 않으면 연기는 불가능하다. 무대에 오르기 전, 배우의 얼굴은 빈 캔버스와 같아야 한다. 젊음과 늙음, 남자와 여자, 인간과 동물, 생물과 무생물이 공존하는 가능성의 얼굴. 그러다가 번개의 번쩍임에 의해 어둠 속의 얼굴이 일순간 드러나듯이 연기를 통해 어떤 표정이 노출된다. 인식적 클로즈업. 그리고 알아봄. 그 모든 사랑의 발생학. (142-143)

봄의 울음과 달리 슬픈 감정은 전혀 없었다. 물론 상실감 은 있었다. 연극이 끝났다는 것, 더이상의 술자리는 없다는 것. 그리고 엄마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 명준은 그렇게 상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그 울음은, 말하자면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의 울음이었다. 그가 늘 믿어온 대로 인생의 지혜가 아이러니의 형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면,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었다. 그렇게 엄마 없는 첫 여름을 그는 영영 떠나보냈다. (156)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역시 어느 시절 우연히 일본에 가서 남긴 자신의 메모가 어떤 사람의 죽음을 막았다는, 그것을 2014년 4월 16일에 일본으로 가서 공연을 하며 알았다는 이야기.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181) 찰나의 연인이 남긴 사랑과 그 흔적이 누군가의 기억에 남고 그것이 사람을 살게 한다는 이야기라면, 기억한다는 것은 사랑에 더 가까워지는 행동일까? 사랑하고 살아지는.


그러다가 나는 후쿠다 준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어서, '날개를 주세요‘라고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유복하게 살기도 했고, 고향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자살하려 했다가도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어느 시점부터인가 줄곧 나를,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나를 기억하게 된 일에 대해서 생각했어.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181)

「사랑의 단상 2014」는 제목을 보자마자 롤랑 바르트를 떠올렸지만 그것은 아니었고, 사랑의 찌질하고 지난하고 불타올랐던 과정과 결과, 그리고 이후의 영향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모음. ‘사랑해’에 대한 검색 기록에 이르면 마음을 울컥하고 울렁거리지만 이 연결이 자연스러운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예전의 나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거기 돌아갈 수 있는, 예전의 나 같은 건 없다는 걸 지훈은 그때서야 깨달았다.
애당초 원해서 빠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원한다고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192)


“언제나 마음이 유죄지."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사랑이 저물기 시작하자, 한창 사랑할 때는 잘 보이지도 않았던 마음이 점점 길어졌다. 길어진 마음은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미워한다고도 말하고. 알겠다고도 말하고, 모르겠다고도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고, 말만 하고.

마음은 언제나 늦되기 때문에 유죄다. (196)


잊지 말 것. 영화를 보며 지훈은 중얼거렸다. 용기를 낸다는 것은, 언제나 사랑할 용기를 낸다는 뜻이라는 것을. 두려움의 반대말은 사랑이라는 것을. (204)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210-211)

24.11.17.














군산의 한 카페에서 『희랍어 시간』을 읽기 시작. 언어에 대한 기민한 감각을 가진 주인공의 상념에서 사고와 음성과 언어 사이의 괴리에 대해 생각한다. 사고를 그대로 담기에 음성은 너무 느리고, 이를 담아내야 할 언어는 그릇이 너무 좁다. 한강 특유의 곡진하고 우묵한 감정은 여기서도 여전하고, 종종 읽으며 강렬한 이미지를 사용한 비유에 놀라기도 하며 읽는다. 두번째로 목소리를 읽은 여자와 눈이 멀어가는 남자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 단편인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를 읽음. 작품집의 첫 작품이었던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고독의 삶”을 통해 우리들이 공통으로 가진 시원을 찾는 것, 그리고 과거를 살고 미래를 사는 것. 과거의 우리를 생각하듯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는 것은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 닮았다. 표제작이 개인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 작품은 더 넓어진 느낌. 세 명의 바르바라의 이야기가 연결되며 나아가는 결론은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키고 정신의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러므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고,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는 것.


"나의 삶이 나의 삶으로 끝난다면야 이 인생은 탄생이라는 절정에서 시작해 차츰 죽음이라는 암흑 속으로 몰락하는 과정이 되겠지. 사실, 인생에 그런 일면이 없지는 않아. 육체에 고립된 삶이 바로 그렇지. 과학이 발달해 새 몸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다면 비관 같은 건 없을 거야. 하지만 육체를 가진 우리는 필멸하지. 늙어서 몸이 삐걱대고 병에 걸리면 그 사실을 확실히 알게 돼. 그러니 늙은 몸의 비관주의는 피할 길이 없어. 하지만 인간에게는 또한 정신의 삶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들려줬던 루이 라벨의 말, 고립과 고독의 차이가 생각나는가?"

"예, 여기 노트 맨 앞에 적어놓았어요.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 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바로 그거야. 정신의 삶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고독의 삶을 뜻하지. 개별성에서 멀어진 뒤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은 얼마간 서로 겹쳐져 있다는 거야. 시간적으로도 겹쳐지고, 공간적으로도 겹쳐지지.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삶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정신의 삶은 조금 더 지속된다네.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팔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이백사십 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을 거야." (230-231)


우리 정신의 삶이 과거로 팔십 년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의 뜻이 여기에 있다네. 나는 1940년대를 기억하고 있어. 그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지금까지 증언했잖아. 지금 만약 내 곁에 열 살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나를 통해 팔십여 년 전의 일들을 역사가 아닌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그렇다면 그 아이의 손자는 이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경험한 시각으로 내가 겪은 1940년대의 일들을 바라볼 수 있을 거야. 거기에 비관이 깃들 여지가 있겠는가? 그렇게 나는 지금 이백 년을 경험한 사람의 시각으로 1801년 신유박해를 바라보고 있다네. 이승훈을, 정약용을, 이벽을. 오직 연민과 사랑이 있을 뿐, 여기에 비관이 깃들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 정신의 삶이 백 년을 넘지 못하고 비관으로 빠져드는 까닭은 인간의 인식은 그 인식만은 대상으로 삼지 못해 그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 눈이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234-235)


“그래서 거울이 있잖아요.”

"그래, 거울을 보면 돼. 거울은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쪽으로 되돌리지. 그럼 인간의 인식을 안쪽으로 되돌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거울은 뭐냐? 그걸 알려면 자신이 인식한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해. 각자가 보는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그렇다면 존재를 확장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이겠어?"

