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7.















소년이 온다를 다 읽음. 읽으면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이미지를 안긴 것은 5장이었고, 가장 감정적인 에너지가 넘실거리던 부분은 6장이었다. 3장을 제외한 나머지 챕터는 2인칭이거나 화자의 직접적인 목소리가 담기는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독백 역시 작품을 읽는 독자를 향한다는 점에서 모두 2인칭으로 서술할 때의 효과를 가리키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작품을 읽는 당신에게 이 모든 목소리가 닿길 바라는 마음. 작가 후기와 같이 읽히는 에필로그를 마지막으로 읽으면서 여전히 광주는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에 김서린 안경으로 비치는 세상을 볼 때처럼 마음이 산란해졌다.


전구 속 필라멘트처럼 가느다란 신경의 각성을 따라 당신은 눈을 뜬다.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불빛이 침침한 복도와 어두운 응급실 유리문 밖을 둘러본다. 썰물처럼 잠이 밀려나가며 고통의 윤곽이 뚜렷해지는 순간, 어떤 악몽보다 차가운 순간이 다시 왔다. 당신이 겪은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166-167)


오래전 동호와 은숙이 조그만 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당신은 기억한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 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173)


2009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207)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213)


나는 가방을 열었다. 가지고 온 초들을 소년들의 무덤 앞에 차례로 놓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앉아 불을 붙었다. 기도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묵념하지도 않았다. 초들은 느리게 탔다. 소리 없이 일렁이며 주황빛 불꽃 속으로 빨려들어 차츰 우묵해졌다. 한 쪽 발목이 차가워진 것을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의 무덤 앞에 쌓 인 눈 더미 속을 여태 디디고 있었던 것이다. 젖은 양말 속 살갗으로 눈은 천천히 스며들어왔다. 반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215)
















어비를 다 읽음. 남은 단편 4편을 한 번에 쭉 읽었다.


광장 근처_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중적인 심리와 그 모순을 포착해내는 김혜진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이 군데군데 보여서 흥미롭게 보았던 작품. 이후의 작품들과 비교하면 훨씬 더 직접적이다. 온갖 운동을 하고 서명을 받으면서도, “듣고 따라하는 동안엔 모두가 괜찮다고 믿을 법한 말들”(162)을 선창하고 복창하면서도, 가판대도 없이 노점을 열며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이들에겐 조그마한 틈도 내어주지 않으려고”(163) 하는 사람들. 오히려 매일 같이 아이를 맡기고 어딘가 일 같지도 않은 듯한 일을 하러 떠나는 남자와 투덜거리면서도 아이를 맡아주는 화자가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물론 이들에게도 연대는 없고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자 애쓰는 모습만 남아있지만, 그래서 더 씁쓸한 작품. 해설을 인용하자면, “’연대의 가치가 아니라 자기 삶의 최소한의 안위가 보장될 가능성에 투신하는 모습이야말로 이 세대의 자화상”(253).


줄넘기_헤어지고 난 뒤의 상처와 헛헛함을 이기지 못하고 어떻게든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고, 심지어 여자의 집에 찾아가 우편물을 뜯어보는 화자의 모습은 전혀 마음이 가지 않았지만, 노인의 숨소리처럼 고요하고 유일한 리듬”(177) 같은 줄넘기에서 세계를 마주한 인간의 어떤 태도를 본다. 나에게 어둠과 슬픔을 주는 세계에 완강히 저항하진 않더라도, 나만의 박자를 만들어가며 지구에서 잠깐 벗어났다가 금세 되돌아오는 것”(183)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어떻게든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태도.


와와의 문_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고통이나 아픔을 쉽게 생각하고 소비하는지, 그 깊이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어쭙잖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지 돌아보게 되는 작품. 화자는 와와가 겪은 일들을 들어주고 재해에 대해 질문하고, 당신이 지금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며 저항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그는 와와가 겪은 재해를 글감으로 소비하고 싶었을 뿐이고 와와가 겪었을 어려움과 아픔을 깊게 생각해보려 하지도 않는다. 다큐를 보면서 그들의 처지를 안쓰러워하지만 때때로 너무 무능해 보여서 화가 났다”(197)는 그의 말처럼.


비눗방울맨_김혜진 작가의 작품에서 광장이 자주 등장하는 공간이긴 하지만, 유독 광화문 일대가 이 작품집에서 자주 보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시위를 하고 경찰들은 시위를 통제하고 역을 막아버리지만, 화자는 이런 온갖 목소리들에 담긴 메시지보다 자신에게 짐이 되어버린 철수를 어떻게든 너에게 돌려주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광장에서 어떻게든 달라붙어 살아왔을 비눗방울맨의 사연에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한가로울 때는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철수를 잃어버린 뒤에는 짜증을 유발하는 대상이 되어버렸을 뿐.















『지구의 짧은 역사』 1장 읽기.

 















『서양철학사』 다시 읽기 시작. 지난번(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오래되었다)에는 고대 그리스까지만 읽고 끝났고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 



덧) 이후 여행을 떠나면서 비행기 안에서든 여행 중이든 책을 꾸준히 조금씩이라도 읽어보리라 다짐했던 나의 욕심은 이미 가득찬 짐짝 속에 세 권의 책과 크레마를 집어넣게 만들었다. 그리고 2주가 넘는 기간 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그 책들은 돌덩어리처럼 나의 어깨를 짓눌렀으니... 새벽에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뽈뽈거리며 쏘다니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잠시나마 시간이 있을 때는 뻗어버리기 바빴고, 비행기 안에서는 여행기를 쓰거나 잠들거나 둘 중 하나였다. 결국 그 책들은 딱 한 번 펼쳐져본 채 나와 함께 돌아왔고... 다시 일상에 적응하는 동안 책들엔 다시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밀렸던 기록을 남기며 마음을 다잡아 보기로 하고, 지금은 일단 마무리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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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완독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지만 멀티버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인지 작가가 설정한 두 개의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한 세계가 다른 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백말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도 내가 태어나면서 자리하게 된 위치와 관련이 있겠지있었지만 근거 없는 낭설로 한순간에 존재가 지워지는 세계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더 크게 들리는 건 삐삐를 통해 전달되는 연대의 목소리.


