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
정지돈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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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에 대한 책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것, 또는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벼운 거닐음, 걸으면서 만난 대상에 대한 성찰, 한가로운 여행의 산책길? 정지돈의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은 이와 같은 독자의 기대를 가볍게 벗어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산책은 각각의 글의 실마리로 기능하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고, 굳이 연관성을 찾자면 그는 거리보다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는 텍스트를 산책하는 일에 더욱 주력한다.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에서 정지돈이 강점을 둔 곳은 '서울과 파리'가 아니라 '생각한 것들'인 것이고, 생각은 그의 소설들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텍스트들의 인용으로 이어진다.

 

  언제나처럼 온갖 텍스트들과 자신의 지인들(실제 혹은 허구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글쓰기이건만, 왜 하필 산책일까? 그것은 "서서 쓴 글"과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된다. 정지돈은 글쓰기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앉아서 쓴 글"은 리얼리즘, "누워서 쓴 글"은 모더니즘이다. "서서 쓴 글""앉아서 쓴 글""누워서 쓴 글"의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그는 말하지만, 이런 글쓰기가 그의 지향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강해졌다.


서서 쓰니까 앉아 있을 때처럼 긴 시간 집중하거나 계획을 세울 수 없으므로 글의 구조는 임의적이고 즉흥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누워 있을 때처럼 편안하지도 않으니 내면 깊숙이 들어갈 수도 없다. 조금 더 설명하면 서서 쓴 글은 걸으면서 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에 쫓기듯이, 의식 깊숙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표층에 머물면서, 전체의 구조나 다음 챕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글쓰기. 기억과 관찰을 토대로 하지만 부정확하고 우연적이며 가볍고 산만한 글쓰기. (173, 강조는 인용자)


  글을 읽다보면 종종 인용된 텍스트나 그의 발화에서 단도와 같은 통찰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더 들어가지 않고 다른 텍스트를 끌어오거나 지인들의 이야기로 빠진다. 김빠지는 웃음을 주는 지인들의 이야기는 유머의 기능에서 끝나지 않고 과속방지턱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까. 끝없는 텍스트의 인용 역시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표층에 머무는 글쓰기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깊이보다 넓이를 지향하는 듯한. 이 두 가지 요소가 "걸으면서 쓴 글"이 흔히 도달하는 '아포리즘'과의 구별점일까.


  "임의적이고 즉흥적"이며 "부정확하고 우연적이며 가볍고 산만한 글쓰기"에 대한 정지돈의 지향은 리베카 솔닛을 통해 소환되는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 산책에서도 만날 수 있다. "수동성이자 불확실성이고 정체성으로부터의 탈출". "훌륭한 시민, 단일한 자아, 사회로부터 주어진 역할에서 벗어나는 것, 비환원적이고 주관적인 상태로 돌입하는 것, 책임을 방기하고 의미를 지연시키는 것."(91) 그래서 그가 발터 벤야민의 '플라뇌르'나 구보에 눈길을 돌리는 것도 납득이 된다. "현란한 소비문화"에 정신이 팔려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는 도시 산책자. 그로 인한 "지각의 산만"(101)은 불확실성과 정체성 잃기를 닮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산책-글쓰기'가 플라뇌르라는 개념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사실 플라뇌르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파리라는 도시에서 난립했던 특정한 종류의 걷기와 걷기를 기록한 텍스트에서 발견한 아이디어를 작가들이 재창조한 것뿐"(83)이라면서. 플라뇌르라고 규정되었던 남성들의 이중성1)을 비판하는 것은 정체성 형성과 개념화를 거부하고 목적으로부터 탈주하는 글쓰기를 지향하는 그에게 당연한 귀결일까. 이런 '산책하듯 글쓰기'는 책의 말미에 가면 "에라스뮈스-분위기"와 만난다.

 

  정지돈은 "에라스뮈스-분위기""특정한 목적이나 주장, 대의에서 자유로워도 된다는 아이디어"이자, "어느 쪽 편을 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태도이며 단지 지식의 즐거움과 삶의 기쁨에 헌신해도 된다는 해방감"(265)이라고 말한다. 에라스뮈스는 애매모호함과 변덕스러움으로 당대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공격받았지만 "빈민의 가련한 처지나 군주의 탐욕 등 세속적 사안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발표할 기회를 좀처럼 놓치지 않았", "폭력을 혐오하는 사람, 평민에 공감하고 소박한 영혼에 공감하는 사람"2)이었다. 그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확실하게 고정된 모든 것"3)에 대한 두려움이자, 자신이 주장하는 "대의가 대의로 전락하는 것을 차단"(263)하기 위함이었다고 크라카우어는 해석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는 정지돈도 공감하는 사유/생활방식, "우리로 하여금 대의 없이 사유하고 생활할 수 있게 해줄 사유방식 및 생활방식이 있을 가능성"(261)을 찾아낸다. 어떤 식으로도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글쓰기. 그것은 자신만의 인장을 글에 새기고 싶은 모든 작가들의 염원이 아닐까. 정지돈은 자기 나름의 방식을 찾아 꾸준히 쓰고 있을 뿐.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드는 이 산문에서 누군가는 파리와 서울의 산책에 대한 서술에 주목할 것이고, 누군가는 목차의 제목부터 유사-지인들의 이야기에 이르는 김새는 유머들에 주목할 것이고, 누군가는 '구보'와 플라뇌르의 이야기에 주목할 것이다. 나로서는 정지돈의 글쓰기론에 대해,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었던 독서였다. '남북조 시대의 예술가'를 읽을 때는 문단에서 소위 '너드한' 이들이 동지를 얻지 못해 외로웠겠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앞으로도 내가 그의 소설-산문을 찾아서 읽을 일은 없겠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꾸준히 이어가며 자신만의 자리를 찾기를 바라는 바이다. 목적지 없이 관조하는 산책처럼.






1) "플라뇌르는 한편으로는 상품과 여성을 시각적으로 소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화의 속도를 거부하고 생산자가 되라는 압력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새로 생겨난 상업 문화에 저항하는 동시에 매혹되는 양가적 인물이다."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김정아 옮김, 2017, 323)

2)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끝에서 두번째 세계, 김정아 옮김, 2012, 25

3) 같은 책, 26



울프와 발저의 산책이 좋은 이유는 그들이 걷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않았고 우울해하지도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의 산책은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것이었지만 멜랑콜리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걸을 때만 진정으로 쾌활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산책과 글쓰기가 가진 유일한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거나 결말을 맺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실한 어느 지점에서, 주제와 의도, 인과와 의무를 망각한 지점에서만 진정한 글쓰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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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2-17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그런 작가였구나 (정지돈이 다시 보이는 글) 왜 이 사람은 지식 자랑 하고 앉아있나, 그래 너 아는 거 많다! 이런 마음이었었는 데.. 제 안의 시큰둥이 좀 변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 2022-02-17 21:56   좋아요 1 | URL
제가 읽은 정지돈의 책도 <내가 싸우듯이>와 이 책이 전부입니다ㅎㅎ 읽으면서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어서 두 권 다 궁금한 책들에 대한 지식을 얻은 것으로 만족한 편..^^

공쟝쟝 2022-02-17 22:57   좋아요 1 | URL
저는 <영화와 시> 보고 좋아서 소설 찾아 읽었는 데 소설이 너무 이상해서 ㅎㅎㅎ 아 나랑 안맞네, 했었거든요! 근데 이런 태도의 글쓰기 였다면! 다른 책 한번 더 찾아보겠어요. 정지돈님아, 만약에 제가 또 찾아 읽게되면 아무님한테 고마워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