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 마니아 - 유쾌한 지식여행자, 궁극의 상상력! 지식여행자 9
요네하라 마리 지음, 심정명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요네하라 마리 

그녀의 책은 처음이다. 예전에 <공중그네>를 읽다가 관 둔 이후로 일본식 유머(?)가 (공중그네 하나로 대변되는 건 아니지만) 나와 맞지 않는가보다 생각이 들어 '재미있다'는 일본 책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는데, 지난 번 마음산책 이벤트 때 요네하라 마리의 이름이 눈에 많이 띄어서 궁금하던 차에 책 소개글 보고 재밌겠다 싶어서 (아니라면 한 번 더 속은 셈 치자 하고) 주문했다.  

아. 그렇지만 속지 않았다. 속기는 커녕 내내 킥킥대며 웃다가 와와하며 감탄하고 으음하며 얼굴 굳어져가면서, 아주아주 열심히 읽었다. 쉽게 읽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재밌어서 책이 손에서 잘 안 떨어지더라는. 당장이라도 실용화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이디어는 더없이 기발하고, 이건 좀..ㅋ 싶은 황당한 발명들은 실현은 못 할지언정 그 발상만으로도 평소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줬다.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여러 개의 다른 시선을 또 얹어주는, 소중한 배움이다. 이렇게 유쾌하고 따뜻한 발명품들을 보고있자니 아무리 비현실적인 것이라도 언젠가는 실현되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믿게 된다. 뭐, 된다 안 된다 보장이라는 걸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으니까. 

마냥 장난꾸러기같으면서도 너무나 눈이 깊은 그녀라서, 그 소소하고도 거창한 아이디어들이 하나하나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끊임없이 재미있는 것을 찾고, 뭔가 늘 다르게 바라보는 그 방향에는 항상 환경을 보호하고 동물을 사랑하며 주변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고, 반대로 그렇게 그녀가 사랑하는 대상물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썩소를 날려주는 그녀. 더할 수 없이 발랄하고 더할 수 없이 신랄하다.

발랄한 그녀   

개와 고양이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그녀는 이 동물들과 함께 여행을 하거나 비가 와도 편하게 산책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결국 함께 먼 길의 여행을 하는 것은 포기해야 했지만ㅋ 강아지의 등에 배낭처럼 지지대를 메어 그 안에서 넓적한 우산이 펼쳐나오게 한다는 발명은 생각만해도 웃겼다(표지에도 있는 그림). 울집 강쥐넘 저거 메고 비 오는 날 돌아댕기는 모습 상상만해도 아하하하하. 실제로 있을 것 같기도 한데, 한 번 찾아볼까.

그녀는 물건도 잘 잃어버려서 어느 날은 물건마다 센서를 달아보는 게 어떨까 생각한다. 전화기, 리모콘, 지갑, 열쇠 등등에 모조리 센서를 부착해 컴퓨터 모니터만 켜면 위치를 알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아 정말 편한 것 같은데, 결정적인 부작용을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도둑이라도 들면 필요한 물건 여기있으니 가져가시오 친절알림서비스가 된다는 거. 모니터를 보며 낄낄대고 좋아 죽는 도둑님 뒤에서 퍼질러 자는 마리 여사가 귀엽다.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이나 사이클을 탈 바에야, 버스나 택시 안을 피트니스 센터라 생각하고 승객들이 단체로 페달을 밟으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도 기발하다. 연료 아껴, 따로 운동할 시간 안 내도 되니까 시간 절약돼 돈 절약돼. 나도 걸어서 출퇴근하는데(30~40분 거리) 솔직히 버스 기다리고 신호 걸리고 차 막히고 하면 걷는 거랑 별 차이가 없다. 자전거라면 버스보다 당연히 훨씬 빠르고. 물론 거리가 멀어질수록 효용이 떨어지므로 적당한 범위 내에서나 가능하겠지만 실제로 생기면 정말 재밌을 것 같다. 그림도 웃긴데, 승객 중 한 사람이 하는 말. "다 같이 페달을 밟게 되면서 치한이 없어져서 좋아." ㅋㅋㅋㅋㅋ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열조 백조가 될 지도 모를 아이디어다.

비슷한 방식으로, 고층아파트에서 펌프로 옥상 저수탱크까지 물을 길어올려 각 층에 급수하면서 쓸데없이 전력을 낭비하는 대신, 옥상에 놀이터를 만들어 시소나 그네같은 놀이기구를 펌프와 연동시키는 방법도 제안한다. 아파트 1층이나 지하에도 피트니스 센터를 만들고 모든 기구를 발전기에 연동해서 전력을 생산한다는 것. 이것 정말 실용화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만하다.  

종이 재활용에 관한 내용도 의미심장하다. 종이를 재활용한다는 것이 폐지를 질척하게 녹여뭉개서 다시 다른 제지류로 재생산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공장을 가동시키며 발생하는 또 다른 오염과 운송, 생산에 들어가는 금전적 부담을 생각해봤을 때 과연 환경보호에 기여하기나 하는지 의문스럽다는 것. 그래서 그녀가 착안한 것은 애초의 원형을 보존하면서도 2차, 3차로 사용이 가능하게끔 제작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잡지를 다 보고 나면 종이가방으로 만들어 쓸 수 있게 한다거나 편지봉투를 만들거나 기타 등등으로. 모든 종이를 그렇게 재사용하기엔 쉽지 않겠지만 역시 발상 자체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환경보호라는 미명아래 환경을 더 해롭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동 위험방지 시스템 역시 유용하다. 각종 사건사고을 막기 위해 자동 제어장치를 만드는 것인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안전벨트를 매야 놀이기구가 작동을 한다던가, 열차에 일정한 속도를 넘어가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하는 거다. 이렇게 실현가능성이 있는 것을 넘어서서, 온실가스가 허용 한도를 넘어서면 국내 온실가스 방출 설비가 일제히 가동을 정지하는 시스템이나 예산 범위를 넘자마자 관료들의 급여 지불이 중단되는 시스템도 개발되기를 바라는 그녀. 저도 동의해요.ㅋ 이어지는 그림 역시 재미있다. 식사를 하는 두 여자, 한 명이 스테이크를 포크에 찍어 입안에 넣으려는데 안 들어간다. "어머, 웬일이야. 아무리해도 입이 안 열리네. 더, 더, 더 먹고 싶은데!" "오늘 아침에 비만 방지 시스템을 설치했잖아요. 벌써 잊었어요?"