 

24.12.31.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완독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 대한 3부가 나에게는 더욱 인상적이었고말미에 등장하는 2045년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불사에 대한 이야기)는 가볍게 읽었다전반적으로 각각의 주제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개괄만 보여주는 교양 강좌의 느낌강의를 책으로 묶었을 때 내가 느끼던 아쉬움들이 그대로 있었다일례로왜 법의학자가 인권주의자의 향기를 더 강하게 내뿜는” 직업인지 저자의 근거를 명확히 찾기가 어려웠다하지만 3부의 연명의료에 대한 저자의 주장과 사례들은 흥미로웠고나름 의미 있는 독서였다고 마무리할 수 있을 듯하다.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이 2014년 8월 전국의 만 20살 이상 1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임종을 원하는 장소로 57.2%가 집을 선택했다다음은 호스피스 완화의료병원요양원 순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통계청 사망 통계에 따르면, 1989년에는 사망 장소로 집이 77.4퍼센트병원이 12.8퍼센트 비율이었으나, 2012년에는 사망 장소로 집이 18.8퍼센트의료기관이 70.1퍼센트사회복지시설 등의 기타가 11.1퍼센트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223)


  우리나라 통계도 있지만실제 미국 통계를 보면 전체 보건 의료 예산의 10~12퍼센트가 삶의 마지막 기간 1년 동안에 쓰인다마지막 한 달 동안 쓰는 비용이 거의 5퍼센트가 넘는다삶의 마지막을 간신히 유지하는 데 어마어마한 돈이 지출되는 것이다그 어마어마한 돈마지막 비용이 바로 중환자실 비용이다몸의 모든 혈관과 모든 구멍에 줄을 달고 생명을 연장하는 데 드는 비용은 사실 굉장히 비싸다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중환자실에서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죽음에 대한 대화가 단절됨으로써 오는 가족 간의 비극그에 대한 안타까움이다특히 죽음을 앞둔 환자가 부모님이라면 어떤 자식이라도 대부분, "우리 부모님 꼭 살려주십시오"라는 이야기를 한다정말 고생 많으셨던 부모님이라서 이렇게 보내드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입원한 경우 대개 말기암 환자이다사실상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필요함에도 환자와 가족은 '죽음'을 두고 대화하지 않는다. (225)


  우리나라는 항암제를 임종 1개월 전에 30.9퍼센트의 환자가 사용한다사실상 임종 1개월 전이면 이제 삶이 얼마 안 남았을 때다이때는 삶의 마지막 정리를 위한 통증 조절이 가장 중요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통증 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모르핀 사용은 2.3퍼센트에 불과하다그래도 미국은 50퍼센트가 넘는다그렇다면 왜 우리나라는 2.3퍼센트에 불과한 것일까이것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국민건강보험 시스템의 문제다. (227)


  물론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은 전 세계적으로 비교해 봐도 대만이나 일본을 제외한다면 비할 데 없이 매우 우수한 시스템이다그럼에도 마지막 모르핀 사용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예산을 삭감한다그래서 의사들이 처방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환자가 통증이 심할 경우 이를 처방해서 통증을 없애야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마지막까지 본인의 여러 가지 일들자식들에게 남기는 당부의 말이라든지 삶의 정리라는 것을 할 수 있는데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임종 환자의 33.6퍼센트가 응급실을 사용한다이것은 모르핀 사용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통증 억제가 안 되니 무려 3분의 1에 해당하는 환자들이 임종 1개월 전에 응급실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너무나도 불편한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227-228) 
















소년이 온다』 다시 읽기거의 10년 만에 다시 읽는다그때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면 이번엔 전에 구매한(노벨상 수상 전이다특별양장판으로동호의 이야기가 나오는 1장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10여 년 전과 달리 한강 작가의 전작(前作)을 좀더 읽은 뒤에 읽는 소년이 온다는 이전보다 서사적인 측면이 강해진 느낌이 있는데아무래도 광주라는 소재가 뿜는 강렬한 힘 때문일 것이다물론 이를 비추는 한강 작가의 문장은 시신들과 동분서주하는 사람들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동호의 모습을 가리키며 자신만의 인장을 찍는다.

 


25.1.1.

소년이 온다』 읽기어슴푸레하기만 했던 읽기의 기억이 3장의 은숙을 보자 선명하게 떠올랐다생채기처럼 남아 날카로운 통증을 남기고 숨을 몰아쉬게 했던 문장들이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른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99)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100)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눈송이들 속에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102-103)



25.1.4.








연희동을 돌다가 합정까지 가서 문지살롱 방문마감 한 시간 전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없었다넓고 아늑한 공간과 문지 책들로 가득한 곳음악 선정도 마음에 들었다옛날에 나온 듯한그래서 처음 보는 책들도 많이 있었는데, 문학과지성 작가론 총서가 90년대에 나온 적이 있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보르헤스에 눈길이 가긴 했으나사놓고 또 읽지 않을까봐 망설이다 결국 사지 않았고백은선 시인의 추천 도서만 사서 나왔다다음을 기약하며.





백은선 시인의 추천도서는 킴 투이의 『앰』이었다.

















25.1.5.