"세계를 더 많이 인식하는 것인가요?"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거지. 그게 바로 사랑의 정의야. 그렇다면 신의 정의는 모든 이를 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일 수밖에 없겠지. 가능한 모든 세계를 인식하는 게 바로 신일 테니까. 우리가 신이 되어 모든 세계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수는 있어. 우리의 기억은 시공간적으로 겹쳐져 있으니까. 조부의 기억은 증조부의 삶으로 이어지고, 증조부의 기억은 어린 시절에 만난 신유박해를 기억하는 칠십 노인의 삶으로 이어지지. 그리고 증조부가 어릴 때 들은 바르바라 이야기가 내 막내 여동생의 세례명으로 이어진다는 것. 이런 식으로 육체가 죽은 뒤에도 정신의 삶은 계속 되는 것이라네." (235-236)


할아버지의 말대로 과거의 우리는 이토록 또렷하게 생 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는 건 불가능한 것일까? 그럼에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게 할아버지의 최종적인 깨달음이었다. (240)


생각이란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걱정과 슬픔,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이어질 뿐이지만, 그 생각이 사라질 때 비로소 정신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 정신의 삶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서로 겹쳐지며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 현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매 순간 육신의 삶으로 되돌아가 다시 기뻐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화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겹쳐진 정신의 삶, 그 기저에 현존하는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노력하기로 했지. 이 삶에 감사하기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기로.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기로. (242)















작가의 말까지 다 읽은 후 과거의 나는 김연수 소설에 어떤 평가를 남겼는지 확인하고자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리뷰를 다시 보았다. 모든 단편의 줄거리가 기억나진 않지만 전반적인 느낌은 기억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전체적으로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더 원숙해진 느낌인데(주제적인 부분도 그렇고 이를 풀어내는 방식도 그렇다), ‘「뿌넝숴」를 넘는 작품이 있었나?’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내 나름대로 세워둔 평가의 바로미터에서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하게 된 작품집. 『소설가의 일』에서 서사적으로 인생을 두 번 산다고 말했던 김연수는 이제 우리는 인생을 세 번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년의 푸코는 '자기 배려'를 위한 주체성에 골몰했다. 1981~1982년에 콜레주드프랑스에서 한 강의를 엮은 책에서 내가 읽은 건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단단한 주체성의 구조를 만들어내 기 위한 그의 끈질긴 사색과 집념이다. 푸코는 강의 내내 ‘내가 누구인지' 묻는 근대의 주체화 방식을 뒤로하고 ‘내가 무엇일 수 있는지' 묻는 고대의 주체화 방식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인 세계관보다는 내 안에 없는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변형시켜가는 실천적인 세계관으로 살아야 한다고 여긴 푸코에게 '영성spiritualité' 은 철학과 대등한 지적 체계였다. 이때의 영성은 나를 변형시키는 정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자기와의 관계 맺기'와 '자기 돌보기'의 핵심을 의미한다.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는 자신을 아는 것보다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아는 것은 딜레마에 빠지게 하지만 선택하는 것은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게 한다. 하지만 이해는 행동하게 한다. (252-253)


푸코가 절실히 매달렸던 주체화 개념은 김연수의 이번 소설들에서 동시대적인 삶이 품고 있는 질문의 형태로 현재화된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 않고 자신이 누구일 수 있는지 물으며 스스로를 변형시킨다는 말이기도 하다. (253)

이들에게 세번째 삶이란 유한한 인간이 영원을 실천하고 낙관을 확신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이다. 미래가 기준이 되어서 현재를 결정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체를 변형시켜나가는 정신의 삶을 살 수 있다.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던 스토아주의자들은 죽음, 질병, 고통 등과 관련된 참된 원칙들을 발견하고 그에 부합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수련하기 위해 '죽음 명상‘을 했다. 죽음 명상은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 죽음을 현재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 수련의 핵심은 하루하루를 생의 마지막처럼 사는 데 있다. 세네카는 죽음 명상을 가장 많이 수행한 사람으로, 세네카가 사람들과 주고받은 서신에는 그가 미래를 살아내기 위해 연습한 죽음 명상의 구체적인 방법이 나온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미래를 현재화해 삶을 회고할 수 있는 시선을 가짐으로써 자신이 자기 삶의 심판관이 되는 것이다. 시간을 겹쳐 보았던 그는 미래를 가져와 현재를 채우고 과거가 된 미래를 통해 전체를 봤다. 심판관의 눈을 통해 미래에 이르기 전에 먼저 미래를 사는 셈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는 건 기억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억이 흐르는 길을 만들어내는 것뿐이지만 기억의 흐름을 만듦으로써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살 수 있다. 그 긴 시간 속에서, 짧은 시간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목도하는 우리는 세상을 낙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56-257)

한동안 괴로운 마음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했다. 마음의 괴로움 앞에서 내가 무기력했던 이유는 그게 두번째 화살이기 때문이었다. 붓다는 세상에서 겪는 고통을 첫번째 화살에 비유했다. 그리고 첫번째 화살을 뽑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 화살이 어디서 날아 왔는지, 누가 쏘았는지, 왜 내가 이런 대접을 당해야만 하는지 따지다가 다시 맞는 화살을 두번째 화살이라고 말했다. 두번째 화살은 뽑고 난 뒤에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거기 여전히 첫번째 화살이 있으니까. 뭔가를 했는데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으니 두번째 화살 앞에서 사람은 점차 무기력해진다.
그와 달리 첫번째 화살을 뽑고 나면 즉각적으로 기쁨이 찾아온다. 그건 고통이 사라지기 때문에 찾아오는 기쁨, 단순한 기쁨이다.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만족스럽지 않고 때로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세상을 품에 안아야 한다. 그게 바로 첫번째 화살을 뽑는 일이다. 몸은 힘들겠지만 고통과 불만족을 겪어내면 이윽고 단순한 기쁨이 찾아온다. 가을이 되면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싶다. 여기에 단순한 기쁨이 있다. 물론 겨울과 봄과 여름에도 단순한 기쁨은 있다. (27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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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표제작을 읽음. 대학생 때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와 『7번국도 Revisited』를 읽었지만 기억이 아예 없고, 나에게 김연수 단편의 최고치는 「뿌넝숴」로 남아있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가 마지막 독서였기 때문. 표제작은 「뿌넝숴」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김원이라는 사람의 깨달음의 연결고리가 특이해 실소하면서 읽었다. 카지노에서 모든 돈을 잃고 얻은 시간에 대한 깨달음이라니. 과거와 미래 모두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21세기형 ‘카르페 디엠’과 같은 느낌.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는 최근에 읽고 있는 『소설가의 일』이 떠오르기도 했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29)

"아까 김원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했잖아. 둘 중 하나를 계속 선택하는 도박에서는 지면 질수록 그다음에 이길 확률이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면서. 그 남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 약간 안됐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지금 일층 큰방에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인생들이 모여 있어요. 두 분 다 학생인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오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이저리그 투수가 한 말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이기면 조금 배울 수 있지만 지면 모든 걸 배울 수 있다. 지기만 하는 인생도 나쁘지 않아요. 중간에 선택을 바꾸지만 않는다면." (32)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1999년에 내게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미래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과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34-35)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그런 세계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이 병은 낫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이 불안을 모두 떠안겠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오지 않는 것인지 한 번 더 알아보겠다. 이게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가 아닐까. 자신의 불안을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는 용기, 미래에 대한 헛된 약속에 지금을 희생하지 않는 마음, 다시 말해서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태도. (『소설가의 일』, 50-51쪽)


24.11.05.