신랄한 그녀  

이렇게 따뜻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일상의 소소한 재미와 실생활에 쓸만한 개선책을 찾는 와중에, 툭툭 튀어나오는 날 선 눈빛이 매섭다. 비합리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콕콕 집어내고 이 세상을 불행으로 몰고가는 것들을 자근자근 밟아버리기도 한다. 미국의 오만을 가차없이 비난하며 '궁극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자조적으로 그리고, 부시에 무기력하게 휩쓸리는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도 수시로 날린다. 그러나 그 분노에 찬 시선 역시 결국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비아냥대며 흘리는 냉소 뒤에는 갈수록 팍팍해지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자꾸만 파괴되는 것이 많아지는 세상에 대한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발명1 뭐든지 하이브리드, p.16

까마귀를 메추라기와 교배해보면 어떨까? 알과 고기가 맛있으니 순식간에 다 잡아먹혀서 보호새로 지정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조류의 영장이라 일컬어지는 까마귀의 똑똑한 머리를 활용하기 위해 앵무새와 교배해서 인간과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히 하는 방법도 있다. 언제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일지 모르는 세상이다. 앞으로 복지 예산이 대폭 삭감되고 나면 보육새, 간호새라 해서 귀하게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위에 자동 위험방지 시스템에 관한 글도 있지만, 책 전체 면면에서 범죄행위에 대한 분개와 예방책에 대한 절실함이 묻어난다. 아이들이 등하교할 때 일대일로 개와 함께 동행하도록 한다거나, 피해자를 실물과 같은 인형으로 만들어 범인 취조실 구석에 두고 마치 귀신이 나타난 것처럼(수사관들은 미리 짜고 못 본 척 연기한다) 해서 자백하게 만들자는 것이 그녀의 생각. 인형에는 실제 피해자와 비슷한 목소리까지 입력시켜 짤막한 말도 하게 한다. 좀 오싹하지만 효과는 짱일 듯.

발명13 '테러와의 전쟁' 게임, p.75  
 
테러리스트에게 정확히 조준하더라도 지나가던 민간인이나 개가 거의 매번 살상당한다. ... 사용자가 발사한 미사일 때문에 사상자의 유족이나 친구들이 유해를 둘러싸고 탄식하며 슬퍼한다. 그러고 나서 좀 지나면 슬퍼하던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용자가 테러리스트 소탕에 몰두하면 할수록 화면상의 테러리스트 수는 늘어난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화면 구석에 오기를 기다렸다 미사일을 명중시키면 민간인을 말려들게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 기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보았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그동안 전혀 공격하지 않고 있었더니 웬걸, 테러리스트의 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결국에는 없어져버렸다.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게임이다. 미친듯이 테러리스트 '박멸'에 집중하다가 그 늘어나는 수에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손을 놓았을 때, 자연히 사라지는 테러리스트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이 들까?

발명75, 비아그라도 무색케 할 무적의 성욕 증진법, p.377

(2004년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발생했던 미군의 이라크인 수감자 성학대 사건을 두고) 궁극적인 성욕 증진법은 전장에 몸을 두는 것이다. ... 적일 가능성이 있는 이상 인정사정없이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당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죽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장은 항상 유혈과 시체로 차고 넘친다.  

이렇게 많은 죽음과 시체를 마주한 인간에게는 어떻게든 그것에 저항하려는 강렬한 본능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마련이다. 적을 섬멸함으로써 스스로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분신을 생산하여 자기의 유전자를 영속시키려는 욕구가 맹렬한 기세로 싹트는 것이다. ...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온갖 전쟁에서, 병사들은 생존본능에서 비롯한 강렬한 성욕 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따라서 전장에는 성욕이 왕성한 젊은이가 아니라 성욕 감퇴로 괴로워하는 노인들이 가야 마땅할 것이다. 헌법의 평화조약을 걷어치우고 전쟁터에 일본 병사를 보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고이즈미 총리와 국회의원 선생들을 제일 먼저 보냈으면 좋겠다.
  
 

전쟁이라는 것이 인간을 정말 다방면으로 망가뜨리는구나, 새삼 소름이 돋는다. 전쟁을 결정하는 자들은 그저 책상머리에서 싸인이나 쓱 휘갈길 뿐, 정작 전쟁터로 내몰려 직접 총을 들어야하는 청년들의 삶에 대해 한 번이라도 '내가 그들이라면'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어도 진심으로는 아무 생각이 없겠지. 본능과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는 곳을, 외부의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역겨워하기는 쉬운 일일 거다. 그렇더라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사람이 변할까 싶기도 하지만, 역시 겪어 보지 않았으니 무조건 매도하기가 저어되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 인간이란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유약하기도 하지 않나. 정작 당사자들이 그 곳에서 빠져나와 '내가 있었던 곳' '내가 했던 짓'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게 될 시간들은 전장에서의 위험보다도 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현실이 아닌 고작 테러와의 전쟁 게임을 허무하게 끝내고 났을 때 밀려올 그 자괴감처럼.

