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들에게 들려주는 행복의 길 청소년 철학창고 6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홍석영 옮김 / 풀빛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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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까? 이 물음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대답들은 모두 '행복'으로 모아진다. 행복은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 즉 최고의 선이다. 어떤 사람도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은 서로 다르고, 때로는 같은 사람도 경우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고유한 일과 기능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고유한 일, 자기에게 어울리는 일을 탁월하게, '매우 잘' 수행할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해지며, 그런 행복은 생애 전체에 걸쳐 완전한 덕을 성취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인 '정신의 덕이 있는 활동'을 행복이라고 규정하고, 행복한 사람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탐구한다.
(1부 행복에 대하여) -12쪽

행복이 완전한 덕에 따른 활동이라면, 이제 덕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래야 행복에 대해 더욱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덕은 '인간의 덕'이다. 인간의 덕이란 신체의 덕이 아니라 '정신의 덕'을 의미한다. 정신의 덕은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으로 구분된다. 철학적 지혜나 이해력은 지적인 덕이고, 너그러움이나 절제는 도덕적인 덕이다.

그러면 덕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정념, 즉 감정을 잘 다스리고 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념이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중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간은 수학에서 말하는 평균과 같은 것이 아니다.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하여,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행동하는 것'이 바로 중간 상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용이며, 또한 참된 덕이다.
(1부 행복에 대하여) -22쪽

국가의 통치 형태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리고 이것의 타락한 형태에도 세 가지가 있다. 세 가지 통치 형태는 군주제, 귀족제, 그리고 재산 능력에 기초를 둔 유산자제(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국가 형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화제라고 부름)이다. 이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군주제이고, 가장 나쁜 것은 유산자제이다. 군주제가 타락하면 참주제가 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1인 지배의 정치 체제이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다. 즉, 참주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군주는 백성의 이익을 추구한다. 군주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백성들의 이익을 돌본다. 따라서 참주제는 타락한 정치 형태 중에서 최악의 형태다.

귀족제는 그 통치자들의 악덕으로 인해 과두제로 타락한다. 과두제에서는 국가에 속하는 것을 제멋대로 분배한다. 즉, 좋은 것을 전부 혹은 대부분 자기가 갖고, 관직을 언제나 같은 사람들에게 주며, 무엇보다도 재물에 연연한다.

유산자제는 민주제로 타락한다. 사실 이 둘은 거의 비슷하다. 유산자제는 다수의 지배를 이상으로 하며, 재산이 있는 사람은 모두 평등한 것으로 여긴다. 한편 민주제는 다른 타락한 정치 형태들보다는 덜 나쁘다. 시민들 스스로의 선거에 의해 지도자를 뽑기 때문이다.
(6부 다시 행복에 대하여)-165-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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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잘코군 2007-06-17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리뷰 카테고리 목록을 보시면 금방 아실거에요. :)
전공 맞습니다.
 
몽매한 자를 깨우치다 이이의 격몽요결 Easy 고전 10
김세서리아 지음, 김우정 그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삼성출판사 / 2006년 12월
절판


"모를 섬기는 자는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행실이라도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말고, 반드시 부모에게 명을 받은 뒤에 그것을 행해야 하는 것이니, 만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도 부모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반드시 자세히 말씀드려서 부모님이 허락하신 뒤에 행할 것이다. 끝애 허락하지 않으신다 해도 곧바로 자기 마음대로 제 뜻을 이루어서는 안된다."
(밑줄그은이 주 : 그 정신은 본받아 마땅하나 언제나 문자 그대로의 말이 옳아보이진 않는다) -89쪽

예전엔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의식의 개념이 들어 있었다면, 요즘의 장례식은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그 사람을 공동체에서 영원히 제외시키는 의식의 절차라는 생각이 듭니다. 장례식장이나 납골당 같은 것이 집 주변에 생기는 것을 꺼리는 것도 그러한 생각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죽음을 자꾸만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이해하려는 현실의 세태가 조금은 아쉽게 느껴집니다.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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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잘코군 2007-06-12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내용은 그다지 깊이있진 않습니다. 이이와 관련된 주변머리들을 훑으신다고 보면 돼요. 이지고전 시리즈 네 권짼가 보는데 다른 책에 비해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워낙 또 <격몽요결>이란 책이, 맹자나 공자 처럼 뭐 말할거리가 많은 책도 아니라. 그럭저럭 볼만해요. <격몽요결>은 1차 서적 붙들고 있긴 힘드니깐.