「난주의 바다 앞에서」 읽기. 황사영의 아내 정난주의 이야기와 손은정이 아닌 손유미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 주제가 겹쳐져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비에도 지지 않고 KO 당하기 직전까지 버티고 버티며. 미야자와 겐지의 「목련」 이야기가 어려웠는데, ‘부처의 선’이란 무엇인가 골몰했지만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죽이고 싶은 아이』 재독. 2편을 읽기 위한 복습의 느낌으로 읽었다. 작년 겨울에 읽었던데 두 인물의 이름부터 가물가물한 이 기억력... 서은과 주연을 둘러싼 인물들의 말들에서 매정하고 무서운 세상의 민낯이 보여 종종 서늘해지는 느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억울한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 있고 한껏 그에게 몰입시키다 반전에 반전을 마지막에 남겨두는 이꽃님 작가의 스타일은 여기서 출발한 건지도(『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에도 반전이 중요하게 작용하긴 한다). 『죽이고 싶은 아이』에서는 마무리가 갑작스럽고 매끄럽지 못하다는 느낌, 반전을 위한 성급한 끝맺음의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에서 좀더 정교해져서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역순으로 작품을 읽었으니, 『죽이고 싶은 아이』에 더 낮은 평가를 줄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과연 2편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


24.11.06.















『죽이고 싶은 아이 2』 완독. 1권에서 이어지는 살인사건의 스토리는 초반부에 바로 밝혀지며 마무리되고, 남은 사람들의 상처 회복기가 주를 이룬다. 2권이 나오게 된 것은 주연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1권에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황폐해진 주연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상처와 죄책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이를 둘러싼 소문과 입방아와 말없는 동조가 얼마나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놓는지에 대한 이야기. 사람을 둘러싼 사람들의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몸서리치면서, 주연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오랫동안 쌓여왔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 감정적으로 흔들리면서 읽었다. 다만 1권에 비해 작가의 직접적인 목소리가 자주 개입되는 것 같다는 부분은 아쉬운 점. 작가도 인물에게 감정적으로 몰입해있어서일까.


24.11.07.

『소설가의 일』 2부 읽기 시작. ‘인생이라는 게 뭐 그따위’이니 처음에는 닥치는 대로 인생을 살고 그 후에 서사적으로 인생을 두 번 사는 것. 언제가 돌이킬 수 없는 다리, 또는 불타는 다리인지 모르니 살아봐야 한다는 것. 20년 동안 좋아할 밴드의 곡을 미리 알고 찾아 들을 수 없으니 지금 좋은 노래를 열심히 듣는 것. 이런 이야기를 플롯 포인트와 3막 구조에 연결시켜 풀어내는 방식이 재치 있다. 김연수 작가의 글을 몇 편 읽어보지 않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야기 작법에서는 예상치 못한 결론으로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이런 지점들을 플롯 포인트Plot Point라고 부른다. 플롯 포인트는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데, 대개의 이야기에는 두 개의 큰 플롯 포인트가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3막 구조인 셈이다. 시드 필드 같은 시나리오 작가는 모든 영화는 시작하고 삼십 분이 지날 무렵에 첫번째 플롯 포인트를 지난다고 말한다. 대개 백이십 분짜리 영화라면 첫 플롯 포인트는 삼십 분에, 두번째 플롯 포인트는 구십 분쯤에 있다. 이 지점을 지나면 이야기의 방향이 크게 바뀌면서 주인공은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특히 첫번째 플롯 포인트를 가리켜 '돌아갈 수 없는 다리' 혹은 '불타는 다리'라고도 부른다. 1막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어떤 사건을 경험하는데, 그러고 나면 다시는 예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91)

서사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산다. 처음에는 그냥 닥치는 대로 살고, 그다음에 결말에 맞춰서 두 번의 플롯 포인트를 찾아내 이야기를 3막 구조로 재배치하는 식으로 한번 더 산다. 인생이 그렇다면, 소설도 마찬가지겠지. 그렇게 해서 소설은 원래 두 번 쓰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하자, "처음부터 잘 쓰지 그랬냐?"라는 사람도 있더라. 그런 말을 들으면 그런가 싶어서 그 사람 얼굴을 쳐다본다. 인생 처음 살면서 ‘지금이 내 인생의 첫번째 플롯 포인트로구나. 이 불타는 다리를 지나면 돌이킬 수가 없으니 최선을 다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기 있구나 싶어서. 처음부터 잘 쓰지 그랬냐고? 아직 결말을 모르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잘 쓰나? 마찬가지다. 내 인생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처음부터 잘 살겠나? 소설을 쓰는 일은 ’인생이라는 게 원래 뭐 그따위'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 하는 일로 시작한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처음부터 잘 사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그건 소설도 마찬가지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소설은 시작된다. (91-92)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반영한다. (한번 더 여러분들을 괴롭힌다면, 그래서 좋은 이야기일수록 핍진성이 풍부하다.) 그러므로 이야기 작법에서는 행동은 반드시 갈등을 일으키고 이 갈등은 주인공을 감정적으로 좌절시킨다고 말한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법구경』을 들춰보면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마라. 미운 사람과 만나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그 다음에 나오는 “사랑에서 근심이 생기고 사랑에서 두려움이 생긴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이야기 작법 중 행동/액션의 운용원칙을 말하는 것 같다. 행동은 갈등을 낳고, 이 갈등은 주인공을 감정적으로 좌절시킨다. (102)

내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이 '행동한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행동한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면, 소설을 쓰는 나 역시 ‘쓴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쓴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소설 쓰기의 절정으로 올라가야만 하리라. 그러니까 먼저 소설가가 되라고 말한다면 순서가 잘못됐다. 소설가라면 플롯의 시작점이 행동이라는 걸 알아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삶이 '쓰기'에서 시작한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그러니 먼저 소설가가 되어야만 소설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먼저 뭔가를 써야만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소설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리에 따라 먼저 뭔가를 쓰고 좌절하고 다시 쓰고 또 좌절하고 그럼에도 다시 쓰는 그 과정을 반복하다가 죽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104)


24.11.09.















지하철에서 『사랑이라니, 선영아』 읽기. 아직 앞부분까지만 읽어서 팔레노프시스와 <얄미운 사람>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까지는 파악을 못하고 있다. 삼각관계인가? 김연수 특유의 고유어들과 사변적인 문장들은 여전하고 이젠 익숙해진 편.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읽기. 소위 말하는 덕질을 ‘구애가 필요치 않은 사랑’으로 정의한 것이 흥미롭다. 사회 제도와 공간이 둘이어야 안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도 그렇고.