마리 여사가 고안해낸 100개의 발명은 무엇보다 재미있어서 좋았고, 단지 재미가 전부가 아니라서 더 좋았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선에서 유쾌하고도 진지하게 풀어내는 그녀의 글과, "내 아이디어 정말 기발하지 않아?"라고 외치기라도 하듯 쓱쓱 거침없이 그려낸 그림은 더할 수 없이 발랄하고 신랄한 즐거움을 선사해줬다. 기발한 아이디어의 바탕에 깔려있는 세상을 향한 날카롭고도 따뜻한 시선, 그 덕분에 마음좋은 웃음을 웃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억지스럽게 끌려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그냥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쿡쿡 튀어나오는 웃음. 기분이 무척 좋다. 유쾌한 그녀를 만나, 나도 한껏 유쾌해진,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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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6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6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화요일 방송도 국가기관의 민간사찰 문제로 여지없이 이슈로 떠올랐던 <PD수첩>. 뒤늦게서야 보고 나서는 6월 22일 20주년 특집방송까지 봤다.  

토크콘서트라고 해서 PD들이 노래라도 한 곡 부르려나 완전 기대했었는데 그냥 가수들 음악 따로 패널들 얘기 따로... 그저 그런 특집이었다. 편집도 튀어서 산만하고... 방송예고글 봤을 땐 뭔가 굉장히 흥미로울 것 같았는데, 패널들의 얘기는 너무 짧아서 황당했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가수들의 무대가 길게 느껴지면서 괜한 거부감마저 들었다.; 싫고 좋고 할 가수들도 아니고,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는데도. (인공위성, 바비킴, 김창완밴드, 이상은, 노영심이 나왔다)

<PD수첩 20주년 특집 토크콘서트 '대한민국, 안녕하십니까?'>    

첫 번째, 내레이션 - 노종면(YTN 해직기자), 정영심(용산참사 유족), 박대성(미네르바), 한채민(촛불소녀) 
당시 방송됐던 장면들이 나오면서 그들의 내레이션이 흘렀다. 노종면 기자(외 5명)의 경우 "방송의 중립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므로 해임처분은 재량권을 일탈한 것"이라고 판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직기자로 남아있다. 회사는 항소했고 그들은 재판 결과에 따라 복직을 시켜달라며 '구걸'하지 않았거든. 구본홍을 바로 코앞에 두고 목소리를 높이던 그, 높았던 목소리만큼 제자리로 돌아가는 길은 높은 오르막길이 되고 있다. 용산 역시, 여전히 용산이다. 이제 용산이라고 하면 그 뒤엔 자동적으로 참사라는 단어가 붙어야 할 것만 같은, 길고 깊게 각인된 야만정부의 단면.

헐. 난 그 사람이 미네르바인 줄 몰랐다. 왜 미네르바 얘기에 못 보던 사람이 앉아있나, 피디인가 기자인가 했는데, 미네르바가 살이 빠져 그런 거였다. 그러고보니 방송예고글에 35kg나 빠져서 수척한 모습이었다는 말이 있었는데도, 사람이 살이 빠졌다고 저렇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나 싶을 정도로 미네르바인지는 상상도 못했다. 몸도 힘들었겠지만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 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법원이나마 중심을 지켜줘서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정말 이 나라 골로 가는 거 아슬아슬하게 버텨주고 있는데 그래서 가끔 무슨 판결 기사라도 눈에 띌라치면 지레 심장이 철렁한다. 똑같은 법서를 보고 공부한 사람들인데 어째서 누구는 개고 누구는 사람인지.

두 번째, 토크 - 진중권, 전원책, 박재동, 최유라 
사회자 이문세가 대한민국이 안녕하냐고 묻는 질문에 전원책은 안녕하다고 했다. 보수꼴통이니 빨갱이니 이런 소리 듣는다고 기분 나빠할 필요 없고 그렇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시끄러운 것 자체가 안녕하다는 것이라고. (속 편한 소리 하십니다...;) 반대로 진중권은 안녕하지 못하다고. 현대미술 강연 나가는데 정보과 형사가 따라붙는 본인의 얘기며 미네르바 사태며 뭐 그런 당연히 나올 얘기들...  

암튼 두 분 나오면 재밌다. 백분토론 단골 파이터;였는데, 토론에서 참 살벌하다 어떻다 얘기가 나오니까 전원책 왈, 진중권이 방송에서 진짜 화나게 하는데, 방송 끝나면 또 웃게 만든다네.ㅋㅋㅋ 자기랑 부딪히면서 진중권이 크는 거라고 말할 때 뭔가 진짜 사회의 어른같은 기분이 들어서 보기 좋더라. 실제로 진중권이 전원책과 논쟁을 벌이면서 사회적 이슈를 확대하는 측면도 있지만 이미 그의 발언 자체로도 충분히 이목이 집중되는 사람이라 그렇게 큰 영향이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다만 본인과 의견이 다른 상대를 향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그 쪽 사람들에게선)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인지라... 초큼 감동이었다는 거.

전원책 변호사와 박재동 화백은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하는데 전원책의 말에 의하면 "이 친구는 수학시간에도 뒷자리에서 누드같은 그림 그리던 좌파였다"고 한다. 나도 수업시간에 그림 많이 그렸는데, 중고딩 때 나 좌파였나ㅋㅋㅋ 투닥투닥 재밌었다. 아 근데 너무 짧았다고...
 
세 번째, 내레이션 - <PD수첩>의 주요 장면들  
김미화(맞나?)의 내레이션과 함께 나오는 자료화면에서는 또 가슴에 불이 붙어 올랐다. 첫 촛불로 기록된 미선이효순이 추모집회와 SOFA개정요구집회, 쇠고기수입반대집회, 용산참사. 망루에 오르며 두 팔로 하트를 그려보이던,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그 사람들이 어떻게 그 누구의 눈에는 그저 쓸어버릴 하찮은 목숨에 불과할 수 있었을까. 이제 태어나면서부터 인생 경로가 정해지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대한민국에서는 목숨값마저도 "평등하지 않다". 