소년이 온다』 읽기. 4장을 읽으며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난폭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 새삼 실감하며 읽는다계엄 사태 때 종종 보았던, 10년 전의 독서였음에도 잊혀지지 않았던 문장들도 함께.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다만 이상한 건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114)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선생은 압니까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115-116)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벌레짐승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134)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살아남았다는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선생은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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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딕테해설 완독. 약간은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지만 완전히 내용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작가가 그렇게 의도한 부분이 있으니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읽기의 한 부분일 터. 읽으면서 밑줄 그었던 부분들을 정리하며 마무리하려고 한다.



DISEUSE(말하는 여자)


속에서 웅얼거린다. 웅얼웅얼한다. 속에는 말의 고통, 말하려는 고통이 있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있다. 더 거대한 것은 말하지 않으려는 고통이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 말하려는 고통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속에서 들끓는다. 상처, 액체, 먼지. 터뜨려야 한다. 배설해야 한다. (13)



클리오 역사


진리는 그 자체 외의 모든 절제를 진실과 함께 포용한다. 그 밖의 시간, 그 밖의 공간, 자체의 시간의 유유한 광휘, 죽음의 유유한 표식을 상관하지 않고, 다른 삶들과 병행한다. 그 자체에게는 전혀 모르게. 그러나 노래하기 위하여. 누구에게 노래하기 위하여. 아주 부드럽게. (38) 


왜 지금 그 모든 것을 부활시키는가. 과거로부터. 역사를, 그 오랜 상처를. 지난 감정을 온통 또다시. 그것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다. 지금 그것을 불러일으켜 잊힌 역사를 망각 속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말과 영상 속에서 또 다른 말과 영상을 조각조각 끄집어내어, 잊힌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43) 


목이 잘린 형상들. 낡은. 흉진, 이전의 형상의 과거의 기록, 현재의 형상은 정면으로 대면해 보면 빠진 것, 없는 것을 드러낸다. 나머지라고 말--, 기억. 그러나 나머지가 전부다.


기억이 전부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열망. 빠진 것을 지킨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부정의 사이에 고정되어 진보의 표시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나이를 먹는다. 단지.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없다. (48)



칼리오페 서사시

 

당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강제로 주어진 언어를 말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언어가 아닙니다. 비록 당신의 언어가 아닐지라도 당신은 그 언어로 말해야만 한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은 이중 언어 사용자입니다. 당신은 삼중 언어 사용자입니다. 금지된 언어는 바로 당신의 모국어입니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말합니다. 비밀 속에서. 바로 당신의 언어를 말입니다. 당신 자신의 언어. 당신은 아주 부드럽게, 속삭여 말합니다.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게. 모국어는 당신의 안식처입니다. 당신의 고향입니다. 당신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진정으로. 말한다는 것은 당신을 슬프게 합니다. 그리움. 말 한마디를 발설하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는 특권입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모두의 죽음을. 법으로 혀가 묶이고 말이 금지된 당신들 모두 하나. 당신은 마음 한가운데에 위는 붉고 아래는 푸른색인,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태극; 타이치t’ai-chi 마크를 가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상징입니다. 속한다는 상징. 목적의 상징.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상징. 탄생에 의한. 죽음에 의한. 피에 의한. 당신은 그 상징을 당신의 가슴 속에, - 속에, 당신의 - 속에, 당신의 영-혼 속에. (56)


당신은 씁니다. 당신은 쓰고 당신은 말합니다. 가면 속에 숨겨진 음성으로 달을 향해 말을 심고 바람에 말을 실어 보냅니다. 계절의 지나감을 통해. 하늘에 의해 물에 의해 말은 탄생하고 분별이 주어집니다. 한 입에서 다른 입으로 전해져, 한 사람이 읽고 다른 사람이 받아 읽으면서 그 말들은 온전한 의미를 실현하게 됩니다. 바람. 여명 또는 황혼에 진흙의 땅과 이동하는 철새들 남쪽으로 향하는 철새들은 주둥이 메시지의 씨를 위해 귀신의 베일을 씁니다. 통신. 말을 퍼뜨리기 위한. (58)


어머니, 저는 당신을 만나볼 수 있기 위해 꿈을 꿉니다. 잠 속에서는 천국이 가까이 내려옵니다. 어머니, 내 최초의 소리. 최초의 말. 최초의 개념. (60) 



우라니아 천문학


단지 이미지들뿐. 다만. 이미지들.

내가 들은 빗속의 신호들.

비가 눈으로 된 것에 불과한 말하기.

진실이든 진실이 아니든

더 이상 말하기가 가능하지 않다. (83) 



멜포메네 비극


나는 군중들이 나에서 몸으로 조여오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목소리는 더 우렁차게 울리고 나는 깨어짐의 파열을 일으키는 단 하나의 몸짓을 듣습니다. 나의 왼쪽 나의 오른쪽으로 다른 쪽을 향한 침묵이 앞으로 전진합니다그들은 이제 깨트립니다, 그들의 소리,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당신이 들었던, 그래서 꿈에서도 잊을 수 없었던 귀에 익은 소리, 깨트리는 소리의 결과. 연기는 대기를 감싸고 점점 피어올라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우리는 부분으로 감소되고 뿔뿔이 흩어져 흰색과 회색 속에 가려집니다. 그 속에서 팔 하나가 머리 위로 천천히 올라와 탁한 흰색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거기에선 무릎이 꺾인 다른 다리들이 땅에 엎어지고 온몸이 왼쪽으로 넘어집니다. 눈을 찌릅니다. 그것의 투입은 대기의 공기를 가르기 때문에 하늘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나는 방향감각을 잃고 텅 빈 거리를 달리다가 넘어집니다.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고 나는 걷습니다. 아무 데로나. 탁한 공기가 계속 눈을 찔러 눈물을 흘리며 나는 웁니다. 하늘에 남아 있는 가스 연기가 하늘을 흡수해버렸고 나는 웁니다. 거리는 깨진 벽돌 조각과 파편으로 뒤덮였습니다. 왜냐하면. 꽤 많은 신발짝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을 봅니다. 때로는 그들이 가져온 돌멩이들 틈에 한 켤레가 떨어져 있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나는 찢어진 셔츠가 널려 있는 사이사이를 밟으며 울부짖고 절규합니다. 그들의 자취는 없습니다. 피밖에는. 왜냐하면. 그들 사이를 걷습니다. 그들이 걸었던 보도, 돌멩이가 떨어지듯 그들이 쓰러진 보도, 빗물로는 피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핏자국은 진하디진하게 남아 씻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우는 군중을 따라갑니다. 그들의 노랫소리, 텅 빈 거리를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목소리를 따라. (94-95)