쭉 읽으면서 자주 등장하는 책은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아픈가』이다. 『에로스의 종말』에서도 다뤄진 적이 있는데, 어떤 내용일까 잠시 궁금해하며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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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서리북 읽기. 지난 호에 이어서 새롭게 연재되는 ‘고전의 강’ 코너가 눈에 띈다. 이번에는 밀턴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와 『선택할 자유』.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언급했던 경제학자의 저서이기에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라는 마음으로) 조금 더 집중해서 읽었다. 프리드먼이 새뮤얼슨과 서신으로 주고 받은 자유로운 논쟁의 이야기를 볼 때는 그런 학문적 풍토가 부러워지기도 하고.














프리드먼의 사상을 되짚어 보는 것은 그와 관련한 여러 오해를 해소하고,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극복하는 데 그의 사상으로부터 제대로 된 도움을 얻는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흔히 프리드먼은 시장만능주의를 주장한 자유방임주의자로 여겨지지만, 이런 고정관념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지나친 측면이 있다. 부의 소득세를 제안한 것에도 반영되어 있지만 그는 복지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국가의 핵심 임무 중 하나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대표적인 경제 이론인 통화주의(Monetarism)는 정부의 적절한 통화 정책이 경제 안정에 매우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급진적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하고 경제에 어떻게 관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리와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235)

로즈 프리드먼은 밀턴 프리드먼과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 대학원 동기였다. 그러나 가사와 육아 부담 그리고 여성에 대해 폐쇄적인 당시의 학계 상황 등으로 인해 박사 논문 쓰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소비 행태를 분석했던 그녀의 연구는 밀턴 프리드먼이 『소비 함수 이론』을 집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으며, 그가 대중을 대상으로 쓴 글은 대부분 로즈 프리드먼이 정리하고 적절한 사례를 선정하는 등 그녀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로즈 프리드먼의 이같은 기여에 대해 밀턴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는 서문에 밝히는 데 머물렀지만, 『선택할 자유』에서는 공저자로 그녀의 공헌을 명시했다. (240-241)

이 외에도 프리드먼은 언론 기고와 방송 출연을 활발하게 했다. 그중 특히 유명한 것이 1960년대 후반부터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Newsweek)》에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과 정기적으로 번갈아 가며 실었던 칼럼이다. 정부의 적극적 경제 개입을 옹호하는 케인스주의의 대표 학자인 새뮤얼슨과 국가의 자의적인 경제 개입에 반대했던 보수주의자 프리드먼이 당시의 경제 현안을 두고 18년에 걸쳐 전개한 품격 높은 지상 논쟁은 당대에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아직 경제학계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프리드먼의 이름과 사상을 대중에게도 널리 알렸다. 아울러 그의 칼럼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경제 정책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241)

프리드먼은 『선택할 자유』의 서문에서 『선택할 자유』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다른 주제 가운데 상당 부분을 다시 다루고 있으며, 주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지만,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선택할 자유』, 20쪽) 단 내용적 측면에서 두 가지가 추가된 점이 주목할 만한 차이다. 첫째는 인플레이션과 관련한 논의이다.(『선택할 자유』, 9장)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경제는 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PEC)의 석유 가격 인상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는데, 이와 관련한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다룬 내용이 추가되었다. 둘째는 정부와 공무원의 행태에 대한 경제학적 분석을 책 전반에 걸쳐 전개했다. 이는 앤서니 다운스(Anthony Downs),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고든 털럭(Gordon Tullock) 등이 발전시킨 공공 선택 이론(public choice theory)의 연구 성과, 즉 정부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펼치는 중립적 존재가 아니라 공무원이 자신의 승진이나 소속 부처의 이익을 추구하는, 나아가 이익 집단에 의해 포획(capture)되어 국민의 이익보다는 이익 집단을 위해 정책을 펼치는 존재임을 보여 주는 이론적·실증적 분석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244-245)

프리드먼이 대학원에 입학한 193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경제학계는 오늘날과 많이 달라서 경제학 이론에 기초해서 현상을 분석하는 작업보다는 제도에 대한 서술에 가까운 연구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는 경제학 이론에 기초한 현상 분석 그리고 이를 자료에 근거하여 검증하는 실증 분석을 결합한 연구를 지향했다. 이러한 접근은 상당 기간 비주류였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경제학의 일반적 연구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즉 프리드먼과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자들은 단순히 보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 세상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경제학의 연구 방법을 혁신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자본주의와 자유』는 그런 혁신을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한 책이기에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246-247)

『자본주의와 자유』의 중요한 목적은 케인스주의 비판이다. 프리드먼에 따르면 케인스주의, 나아가 사회주의적인 경제 통제는 경제적 자유뿐 아니라 정치적 자유마저도 억압하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 아울러 케인스주의는 시장이 매우 불안정함을 전제하지만, 프리드먼은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케인스주의자들은 시장의 불안정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로 대공황을 들지만, 프리드먼에게 대공황은 시장의 불안정성이 아니라 정부, 보다 구체적으로는 중앙은행이 경기 침체에 맞서 통화 공급을 늘려야 할 시기에 통화량을 크게 줄였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부의 재정 정책과 복지 정책은 많은 경우 비효율적이며 많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프리드먼은 주장했다. (249)

프리드먼이 불평등 완화를 위해 부의 소득세를 제안한 이유는 서로 관련된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째는 이것이 기존의 소득세 제도를 그대로 활용하면 되기 때문에 추가적인 제도 설계 없이도 복지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소득세 제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의 소득을 정부가 파악할 수 있으므로, 소득 수준에 따라 세금을 걷듯이 소득이 일정 수준에 못 미칠 경우 그 액수만큼 정부가 지원하면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부의 소득세 제도를 도입하면 복지 제도 운영에 수반되는 정부의 낭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실시하는 많은 복지 정책은 현물 지급 방식이다 보니 복지 정책 실시를 위해 공무원을 추가로 고용해야 하는 등 부대 비용이 크게 소요되는 반면 복지 혜택이 주어져야 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지급되지 못해서 발생하는 여러 부작용이 존재한다. 하지만 부의 소득세는 기존 소득세 제도를 활용하면 되고 보조금 지급으로 모든 업무가 끝나기 때문에 제도 운영과 관련한 비효율을 크게 줄일 수 있다. (252-253)


24.10.18.














『느티나무 수호대』 완독. 모든 게 완결된 결말은 아니고 진행형임을 암시하며 마무리되었지만 따뜻한 결말. 혹자는 이렇게 문화적 다양성이 넘치는 동네가 한국에 어디 있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를 비현실적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운 것은 최근에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의 서평을 읽은 후이기 때문. 작가가 던지는 우리 사회에 현저한 문제들은 묵직하지만, 이를 어떻게든 풀어내고 헤쳐나가려 좌충우돌 고군분투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밝고 당차다.