네 번째, 토크  - <PD수첩>의 역대 PD 송일준, 최진용, 최승호
제일 기대했는데, 너무 기대했나벼ㅡㅡ 주옥같은 몇 마디가 가슴을 치고 들어왔지만 너무 짧고 썰렁했다. 고생담을 구구절절 늘어놓거나 방송철학을 거창하게 늘어놓기를 바랐던 것도 아니고 그저 그렇게 진솔한 얘기들을 좀 더 '길게' 듣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다섯 번째, 작은 PD수첩 -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뉴타운 개발 아래 짓밟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짤막한 다큐. "집 부서진 아이라고 친구들이 놀려서" 학교를 며칠씩이나 빠졌던 아이가, 온 동네가 박살 난 폐허더미 위에서 "제가 정들었던 집이에요" 라고 울먹울먹한다. 이 아이의 상처와 기억은 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그 작은 가슴에 박힌 눈물덩어리를 어찌. 엄마한테 반찬투정이나 하고 동생이나 괴롭히고 숙제 안 해서 혼나기나 할 나이에, 어른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아픔을 받아내야하는 가혹한 현실 속 그 아이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째서 이 나라는 10살도 채 되지 않은 꼬마 아이의 얼굴에 어른의 절망을 무자비하게 처발라버리는 건지. 아이의 얼굴은 아이답게 지켜주는 것이 국가가 해야할 일 아닌가?...

암튼 그렇게 눈물 쏙 빼놓고는 마무리는 참 발랄하게도 비행기 날리기(방청객들이 PD수첩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서 무대로 날려보내기)를 한다. 에에. 평소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에서 잠깐 벗어나 좀 경쾌하고 다채롭게 가려고 했던 것 같지만, 아무래도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을 쇼의 형식으로 담아내려던 기획은 무리였다 싶다. 쑥쑥한 가슴에 노래는 잘 안 들어왔고 음악이라기보다 그냥 번잡한 소리로만 들렸다. 어쨌든 PD수첩의 20년과 맞물렸던 그 간의 굵직굵직했던 사회문제를 한 눈에 되돌아볼 수 있었던 것, 너무 오래 전이라 몰랐던 방송도 슬쩍 맛보기로나마 알 수 있었던 것으로 충분히 의미는 있었다. 그만큼 지난 20년의 대한민국 역사를 "관통"해온 PD수첩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며.

흠. 그래도 이런 특집 정도면 어설프게 노래랑 섞어서 토크콘서트를 하느니 손석희(이럴 때 안 보면 언제 보나요)가 진행하는 미니 토론처럼 꾸몄더라면 참 좋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진중권 외 패널들과 피디들이 한 자리에서 그냥 편하게 대화하는 형식으로... 뭐 이미 끝난 방송가지고 아쉬워해봤자지만. 그래도 좀 너무 헛헛해서, 마침 주문해놨던

<PD수첩 - 진실의 목격자들> 을 집어 들었다. 일주일 전에 받았는데 계속 못 읽고 있다가 이 참에 주말 독서로. 책날개에 보니까 지승호의 트위터가 소개돼있다. 서재는 닫으신 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그 쪽에 집중하고 계신가보다. 알라딘엔 그 분과 개인적으로도 친분있는 님들이 많은 것으로 아는데, 이미 알고 있으실 수도 있지만 혹시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latteemiele(프랑스어인가. 뭔 뜻일까?) 

<진심의 탐닉>을 한 편 한 편 마음 좋게 읽었지만 역시 난 미사여구 없이 있는 그대로 풀어 주는 이런 인터뷰가 더 좋다. 전문 인터뷰어의 인터뷰와 영화잡지기자의 인터뷰, 각각 인터뷰를 전하는 매체도 다르고 자연히 인터뷰 방식이나 색깔이 다를 수 밖에 없으니 굳이 비교선상에 놓을 문제는 아니지만... 그냥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그렇다는 거. 간결하고 압축된 대화 속에서 느껴지는 잔잔한 감동도 좋지만 이렇게 일견 무미한 듯 죽죽 이어가는 이야기 속에서 천천히 차오르는 감동, 차분하게 스며들어 깊숙히 퍼지는 울림이 좋다.  

<PD수첩>을 최초로 기획했던 김윤영, 그와 함께 초창기 멤버였던 김상옥, 종교문제를 중점적으로 파헤쳤던 윤길용,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김환균, 각종 이슈의 중심에 있었던 송일준, 권력의 핵심부를 건드렸던 최진용, 최근 검사 스폰서 문제를 고발했던 최승호, 황우석 신화를 깨뜨렸던 한학수, 쇠고기 협상의 문제점과 광우병 위험을 지적했던 김보슬 PD. 아아. 이름 하나하나 써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손가락이 찌르르르한다. 진실을 향한 열정, 용기, 양심으로 똘똘 뭉쳐 PD수첩을 스무살로 키워낸 이 사람들. 진짜 멋진 사람들이다. 시청자가 제일 무섭다고 말하는 그들. "외압에 맞서면 당장 죽는다. 그러나 굴복해서 얼마간 살아남더라도 더 이상 정직하지 못한 방송은 어차피 나중에 죽게 되어있다. 그럴 바엔 지금 죽는 게 낫다." 고 말하는 그들. 갖은 고난과 위협 속에서도 기어이 여기까지 꿋꿋하게 걸어온 그들에게 마음 속 깊은 존경, 존경,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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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옛 친구에게 
->창이 열리면 [동영상 바로보기] 버튼을 클릭. 동영상을 바로 누르면 또 창이 열려서 번거로워요.
  

 


화면에는 3집 자켓이 나오는데
이 노래가 수록된 앨범은 저 [베스트 오브 베스트 1989~2003] 이다. (나도 어떤 앨범에 있는 곡인지는 몰랐는데 지금 알았다)
3집에 실린 건 그 유명한.. 빗소리로 잔잔하게 시작하는 어쿠스틱한 옛 친구에게.

