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던 새벽
책장 맨 아래칸에 가로로 끼워져있던 <스탠 바이 미> DVD가 갑자기 눈에 띄었다.
언제쩍 산 걸 아직도 안 보고 있었구나.
원작소설 제목이 <The body>라고 하는데
번역본은 영화제목과 똑같이 스탠 바이 미로 나왔나보다.
스탠 바이 미가 훨씬 좋고 어울림.
아름다운 이야기다.
겁 많고 단순한 번, 약간 또라이 기질있는 테디, 조용하고 생각 많은 고디,
대담하면서도 마음 씀씀이가 깊은 크리스.
그 나이다운 호기심과 용기, 짖궂은 장난, 고민과 상처, 이 모든 것들은
친구와 함께 하기에 더 빛나고, 더 재미있고 그리고 덜 아픈 것이 된다.
앞으로 더 크면 지금처럼 만나지 못할 것을 예감하는 소년들의 모험담이 참 애틋하다.
어쨌거나 리버 피닉스는... 어린 시절에도 진정 눈빛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던 거군.
스무 살 재수하던 시절, 친구 집에서 <아이다호>를 봤던 그 때의 느낌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평범한 캐릭터에서는 여지없이 빛을 잃어버리는 대신(스니커즈 같은 건 정말 쉣임)
<아이다호> 영화 자체의 분위기와 맞물려 돌아가는,
오로지 그만이 제대로 자아낼 수 있는 위태롭고 불안한 에너지가 미치도록 아름다웠던 리버 피닉스.
(세상에 알려진) 실제 삶 역시 배우로서의 그 느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 사람은 진짜야..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우가 아니었다면 그런 아름다움을 어떻게 발산하며 살았을까. 아찔하다. 너무 짧은 삶이었지만...
스탠 바이 미의 크리스는 그가 열 몇 살 즈음이었을 땐데, 여린 이미지가 없진 않지만 아주 든든한 형같은 것이
연기를 능청스럽게 잘도 하는구나. 아저씨 포스마저 느껴짐.
꼬맹이들 보면서 웃고 맘 짠해하다가
다 보고 4시쯤 잠이 들어 10시에 깼다.
스트레칭 좀 해주고
사과 하나, 빠다코코낫 한 봉지, 호두마루 한 개로 아침식사 하고ㅋ
그리구선.. 인터넷 기사 좀 보다가
조만간 침대 버리고나면 그 자리에 들일 책장 찾아 삼만리.
며칠 전부터 동네 가구점이며 인터넷 쇼핑몰까지 여기저기 찾아봐도 딱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요즘 많이 나오는 칸칸이 정사각 모양인 5단 책장은 영 별로라서 다른 거 찾고 찾다가
결국 결정한 건 알라딘에서 찾은 저 넘.
무엇보다 6단이고, 너비는 3자(88cm)짜리. 모양새도 가격도 딱 좋다. 이거 두 개면 될 거 같다.
배송비만 5만원 나오네...
이제는 방을 좀 넓고 시원하게 쓰고 싶어서
저 크고 오래 된 침대는 버리던가 재활용센터에서 가져간다고 하면 보내버릴 생각이다.
그 동안에도 계속 치워버려야지 했는데, 담주엔 진짜 맘 먹고 정리하려고.
여름도 오고 하니 대청소 할 겸, 침대 치우고 책상 위치도 바꾸고
널찍하게 공간 비워서 대나무 자리 깔고 창문에 발도 쳐야지.
생각만해도 기분 시원하고 좋아진다. 대나무 자리 위에서 딩굴딩굴 책 많이 읽자.
책장을 보관함에 담아놓고
점심 먹으면서 <SBS 시사토론>을 다운받아 봤다.
경기도지사 두 후보 김문수와 유시민의 맞장토론이었는데
선거 앞두고 뭐 다 조심스러웠겠지만
서로 개인적인 인연이 깊다는 분들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유독 부드러웠다.