『가녀장의 시대』 완독. 각각의 장이 짧고 에피소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속도감 있는 문체와 쿨하고 재치 있는 서술이 인상적. 세 가족의 일상 이야기도 좋지만 군데군데 가부장제의 모순, 새로운 가족 형태에 대한 이야기가 가볍게 다뤄지면서 생각할 거리를 준다. 이슬아의 작품 중 처음 읽는 작품이 소설이 되었는데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게 만든 작가의 필력이 부러웠고, 다른 작품들도 읽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소설에서도 다룬 『새 마음으로』에 손이 간다..


"사람의 자식 된 자로서 어찌 효도를 하지 않으리오."

할아버지가 근엄하게 해설했고 그것은 가부장의 말이었다. 감히 내 말을 부정하는 것이냐는 질문과도 같았다. 말은 우리를 '마치 ~인 듯' 살게 만든다. 언어란 질서이자 권위이기 때문이다. 권위를 잘 믿는 이들은 쉽게 속는 자들이기도 하다. 웬만해선 속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속지 않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방황하게 된다. 세계를 송두리째로 이상하게 여기고 만다. 어린 슬아는 선택해야 했다. 속을까 말까. (9)


자신에 관한 긴 글을 듣자 오랜 서러움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슬아의 해설과 함께 어떤 시간이 보기 좋게 떠나갔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멀어져야만 얻게 되는 자유였다. 고정된 기억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존자에 관한 여러 개의 진실이 시골집 거실에 차곡차곡 놓였다. 마당에서는 배추들이 절여지는 중이었다. (109)


이런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하루 두 편씩 글을 쓰는데 딱 세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세 명의 독자가 식탁에 모여앉아 글을 읽는다. 피식거릴 수도 눈가가 촉촉해질 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읽기가 끝나면 독자는 식탁을 떠난다. 글쓴이는 혼자 남아 글을 치운다. 식탁 위에 놓였던 문장이 언제까지 기억될까?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
그랬어도 슬아는 계속 작가일 수 있었을까? 허무함을 견디며 반복할 수 있었을까? 설거지를 끝낸 개수대처럼 깨끗하게 비워진 문서를 마주하고도 매번 새 이야기를 쓸 힘이 차올랐을까? 오직 서너 사람을 위해서 정말로 그럴 수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 (228)


"무화과가 다 익었네. 우리 대표님은 글쓰느라 마당에 무슨 열매가 열렸는지도 모르시겠죠?"

복희가 기쁜 마음으로 무화과를 딴다. 복희에게 아름다움이란 계절의 흐름, 맑은 날에나 궂은날에나 자라기를 포기하지 않는 존재들. 웅이에게 아름다움이란 슬픔과 기쁨의 극치를 다 아는 가수의 목소리. 밥하고 글쓰는 두 여자. 슬아에게 아름다움이란 단정하고 힘있는 언어, 그리고 동료가 된 모부의 뒷모습.

지구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은 무엇보다 좋은 팀이 되고자 한다. 가족일수록 그래야 한다는 걸 잊지 않으면서. (308)



24.10.20.















도봉산 쪽 카페에서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읽기. 프롤로그를 읽는 순간 ‘아, 이 책은 내가 좋아하겠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그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 “멜로”로서의 사랑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랑의 양태에 대한 다양한 단상들에 오래 눈길이 남아 줄곧 표시를 해두었다. 나에게 사랑이라는 주제는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 끝없이 변화하고 증식하는 무엇이다.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들을 만나서 반갑고, 골똘히 생각해보게 하는 말들이어서 반갑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들이어서 반갑다.


멜로. 원래는 '노래'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멜로드라마는 노래가 곁들여진 연극이 그 기원이다. 프랑스혁명 이후부터 홍행하기 시작한 멜로드라마는 기존의 정통극과 달리 통속성과 오락성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 통속성과 오락성은 멜로드라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스토리텔링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이후로 대중이 가장 잘 몰입하고 가장 손쉽게 음미하는 소재가 되었다. (9-10)

멜로드라마처럼 사랑을 도구로 삼아 사랑을 소비해 온 문화들을 우선 사랑의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 사랑을 낭만적 영역이라 치부하고 탐구를 외면해온 시선 역시 사랑의 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멜로드라마의 세례를 받고서 허구적인 사랑 놀음에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사이에, 우리는 그와 비슷한 격정적인 감정만을 사랑이라며 동경해왔다. 심정이 짜릿한 설렘과 심장이 저릿한 통증을 함께 겪고 싶다고 막연하게 사랑을 꿈꾸지는 않았을까. 거기에 어떤 약속과 어떤 책무가 뒤따르는지에 대한 예상은 그다음 순위의 관심으로 미뤄놓지는 않았을까. (10)


나는 사랑에 무능력했던 나의 경험들이 사랑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에서 기인되었다고 생각해왔다. 언젠간 이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을 멜로로 연결 짓고 식상해하던 습관이 사랑에 대한 결례라는 걸 우선 알아채야 했다. 사랑의 적들은 사랑의 반대편에 있지 않고 사랑의 내부에 매복해 있다는 것도 알아채야 했다. 사랑의 적들이 겹겹이 덧씌워진 채로 사랑은 본래의 얼굴을 잃은 지 오래되어 보였다. 사랑에 대하여 무지한 채로도 사랑을 했던 나 같은 이들이, 사랑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으로써 사랑을 소외시켜왔던 것이다. (12-13)


서로를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좋아할 수 없는 사람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가 가족에게는 있다. 이 당위가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보장해주면 좋으련만, 사랑이 지닌 위험으로 기울 때가 많다. 그래서 타고난 사랑의 능력을 훼손당하기도 하고, 인간을 무의식적으로 불신하기도 하며, 미지에 대한 당연한 불안에 내성이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사랑의 압력과 폭력에서 기인된 트라우마가 심장 깊숙이 각인되어버리기도 한다. 오래된 제도로서의 가족은 서로를 계속해서 희생해야만 존속될 수 있다. 개인의 서사가 두려움 없이 전달되고 이해되며 존중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39)


좋아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남들에게 빈축을 살 만한 것일 때에 좋아하는 마음을 쉽게 철회할 수 있는 애호의 세계. 준거집단의 기준에 편입돼야 마음이 편하고 유행을 따라야 뒤처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 애호의 세계. 애호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확인하는 기회를 잃는 대신, 같은 걸 좋아함으로써 소속감을 형성하는 기회를 얻는다. 판에 박힌 것을 싫어하면서도 스스로 판 속으로 들어간다. (48)


사람들은 로맨스 서사의 판타지로 배워온 사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하는 사랑은 이토록 구질구질한데 영화 속 사랑은 감미롭기만 하니, 번번이 내가 어딘가 잘못된 사람처럼만 느껴진다. 사랑은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만 같고, 내가 하고 있는 이것은 어떤 실수이거나 고행이거나 투쟁처럼만 느껴진다. (56-57)


상처를 남기고 종결된 사랑은 대개 초라함과 추악 사이에 놓여 있다. 상처를 남기지 않고 종결된 사랑은 별로 없다. 사별의 경우가 아니고서는 사랑했던 사람을, 사랑이 시작될 때의 그 아름답던 사람으로 기억해주는 이 역시 별로 없다. 이미 초라함과 추악 사이에 버려진 사랑을 스스로의 발화로 인해 보다 더 초라하고 보다 더 추악한 것으로 재편하면서까지 자신의 실책을 덮어버리려 해서 는 안 된다. 차라리 지나간 사랑은 봉인해야 옳다. 입을 다무는 게 낫다. 마치 처음 포옹을 하던 그 순간처럼,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온전히 포갬으로. (83)



24.10.21.