정규앨범에 실린 게 원곡일텐데
나는 이 rock 버전(?)을 먼저 알았고 더 좋아했다. 
코러스가 약해서 보컬이 더 돋보이는 것도 좋고.. 처음부터 치고 나오는 드럼도 좋고.. 중간에 일렉기타도 좋고...
빗소리는 없어도 비오는 날 들으면 참 좋은 노래.

머큐리님. 말씀대로 찾아서 연결해봤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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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0-07-01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 버젼도 좋습니다...ㅎㅎ 건조기후님 감솨~~~

건조기후 2010-07-02 10:07   좋아요 0 | URL
헤헤. 좋죠?
 

토요일 새벽에 주문한 책이 그 날 밤 집에 오니까 도착해있었다. 어두운 방안으로 막 들어오다 박스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택배오는 건 늘 현관입구 쪽에 자리가 정해져있는데 누가 왜 새삼 방 안에까지ㅜ 그대로 넘어졌으면 책상 의자에 턱을 제대로 찧을 위치였어서 순간 아찔. 암튼 바로 온 거 보니까 주문하면서 당일배송 체크돼있는 걸 그대로 넘겼나본데.. 급한 책도 아니구만 뭔가 마구 보채서 받은 기분.

상자를 뜯고 증정품 확인하고ㅋ (책은 4권인데 증정품이 3개) <진심의 탐닉>을 들고 김제동 편을 먼저 펴서 읽었다. 김혜리 기자는 말만 많이 들었지 직접 그녀의 인터뷰글을 보는 건 처음인데

음... 에에... 김제동에 대한 방송이나 기사는 눈에 띄면 거의 다 보는 편이기 때문에 아는 이야기가 많아서 그런지, 좀 밋밋했다. 내가 몹시 감동받았던 이야기가 너무 확 줄여져있어 어쩐지 마음이 상하기도 했고. 김제동이 얘기를 길게 하지 않은 건지 김혜리가 정리하면서 줄인 건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녀 인터뷰에 대한 첫 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았던 셈.

분량을 조절하긴 해도 그렇다고 내용을 윤색하는 게 아니라 "대화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물기를 빼는" 거라는 말이 아주 그럴 듯하게 들렸는데, 잡지에 실렸던 인터뷰라 제한된 지면상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난 그 물기라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 작은 거 하나에 훅 갈 때도 있고.ㅎ 구술 대화를 활자로 옮기면서 "어.. 어.. 그러니까" 뭐 이런 거, 열 받아서 내뱉는 씨발 존나 이런 욕지거리, 중간중간 얕은 한숨, 대답하기까지 걸리는 시간같은 미묘한 것들까지 표현해주는 인터뷰가 좋다. 말하지 않는 시간도 인터뷰 시간이고 그것 역시 인터뷰의 일부니까. 그래서 그녀의 손을 거친 정갈함이 나와는 별로 맞지 않았다. 좀 중구난방이라도 사실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게 좋은데.

단행본으로 다시 정리하면서, 애초에는 다소 거칠었을 인터뷰 질감을 조금 살려줬어도 좋지 않았을까? 고현정의 말마따나 "마구잡이 단어 나열이 정돈되면서 반듯반듯해졌고, 마치 내가 생각이 깊은 인간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김혜리 기자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자신을 발견하게 해주는 신비한 힘이 있"어서 인터뷰이의 입장에선 좋겠지만, 역시 그런 건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자칫 미화시키는 느낌이 들어 진실을 의심하게 되곤 하니까. 보기엔 좋고 예쁘지만,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말같은 것 그닥 탐탁치않아 하는 나같은 사람은 마구잡이 단어 나열, 이런 게 더 좋다. 뭐 굳이 예쁜 걸 흐트리자는 게 아니라, 예쁘면 예쁜 그대로 예쁘지 못하면 또 예쁘지 못한 그대로의 모습이 좋다는 거...  

어쨌든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그녀의 인터뷰는 무척 아름답다. 그녀는 참 잔잔하게 흐르는 맑은 냇물처럼 사람을 바라본다. 아주 조심스럽고도 편안하게. 그녀와 인터뷰를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도 같다. 나를 예쁘게 바라봐주는 진심어린 눈빛에 마음을 가만가만 풀어놓게 되는 기분이랄까. 질문도 마음을 울리는 것들이 있었지만, 평이한 질문에도 마음에 울림을 주는 답을 하는 것 또한 인터뷰이의 힘이 아니라 그녀라는 인터뷰어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앞뒤로 삽입된 그녀의 글도 참 좋다. (이런 날씨에 이런 비유라니 덥긴 하지만) 벨벳처럼 촉감이 보드랍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문장들. 문학이다.  

암튼 한꺼번에 다 읽어버리긴 아까워서 몇 개 골라 읽었는데, 대체로 다 가슴 촉촉한 기분으로 잘 봤지만 무한도전 김태호PD가 압권이었다. 동아일보 입사시험 최종까지 합격했는데 포기한 이유. 

인턴 합격자 12명에 들었다고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는데 어째 남의 옷 입은 느낌만 들고 한숨만 나오는 거예요. "나 글 쓰는 건 싫은데..." 싶고. 정장을 입고 오라는 지시도 마음에 걸렸어요. 결국 "내일 못 갈 거 같습니다"라고 전화했더니 "왜요?" 묻더라고요. "마음이... 안 내키네요" 라고 대답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귀여운 말줄임표 ㅋㅋㅋㅋㅋ  
(아 이건 정말 말줄임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하늘땅 차이인데. 김혜리가 김태호의 성격을 좀 더 잘 표현하기 위해 넣은 것인지 김태호가 실제로 말을 저렇게 소심스럽게 한 건지 궁금하다.ㅎ)

제일기획은 최종까지 갔는데 재학증명서를 빠뜨렸어요. 인사부 과장님이 다음날 퀵서비스로 보내면 받아주겠다고 했는데, 어린 생각에 설마 재학증명서 없다고 떨어뜨릴까 싶어 안 보냈더니 떨어졌죠. 그냥 정이면 될 줄 알았어요. 서로 눈을 바라보며 얘기했으니까...  