경찰과 군인들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신들을 복제하여, 당해낼 수 없는 숫자로 배가하여 그들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들의 직무 이행과 그들에게 주어진 신분은 그들의 고향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들의 형과 누이, 그들의 아이들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 그들 자신의 핏줄기보다 더 멀리 나아갑니다. (96)



에라토 연애시


 "나는 다만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힘없고 약한, 그럼에도 나의 나약함이 곧 나 자신을 당신 사랑의 희생양으로 바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 주님! 과거에는, 순수하고 오점 없는 희생양만이 강하고 힘있는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신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완벽한 희생양이 필요했지만, 사랑의 법은 공포의 법으로 계승되었고 사랑은 나를 희생물로 선택하였습니다. , 약하고 불완전한 창조물. 이 선택은 사랑을 받을 만한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이 더 완벽하게 충족되기 위해서는, 그 사랑 자체를 낮추고, 그 자체를 무까지로 낮추어 이 무를 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오 예수님, 나는 압니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갚아진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사랑을 사랑으로 갚음으로써 나의 가슴을 위로할 길을 찾았습니다." (123)



엘리테레 서정시


죽은 시간. 텅 빈 눌림이 매장된다 다시 소생하기에는 박약하고 기억에는 저항한다. 기다린다. Apel. Apellation. 발굴. diseuse로 하여금 하게 하라. Diseuse de bonne aventure. 그녀로 하여금 불러내도록 하라. 그녀로 하여금 오래 오래 다시 또다시 내려지는 저주를 깨뜨리도록 하라. 그녀의 목소리로, 땅바닥을 꿰뚫고, 타르타로스의 벽을 뚫고 우묵한 그릇의 표면을 빙빙 돌며 긁어내게 하라. 밖으로부터 소리가 들어가게 하라. 그릇의 텅 빔 그것의 잠들어 있음에. 그때까지. (135) 


죽은 낱말들. 죽은 언어. 사용하지 않음으로 해서. 시간의 기억 속에 묻혀버림. 고용되지 않았다. 발설되지 않았다. 역사. 과거. 말하는 여자, 9일 낮과 9일 밤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찾아내도록 하라.

기억을 회생시키라. 말하는 여자, 딸로 하여금 땅 밑으로부터 나타날 때마다 샘을 회생시키도록 하라.

잉크가 다 말라 없어지기 전에, 쓰기를 마침내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기 전에 가장 진하게 흐른다. (146)



탈리아 희극


미래가 없다, 다만 시간의 몰려옴이 있을 뿐. 설명할 수 없고, 공허하며, 무형의 시간, 그녀는 그것을 향해 움직이도록 기대될 뿐이다. 앞쪽으로. 앞으로. 그리고 어떻게든 현재를 지나쳐버린다. 망각의 은총으로 스스로를 구제하고 있는 그 현재. 그녀는 그것을 어떻게 정당화시킬 수 있었을까. 현재의 가시성이 없이.

그녀는 실제의 시간을 대치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시간을 앞에 전시하고 그것을 엿보는 자가 된다고. 그녀는 죽음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올 수 없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죽음을 대치할 수 없다는 것을, 실제로 죽지 않고는 그것의 극복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152-153) 


그녀는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계속 살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치지 않고 계속 쓸 수만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글을 씀으로써 실제의 시간을 폐기할 수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살 것이다. 그녀 앞에 그것을 전시해놓고 그것의 엿보는 자가 될 수 있다면. (153)



테르프시코레 합창 무용


깨어진다는 것. 깨어진 말로 구술한다는 것. 깨어진 말로 말한다는 것. 깨어진 말로 얘기한다는 것. 깨어진 말을 한다는 것. 깨어진 언어. 피진어. 깨어진 낱말. 말하기 전. 말해지는 대로. 말한 대로. 말해지려던. 말하기 위해. 그러면 말하라 (173) 



폴림니아 성시


엄마 나를 창문으로 올려주세요, 그의 시야로부터 너무 높이 올려다 보는 어린아이. 유리창 사이로 어떤 영상이 이제 검은색 회색들의 희미함, 그녀의 시야 위에 머뭇거리는 그림자들 머리는 가능한 만큼 뒤로 젖혀졌다. 나를 창문으로 올려주세요, 하얀 창틀과 그 사이 유리, 이른 황혼 또는 여명의 빛이 어두울 때, 선은 그림자에 지워지고 집들은 지나가는 빛에 그림자 우물을 드리울 때. 짧다. 밤을 향해 모두 짧다. 골목길은 마지막 집 뒤로 모퉁이를 돌아가는 끝없는 길. 담벽들, 손으로 만든 돌 벌집들 하나하나가 금빛을 품고 광선의 흰색을 반사한다. 창틀과 유리 사이에 아무도 없다. 나무들은 앞으로 다가올 전망을 기다리며 침묵을 고수한다. 만약에 일어난다면. 부동의 침묵을 들어 올리기 위한 부단한 지킴 속에서. 나를 창문으로, 그 그림의 영상으로, 올려주세요. 암석의 무게에 매여 있는 밧줄들을 풀어주세요. 처음엔 밧줄들, 그리고 정적을 깨트리기 위하여 나무 위에 긁히는 소리, 종들이 떨어지자 울림이 뒤따른다. 정적을 깨트리기 위하여 무게를 들고 있는 밧줄이 나무에 긁히는 소리. 종들이 떨어지며 하늘에 소리를 떨친다. (191) 