서리북 15호 완독. 아카키와 바틀비와 잠자를 비교해보는 글쓰기를 흥미롭게 보았다.
















아카키는 우리 주변에서 더러 마주치는, 자족적이고 평온하고 바로 그 때문에 음산한 일 중독자의 느낌을 준다. 정서 실력도 나쁘지 않아 해고될 위험도 없으니 일체유심조, 정신 승리가 따로 없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에게 북국의 추위(자연환경)와 만년 9급 관리(사회적 지위)와 빼앗긴 외투(속된 물건) 등 환유의 굴레를 씌우고 삭막한 정조에 붙박아 둔다. "그까짓 외투 때문에!"라고 말들 하지만 외투 자리에 다른 것을 넣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박찬욱, 《헤어질 결심》) 요컨대 외투는 그 본질상 한시적인 우리의 삶을 일순간이나마 유의미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고갱이 같은 존재다. (261)

물론, 인간이 인간이기를 멈추고 벌레가 되는 순간 비로소 인간다움을 응시하게 된다는 역설이 「변신」을 관통한다. 흡사 아카키-유령이 아카키-인간보다 더 생기로운 것처럼, 말없이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정서만 하던 바틀비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면벽 공상에 빠져 있는 바틀비가 더 인간다운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필경사는 책상 앞에 앉아 정서할 때, 영업사원은 구매자를 찾아다니며 물건을 팔 때 비로소 사회적 자아를 실현한다. 자,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빡빡한 인간-영업사원의 삶과 온종일 방바닥과 벽과 천정을 산책하는 인간-벌레의 삶 중 어떤 것이 더 살아 있음에 가까운가. (266)

소설의 화법과 문체를 고려하더라도 그 자체로 어딘가 특이한 아카키, 바틀비와 달리 잠자는 너무나 평범한 인물이다. 주인은 저 파놉티콘처럼 존재하는 척만 해도 노예가 알아서 제 몸을 채찍질한다. 한편 주인은 주인대로 '법 앞'의 말단 문지기처럼 '피로 사회'(한병철)의 엄정한 위계질서 안에서 자신을 소진한다. 「외투」와 「필경사 바틀비」가 주인-사회와의 충돌에서 도드라지는 노예-인물의 개성적 성격에 주목한다면, 「변신」은 평범과 정상과 상식과 중치의 육화인 인물을 덮친 비극의 보편적 부조리를 강조한다. 잠자의 오묘함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즉, 잠자는 그저 '인간 아무나'고 그 '인간 아무나'는 누구나 하루아침에 벌레가 될 수 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인간입니다." 끝으로 요제프 K의 "개 같군!"이라는 마지막 탄식을 변주해도 재밌겠다. "영락없이 말똥구리 신세군!" 언제 읽어도 아리송하고 격하게 웃긴 이 느낌, 카프카적인 것(Kafkaesque)'이 참 좋다. (267-268)















『소설가의 일』 읽기. 외숙모의 시에서 출발해 어머니의 뉴욕제과점을 지나 매일 쓰는 작가로 넘어가는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워 감탄하며 읽었다. “매일매일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마치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신인’으로 태어난다는 것. 뒤에 나오는 휴게소의 인사기계에서 재능으로 넘어가는 부분도 필력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결국 재능은 인사기계처럼 가짜를 만들 뿐, 소설가를 대신해서 써주지는 않는다는 것. 결국 쓰는 것은 소설가의 몫이라는 이야기로 읽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있으면, 지금 뭔가를 쓰고 있다면, 그는 ‘소설가'라는 그 문장의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프루스트 씨는 그때 뭔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이 뭐든, 내가 이해하든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든, 그는 뭔가를 썼고, 그의 시간은 11권의 책으로 남았다. 소설가의 일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 일생 앞에서는 다작이라는 말도 무의미하고, 수면용 소설이라는 말도 무의미하다. 그저 어떤 시간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자신이 경험한 시간의 흐름을 소설로 보여줄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그는 소설가가 된다.  (12)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19)


휴게소에서 인사기계를 마주 보고 서 있을 때, 검은 집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티모시가 외치는 장면을 떠올렸다. 나는 그 검은 집이라는 게 소설가의 재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술집에 모여서 농담거리로 삼을 뿐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들여다볼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 집과 같은 것. 소설가가 재능에 대해서 말할 때는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을 때다. 소설가에게 재능이란 인사기계나 기도기계 같은 것, 그러니까 마치 나 대신에 소설을 써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소설기계 같은 것이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이건 호두과자기계와 다른 종류의 기계다. 재능이라는 소설기계는 소설을 만들지 않는다. 소설기계 역시 소설가의 죄책감이나 꺼림칙함을 덜어주기 위해서 고안된 기계다. 소설을 쓰지 않기 위한 방법 중에서 재능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도 죄책감이 없는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23)


처음 소설을 쓰려고 앉았을 때, 나는 무엇도 감각하지 못하는 영혼과 같다. 그래서 무엇이든 감각하려고 애를 쓴다. 그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빠르게' 쓰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조금씩 소설 속의 세계는 작가에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초고는 그렇게 쓰여진다. (33)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내가 찾아내려고 하는 건 디테일이다. 우리말로는 세부 묘사라고 하는데, 소설에서는 세부 정보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녀는 질투심이 강한 여자였다"라는 관념에 세부 정보라는 빛을 쪼이면 소설의 문장이 나온다. 질투심이 강한 여자의 눈빛은 어떻게 생겼는가? 질투심이 강한 여자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가? 질투심이 강한 여자는 언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가? 소설의 문장이라는 건 이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그러니 소설가가 시놉시스를 쓰거나 줄거리 요약을 하거나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면, 원칙적으로는 소설을 쓰는 게 아닌 셈이다. (35)

이야기는 이 세계를 보고 듣고 느낀 주인공이 자신에게 없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때 생겨난다. 예컨대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미녀에게 첫눈에 푹 빠진 은행원이 있다고 치자. 평상시처럼 졸고 있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그래서 자기 마음을 표현했다가 단번에 차였다. 이때 은행원이 그 미녀의 해골을 상상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소설이 망하는 거지. 그러니까 소설가는 이 세상이 더 많은 번뇌망상으로 가득하기를 바라는, 아무튼, 어딘가 좀 비뚤어진 인간일 수밖에 없다.