미치겠다ㅋㅋㅋㅋㅋ 사랑해요 태호피디ㅠ

저희가 제일 경계하는 것이 '자뻑'이에요. 우리가 높은 데에 있고 베푸는 방식으로 나누는 것이죠. <느낌표!>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러브하우스'를 하면서 일종의 거래가 아닐까 고민했어요. 어려운 사람의 신분을 노출하고 슬픔을 다시 끄집어내 상처를 보여준 다음 그 '대가'로 집을 지어주고 도움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불편함이었죠. 가출 청소년을 찾아다닐 때, 딸을 찾아나선 아버지가 속옷 바람이어야 하는데 제대로 옷을 입고 나와서 헐레벌떡한 느낌이 없다고 선배한테 야단맞은 일이 있어요. 전 표정만으로 다 보여줬다고 생각했고요. '러브하우스'도 방송국에서 간다고 말씀드리면 제일 좋은 옷을 입고 화장도 하고 계신데 리얼함이 떨어진다고 지우라고 시키는 일이 있었어요.  

그런 게 너무 싫어서 공익은 다시 안 한다고 결심했는데 <무한도전>을 하다 보니 어떻게든 나누고 싶었어요. 3, 4년 전 연말 방영분에서 몰래 어려운 분들의 집 앞에 선물을 놓고 왔죠. 그 분들을 노출하지 않았지만 다음날 아침 집 앞의 용달차를 보았을 때 가족의 아버지가 모든 걸 함축하는 리액션을 하셨어요. "오, 하나님!" 하는 한마디였죠. 치킨집과 삼겹살집을 찾아간 '박명수의 기습공격'은 '신동엽의 신장개업'을 저희 방식으로 새롭게 접근한 거에요. 거기서 음식점 주인, 먹으러 간 운동선수들, 돈을 쓰는 박명수, 누구 하나 밑지는 장사가 아니거든요. 초대된 선수들은 잘 먹어서 좋고 장사하시는 분들은 불로소득이 아니니까 떳떳하게 돈을 받을 수 있고 저희는 기쁨을 나눠서 좋고 세 가지가 결부돼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공익도 거품은 빼고 진실을 돋보기처럼 확장해서 보여주는 쪽이 맞지 않나 싶어요. 

아. 완전. 공감. 사람 아픈 데 찔러서 눈물 빼고 그거 팔아서 옛다 집 한 채, 옛다 가게 하나... 참 야만스럽다고 생각했다. 약자에겐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병원24시인가, 치료비가 없어서 수술 못하는 환자들의 처지를 보여주고 모금하는 프로그램도 나는 좀 불편해서 잘 못 본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미안한.. 그런 기분도 있고, 당신은 도움을 받는 입장이니까 배려같은 건 기대하지 말라는 듯한, 너무 쉽게 가는 방식이 거북한 데서 오는 불편함. 에둘러 가더라도 다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텐데.    

김태호는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었다. 눈물을 사고 싶지는 않은 사람. 섣불리 상처를 위로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한 번이라도 더 웃는 것으로 덜 아프게 해주고 싶은 사람. 웃음은 얼마든지 거래하고 싶은 사람.  

처음엔 <진심의 탐닉>이라는 제목이 다소 거창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탐닉이랄 거 까지야 싶었던 건데,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체 이런 유명인들의 진심이라는 것을 어디까지 내어놓아야 할 것인가, 그 답도 쉬운 게 아니긴 하다(아예, 내놓을 필요가 있을까 싶을 때도 있고). 그들이 생각하는 진심의 정도와 내가 생각하는 진심의 정도가 다를 때, 내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그들의 진정성이 부족하다며 실망할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 에... 바보같은 말을 하고 있구나. 사람의 진심이라는 것이 어디 누가 감히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상대방에게 어떤 감흥을 주고 말고를 떠나서 그들에게서 나온 그 모든 것은 진심일 것이다. 조금쯤 꾸며서 하는 듯한 얘기도, 웬만해선 보여주려 하지 않는 모습도, 그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진심인 거겠지. 그들이 드러내는만큼 받아들이고 내 마음이 반응하는만큼 공감한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뭐 더 달리 있을 게 없는 거고. 그저, "나 이 사람 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들의 그 맨모습 슬쩍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인터뷰를 읽는 즐거움은 충분하다 싶다. 게다가 이렇게 깊고 따뜻한 눈에 비친 그들이라면. 

천천히 하나 하나 골라가며 느릿하게 읽어가야지.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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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6-22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인용하신 태호피디 인터뷰 부분 때문에 저도 이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건조기후 2010-06-22 23:56   좋아요 0 | URL
오, 미모의 다락방님. 헤헤.
김태호 편 정말 좋았어요. 아 정말 입사서류 안 내놓고 정이면 될 줄 알았다니.
다른 멋진 얘기도 많은데 저 말에 완전 꽂혀가지고.ㅋㅋ

오늘은 정우성 편을 읽었는데..
그 배우는 그냥 글자로도 사람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더군요. 어휴.

마노아 2010-06-22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나면 또 이렇게 써주세요. 감동이에요.^^

건조기후 2010-06-22 23:59   좋아요 0 | URL
인터뷰가 다 좋아요. 남은 것도 야금야금 조금씩 삼켜가며 볼라구요. ^^

글샘 2010-06-22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턱,에 바늘자국 안 내게 돼서 다행이에요. ^^ 재밌네요. 천천히 하나하나 골라가며 읽고 싶에 만드는 책... 참 드물죠. 좋은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마워요~~

건조기후 2010-06-23 00:07   좋아요 0 | URL
인터뷰 한 꼭지 읽고 나서 감도는 여운이 더 좋은 거 같아요. 그래서 바로바로 다른 사람 인터뷰로 잘 안 넘어가게 돼요.ㅎ

무해한모리군 2010-06-22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기대가 되요.