작품 해설_「『딕테』와 차학경의 예술 세계」(김경년)


딕테는 모두 열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 'DISEUSE(말하는 여자)'를 제외하면 각 부분마다 그리스 신화의 시신詩神과 각 시신들이 주관하는 학문 또는 주제가 제목처럼 앞서고, 그다음에는 실제의 역사적 여성(유관순, 저자의 어머니 허형순, 성녀 테레즈, 무성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의 주인공으로 분장한 프랑스 여배우 르네 팔코네티 등)의 사진 또는 그림의 영상이 등장한다. 원문은 영상 다음에 시작되며, 문체는 대부분 시적 산문이라고 할 수 있다. (223) 


따라서 첫 부분은 가장 자서전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능한 한 최소한의 말을 하기 위해" 또는 '말을 하고 싶은 욕망'의 갈등으로부터 사포와의 접신을 통해 '언제나, 있는 시간은 모두, 좌로, 우로, 배설하는, 말하는 여자'로의 변신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제부터 그는 말 없는 유관순, 어머니(허형순 여사), 잔 다르크, 성녀 테레즈 등 여성의 삶, 즉 여성들의 경험의 연대성을 제시한다. (224)


차학경의 작품에서 언어에 대한 성찰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딕테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수성은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프랑스어와 영어의 병행 사용이 눈에 띈다. 그 밖에도 언어의 유희 같은 패러디, 언어의 잠재적인 모호성 추구, 언어의 분해와 재결합, 언어의 음상音像 또는 형태소를 중심으로 한 연쇄 변화 등 다양한 언어 표현 수단들이 자유자재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언어의 형태소에 따라 변화되는 의미의 변형을 추구하고 있다.

때로는 정례적인 문법에 어긋나는 영어 용법을 볼 수도 있고(예를 들어 선행사가 없는 대명사, 특히 ittheir 등의 사용, 전치사의 생략 등) 때로는 영화의 극본 같은 현재형 묘사, 또는 시제가 부정한 동사 원형들이 나타난다. 이는 문장 전체에 탄력, 그리고 나아가 시간의 한 정에 구애받지 않는 생동성을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차학경은 시간과 공간의 없음, 곧 시공의 초월, 그리고 그것의 영원성으로의 연결에 대해 가장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이 이런 언어 표현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예를 들면, 문법 카테고리의 하나인 '시제'의 사용을 거부한 것은 '문법이 임의로 한정시키는 시간의 제약성'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226-227)


각 부분들이 소설적 이야기로서의 연결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여성 인물들을 다루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사포와 아홉 명의 시신에 역사 속의 실제 인물, 즉 유관순, 저자의 어머니, 잔 다르크, 성녀 테레즈 등을 연결시킴으로써 역사적 연관성과 대응성, 그리고 여성 체험의 연대성을 동서양의 차이 없이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분산된 세계diaspora 속에 소외된 이방인/소수민족의 존재성, 여성의 체험, 일제 강점기 한민족의 수난, 분단과 민주주의를 위한 수난, 순수한 사랑에의 갈망, 그리고 저자 자신에 대한 자서전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227)



작품 해설_「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권영민)


'딕테'라는 작품 제목은 '받아쓰기'라는 특별한 글쓰기 방식을 의미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복합적이면서 이중적 성격이 강하다. 받아쓰기의 행위는 모든 글쓰기의 출발이면서 동시에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의 본질적 속성을 그대로 말해준다. 일반적으로 받아쓰기'라는 행위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글쓰기의 주체적 의지가 제대로 반영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말해주는 자가 언제나 우위에 있고 그것을 받아쓰는 자는 언제나 말하는 대로 '받아쓰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에서 받아쓰기가 갖는 주체의 수동성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받아쓰기'의 행위는 인류의 역사 자체가 가지는 다양한 전승의 의미를 포함한다. 신화는 일종의 '받아쓰기'를 통해 후대에 전승된다. 그것은 단순한 수동적 글쓰기가 아니라 인간의 기억을 만들어내고 그에 따라 행동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신화는 인간 사유의 근원적인 상징이 되는 것이며 인간의 모든 글쓰기는 결국 이 신화를 '받아쓰기' 하는 데에서 생겨난 다양한 이야기의 변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31-232)


딕테에서 독자들이 당혹해할 수밖에 없는 특징은 목소리가 다른 화자의 진술이 서로 뒤섞인 다양한 삽화가 어떤 규칙 없이 결합되고 있는 점이다. 그러므로 스토리를 지닌 어떤 내용의 서사적 연결이나 의미의 맥락을 따지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여기저기에 다양한 사진이 끼어들어 읽기를 방해한다. 사진은 그 텍스트 자체가 특정 시간에 정지된 이미지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사진 속의 이미지는 침묵이면서 동시에 침묵하는 언어다. 이러한 복잡한 구조는 때로는 몽타주의 기법으로, 때로는 콜라주의 파격처럼 서로 겹치는 메시지와 이미지의 착종으로 서사 공간 자체를 입체화한다. (233)



24.12.24.