앞에서 소개한 공식이 기억나는가? 감각적으로 구성된 캐릭터에게 욕망을 부여한 뒤에 방해물로 그 욕망이 실현되는 것을 저지하면 이야기가 발생한다던 그 공식. 이걸 불교 경전 식으로 말하자면, 고생길이란 보고 듣고 느낄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불우해진 중생이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간절히 원하건만 세상의 갖은 방해로 그걸 얻지 못하는 과정을 뜻한다. 그러니 할리우드의 이야기 공식은 이렇게 바꿀 수 있겠다.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 그에게 없는 것) / 세상의 갖은 방해= 생고생(하는 이야기) (40)


24.10.22.
















도서관에 남아있는 한강 작가의 단편집 『노랑무늬영원』 읽기. 첫 단편인 「회복하는 인간」부터 작가의 도장이 진하게 찍혀있는 느낌을 받는다. 사랑했지만 혈연이어서 보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치부와 수치심에 대하여. 까닭도 모르게 혈연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끝내 남은 상처가 낫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의 설움에 대하여 생각해본 시간.


『소설가의 일』 읽기. 소설 쓰기의 방법에 대해 이렇게 쉽고 물 흐르듯 쓴 책이 있었나 싶다. 작법서를 따로 찾아 읽은 적은 없지만. 작가의 영업 비밀을 몰래 엿보는 것 같은 느낌. ‘왜’ 상자와 ‘어떻게’ 상자의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이 모든 생고생이 내게 없는 것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나의 장점, 내가 사랑하는 것들 때문에 생긴다는 걸 아는 순간, 구멍에 불과했던 단순한 욕망은 아름다운 고리의 모양을 지닌 복잡한 동기가 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이 인생을 이끌 때, 이야기는 정교해지고 깊어진다. (47)


그러므로 현대소설의 주인공이 온몸으로 끌어안아야만 하는 것은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이 불안이다. 만약 『춘향전』처럼 만난 첫날에 사랑가 부르며 여주인공 옷고름 푸는, 참으로 명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면, 자신이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원망해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인간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보다 구닥다리로 느껴지는 소설은 없다. 설사 그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다고 해도 불안 속에서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주인공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에 그런 주인공에게 우리의 마음이 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그런 세계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이 병은 낫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이 불안을 모두 떠안겠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오지 않는 것인지 한 번 더 알아보겠다. 이게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가 아닐까. 자신의 불안을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는 용기, 미래에 대한 헛된 약속에 지금을 희생하지 않는 마음, 다시 말해서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태도. (50-51, 강조는 인용자)

어떤 사람을 둘러싼 세계에서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를 제거하면 그는 무기력해진다. 그렇다면 이건 우리 인생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사춘기가 지나면서 우리 인생도 조금씩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니까.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는 건 아니라거나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잘 살지는 못한다는 걸 우리는 깨달아간다. 해서 무기력은 현대인의 기본적 소양이다. 그런 무기력의 양대 산맥이 바로 현대 연애와 암 선고다. 내 뜻과 무관하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질병과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연인을 견디는 일이 현대소설의 본질이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결국 현대소설의 윤리는 불안을 이겨내고 타자와 공존하는 그 용기에 있는 셈이다. 이 용기는 두번째 그룹의 개들과 마찬가지의 처지이면서도, 그러니까 모두들 안 된다고 말하고, 또 자신부터가 여러 번 실패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뭐라도 해보겠다고 나설 때 비롯한다. 용기는 동사와 결합할 때만 유효하다. 제 아무리 사소하다고 해도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건 용기가 될 수 없다. (52-53)

이야기의 관점에서는 수많은 백스토리와 인물을 포함하고 있는 게 가장 좋은 동기다. 언제나처럼. 그렇다면 이 삶도 마찬가지다. 이 삶이 멋진 이야기가 되려면 우리는 무기력에 젖은 세상에 맞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단순히 다른 삶을 꿈꾸는 욕망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한다. 불안을 떠안고 타자를 견디고 실패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지금 초고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은 소설가에게 필요한 말은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하자는 것이다. (54)

하지만 질문은 독창적일 필요가 없다. 그저 상자 두 개를 상상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양손을 이 상자 두 개에 넣고 ‘왜?'와 ’어떻게?'가 쓰여진 카드를 꺼내기만 하면 우리는 소설 창작의 절반을 한 셈이다. 눈치챘을지 모르 지만, '왜?'라는 의문사로 알아낸 대답들은 모두 백스토리가 된다. 이 백스토리는 등장인물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어떻게?'라는 의문사로 알아낸 대답들은 모두 디테일이 된다. 이 디테일은 플롯을 진행시킨다. 그리고 백스토리와 디테일을 갖추면, 그 어떤 인물도 악한이 될 수 없다. (60)


24.10.23.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다 읽다. 하와이 이주민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김영하 작가의 『검은 꽃』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세 여성이 겪는 풍파가 가득한 서사가 끊이지 않아 순식간에 읽게 된다. 인물들의 굴곡진 삶에 나도 함께 감정의 파도를 타며 읽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전형적인 이민자 소설에 가깝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 버들의 자식들의 목소리에서 다른 소설과의 구별점을 찾았고, 특히 정호-데이비드의 말은 내가 청소년소설을 읽을 때 가지던 예상을 깨는 말이었다. 현대로 치면 세대 갈등이 연상되는 대목이었다고 해야 할까? 갑자기 영화 《도쿄 소나타》의 형이 미군에 입대하겠다고 고집부리는 장면이 떠오른 건 왜일까?


24.10.24.

한강의 『노랑무늬영원』 마저 읽기. 개정판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소개만 보았을 때는 단편의 순서가 많이 달라졌다. 오늘 읽은 건 「에우로파」, 「밝아지기 전에」, 「왼손」. 「파란 돌」을 읽다가 멈춤.


「에우로파」에서 눈에 띄는 내용은 화자의 성 정체성과 목성의 위성 에우로파(얼음으로 뒤덮인)에 대한 노래이지만, 정체성의 혼란, 사랑과 동일시를 오가는 감정의 외줄타기, 서로 다른 이유로 마음에 새겨진 상처들을 우회하며 오가는 대화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진한 감정의 발자국을 남기며 독자를 이끈다. 단편들을 쭉 읽으면서 이 작품들에서 중요한 건 이야기가 아니라 인물들이 명백히 드러내지 않는 상처와 감정의 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골똘히’라는 부사가 잘 어울린다.


「밝아지기 전에」__화자의 삶과 은희 언니의 삶을 나란히 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일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내면의 상처들을 품고 살며 상대방의 삶에서 자신에게 없는 것 같은 단단함을 보는 삶. 서로의 막연한 꿈에서 말하지 않은 부분을 읽어내지만 그걸 드러내지 않는 서로에 대한 존중.


「왼손」__무의식에 내재된 다양한 (금지된) 욕망을 왼손이 의식을 거스르며 실행해나가는 과정은 공포스럽고 놀랍기도 하지만, 자기파괴적인 결말을 포함해 어딘가에서 본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4.10.25.~26.