건조기후 2010-06-23 00:11   좋아요 0 | URL
저도 다음에 골라 읽을 인터뷰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져 있을 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어요.ㅎㅎㅎ

2010-06-26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6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6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7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6월 1주

콜린 퍼스 주연의 영화 두 편이 같은 날 개봉해서 상영중이다. <싱글맨>과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입니까?>.
<싱글맨>은 포스터 속의 남자가 콜린 퍼스인 줄 몰랐다가 다른 영화를 예매하면서 알았다. 오. 봐야지.
딱히 젊고 파릇파릇한 그를 봤던 기억이 없긴 하지만, 왠지 저렇게 뺀질한 중년신사의 모습은 어색하다.
전통적이고 고지식하면서도 뭔가 아직 때가 덜 묻은 것 같은 분위기가 멋진 그인데.

<싱글맨>은 연인을 교통사고로 잃은 후 남은 자의 삶을 삼켜버린 상실감을 잔잔하게 그린 영화다.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 조지(콜린 퍼스)는 꽉 막히고 빈틈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슴에 난 구멍속에서 외롭게 허우적대고 있다. 16년을 함께 지낸 연인을 잃은 쓸쓸하고 허무한 심정이 눈빛과 표정 하나하나마다 싸하게 배어난다.

하얀 눈길 위에 죽어있는 짐을 매일 밤 꿈 속에서 만나면서 그의 삶은 점점 죽음의 빛으로 탈색되어간다. 실제로 화면의 톤이 주인공 심리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데, 화면의 색감이 어둡고 낮게 가라앉았다가 어느 순간 선명한 빛을 낸다. 그의 삶에 다시 생기가 돌아오는 순간이다. 화려한 장치는 아니지만 몹시 감각적이고 예뻤다.

눈동자가 클로즈업 되는 장면이라든가 입술이 붉게 도드라지는 장면들까지, 게이의 감성을 건드리는 것들이 이런 거구나 엿보는 기분도. 그저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라고 생각해왔던 것과 약간 달랐던 것이, 땀에 젖어 햇빛에 반들거리는 남자의 가슴을 매혹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술을 마시는 입술을 탐하는 듯한 눈빛, 그런 눈빛과 눈빛이 부딪히는 순간 얼굴에 피어나는 야릇한 미소같은 것들은 그들을 좀 더 섬세하게 바라보게 했다. 서로를 알아보는 징표라도 있는 듯 이끌리는 동물적인 감각은 남녀관계와 전혀 다를 것이 없구나, 뭐 그런 새삼스러운 것까지.  

(결코 완전히 지워내진 못할 것 같은) 특유의 까칠한 얼굴은 여전하지만, 그것이 공허한 표정과 섞여 자아내는 날선 슬픔은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온다. 결말이 반전이라면 반전이고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입니까?>
영화 제목을 착각했다. <아버지를 처음으로 본 것은 언제입니까?>로. 기억은 종종 눈의 물리적인 기능을 지배하곤 한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버지와는 이제 마지막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본 것처럼 낯설었던 느낌이 지금까지 강하게 남아있다. 영정도 낯설었고 입관을 기다리며 누워있던 아버지도 낯설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기도 했지만, 단 한 번의 따뜻한 정도 느껴보지 못한 이 분, 나를 낳아준 아버지라는 이 분, 마치 처음 본 것 같은 낯설음이 곧 마지막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감당하기 힘든 괴리감으로 나를 덮쳤던 그 때.

이런 기억들을 생각나게 하는 건, 영화가 뻔하게 노리는 것이기도 하다. 관객들 가슴 속에 존재하는 저마다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저마다의 감상에 젖게 만드는 것. 영화 속 아버지와 성격이 비슷하다거나 암으로 돌아가셨다거나하는 특정한 부분들이 개인사와 겹친다면 조금쯤 눈물이 나기도 할 것이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아들이 마음을 풀어가는 과정에서는 나의 경우와 맞물리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 자체에 관한 소감이라면 딱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어쩌라고?;

어린 시절의 블레이크는 좋았고, 성격차이와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부자지간의 묘한 신경전에도 공감이 갔다. 그러나 어른이 된 블레이크(콜린 퍼스)의 '과거여행'을 통한 아버지와의 '화해'는 좀 생뚱맞고 허술했다. 도대체 블레이크는 그 여행의 어떤 지점에 이르러 마음을 완전히 열 수 있었던 걸까?...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들도 많았고 콜린 퍼스 역시 특별히 나쁘진 않았지만 특별히 좋지도 않았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였다. (페이퍼 제목이 매력속으로 인데;;)
 
사랑해 마지않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도 콜린 퍼스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런, 예술가다운 성격이라고 해야하나. 몹시 까칠하고 고집스러우면서도 순수했던 화가 베르메르 역으로 콜린 퍼스는 정말 적격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트 역의 스칼렛 요한슨도 물론. 

그리트가 베르메르의 화실 청소를 시작한 날, 그녀는 뭔가 마음에 걸려 베르메르의 부인과 장모가 있는 거실로 간다. "마님, 화실의 창문을 닦아도 될까요?" "그런 건 묻지 않고 해도 돼." "하지만 빛이 바뀔지도 몰라서요."  