희랍어 시간다시 읽기.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전개되고 말과 시력을 잃어버린(잃어가는)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세공된 문장들을 감탄하면서 읽게 된다. 드디어 단둘이 만나게 되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남자의 모습에서 멈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보았는데, 영화관에서 자꾸 큰 소리로 속닥거리는 남자 때문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영화는 소설을 충실히 재현해냈다는 생각이 들었고, 킬리언 머피가 연기한 빌 펄롱도 내면을 표현하는 표정 연기가 영화에 깊이 빠져들게 해 감탄하면서 보았다. 네드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잊고 있었어서 집에 와서 다시 소설을 훑었고, 이 작품은 역시 소설이 훨씬 좋구나, 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맡겨진 소녀(영화는 말없는 소녀)는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나중에 보았었는데 그때는 감상이 정반대였던 기억이...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99)


생각해보면 올해는 영화를 책보다 더 자주 보았던 것 같은데(무비랜드를 알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영화에 대한 감상들을 각각 적어서 투비에 연재해볼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전혀 실천하지 못했다. 여러모로 기록과 정리, 리뷰에 있어서는 만족스럽지 못했던 한 해. 내년에는 좀더 열심히 읽고 써야겠다는 생각을 또 한다. 투비컨티뉴드...



24.12.28.


희랍어 시간완독. 언어를 가졌으나 상실한 이와 시력을 상실해가는 이의 묘한 만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세계를 향해 자신을 표현할 수단을 상실해 내면으로 침잠해가는 이와 세계를 이해할 수단을 상실해 세계와 소통할 수 없어 내면으로 침잠하는 이. 두 사람이 처음으로 교감하는 마지막 부분의 이야기가 아득하면서도 아름답게 시처럼 펼쳐진다. 분명하게 묘사되는 사건이 없음에도 다 읽고나면 여운이 남게 되는 작품.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161)


마모된 거대한 톱니의 일부를 만지듯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쓸어 본다. 오래전에 퇴화된 기관을 기억하듯, 말들이 떨며 솟아오르던 경로를 머릿속으로 더듬는다.

자신이 말을 잃은 것이 어떤 특정한 경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셀 수 없는 혀와 펜 들로 수천 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 누덕누덕 기워진, 바싹 마른, 무표정한 심장. 그럴수록 더 힘껏 단어들을 움켜쥐었다한 순간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무딘 파편들이 발등에 떨어졌다. 팽팽하게 맞물려 돌던 톱니바퀴가 멈췄다. 끈덕지게 마모된 한 자리가 살점처럼, 숟가락으로 떠낸 두부처럼 움푹 떨어져나갔다. (165)


어두운 초록색 흑판에 백묵으로 문장을 쓸 때 나는 공포를 느껴요.

방금 내가 쓴 글씨지만, 십 센티미터 이상 눈에서 떨어지면 보이지 않아요.

암기한 대로 소리내어 읽을 때 공포를 느껴요.

태연하게 내 혀와 이와 목구멍으로 발음된 모든 음운들에 공포를 느껴요.

내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공간의 침묵에 공포를 느껴요.

한번 퍼져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단어들.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단어들에 공포를 느껴요. (167)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읽기 시작. 법의학이란 무엇이고 어떤 학문인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쉽게 보여준다. 통상 우리는 범죄와 연결짓곤 하지만 사실 일상의 모든 죽음과 관련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어비읽기. 치킨 런쿵후하는 자세를 읽음.

치킨 런은 자살하려 했지만 우연히 치킨 배달부에게 구해진 남자와 비좁은 방에서 겨우 살아가다 사람을 구했다는 이유로 자살을 도와주게 된 치킨 배달부의 반복되는 자살 실패담. 나란히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에서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된다.

쿵후하는 자세는 할 일이 없이(아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계속 자전거를 타고 떠도는 화자에게 끊임없이 무엇을 하고 있냐고 시비를 거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처럼 읽힌다. 어쩌면 잠시 나만의 쿵후를 하기 위한 자세를 잡고 있었을 뿐인데 아니꼬운 눈으로 지금 뭐하는 거냐며 시비를 거는 세계. 이 세계가 규정한 을 하고 있지 않으면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는 세계를 배회하는 이에 대한 이야기.



24.12.29.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읽기. 2부는 생명의 시작과 죽음의 정의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부터 시작해 안락사 논쟁에 대한 이야기까지 접근한다. 교양 강의의 성격상 각각의 주제를 아주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는 편. 그래도 보라매병원 사건’, 사망 원인과 사망 종류의 차이, 죽음의 변천사 같은 내용은 흥미롭게 읽었다. 이제 3부만 남겨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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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5.

















딕테읽기. 엘리테레 서정시탈리아 희극읽기.


 

24.12.17.


딕테본문 완독. 테르프시코레 합창 무용폴림니아 성시를 읽음. 뒤로 갈수록 혼란스러워지는 글들과 마주하기. 주석을 보면서 읽어도 무슨 의도인지,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혼란스러운 글들의 연속이다. 해설을 보면 정리할 수 있을까?

 


24.12.20.


부고를 들음. 처음으로 자신의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일찍 떠난 이의 장례식장에 있을 때의 심란함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여태껏 내가 갔던 장례식장은 천수를 누렸거나 노년에 접어든 분들의 장례식이었는데, 정말이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이의 장례식장은 그것과 너무나도 달랐다. 식장에 내내 감돌던 침통함과 절절함. 친구에게 어떻게 위로를 건네야 할지, 이 안타깝고 슬픈 마음이 어떻게 말해야 전달이 될지 모르겠는 막막함. 평소보다 오래 있었지만 시간이 늦어 발걸음을 떼야 했던 장례식장을 나오며, 끝까지 자리를 지킬 생각으로 왔던 친구의 다른 친구들을 보며 나의 장례식엔 끝까지 자리를 지킬 사람들이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계속 맴돌았던 시간들.