『노랑무늬영원』 읽기. 「파란 돌」의 뒷부분을 마저 읽고 「노랑무늬영원」을 이틀 동안 읽음.


「파란 돌」__한강 작가의 소설 속 화자들의 목소리는 왜 이리도 다들 말로 다 표현하기도 어려운 설움을 목소리에 꾹꾹 눌러담고 있나. 어느 순간 삶의 어떤 고비를 겪은 화자가 어린 시절 잠시 마주쳤던 당신께 보내는 편지. 인생을 놓고 보면 잠깐이었지만 강렬했던, 상처 많은 두 사람이 잠시 서로에게 기대었던 이야기.


「노랑무늬영원」__중편 분량의 작품. 소설집의 작품 중 가장 먼저 발표된 작품. 여기까지 읽으니 작품의 정조가 대체로 비슷하다는 느낌도 받는다. 몇 가지 모티브가 반복되기도(길거리에서 차를 몰다 동물을 치게 되거나 혹은 칠 뻔하거나 하는 이미지들). 하지만 가장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읽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미술을 전공했으나 차사고로 양손 모두 힘을 쓰지 못하게 된 화자. 사고 이후로 사랑이 메말라 결혼 생활도 껍데기만 남아버리고, 투명해지고 기민해진 감정과 감각만 남아버린.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진의 존재에 관련된 기억을 쫓아가며 잠시 스쳐갔던 사랑의 감정을, 지금은 메말라서 없어진 사랑을 찾아보려는 몸부림처럼 읽혔다. ‘노랑무늬영원’이라는 학명을 가진 도마뱀의 강렬한 색채, 그리고 화가 Q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강렬한 노랑의 이미지. 마지막에 화자가 손으로, 세계가 힘을 빼앗아버린 그 손으로 찍어내는 노랑. 노랑이 작품 전반에 넘실거린다. 다만 잔멸치의 떼가 나타나는 꿈은, 그 꿈의 반복은 무엇이었을까.


『소설가의 일』 1부 완독. 요약하자면 할리우드의 이야기 공식, ‘왜’ 상자와 ‘어떻게’ 상자, 빈도수 염력사전(적확한 어휘 찾기), 그리고 핍진성.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대소설은 주인공의 동기를 파헤치는 장르다. 그런 점에서 현대소설은 추리소설의 일부다(라고 우기는 건 내가 추리소설이야말로 소설 중의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3)

사실 『주홍색 연구』는 코난 도일의 첫 작품이기 때문에 뒤에 쓴 추리소설에 비해 단점이 많이 지적된다. 예컨대 나를 매료시킨 동기 부분이 대표적으로 지적되는 결함이다. 추리소설의 독자들이 읽기에는 이 부분이 너무 길다. 코난 도일이 동기 부분을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당대의 소설들이 이런 식으로 '현재의 괴기한 사건 + 그 사건의 동기를 말하는 기나긴 멜로드라마 + 괴기함 속에 숨은 자연적 질서를 이해하는 결말'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마담 보바리』도 이런 식으로 추리소설로 재구성할 수 있다.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한 의사 부인의 끔찍한 음독자살 + 왜 마담 보바리는 불륜에 빠져서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됐는가 + 어떤 부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일탈을 보바리즘으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결말.' (64)

나는 사랑이란 행동이 아니라 말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빠른 시간 안에 상대방에 대해 더 구체적인 정보를 더 많이 알아내자면, 그의 행동을 지켜볼 겨를이 없다. 그래서 막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상대방에 대해 더 많이, 더 구체적으로 알수록 우리는 더 빨리 사랑에 빠진다. (70-71)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쓰는 게 소설가에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둘러싼 언어의 세계가 여러 겹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제일 바깥쪽을 추상적이고 큰 단어들, 예컨대 평화, 정치, 슬픔, 절망 따위의 단어들이 단단하게 감싸고 있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구체적이고 작은 단어들이 숨어 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쓸 때. 우리는 대개 제일 바깥에 있는 단어들로 글을 쓴다. ‘5월을 보내는 마음이 슬프다'느니, ’그녀는 질투심이 많다'느니. 자기가 쓴 초고를 보면 누구나 약간의 구토증세를 느끼는데,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이 우주가, 아니, 우리를 둘러싼 언어의 세계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좀 쓸 만한 단어는 그런 너저분한 단어들을 뚫고 가야 나온다. (75)

즉 소설가에게는 두 개의 상자가 있다. 각각 '왜?'와 '어떻게?'라는 의문사가 들어 있는 상자들이다. 세계를 감각하는 인간이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자신에게 없는 뭔가를 얻기 위해서 생고생하는 간단한 이야기를 만든 뒤, 이 상자 속의 의문사들을 하나씩 꺼내 붙이면 질문이 완성된다. 이건 쉽다. 그렇다면 소설가가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은 어떨까? 이제는 빈도수 염력사전을 펼친다. 염력을 이용해서 가능하면 뒤쪽 페이지에 있는 단어와 표현 들을 쓰려고 노력한다. 이건 한 번에 쉽게 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았나? 우리가 사는 우주는 가만히 놔두면 삐딱해지는 곳이라고. 지구가 기울어진 꼴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추상적인 대답이 나온다고 너무 실망하지 말고 생각의 힘을 이용해서 빈도수 염력사전의 뒤쪽에 있는 단어들로 바꿀 생각을 하면 되겠다. (76)

만약 자기가 쓴 초고를 봤는데 토할 것 같다면 그건 소설가의 일거리, 즉 생각할 거리가 많이 생겼다는 뜻이다. 이건 뱃살이 생기거나 방이 더러워지는 일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우리 우주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란 뜻이다. 뱃살이 나왔다고 난 원래 배불뚝이로 태어난 것이라며 절규하거나, 방이 더러워졌다고 왜 나는 사는 방마다 더러워지느냐고 좌절하는 사람만큼이나 이상한 게 처음 쓴 문장이 엉망이라고 재능을 한탄하는 사람들이다. 단번에 명작을 쓰고 싶다면, 시간이 갈수록 방이 깨끗해지는 우주에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77)

이런 이유로 소설을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핍진성은 상상력을 제약하는 방해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완전히 반대라고 생각한다. 핍진성은 소설을 쓰기 위한 최소한의 토대다. 소설가는 구체적인 문장을 넘어서 핍진한 문장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까지가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많은 독자들이 내게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아요"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핍진한 문장보다 구체적인 문장이 더 좋아요'로 이해한다. 물론 구체적인 문장만 해도 대단하다. 하지만 소설가에게는 구체적인 문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이해해주기를. 지금 나는 허구의 세계를 문장으로 창조해서 실제 감동을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소설에 푹 빠진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허구가 아니다. 그게 다 핍진한 문장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캐릭터를 만들고 플롯을 짜는가가 모두 이 핍진성에 기초한다. (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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