수도권 규제완화, 경기도 교통문제, 무상급식 등 복지문제, 4대강 사업, 대북정책 등등 다양한 주제로 토론이 이뤄졌는데
역시 정확한 팩트와 논리는 기본이고 일단 말에 '내용'이 있는 건 유시민.
김문수의 말은 많이 헛돌았지만 그냥 그 입장에서는 할 만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고.
대체로 차분하고 좋은 토론이었다.
근데, 방송 내내 오른쪽 상단 SBS로고 아래 남아공월드컵 D-27 이라는 안내가 박혀나왔다.
선거앞두고 하는 후보 토론인데, 지방선거 디데이 표시하는 게 상식 아닌가... 좀 어이 없었다.
컴퓨터 끄고, 밥 먹은 설거지도 끝내고, 이 닦는 김에 세수도 하고 허헛
나른한 오후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었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하...... 좋다. 통통통 온몸의 핏줄이 선다.
나와 같은 색감의 언어를 쓰며 같은 향을 맡고 같은 소리를 듣는 사람과의 인연, 혹은
전혀 다른 언어를 쓰더라도 내 언어를 알아봐주고 내 향과 내 소리를 알아채주는 사람과의 인연
이런 건, 평생 한 번이면 과한 행운이 아닐까.
몇 초 후, 며칠 후, 메일전송시간 간격에 맞춰 호흡까지 달리하며 몰입하는 내 모습이 웃겼다.
연애와 관련된 모든 신경이 다 말라죽은 줄 알았는데, 그래도 맥은 이어가고 있었던 모양.
간만에 손가락발가락 간질간질하고 가슴도 찌르르한 게
누군가를 기다리며 설레고, 심장이 터질만큼 열렬하게 원하는 그런 감정이 새삼 그리워졌다.
지금껏 살면서 딱히 그래본 적이 없어서
새벽 세시 바람이 아닌 그냥 밤바람에도 마음이 허해지누나.ㅎㅎㅎ
그리고 그 후로, <일곱번째 파도>를 주문할까 말까 아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이대로... 아쉬운 여운으로도 무척 만족스러운데.
새벽 세시에 에미의 창가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
그녀가 창쪽으로 발을 돌리는 대신 레오와 한 침대에 있는 거라면
난 좀 김이 샐 것 같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책이 뻔히 있는데... 어떻게 안 보냐고.
비포 선셋같은 경우도. 그렇게 망설이다가 결국 봤는데.
하지만 그래도 역시 마음에 제대로 남아있는 건 선셋이 아니라 선라이즈인 건 또 어쩐대. 흐.
선셋은 제시와 셀린느가 처음 만나던 서점밖에 기억이 안 남. 셰익스피어 앤드 뭐시기 서점.
(망설이다하니 생각나는 얘기. 어떤 애가 가게에서 설레임을 찾다가 말이 헛나와서 "아줌마, 망설임 없어요?"ㅋㅋㅋㅋㅋ)
음. 어쨌거나
당분간은 이 아련한 여운을 그대로 느껴봐야지.
죽다 살아난 내 연애세포들 간만에 얕은 숨이나마 좀 쉬게 해주자-_-
ㅎ
5월 16일
역사에 오명으로 남은 숫자의 오늘
소년 리버 피닉스를 보고 잠이 들었고(존 쿠삭도 반가웠어요)
일어나서 간식거리로 아침을 때웠고
시원하게 바뀔 방을 떠올리며 책장을 골랐고
된장찌개와 밥을 먹으며 역시 유시민이야 유시민 그랬고
세수를 한 말끔한 얼굴로 멋진 연애소설을 읽었고
후속작을 쓴 작가를 잠깐 미워했고
저녁은 밥 아닌 떡으로 또 때웠고
떡을 먹어도 왠지 허한 속에, 북풍이 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그런 하루.
혼자놀기의 진수랄지.
나름대로 좋았던 5월의 한 가운데 일요일.
* 어제 저녁에 쓰다 말아 임시저장돼있던 건데 지금 올리려니. 훔. 뭐 딱히 이상하진 않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