그녀의 남다른 직관과 재능을 지켜보며 까다로운 자신만의 세계로 맞아들인 베르메르는 그녀를 거의 예술적 동반자로 여기게 된다. 그녀가 청소하러 들어가서 정물 구도를 바꾸어놓고, 그가 그 구도대로 그림을 그리는 엇박의 교감도 사뭇 가슴이 떨렸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물감을 만들던 장면이었다. 화실 위에 붙은 작은 다락방 안에서 그녀와 그는 말도 없이 달그락달그락 재료를 갈고 섞는다. 가끔은 베르메르의 조곤조곤한 설명이 팽팽한 침묵을 갈랐고, 가끔은 그와 그녀의 손이 스치듯 닿으며 서로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튀어올랐다. 그녀가 마지막 순결처럼 감춰왔던 머리칼을 그에게 들키던 순간의 뜨거웠던 긴장까지... 모든 것이 예술이었다. 책을 먼저 본 터라 실망하지 않을까 했는데, 책이 더 좋긴 하지만 영화도 몹시 사랑스러웠다.

    

<러브 액츄얼리> 이건 뭐 너무 유명한 영화니까. 역시 까탈스러워 보이면서도 로맨틱한 구석이 있는 역할로는 그가 최고인 거 같다. 여기서 캐릭터 자체는 성격이 그닥 드럽지도 않았지만, (조용하고 예민한 인상을 주는) 작가라는 직업 자체만으로 그의 매력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특유의 무뚝뚝한 이미지 덕분에 막판 레스토랑에서의 프로포즈가 더 감격적이었던. 은근한 매력이라면 휴 그랜트도 만만치 않은데, 역시 분위기는 콜린 퍼스 쪽이 더 좋았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여기도 휴 그랜트과 함께구나. 포스터 사진.ㅋㅋㅋㅋㅋ 공부만 열심히 한 순진쟁이의, 브리짓에 대한 풋풋한 사랑과 바람둥이 말종 상사로부터 그녀를 지키려는 정의감이 고스란히 드러난 표정. 귀엽고 멋지다. 그러고보니 이 영화에서 그의 이름이 마크 다아시였다.

보너스로 <오만과 편견>. 이건 아직 못 봤는데 그의 출연작을 검색하다가 발견했다. 제인 오스틴의 그 오만과 편견을 드라마로 제작한 거라고 한다. 당연히 다아시 역엔 그다. 세상에, 그렇게 냉정과 열정을 동시에 지닌 에고덩어리 다아시로 콜린 퍼스 이외에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아래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하는 다아시.

발버둥치며 자신과 싸워봤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모하고 사랑하는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언하건데, 제가 제 가족들과 친구들의 소망과 제 자신의 판단에 명백히 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일가친척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결혼은 어떤 것이든 매우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질 겁니다 
사실 분별있는 사람으로서 제 자신이 그렇게 비난받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주위의 모든 반대를 물리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가 만났던 매순간마다 전 열렬한 동경과 관심으로 당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 고통을 상기하고 저의 청혼을 받아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뭐래.ㅋㅋㅋㅋㅋ 아. 이 드라마도 보고 싶고 책도 다시 읽고 싶다. 이래서 고전은 고전인가보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표정이 그처럼 어울릴 수 없는 까칠한 얼굴도 얼굴이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순박한 눈짓과 미소가 있어서 더 매력적인 배우다. 능글능글한 유머보다는 신경질적인 무표정 혹은 아주 진솔한 눈빛이 참 멋진 영국 남자. 그의 영화를 모두 본 건 아니지만 <싱글맨>에서 그의 연기는 아주 깊어서, 그의 진면목을 보여줄 영화가 조만간 한 번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갖게 한다. 다른 배우들에게는 없는 그만의 매력이 남김없이 발산될 작품을 '제대로' 만나길 고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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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6-07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죽겠다요 건조기후님.

"주위의 모든 반대를 물리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가 만났던 매순간마다 전 열렬한 동경과 관심으로 당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 고통을 상기하고 저의 청혼을 받아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받아줄게요, 하고 싶네요. 아, 그런데 저한테 한건 아니니까요..orz


[오만과 편견]은 안봤으니 패쓰하고,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저는 별로였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의 콜린 퍼스가 참 좋았어요, 저는.

건조기후 2010-06-07 22:59   좋아요 0 | URL
오만과 편견을 보심 마음이 달라질지도 몰라요. 더 반해버릴 수도 있지만요.ㅎㅎㅎ
저 볼드체 구절도 정말 짜증나고 귀엽지 않나요ㅋㅋㅋ 이런 게 바로 다아시ㅠ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그런 캐릭터가 이 배우에겐 정말 잘 어울려요.
근데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는 더 할 것 같아요. 윽^^ 주말에 찾아보려구요. 벌써 두근두근ㅎ

다락방 2010-06-07 23:33   좋아요 0 | URL
[오만과 편견] 책속의 다아시는 사실 그다지 제가 반할만한 캐릭터는 아닌데, 인용하신 문구를 보니 막 좋아질라고 하네요. ㅎㅎ 저는 남주쪽이라면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 보다는 [제인 에어]의 로체스터 쪽이 더 멋지더라구요. ㅎㅎ

건조기후 2010-06-08 00:57   좋아요 0 | URL
아 잠깐 제가 착각했어요.. 요 드라마를 안보셨단 말인데 책을 안보셨단 말로;;
어쩐지 댓글 쓰면서도 음? 안보셨을리가 없는데.. 하며. 아핫;
드라마 보고 나서 책도 다시 봐야겠어요. 누런 옛날 책 말고 새로 사서 새 기분으로.(웬 새 기분ㅋ)

다락방님. 저 제인 에어는 전혀 기억이 안 나요ㅠ 아 슬프다ㅠㅠ

사비 2010-06-0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싱글맨 괜찮아? 볼라다가 누가 별로래서 안봐도 되나보다 했어

건조기후 2010-06-08 22:57   좋아요 0 | URL
응 좋던데 난... 봐도 후회 안 할 것임^^ (하면 어쩌지ㅋ)
블로그 포스팅 좀 하징? 그만 내려다봐;;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