24.12.22.


한 주는 내내 앓았고(앓느라 가려고 했던 14일의 국회도 가지 못했다), 한 주는 일에 치이고 사건과 정해진 일정 들을 지나느라 읽기에 소홀하느라 결국 100자평을 작성할 기한을 놓쳤다. 허나 읽는 중에도 이 책에 대한 내 감상을 어떻게 표현할지 막막하기만 했고... 뒤의 해설과 후기를 보면 길이 보일지 생각하는 중. 인터넷으로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찾아보기도 하고 스크랩해 놓기도 했다.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까?



열심히 찾았던 글들 중 하나만 스크랩으로 남겨놓았다. 차차 정리할 것들.

https://brunch.co.kr/@lilybath/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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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완독. 페소아의 불안의 서(봄날의책)에 대한 글로 마무리. 잠들기 전의 상태에서 썼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글이 인상적이었다. 불안의 책(문학동네)을 예전에 읽으면서 밑줄을 수도 없이 긋고 그걸 정리해보겠다면서 일일이 적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제풀에 지쳐 어느 순간 읽기를 멈추고 그대로 덮어두었더랬다. “가장 무방비한 감각과 감정을 기록하는작업. 그 작업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불안정한 들과 나와 나 사이에 있는, 신이 망각한 빈 공간속의 를 마주하는 시간. 페소아의 수많은 이명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페소아의 이명에 관한 책도 많이 사두었는데 여전히 읽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리스본에서도 인상깊었던 장소들 중 하나가 페소아 박물관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였건 수면 직전에 씌어졌을 이 책은 어느 정도까지의 각성 상태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지를 입증하려는 듯하다. 동시에, 지독한 각성 상태가 잠과 꿈과 가장 흡사하다는 것도 입증을 하려는 듯하다. 또한, 불안의 서의 페르소나인 '소아레스'를 이미 미쳐 있는 자이자 미쳐버린 지 너무나 오래되어 도리어 정상에 가까워진 자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다. 보통의 사람들이 정상적인 척을 하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고 파악할 때,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미 관성이 되어 버려 감지할 수 없는 것까지를 볼 수 있는 '진짜 인간'의 상태. 이미 미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각성 상태. (209)


어쩌면 이 책이 "잠을 위한 찬가"가 아닐까. "나는 잠자는 듯이 글을 쓴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지루하기 때문에 일을 하듯이, 때때로 나는 아무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글을 쓴다. 나는 꿈꾸는 상태에 빠진다. 생각하지 않는 자라면 그런 백일몽 속에서 자신을 잃겠지만, 나는 글을 쓰면서 나를 잃는다. 나는 산문으로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참혹하고도 가열찬 불안과 상념이 범람할 때에 그리하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만 같은 상태가 될 때에, 그 무게로부터 완전히 달아날 수 없다면, 달아나는 일과 가장 닮은 행위는 그것에 대하여 무방비하게 감각하고 그걸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210)


어설픈 현자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여정이 곧 삶이라고 우리를 속여왔지만, 실은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해야 하는 여정이 곧 삶일지도 모른다. 나를 맴도는 어설프고 주눅 든 나, 나에게 해로운 것만을 달콤하게 권하는 협잡꾼인 나, 나에게 위선 아니면 위악만을 가르치는 감독인 나, 나에게 거짓 눈물과 거짓 한숨과 거짓 웃음을 사탕처럼 던져주는 사육사인 나, 그래서 무엇을 하며 살아도 어딘지 모를 불안과 불쾌감을 그림자처럼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나. 그 모습을 비웃는 구경꾼인 나. 그런 나와 결별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포기하는 것만이 방법일지도 모른다. 꽃나무가 더 이상 꽃나무이기를 포기하는 꽃 지는 계절처럼, 장마가 더 이상 장마이기를 포기하는 쨍한 다음 날 아침의 맑은 하늘처럼. 포기와 체념의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을 알려면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더 현명한 환멸에 도착한 이후여야 하리라. (212-213)


불안의 서는 불안에 대한 갖은 해명에 지쳐 있는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불안함에 대하여 충분히 숙고하여 불안의 편에 서 있지만 그 입장마저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나와 나 사이를 커다란 괘종 시계의 추처럼 똑딱이며 왕복운동을 하고 있어서 그 현기증마저 이제는 관성이 되어버린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가끔은 나와 내가 나란히 벽에 기댄 채 헐렁하게 손을 잡고 앉아서, 창문으로 들어온 네모난 햇빛이 시간과 함께 조금씩 움직여 나와 나의 테두리를 온전히 가두는 느낌을 아는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세상의 모든 현혹으로부터 완전하게 비켜서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현혹의 무상함을 일깨우기 위해 독자를 현혹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하여 독자를 현혹하지 않은 채 불모의 사막지대를 펼쳐 보이고야 만다. '이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구나'라는 감동을 독자는 굳이 느낄 필요가 없다. 단지, 모든 고백은 "내 비루한 존재가 삶 앞에서 자신을 위장한다는 현상을 견디기 위하여 적혔을 뿐이니까. (215-216)


에필로그의 마지막 말은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어느 부분에선 작가의 생각의 흐름을, 그것을 표현한 문장의 결을 따라가기 어려웠지만, 사랑이 으레 그러하듯 그것을 나의 문장으로 읽어내는 것도 내 몫이다. ‘사랑이 아닌 사랑함에 대해 고민해보았던 시간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사랑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사랑함에 대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함은 사랑과는 다른 얼굴이어야 한다. 사랑은 사랑을 재배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사랑을 돌아보고 돌보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을 사랑해온, 사랑을 명사로 고정하는 사랑의 담론들에 비켜서서, 사랑이 더 이상 감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게 내버려두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학습해온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힘도 없다. 하지만 사랑함은 그렇지 않다. 삶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세상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223)



24.12.03.
