이잘코군 2007-06-1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사실 잘 모릅니다. :) 그렇담 요 책으로도 괜찮을거 같아요.

2007-06-12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을 위한 약속 사회계약론 나의 고전 읽기 3
김성은 지음, 장 자크 루소 원작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6월
품절


루소에게 독서는 훗날 자기 머리로 생각하기 위한 철저한 훈련이었다. 그는 자기 입맛에 맞는 책 몇 권만 읽고 세상을 모두 아는 양 잘난 척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우선 자신의 입장을 하얗게 비워두고 저자가 전해 주는 지식을 머릿속에 저장하는 데만 힘을 쏟았다. 그렇게 수많은 저자들의 얘기를 편견 없이 모두 섭렵한 다음에야 그것들을 비교하고 성찰하여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만들었다. -42쪽

홉스가 보기에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선하고 악한 것이 따로 있지 않았다. 선하고 악한 것, 옳고 그른 것은 상대적이며, 국가와 법이 성립되었을 때 비로소 판정 기준이 생긴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 끝까지 추구하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하여 이리나 늑대와 다름없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진다. 이처럼 살아남기도 벅찬 자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계약으로써 국가를 만들어 자연권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권리를 양도하여 복종한다. -77쪽

가족은 정치사회의 최초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배자는 아버지에 해당되고 국민은 자식들에 해당된다.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태어난만큼 그들이 자유를 양도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다만 가족과 국가에 차이가 있다면, 가족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는 것이 자녀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지만, 국가에서는 지배자가 국민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지배의 즐거움 때문에 국민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사회계약론 1부 2장) -101쪽

사회 안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왜냐하면 오로지 욕망의 충동을 따르는 것은 노예적 굴종이지만 스스로 만든 법을 따르는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 1부 8장) -113쪽

사회계약이 유명무실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일반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라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단체에 의해 일반의지를 따르도록 강요되어야 한다는 약속이 사회계약 내에 암암리에 포함되어 있다. (사회계약론 1부 7장) (밑줄그은이 주 :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 -141쪽

영국 국민은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대의원을 선출할 때뿐이며 일단 선출이 끝나면 그들은 노예가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사회계약론 3부 15장)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투표일에만 자유롭다. 딱 하루 국민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면 나머지 날들은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든 나 몰라라 살아간다. 그나마 투표일마저도 무관심하게 지나치고 그것을 자랑이라고 떠든다.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그놈이 그놈인데." 그러나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해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시를 게을리 하는 국민은 잘못된 정치에 침묵으로 동의하고 있는 셈이다. 빌헬름 라이히라는 학자는 저서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가장 심하게 정치를 타락시키는 것은 스스로 비정치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소극적이고 사회에 무관심한 태도다"라고 경고했다. 루소가 일찍이 간파한 대로, 사회에 속한 이상 그 누구도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170-171쪽

본질적으로 전원 일치의 동의를 요구하는 법은 단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사회계약이다. 왜냐하면 시민들의 협동은 가장 자발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나 스스로 다스리고 있는 만큼 어느 누구도 어떤 구실로도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예속시킬 수 없다. 노예의 아들이라고 태어나면서부터 노예로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다. (사회계약론 4부 2장) -202쪽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얘기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루소의 후예로서 칸트가 깨달은 것은 모든 인간은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한 개인이 아니라 '인류'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을 넘어서서 인류의 입장에 설 때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다. -210쪽

"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일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마르크스가 가장 좋아하는 고대 로마의 명언)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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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11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소하면 다섯명?의 자식을 고아원에 버린 것이 생각나요..