딕테읽기. 서문?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딕테(Dictee, 받아쓰기)에서 몇 차례 길을 잃고 더듬더듬 읽는다. 천주교의 미사와 화자의 의식의 흐름이 뒤섞인 듯한 파편적인 글들. 겨우겨우 졸음을 쫓으며 읽다가 문득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니 말도 안 되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한 순간에 과거로 회귀하는 듯한 소식들을 끊임없이 찾아보느라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한 사람이 이렇게나 우리 시대를 퇴행시킬 수 있다는 것에 허망함과 환멸을 느끼며. 그것을 어떻게든 일단 막아냈다는 것에 안도하며.


각 장의 제목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홉 뮤즈와 그들의 고유 예술 영역을 차용하여 명명한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Mnemosyne)가 아흐레 동안 제우스(Zeus)와 동침하여 아홉 명의 뮤즈 신을 낳듯, 책의 구성은 가톨릭 의식인 ‘9일간의 기도(novena)’로 이루어져 있다. 차는 기도 의식을 관장하는 인물이자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여주인공 화자 말하는 여자를 소개한다. 유관순과 잔 다르크, 만주 태생인 차학경의 어머니 허형순 여사와 성 테레사가 있다. 언어와 문화의 경계에 선 여성들이자 주체적 인물이다. 이들 목소리를 빌려 자신이 경험한, 디아스포라적 삶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 「딕테가 돌아온다, 하퍼스 바자, 2024.11.07.

(https://www.harpersbazaar.co.kr/article/1872954)



24.12.04.


딕테계속 읽기. 제우스와 므네모시네의 아홉 딸들의 이름이 목차처럼 나오는데 그 중 클리오 역사에는 유관순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관순의 서사와 기억과 기록에 대한 조각들. 앞선 글에 비하면 읽기에는 수월하나 송곳처럼 드러나는 단상들에서 멈칫멈칫한다. 시적인 것 같기도, 무의식 같기도 한 것. 어제의 여파인지 어떤 구절에 오랫동안 눈이 머물렀다. 기록하고 끊임없이 기억하는 이유.


왜 지금 그 모든 것을 부활시키는가. 과거로부터. 역사를, 그 오랜 상처를. 지난 감정을 온통 또다시. 그것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다. 지금 그것을 불러일으켜 잊힌 역사를 망각 속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말과 영상 속에서 또 다른 말과 영상을 조각조각 끄집어내어, 잊힌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43) 



24.12.05.


딕테계속 읽기. 칼리오페 서사시는 작가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구성되어 있다. 만주에서 작가 자신처럼 이방인이었던 어머니의 삶이 꿈과 같은 몽환적인 장면들과 얽힌다.



24.12.06.















오늘 받은 책 중엔 어떤 어른이 있었는데, 책 상태를 확인하고자 펼쳤다가 인쇄된 사인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사이 찾아온 이 난장의 겨울에서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문장들.



딕테계속 읽기. 멜포메네 비극에는 분단 이후 1962년의 사건이, 오빠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며 읽어내려 노력해보고, 군인과 경찰이 나오는 대목에선 자꾸 계엄령과 군인들의 모습이 상기된다.


경찰과 군인들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신들을 복제하여, 당해낼 수 없는 숫자로 배가하여 그들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들의 직무 이행과 그들에게 주어진 신분은 그들의 고향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들의 형과 누이, 그들의 아이들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 그들 자신의 핏줄기보다 더 멀리 나아갑니다. (96)



24.12.08.














어비읽기. 내가 읽었던 김혜진 작가의 장편들이 연상되는 단편들이 몇 개 보인다. 초기 단편집이어서 내가 읽은 이후의 작품들과 구별되는 건 블랙코미디적인 요소들. 바틀비의 후계인가 생각했지만 먹방 bj가 된 어비(어비)아웃포커스의 엄마, 한밤의 산행의 소년이 그렇다. 마냥 웃을 수 없는 건 이들이 처한 문제가 겨냥하는 것은 결국 이 세계, 생존을 위한 투쟁이 디폴트가 되어버린 구조이기 때문.



딕테에라토 연애시를 읽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 보니 페이지 번호는 순서대로인데 페이지가 서로 바뀌어 인쇄된 부분들이 있어 연결이 되지 않았다. 발견한 만큼은 알라딘에 문의를 남겨놓았는데, 애초에 파편적인 텍스트라 내가 미처 발견 못했는데 더 많은 곳에 뒤죽박죽이 된 페이지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만 커졌다. 북펀딩으로 받은 도서가 이렇게 오다니... 에라토는 성녀 테레즈에 대한 이야기.




) 오늘(24.12.10.) 아침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으나 일하는 중이어서 받지 않았는데 문의한 내용에 대한 문자가 와 있었다. “원서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다라는 이야기... 궁금한 점은, 원서는 아마도 영어이거나 프랑스어일 것으로 보이는데 페이지의 내용을 작가가 뒤죽박죽으로 섞은 것이 이렇게 구현이 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뒤의 해설까지 읽으면 그 의도와 편집에 대해 알 수 있을까? 혹시 몰라 문의한 내용과 해당 페이지를 캡처해서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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