이잘코군 2007-06-11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네 정확하십니다. 9살 연하의 여관하녀와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다 내다버렸죠. 그거 때문에 쉬이 비판받죠. 근데 당시엔 그런게 또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여건이 안되는데 아이를 낳으면 고아원에 버리는게.
 
인간 생명의 시작은 어디인가 -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생명 윤리, 윤리 이야기 지식전람회 6
최경석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6년 1월
절판


인간 개체복제는 체세포복제배아를 착상시켜 약 10개월 간의 임신기간을 거쳐 출산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두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흔히 사람들은 인간 개체복제를 '인간 복제'라 부르는데, 어떤 이는 인간 배아복제 역시 '인간복제'라 부르기도 하므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동하지 않도록 '인간 복제'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32쪽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은 항상 법으로 규정하는 것의 영역보다 크다. 예를 들어, 자선을 베푸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옳고 권장할 만한 일이지만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법으로 명시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법이나 관습 안에서 용인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은 아니며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법이나 관습으로 규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을 법률로서 규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관습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도 생명 윤리에 관한 법률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허용하지는 않고 있는지 검토해 보고, 그것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그 개정을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6쪽

수정논증의 지지자들은 잠재성을 '될 잠재성'과 '산출할 잠재성'으로 나눈다. 정자나 난자는 배아와는 다른 지위를 지니는데, 정자나 난자가 지닌 잠재성은 '산출할 잠재성'인데 비해, 배아가 지닌 잠재성은 '될 잠재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80쪽

만약 이에 대해 인간 개체로 발전할 잠재성의 소유자는 반드시 수적 동일성을 유지한 단일 존재자여야 한다고 답한다면, 이런 생각은 도덕 공동체의 일원은 개별적 개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도덕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존재자의 범주는 최근 확대되고 있다. 물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개별적 인간이 아닌 집단이나 법인, 동물, 자연 등도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착상 후의 배아부터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다소 편협하다고 말할 수 있다. -85-86쪽

샌들은 배아를 사람과 사물 사이에 위치한 존재자로 간주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것을 주장하고자 한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소나 돼지의 생명을 함부로 여기지 않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소나 돼지를 인간의 양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배아의 생명도 존중되어야 하나 사람의 생명은 아니기에 인간의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을 수 있다. -105쪽

그렇다면 착상 전의 배아를 단순한 세포덩어리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배아는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있는 유전적 정보에 따라 자신의 발달 과정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배아가 성숙한 인간 존재자로 발달하기 위한 생물학적 프로그램을 자신 내부에 지니고 있다는 점은 배아를 정자나 난자와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점이기도 하다. -106쪽

또한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정자나 난자가 23개의 염색체를 지닌 것과 달리 배아는 인간 개체와 동일한 46개 염색체를 지닌 생물체라는 점이다. 배아는 이후 여러 인간 개체로 분화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들 개체와 동일한 유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특성은 이후 발달단계에서 연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107쪽

'도덕적 지위'라는 것은 상당히 포괄적인 개념이다. 도덕적 지위는 어떤 존재자가 지닌 도덕적 권리와 책임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래서 도덕적 지위는 생명권이나 자율권의 소유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 자율권의 소유 여부는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라고 해서 누구나 동등한 자율권을 지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책임질 만한 판단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율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잘못된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어린 아이의 행위에 있어서 도덕적 책임과 성인의 행위에 있어서 도덕적 책임은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는 그 둘의 도덕적 지위가 동등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차이는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거나 판단능력을 상실한 환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자율권 행사는 능력에 따라 도덕적 지위는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능력에 따라 어떤 존재자의 도덕적 지위가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권과 관련된 도덕적 지위에 대해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명권에 대해서는 동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13-114쪽

최근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요구할 수 없는 동물도 생명권을 지닌다는 주장은 감각 능력을 지닌 존재자에 대한 도덕적 배려를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다. 더 나아가 식물도 그리고 자연도 존중되어야 할 가치를 지닌다는 견해는 생명 일반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권리의 주체가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느냐, 감각능력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달리 말해 도덕적으로 존중해야 할 대상자의 범주가 반드시 자기동일성의 확립이나 감각 능력의 소유여부만으로는 결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34쪽

도덕적 논란에 대한 의견 불일치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의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어 온 인간 배아연구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낙태에 대한 문제, 안락사에 대한 문제 등,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도덕적 문제에 대해 일치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의견의 불일치는 어느 한편이 잘못된 논증을 사용하거나, 선입견이나 오해가 개입되었거나, 정확하지 않은 논거를 사용하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불일치는 이런 문제점이 없는데도 발생하는 의견의 불일치이다. 즉 서로가 논리적 잘못이나 선입견이나 오해에 근거하고 있지 않고 사실이 아닌 논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의견의 불일치이다. 이런 종류의 의견 불일치를 철학자 존 롤즈는 이성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견의 불일치로서 '이성적 불일치'라고 불렀다. -136쪽

위 사례는 기술적인 의미의 도덕 상대주의와 규범적 의미의 도덕 상대주의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덕 상대주의를 단지 사회와 문화에 따라 예절이나 규범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는 정도라면 그것은 현재의 사실을 기술하는 기술적 상대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이 그렇다는 기술에서 그치지 않고, 도덕이란 것이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다른 것이 하나의 규범이론이라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규범적 상대주의라고 해야 한다. -145쪽

롤즈에 따르면 이성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은 구별되는데, 이들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주의 깊게 선택된 목적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선택하거나 추구하는 것과 관련된 지적 덕목이지만, 이성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성적인 목적이나 관점에 대한 동등한 또는 공정한 고려를 요구하는 윤리적 덕목이다.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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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08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을,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라 할 것인가?"
논란이 구구합니다. 시점에 대한 시시비비는 별로 의미가 없는 듯합니다.
때때로 '철학함'에 거시적 관점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일 때가 있는 듯 합니다.
이를 테면 상기 문제와 같은 논란 시에..

 


  "지난 달 19일 이라크 아르빌의 자이툰 부대에서 숨진 오모 중위의 사인이 결국 ‘소총 자살’로 결론 내려졌다. 군 인사법 등에 따르면 자살자는 특별한 공적이 없을 경우 ‘순직’ 처리되지 않는다. 국립묘지에 묻힐 수도 없다. 오 중위 역시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군(軍)의 판단이다."

  군대에서 자살은 수치스러운 죽음이다. 동시에 군대 내에서 '자살'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사고에 관한 잡음을 차단하는, 언제나 정당화되는 결론이기도 하다. 군부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문스러운 죽음은 자살로 규명된다. 아니 자살이기 때문에 의문스럽다고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내가 군대를 가기 대략 1년전쯤 나의 동아리 후배가 100일 휴가를 앞두고 동해바다에 시체로 떠올랐다. 100일 휴가 며칠 앞두고 집에 갈 수 있다는 설레임을 안고 편지를 쓰기도 했었다. 하지만 설레임은 그저 마음 속에 묻어둬야만 했다. 어느날 아침의 동해바다는 후배의 시체를 떠올렸고, 원인은 자살로 판명되었다. 여러가지 의문스러운 점들이 있었지만 군부대는 결코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녀석의 집안은 순식간에 뒤집어졌고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고 강원도 해안의 그 부대 앞에 천막을 치고 몇날며칠을 머물며 항의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항의는 하소연으로 바뀌었고 혼자만의 눈물로 마무리지어졌다.

  "하지만 오 중위가 군에 복무하지 않았더라면, 설사 동기가 개인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목숨을 끊을 정도의 극한 상황에 내몰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보살핌 받을 기회가 더 많았을 수도 있다. " 오 중위도 그날 시체로 떠오른 내 후배녀석도 군에 복무하지 않았더라면 동기가 개인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목숨을 끊을 정도의 극한 상황에 내몰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후배녀석은 강제복무한 것이 아닌가.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국가의 신성한 의무라 불리우는 군복무를 위해 강제로 군대에 간 것이 아니던가. 사인이 정말 자살이라 하더라도, 자살로 쾌활하고 사람좋은 그 녀석을 죽음으로 내몬 건 분명 군대다. 록밴드 공연에 열광하고 무대 위에 올라가 헤드뱅잉을 하고 슬램을 하던 그 녀석, 드럼을 배우고 싶다고 내게 가르쳐달라 조르던 그 녀석, 함께 술을 마시며 림프비스킷과 닥터코어911과 콘의 음악을 이야기하며 흥분하던 그 녀석은 이제 없다.

  자살은 나약한 자의 비겁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살로 죽은 후배를 둔, 자살로 죽은 친구를 둔, 자살을 결심하려했던 가까운 누군가를 옆에서 본 나로선 그렇게 쉽게 자살을 이야기할 수 없다. 나는 단 한번도 자살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옆에서 그들을 지켜봤다는 것으로 감히 자살을 말하자면, 자살을 결심하기까지의 그들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크다. 그들은 더이상 갈 곳이 없는 생의 끝에 발을 딪고 불안전하게 홀로 서 있는 것이다. 앞으로 한 발 디디면 더 할 나위 없이 편안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다시 한 발을 뒤로 빼면 마음의 무거운 짐을 다시 이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 외딴 이라크의 어느 마을에서 소총으로 자신의 턱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오중위의 죽음은 마땅히 존중해줘야 한다.

  "국방부는 한때 군내 자살자를 위한 별도의 묘지를 검토하다 반대 여론에 밀려 없던 것으로 해버렸다. 자살자를 혐오스러워 하는 낡은 국민 정서에 여전히 얽매여 있는 모습이다."  자살자를 이토록 한심스러워하고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하는 군대라면, 그런 국가라면, 더 이상 말 할 가치도 없다. 자살자는 임무수행 중 죽은 다른 군인들과 똑같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야 한다. 그들을 자살로 내몬 것은 군대이고 국가이다. 가해자가 어찌 피해자의 죽음을 모른 척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봉사하려는 그들을 나라는 내팽겨쳐서는 안된다. 그들은 분명 국가에 봉사하다 죽었다. 어찌 자살자를 이토록 함부로 다룬단 말인가.

  오히려 국가는 2007년 6월 5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평화재향군인회장이자 예비역 준장인 표명일씨의 칼럼내용처럼 "전장에서 적군이 아닌 민간인을 학살하도록 지시한 자들이나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독립운동가 탄압에 앞장섰던 자들을 비롯해 민주주의를 파괴한 독재자, 그리고 친일 권력에 붙어 반인권적 범행을 해온 자들은 국립묘지에 안장해서는 안 된다." 군대와 국가가 부끄러워해야 할 대상은,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대상은 바로 저들이다.



* 국립묘지에 묻혀선 안될 사람들(표명일, 예비역 준장 및 평화재향군인회장)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06/h2007060418130224360.htm

* 자살, 軍에 오지 않았다면... (김범수 기자, 한국일보 사회부)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06/h2007060517584624430.htm

* "그렇게 잘생겼던 아들이 군대가서 왜 분신을...."  (2007. 6. 6 기사)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532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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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7-06-07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복무중 자살자를 국립묘지에 안장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전혀 뜻밖이네요. 그렇다면 자살이라는 결론만큼 손쉬운 책임회피도 없겠군요.

이잘코군 2007-06-07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과몽상님 / 네 그렇다고 합니다. 자살자는 국립묘지 대상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게다가 몇년(?)전인가 국방부에서 자살자 전용 묘지를 만들려고 했다가 여론에 부딪혀 포기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의문스러운 죽음, 불명예스러운 죽음은 자살로 결론나죠.

누에 2007-10-17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